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9)>
일각은 모용재화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근처로 걸어오는 진소운을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정…… 진정 그 사로(死路)를 뚫고 왔구나. 진정…….’
자신이 어째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과거 부처님 전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일각이었다.
“정말 왔군요…….”
일각의 말에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가 말입니까?”
“……진정 이곳까지 올 줄 몰랐습니다.”
“온다 했으니 오는 거지요.”
일각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런 겁니까?”
진소운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네. 뭐 특별할 게 있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이 툭 내뱉는 말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일인지,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행동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모르는 것인가?
‘그릇 자체가 다르단 말인가?’
진소운은 예의 흑룡검으로 혈의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각 학관생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
“안 된다면 뒤로 빠져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들도 슬슬 물러갈 것 같으니.”
“진 시주께서 하신다면 저도 당연히 해야겠지요.”
“하아……. 그놈의 시주, 시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당연한 듯 앞으로 나아가는 진소운.
그의 뒤를 쫓는 일각은 순간 광휘의 빛을 발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석가……?’
눈을 비비며 다시금 앞을 바라보자, 진소운이 고개를 돌린 채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갑니까?”
“가, 가겠습니다.”
일각은 어쩐지 혼란했던 머릿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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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학관생들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장자씩이나 돼서 일개 태을문의 제자를 쫓아다닌다며 무시받던 모용재화.
그가 궁을 든 채 홀로 혈의인들을 막아섰다.
한 발 한 발 쏘아질 때마다 그 잔악무도한 혈의인들이 공포에 젖어 뒷걸음질 치기 일쑤였고, 삿된 사술을 펼치던 술사들은 저들이 표적이라도 될까 시끄러운 방울을 품속 깊이 숨겼다.
그의 도움으로 어쩌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나타났다.
세상에 존재해서 안 되는 ‘마물’.
전해져 오는 구전만으로도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만든다는 ‘강시’.
신기함이나 호기심보다는 절망감이 더 컸다.
현 정도회의 최강자인 일각이 강시에 속절없이 밀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목숨도 여기까지가 끝이라 생각했을 때.
이번엔 ‘그’가 나타났다.
‘진소운?’
정예 중의 정예라는 무림학관 정도회의 전통적 지위를 박살 낸 원흉.
지금은 무림학관에서 학사 일정을 수행하고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희망을 떠올리는 이는 없었다.
자신들은 물론이고, 장로님들조차 어쩔 수 없는 현 상황을 진소운이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진소운의 등장은 그저 죽음의 공포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장치에 불과했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몰아치고 부서진다.
그 괴랄하고, 무서운 존재인 철강시가 마치 장난감처럼 휘둘린다.
무감하게 살수를 펼치던 강시가 이를 드러내고,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이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강시를 믿고 있던 혈의인들마저 당황하여 움직이게 만들 만큼.
내부가 진탕되고, 머리가 울리는 사술의 부작용을 겪는 학관생들이 시선을 돌리지 못할 만큼.
그리고 끝내 강시의 몸이 잘려 나갔다.
“세상에…….”
“대체 이게 어찌…….”
“아미타불.”
놀람과 탄성이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아무리 성적이 좋고, 실력이 좋다 한들 그래도 결국엔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남을 진소운이.
그들 중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홀로 해냈다.
“허…….”
죽음에 위기에서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머릿속 깊숙하게 박혀있던 고정관념이 뒤집힌 충격에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야 이 멍청아!”
진소운이 남화성을 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적당히 기운을 불어넣어야지! 아니, 왜? 차라리 중단전에 장풍을 쏘지, 그러냐!”
“시, 시부럴…… 나는 지금 내상을……. 쿠, 쿨럭!”
“삼원문의 내가기공 효능이 회복력에 몰빵 되어 있다는 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냐!”
“……그, 그건 우리 사문의 기밀인데 어떻게…….”
“똑바로 해! 그리고 찢어 먹은 복마부는 네 꺼에서 깔 테니 그리 알고.”
“시부럴 놈아! 이걸 왜 내 꺼에서 까는데!!”
철강시를 절단 내고, 혈의인들의 부대를 물러서게 한 진소운은 지금 당.연.한.듯. 정도회 학관생을 돕고 있었다.
그것이 본래 자신의 일인 양.
과거 그를 욕했던 이들에게 하나하나 다가가서 기를 불어넣어 주고, 약을 챙겨준다.
그의 행동에선 조금의 어색함도 드러나지 않는다.
되려 어색함을 느끼는 건 도움을 받는 이들이다.
이들 중에는 과거 정시 때, 진소운을 죽어라 방해한 이들도 있었다.
멸혼진 사건 때는 어떠했던가.
진소운은 자신들이 저지른 사건을 수습하겠다고 그 죽음의 절진 속에 스스로 들어갔었다.
그런 인원이 지금 아무렇지 않게 학관생들을 챙기고 있었다.
“……일각 스님.”
소림의 속가문파 소속인 학관생이 일각에게 물었다.
“저자가 저리 행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이유라니…… 어떤 말씀이십니까?”
“저자와 우리는 적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헌데 어찌 우리를 이리 돕는 것일까요? 혹여 이를 빌미로 정도회에 빚을 지우려는 심산 아닐까요?”
“…….”
일각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의 두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 담긴다.
“그대의 눈에는 진정 그것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표정.
일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내가 정의란 이름으로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습니까?”
“무, 물론이지요. 전 소림사의 속가 문파인…….”
‘소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일각의 음성이 무겁게 그의 말을 잘랐다.
“헌데 어찌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 넷?”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아 자불(慈佛)이라 불리던 일각의 얼굴이 마치 쇳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불경을 만 번 읽고, 깨달음을 천 번 이룬들, 그것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많은 공부가 무슨 소용입니까!”
“스, 스님.”
“진 시주는 도가 문파의 제자이면서도 부처님의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헌데 어찌 그대는 소림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면서 마치 마귀와 같은 생각만 하는 겁니까!”
일각의 호통에 속가문파 학관생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스님. 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이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이 보인다 하였습니다.”
학관생을 바라보는 일각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진 시주를 보는 그대의 눈이 어떤지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할 말을 잃은 학관생을 노려보던 일각이 진소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눈에 명료한 빛이 깃든다.
“진 시주는…… 귀인(貴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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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학관생들을 수습한 나는 근처 봉우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헥…… 헥…… 헥……, 여, 여긴 왜 올라온 거냐?”
그것도 덩칫값 못하는 떨거지를 달고.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왜 쫓아온 거냐?”
남화성은 주인한테 속은 강아지처럼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버럭 외쳤다.
“시부럴…… 그럼 정도회 인원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뭐 하라고!”
겨우 그 이유로 쫓아왔다고?
“모용재화랑 같이 있든지.”
“모용재화라고 편하겠냐?”
“하여간…… 그러게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녔어야지.”
“…….”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전방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진 곳에 뒤로 퇴각한 시산혈교의 부대가 보였다.
철강시를 잃은 놈들은 지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지.
혈교 내에 세 마리밖에 없는 강시 중 하나를 잃었으니 앞으로의 계획도 많이 어그러졌을 것이고.
“설마, 반격하려는 것이냐?”
“반격 같은 소리 하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철강시가 없다 해도 혈교는 혈교다.
무림맹의 본대가 오지 않는 이상, 사술에 중독된 학관생들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학관생들을 데리고 뒤로 도망치는 게 최선.
“그럼 어째서 이곳까지 온 거냐?”
“그냥 가게 두면 아쉽잖아.”
“뭐?”
“여기까지 왔는데, 강호를 혼란케 만든 놈들한테 한 방 먹여 줘야지.”
“…….”
남화성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혹시 강시를 상대하다 시독(屍毒)에 중독된 거냐?”
대체 머리는 뒀다가 어디 쓰려는 건지.
“이러니 덩치만 커다란 뱁새를 상대론 이야기가 안 통한다고 하는구나.”
“……그거 설마 내 얘기냐?”
물론 나도 이런 기회가 올 거라 처음부터 예상하진 못했다.
설마 세 구밖에 없는 철강시를 선발대에 함께 보내다니.
‘그렇다는 건 혈해옥(血海玉)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겠지.’
마교의 아홉 종주 중 하나인 혈마종이 오십 년 전 마교를 뛰쳐나온 이유는 바로 혈해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역대 혈마들이 죽기 전 다음 혈마에게 넘기는 혈해진기.
그렇게 전해진 혈해진기가 오백 년의 세월 동안 하나의 정수를 이룬 것이 혈해옥.
‘시마강령술을 익히지 못하는 혈교가 철강시를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지.’
철강시가 있다는 것은 곧, 혈해옥이 이곳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십오(十五)신기의 적광검의 재료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본래 혈해옥은 사천혈사를 끝낸 무림맹의 전리품 중 하나에 불과했다.
멸망한 시산혈교의 인원들은 각종 사술과 환술진을 위한 사특한 물건들, 거기에 강시 제조를 시도하던 중 만들어진 물건들까지 온갖 기괴한 것들을 지니고 있었다.
혈해옥도 그것 중 하나로 취급되었고.
혈해옥의 진가를 몰랐던 무림맹은 그것을 창고에 처박아 넣고 방치했다.
후에 장도원이 맹에 입성한 뒤 혈해옥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 사특한 기물을 통해 신기(神器) 적광검을 만들어 냈다.
훗날 ‘혈해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훗날 만통부에서 잠시 일을 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을 만큼, 적광검은 포기하기 힘든 물건이다.
‘기력증폭이라니…… 기력증폭이라니…….’
내 머릿속은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 저들 중 누군가 혈해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이 혈교를 완전히 정벌하기 전에 얼른 혈해옥을 빼돌려야 한다.
“내려가자.”
“……응?”
“왜? 여기에 계속 있을래?”
“시부럴…… 이렇게 빨리 내려갈 줄 알았으면…….”
저 새끼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가 나서서 해놓고선 맨날 투덜거리는 걸까.
봉우리에서 내려온 나는 학관생들에게 다가갔다.
얼른 이들을 재정비시킨 후 학관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일단 이들이 빨리 떠나야 내가 맘 편히 뒷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이들은 먼저 보내고, 혈해옥을 확보한다.
그리고 장도원에게 혈해옥을 보내어 신기 적광검을…….
그렇게 찬란한 미래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남화성이 팔꿈치로 나를 툭툭 친다.
“진소운…… 뭔가 이상하지 않냐?”
그제야 학관생들을 보려 고개를 드는데.
“네 이놈! 진소운!”
한쪽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가 나타났다.
학관생의 부축을 받으며 푸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중년 남자.
‘명현 도장.’
그는 분에 가득 찬 얼굴로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감히 점창을 상대로 수작을 부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제압하여 내 앞에 끌고 오라!”
뒤늦게 사술에서 벗어나 정신도 온전치 못한 인간이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하하, 참나.”
나는 흑룡검에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철강시 말고 때려잡아야 할 놈이 또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