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77화 (177/357)

#177.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7)>

무림맹 만통부.

“손 제대로 안 들어!”

제갈소명의 추상같은 호령에 푸들푸들 떨리던 맹주원의 양손이 다시금 번쩍 펴진다.

나이 서른에 가까운 놈이 애들이나 받는 ‘손들기’ 벌에 죽을 둥 살 둥 땀을 흘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더욱 미워 보인다.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게지, 감히 만통부의 명령서를 발급해?

물론 절차상으론 문제가 없다.

자신이 부재 시 다음 책임자는 만통부의 부장인 맹주원이 맡아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 명령서가 장로원을 복귀시키라는 명령이고, 더 나아가 그 실행 인원으로 승호당을 배치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세상에…… 승호당이라니…….

이는 정치적으로 들어가면, 만통부가 장로원을 흑도 무리로 여기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해석의 여지도 생긴다.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차후에 언제든 이 일을 꼬투리 삼아 만통부를 쥐어흔들 수 있을 정도의 일.

아무리 진소운에게 정신이 나가 있는 놈이라 할지라도 선을 한참 넘었다.

“네놈이 그걸 모르지 않았을 터. 정녕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냐?”

제갈소명의 질문에 맹주원이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오물거린다.

“주둥이가 달렸으면 말을 해봐라! 말을! 변명 한마디 못 할 일을 저지른 것이냐?”

“……아니, 그것이…….”

“아니? 아니라고? 이 일에 네놈이 변명할 여지가 있단 말이냐!”

변명을 해보라는 말에 설명을 하려던 맹주원이 입을 꾹 다문다.

“이놈이! 그 불만 가득한 표정은 뭐냐?! 네놈이 잘했다는 것이냐?! ”

“저…… 사실은…….”

“네놈이 아직도 할 말이 있더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할 놈이 감히 한 개 달린 주둥이를 열어?!”

“…….”

벌써 한 시진째, 같은 갈굼이 반복되어 맹주원은 죽을 맛이었다.

‘말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차라리 징계를 받아버리면 마음이 편하기라도 하겠건만, 그것도 아니고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아 계속 반복적으로 갈굼만 당하고 있다.

이러다간 숨 쉬는 걸로도 꼬투리 잡혀 갈굼당할 지경.

“그럼 딱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네놈이 진정!”

“변명이 아닙니다. 전 단지 진소운에게 만통부의 권력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제 잘못은 인정합니다. 그래도 인재를 데려오고 싶었다는 제 진심만은 알아주십시오.”

맹주원은 제갈소명이 자신의 말을 끊지 못하도록, 한 호흡에 모든 말을 내뱉었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숨을 몰아쉬는 맹주원.

그의 뻔뻔한 태도에 제갈소명은 기가 막혔다.

“좋다. 근데 승호당은 어찌 움직인 것이냐? 그놈들이 만통부의 명령서만으로 움직일 리는 없었을 터.”

“아…… 그거요? 별거 아닙니다. 가서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싹싹─.”

“…….”

손까지 비벼가며 무용담을 풀어놓듯 당당하게 말하는 맹주원.

허, 이놈에겐 진정 체면 같은 건 없는 것인가!

차후 장로원의 견제를 받아야 하는 것도 짜증 나 죽겠구만, 만통부의 위신까지 바닥에 처박아 놓은 격이다.

“네놈은 진정──”

분에 찬 제갈소명의 모습에 두려워하던 맹주원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곤 소매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낸다.

“이겁니다!”

“응?”

“바로 이겁니다, 총군사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제갈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말려들었다.

“그게 뭔데?”

“절 위기에서 구해줄 주머니요.”

이 새끼가 정신이 탈출해 버린 건가?

“진소운이 총군사님께 전달해 달라 한 물건입니다.”

‘진소운’이라는 세 글자에 흥분이 차게 식는다.

그 영민한 놈이 현 사태가 불러올 후폭풍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을 터.

그럼에도 만통부의 명령서와 승호당까지 거절하지 않고 가져간 의도가 궁금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전서로 보이는 종이 두 장과, 나무 조각이 들어있었다.

전서를 먼저 펼쳐 본 제갈소명은 낯선 전서의 양식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림맹도 그렇지만 정보단체들은 작은 전서 안에 함축된 정보를 담아야 하기에 각기 정해진 양식을 쓴다.

만통부는 주로 내부의 정보단체와 개방의 전서 양식을 접한다.

지금 보는 새로운 양식은 개방, 무림맹과 관련된 곳의 전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놈이 따로 정보를 지급받는 곳이 있었단 말인가?’

헌데 전서를 앞뒤로 돌려보다 보니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그게…….

‘……하오문?’

근래에 들어 개방의 뒤를 바짝 쫓으며 성장세를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정보단체.

하오문 때문에 개방이 요즘 무림맹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오문의 성장세는 엄청났다.

그런데 진소운이 하오문에도 연줄이 있었단 말인가?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하기에 일단 전서를 펼쳤다.

-사천에서 등장한 이들은 같은 기간 복양평원에서 나타난 이들과 다른 소속으로 추정됨.

다만, 그들의 무공의 여파가 사람의 정심을 흔들고, 이지를 상실케 하는 과정에선 공통점이 보임.

벌써 여기까지 조사를 했다고?

아직 개방과 무림맹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복양평원의 흉수와 사천의 흉수들을 비교했다는 점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제갈소명은 얼른 두 번째 전서를 펼쳤다.

-10년 전부터 사천에서 이지를 상실한 자들이 발견되었음.

이들은 공통적으로 악몽과 같은 환상을 보고, 자는 동안 피거품을 일으키는 등 반복적으로 피폐한 현상을 보임.

당가를 비롯한 의원들은 각기 환자만을 살폈기에 환자들의 공통점을 찾지 못함.

멀쩡한 이가 이지를 상실하고 환상을 보는 증상은 사술의 대표적인 후유증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정신병과의 차이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기에 의원들도 겉으로는 그 병환을 살필 수 없다.

유일한 차이점은 자는 동안에도 내부가 진탕되어 내상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인데.

이 또한 간헐적인 현상이라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개개인의 병환까지 상세히 수집했다고? 세상에…….’

새삼 개방을 위협하는 하오문의 성장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체감하던 제갈소명은, 현 사태가 어쩐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이 설마…….’

머리를 간질이는 불안한 감정.

설마 하면서도 아닐 거라 스스로를 다독인다.

당장 복양평원에 나타난 인원들을 조사하는 데도 무림맹의 체계가 비명을 지를 지경이다.

여기에 다른 이들까지 나타난다면…….

“나머지 하나는 안 보십니까?”

“…….”

고개를 드니 어느새 맹주원이 손을 내리고 바짝 붙어 전서를 함께 읽고 있었다.

“너 언제 일어났냐?”

“전서 내용만 확인하고 다시 손 들겠습니다.”

“…….”

“제가 보기에 이거 꽤 큰일이 일어난 거 아닙니까.”

“…….”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제갈소명이 결국 손을 꺼내었다.

그리고 골패를 확인하는 도박꾼의 심정으로 나무 조각을 천천히 확인했다.

-혈교발현. 진소운.

내용을 확인한 제갈소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서 맹주원이 제갈소명의 심경도 이해하지 못하고 주둥이를 놀렸다.

“허어! 혈교라니, 진짜 제가 무릎까지 꿇어서 승호당을 보내길 천만다행이네요. 그게 아니었으면 우리 학관생들 모두 위험할 뻔한 거 아니었습니까?”

진소운이 전한 소식이 사실이 아닐 거라 현실도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제 잘못을 면피하려 하다니.

정녕 이런 이가 만통부의 부장이 맞단 말인가.

제갈소명이 나무 조각에 내기를 잔뜩 불어넣어 맹주원에게 던졌다.

“죽어!!!”

“꾸에에에엑!”

#

구정룡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사방에 먼지가 휘날리고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대체 뭣들 하는 것이냐! 상대는 겨우 태을문이다! 태을문! 곤륜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문제는 싸우고 있는 이들 모두가 백도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라는 것.

‘대체 뭣들 하는 짓인지!’

스물에 가까운 곤륜파와 속가문파의 제자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또 스물의 인원이 곤륜의 검진인 삼십육격한매검진을 펼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곤륜의 삼십육격한매검진에 맞서고 있는 상대는, 약관도 되지 않은 듯한 세 명의 사내.

“멈추시오!”

보다 못한 구정룡이 신형을 날려 두 검진 사이에 뛰어들었다.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자신 있기에 가능한 일.

“엇! 당주님!”

“당주님이 오셨다!”

“다행이다!”

구정룡이 끼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금·은·동 형제가 얼른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난다.

반면, 제때 검을 거두지 못한 곤륜의 제자들은 결국 구정룡과 검을 맞대야 했다.

채채채채챙.

네 사람이 동시에 베어오는 검을 막아선 구정룡은 묵직한 무게가 느껴짐에 혀를 내둘렀다.

‘삼십육격한매검진이 곤륜의 절기 중 하나라더니.’

잘못하다간 개망신은 물론이고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는 긴장감에, 얼른 내공을 급히 끌어올려 곤륜파 제자 발밑으로 검기를 날렸다.

파파파파파팟!

검기가 땅바닥을 패며 흙더미를 사방으로 흩뿌렸고, 이에 곤륜의 제자들이 주춤하는 사이 감천악을 비롯한 승호당의 인원들이 곤륜파와 속가무문의 학관생들 주변을 둘러쌌다.

“누구냐!”

곤륜의 장로 상원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바락바락 소리를 쳤다.

“승호당의 당주 구정룡이라 합니다. 장로님.”

신원을 밝히자 샐쭉 표정이 바뀌는 상원.

금세 신색을 회복한 상원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승호당이 낄 자리가 아니다. 썩 비켜나거라.”

구정룡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곤륜파와 속가문파의 학관생들에게 향했다.

이어 자신의 뒤에서 조금은 지친 듯 보이지만 멀쩡하게 서 있는 금·은·동 형제들에게로 옮겨간다.

대충 봐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 정황들.

‘한 방 먹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이거군.’

태을문의 제자를 상대로 곤륜과 속가문파가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곤륜의 상원이 ‘승호당’이라는 말에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이유였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겠습니다.”

“……뭐라?”

상원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구정룡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저희들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자네는, 이게 지금 싸움이라 생각하는가?”

상원은 도통 이성을 차릴 여력이 없어 보인다.

구정룡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앞선 조들이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었습니다.”

“……?”

구정룡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내의 흥분이 차게 식는다.

“전해진 바로는 소충현 장로님과 정사익 장로님도 흉수들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상원 장로.”

뒤늦게 도착한 수허 장로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상원 장로.

“방금 저치가 한 말이 사실인가?”

“아직 모르네. 지금 그걸 확인하러 가는 길이지.”

상원 장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면서 따라나섰단 말인가?”

“이 소식이 진소운과 철순직이 보낸 것이라 하더군.”

“철순직? 12봉성의 그놈 말인가?”

“그렇네.”

철순직과 진소운은 같은 백팔봉이긴 하지만, 진소운의 독주로 둘은 서로 함께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이 각기 같은 정보를 제공했다는 건, 믿기지 않지만 정보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소식이 사실일 리 없겠지만, 그렇다면 그것을 문제 삼으면 되겠다 생각했네.”

수허의 말에 상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별수 없군.”

상원이 금·은·동 세 형제를 바라봤다.

“네놈들 이것이 곤륜의 전부라 생각하지 마라.”

“…….”

“…….”

“…….”

상원이 돌아서며 곤륜과 속가문파의 학관생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뭐 잘했다고 아직도 누워 있느냐! 썩 일어나지 못할까!”

상원의 벼락같은 호통에 학관생들이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정룡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태을문의 세 형제를 바라봤다.

“수고들 했군.”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감사합니다. 당주님.”

“아무리 그래도 칭찬만은 해줄 수가 없군.”

“네?”

구정룡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쓴소리를 내뱉었다.

“어찌 무력으로 저들을 막을 생각을 했나! 간신히 막았기에 다행이지. 저들이 처음부터 삼십육격한매검진을 사용했다면 자네들은 진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알고 있나!”

구정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세 형제의 표정이 요상하다.

“…….”

“…….”

“……크흠.”

서로 눈치를 보며 답답한 듯 입을 오물거리고, 더러는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구정룡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설마…… 처음부터 삼십육격한매검진을 사용했단 말인가?”

그러자 금표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꽤 진심이시더라고요. 네, 그래서 당주님이 오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옆에서 잠자코 듣던 은호가 도끼눈을 치켜뜨며 금표를 노려본다.

“그러니까 중간에 그냥 빠지자고 했잖아!! 진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고!”

“아! 안 죽었으면 된 거지, 왜 이제 와서 난리야! 그때 빠지던가!”

“앗!!! 형들 싸우지 마!!!”

갑자기 저들끼리 티격태격하며 싸우기 시작하는 금·은·동 형제들.

구정룡은 셋을 보며 속으로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셋이서 삼십육격한매검진을 막았다고?’

그때, 감천악이 구정룡에게 다가왔다.

“준비 다 끝났습니다. 다시금 출발하면 됩니다.”

“…….”

“당주님?”

구정룡이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감천악에게 물었다.

“천악, 너랑 나랑 승호당원 하나 데리고서 삼십육격한매검진을 막을 수 있겠냐?”

“……그게 뭡니까? 신종 자살법입니까? 죽으려면 혼자 죽으십쇼.”

감천악이 결국 정신을 놔버렸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지. 이게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 못 막는 게 당연한 것이지……. 근데 어떻게…….”

“뭐가 말입니까?”

하지만 상원 장로의 반응을 보면 금·은·동 형제가 거짓말을 하는 듯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뭘 믿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호기심에 정신을 놓고 있기에 지금은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

통. 통. 통.

기이한 움직임.

핏기 없는 피부.

검게 변한 손톱과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송곳니.

눈을 몇 번이고 비비고 봐도 강시가 분명하다.

“시부럴, 시부럴, 시부럴.”

남화성이 감히 스님을 옆에 두고 욕지거리를 연속으로 내뱉었지만, 그 반듯한 일각 역시 남화성의 욕지거리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시마강령술이 다시 나타날 줄이야…….”

“내 평생에 진짜 강시를 볼 줄 상상도 못 했는데…….”

흡성대법과 마찬가지로 사대 마공에 떡하니 이름을 올린 역천의 술을 감히 쓰는 이들이 있을 거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은설란이 넋을 놓은 듯한 두 사람을 일깨웠다.

“……저, 지,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여, 여기로 오고 있어요!”

모용재화를 응시한 이후, 강시는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주님들은 모두 물러서십시오!”

일각이 합장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손에서 황금빛 금강력이 쏟아져 나오며 강시를 두들겼다.

퍼퍼퍼퍼퍽!

벽력시에도 끄떡없었던 강시가 움찔움찔하며 뒤로 밀려난다.

그 광경에 구경하던 이들은 역시나 소림이라며 저마다 감탄을 내질렀지만, 이내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일각의 양손에 어린 황금빛의 광채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던 것.

“……일각 스님이 많이 지쳐 보이시는데요.”

은설란의 말에 모용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반 내력도 아니고 상위 기력인 금강력을 계속 써왔던 일각이다.

제아무리 소림의 제자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내공 소모를 견뎌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재화 시주! 사람들을 데리고 대피하십시오!”

“하지만 스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피하라는 겁니다. 진 시주가 오기 전까진……!”

일각은 자신이 내뱉고도 스스로 놀라버렸다.

그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을 이었다.

“……진 시주가 오기 전까진 남은 자들을 보호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소리를 내지르며 뻗어내는 주먹에서는 황금색의 기운이 점차 옅어진다.

더불어 강시는 일각을 압박하여 모용재화를 비롯한 일행에게로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일각은 버티고 또 버텼다.

남화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시부럴, 시부럴, 시부럴, 시부럴, 진소운 이 시부럴 놈……. 강시가 있단 말은 안 했으면서…….”

갑자기 옆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진소운을 욕하는 남화성에 모용재화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어 모용재화와 은설란을 바라보았다.

“딱 오 초식! 그 시간을 벌어줄 테니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쳐라!”

남화성의 뜬금없는 말에 두 사람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뭐냐? 나도 그 이상은 못 버텨!”

“아니, 그게 아니라 굳이 왜 그쪽이…….”

모용재화, 은설란과 남화성은 실질적으로 인연이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

더 나아가자면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런 남화성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남화성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소운이 복마부 다섯 장을 준다고 했다.”

이해 안 되는 말에 모용재화가 의문을 품어보지만, 남화성은 두 사람의 등을 밀치기만 했다.

“아무튼 빨리 움직여! 강시까지 움직였다면 진짜 이곳에서 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남화성은 두려움을 잊으려는 듯 일부러 제 주먹을 강하게 부딪쳤다.

“빌어먹을 감히 강시로 강호를 더럽히려 해?”

남화성은 악다구니를 쓰며 언덕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싸우기도 전에 공포에 잡아 먹힐 것 같았으니까.

통. 통. 통.

난생처음 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남화성은 긴장감에 군침까지 꿀꺽 삼켰다.

한번 나타날 때마다 천하를 피로 물들인다는 재앙적 존재.

오직 인간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살인 병기.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끔찍한 존재.

“빌어먹을 진소운!”

뭣 때문에 자신이 나선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남화성 자신은 겨우 복마부 다섯 장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바보 멍청이가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가서 다 써버렸다는 소리만 해봐! 가만 안 둔다!”

지금 이 순간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얄팍한 이득과 손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남화성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감정.

어쩌면 진소운에 대한 그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 나선 건지도 몰랐다.

“화성 시주! 조심하십시오!”

강시의 힘을 견뎌내지 못한 것인지 일각이 잠시 떨어지며 외친다.

“으아아아아아!”

단일 무공 하나로 삼원문을 백팔봉의 수좌로 올려줬던 녹각쇠운철권.

일각과 벌어진 공간 사이로 그 녹각쇠운철권이 짓쳐든다.

주먹에 어린 녹색의 권격이 강시를 짓뭉갤 듯 패도적으로 뻗어나간다.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던 강시는 일각에서 남화성으로 목표를 바꾸고, 제가 어떤 위험한 권격에 공격당할지도 모르는지 어설프게 주먹을 내밀 뿐이다.

“멍청한 놈 감히 녹각쇠운철권을…….”

쾅.

묵직한 울림이 사방으로 뻗쳐간다.

접권(권과 권이 마주침)이 발생한 순간 남화성은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말을 꾸욱 삼켰다.

‘오초는 개뿔…… 삼 초도 못 버티겠구나.’

저 일각은 대체 이런 괴물을 상대로 몇 초식이나 버텼던 걸까.

뿌드득.

오른손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내공을 왼손으로 옮겨 녹각철운장을 쏘아낸다.

빠바바바박.

거친 바위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녹각철운장이 강시의 머리 전체를 휩쓸었지만, 놈은 벽력시를 맞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염병…….”

권과 장을 회수한 남화성이 다시금 최후 절초를 펼치려는 순간 강시는 발을 쭉 뻗어왔다.

퍽.

분명 평이하기 그지없는 발차기였으나 범종의 타구에 맞은 듯 일절 저항하지 못한 채, 삼 장이나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화성 시주!”

“커흑, 우웩!”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구역질과 동시에 한바탕 핏물을 내뱉는다.

확실한 내상의 증거.

“……빌어먹을 놈…… 금방 온다더니…….”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욕지기를 내뱉고 남화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가 없는 듯 보였던 강시는 일각을 무시한 채, 남화성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약속한 오 초는 지켜야지.”

남화성이 날뛰는 혈도에 억지로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부풀어 올라 언제 터질지 모를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사이 강시는 빌어먹게도 약 올리듯 통. 통. 튀어 오르며 순식간에 남화성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랐다.

“화성 시주! 피하십시오!”

남화성이 발악하듯 녹각쇠운철권을 마구 쏟아낸다.

“으아아아아아악!”

강시의 온몸에 녹색의 광휘가 남을 정도로 녹각쇠운철권을 쏟아낸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남화성의 빠르기를 쫓지 못한 강시는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하…….

남화성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세어 나온다.

“……하하.”

녹색의 광휘에 한차례 휩쓸린 강시가 다시금 나타난다.

“아무리 강시라고 해도 이건 반칙 아니냐?”

애당초 방어를 하지 못한 게 아니다.

방어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강시는 검게 칠한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다.

“헙!”

그리고 이제껏 보였던 느릿한 움직임과 달리 쾌속하게 남화성의 심장을 꿰뚫는다.

“응?”

아니, 꿰뚫으려 했다.

목과 손에 감긴 금빛 실만 아니었다면.

“…….”

실을 따라 시선을 올리던 남화성이 말했다.

“……빌어먹을 왜 이제야 온 거냐!”

시체처럼 무감하던 강시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황의 빛을 보였다.

강시가 재빨리 실을 끊어내려 손톱을 마구 긁지만 실은 더욱 팽팽하게 강시의 목을 옥죈다.

그리고 실의 시작점에서 강시를 붙들고 있는 사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답한다.

“세상에 ‘철강시’랑 몸통 박치기를 할 정도로 멍청이가 실제 있을 줄이야.”

이제껏 남화성에게 이상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진소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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