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80화 (180/357)

#180.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10)>

명현 도장은 쨍한 고통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지난밤 버티지 못할 만큼 취기를 올린 것처럼 머리는 무겁고 온몸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혜성 대사와 술을 좀 나누긴 했지만,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이후에 취기를 느껴본 적이 없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을 깨웠던 제자들의 상태도 이상했다.

점창의 제자로서 언제나 용모 단정함을 유지해야 했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어느새 거칠게 수염을 기르고 눈 밑엔 검은빛이 돌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목소리를 내뱉던 명현 도장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목에서 마치 며칠은 쓰지 않아 녹슬어 버린 듯 쇠 긁는 소리마저 나는 게 아닌가.

앞에 선 제자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린다.

“사술…… 사술입니다. 장로님.”

“사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사술이라는 말을 하면 어찌 알아듣는단 말인가.

“사흘 전 저희를 습격한 이들이…… 사술을 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명현 도장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소리!!! 점창은 사술 같은 허접한 것에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더냐!!!”

“…….”

혈의인들과의 전투에서 항마진언주마저 외지 못해 뒷수습이나 하고 있던 제자들이 샐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점창 소속은 사술이 비켜 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번엔 왜 당한 걸까?

제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거나 말거나 명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필시 어설픈 흑도 놈들이 감히 무림맹을 두려워 않고 헛짓거리를 한 것이겠지.”

분에 못 이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명현은 순간 머리가 핑 도는 어지러움에 비틀거렸다.

“사흘 내내 기절해 있으셔서 그렇습니다. 장로님.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점창의 제자인 이기풍이 명현을 다독였지만, 명현은 그런 제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막사를 뛰쳐나간 그의 눈에 담긴 광경은…….

“이, 이게 무슨……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바닥에 구르는 시체.

그 시체가 입고 있는 무복은 분명 ‘대점창파’의 것이다.

명현은 눈을 부릅뜨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 무슨…….”

깊은 상처를 입고 혼수에 빠진 부상자.

그가 입은 무복 역시, ‘대점창파’의 속가무문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핑──.

머리를 강하게 찌르는 고통에 명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사술의 여파가 남아있는 듯합니다. 진소……. 아니, 학관 대표의 말로는 사기로 인한 후유증이 남지 않게 하려면 안정을 찾고 운기행공을 꾸준히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이기풍의 말에 명현이 발작하듯 반응했다.

“진소운? 갑자기 진소운 얘기가 왜 나오는 것이냐?”

이번 행사는 악양에서 얼룩져 버린 점창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끝을 모르고 팽창하기만 하는 진소운의 명성을 누르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곳에선 진소운이 나타나기는커녕 진소운의 이름조차 언급되어선 안 될 터였다.

“…….”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점창의 제자들이 서로 눈치를 본다.

결국 이기풍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학관 대표가 저희를 구하러 달려왔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서슬 퍼런 명현 도장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흰 분명 죽었을 것입니다.”

이기풍의 말에 동의하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제자들.

명현 도장은 제자들을 쏘아보았다.

“대표? 지금 진소운을 그리 부른 것이냐??”

당최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

명현은 자신의 멍청한 제자들을 향해 일갈했다.

“멍청한 놈들! 그깟 태을문 제자 하나를 못 넘기에 내 이리 행사까지 만들었건만! 네놈들은 실없이 그놈을 두둔하는 것이냐?!”

“…….”

“진소운…… 그놈이 지금 여기 와 있는 것이냐?!”

명현 도장의 물음에 주저하던 이기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허…… 학사 일정을 소화해야 할 놈이 이곳까지 왔다고?”

명현 도장은 사술의 후유증으로 끊임없이 고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맹렬하게 돌렸다.

진소운이 이곳에 그냥 왔을 리 없었다.

뭔가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할 터!

“그래! 그렇지! 이 모든 상황은 그놈의 음모가 분명하다!!”

커다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명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

평소라면 명현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한 마디라도 가슴에 새기려 눈에 불을 켜던 제자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놈은 분명 흑도와도 내통을 하는 놈이지. 흑도와 미리 짜고 함정을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하다! 진소운! 그 잡놈은 어디 있느냐?”

점창의 제자들 중 명현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놈이 이곳에 있다며! 어디 있느냔 말이다!”

명현의 채근에 속가문파 소속의 제자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바, 방금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왔다 들었습니다.”

“안내해라! 내 그놈을 직접 단죄해야겠다!”

“…….”

“어서 안내하라고 하지 않느냐!”

이번에도 침묵만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점창의 제자들 중 누구도 나서지 않자, 결국 이기풍이 명현 도장을 부축했다.

이후의 광경은 점창의 제자들이 모두 예상한 것이었다.

“감히 점창을 상대로 수작을 부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제압하여 내 앞에 끌고 오라!”

명현 도장의 추상과도 같은 명령이 떨어졌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감히 일개 학관생 따위가 흑도와 내통한 것도 모자라 장로원을 습격해? 네놈의 죄는 죽음으로도 갚을 길이 없겠구나!”

명현 도장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버럭버럭 소리쳤지만, 진소운은 한마디 변명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되려 흑룡검에 손을 가져간다.

“아무리 썩었다 한들 그래도 똥오줌은 가릴 줄 알았는데.”

그리고 천천히 흑룡검을 뽑았다.

진소운의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전생에서도 저런 자들 때문에 열 명이 죽을 일이, 백 명이 죽을 일로 커졌다.

“우리보다 잘 배웠고, 더 뛰어난 사람들이니까……. 뭔가 큰 그림이 있을 거라 믿고 또 믿었지.”

그렇게 수 만명의 무고한 희생 끝에서야 깨달았다.

희생자들의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북해로 도망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그들이 말하는 대계(大計)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숨기는 표지판에 불과했음을…….

진소운은 그 희생자들의 가장 최전선에 서 있었기에 배신감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눈앞의 참상에서도 시선을 돌리다니. 당신 같은 이가 바로 사도보다, 마도보다 더 위험한 무림맹의 적이다.”

진소운이 흑룡검으로 명현을 가리키자, 명현이 불 같은 분노를 터트린다.

“네놈! 감히 점창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는 데 그치지 않고, 감히 무림맹의 장로원에게까지 대적하는 것이냐!”

명현과 달리 진소운의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내가 뭘 꾸몄단 말이오?”

“네놈이 우리 정도회의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흑도와 수작을 부린 걸 모를 줄 알았더냐?”

“그대들이 모용재화와 은설란만 데려가지 않았어도 그대들이 죽는 걸 그냥 두고 봤을 것이오.”

“……뭐, 뭣이!”

전생에서의 명현 도장의 경지는 초절정이었다.

적사투관의 경지는 못 이뤘더라도 삼화취정은 충분히 이뤘을 터.

정기신이 하나로 혼일되어 천궁이 보호되고 있었을 테니, 부지불식간에 환술진에 당했다 한들 이지를 상실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로, 지금 명현 도장은 사기의 후유증은 앓을지언정 정신은 아주 명료한 상태에서 개소리를 내뱉고 있다는 말이다.

“이곳엔 나뿐 아니라 혜성도 함께 있다. 네놈이 장로원을 상대로 암수를 벌인 것은 알고 있느냐?”

“계속 지껄여 보시오.”

“이는 곧 무림맹이 정한 역모나 마찬가지이다.”

“하……. 하하.”

일촉즉발의 상황.

사람들을 보살피던 모용재화와 은설란이 진소운의 옆으로 다가간다.

남화성은 진소운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할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진소운에게 붙는다.

“그래서 어찌하겠단 말이오?”

“네놈을 무림맹으로 압송하여 치죄를 하겠다! 더불어 네놈의 사제들과 문파들도 온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말거라!”

명현 도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소운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사방으로 살기가 폭사되었고, 이로 인해 겨우 내부를 안정시켰던 이들 중 몇몇은 다시금 각혈을 내뱉었다.

살기의 여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명현조차도 얼굴이 노랗게 떴다.

진소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보시오.”

“……뭐, 뭣이!”

“해보라 했소.”

“…….”

진소운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린다.

그 반항적인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명현 도장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못 하겠소? 내가 도와주지.”

진소운이 흑룡검을 바꿔 쥔다.

이윽고 성큼성큼 명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퍽.

내공이 실린 발길질을 내질렀다.

“으헉……!”

이기풍에게 기대고 있던 명현의 신형이 초라하게 바닥을 구른다.

진소운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내가 흑도와 내통을 하고, 무림맹을 뒤집어엎을 역모를 꾸미고 있다 생각하면 제대로 해보란 말이오!”

“네, 네놈이 정녕!”

퍽!

진소운의 우악스런 발길질이 명현의 면상에 꽂힌다.

“푸헉!”

명현의 코에 상처가 나며 핏물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진소운은 살기를 거두지 않는다.

“내가 무림맹의 적이고, 강호를 위협하는 존재라면 어디 한번 나를 죽여보란 말이오!”

“네, 네놈! 내가…… 내상만 입지 않았어도……!”

“내상?”

진소운의 눈가에 경멸이 어린다.

이윽고 지풍을 날려 명현의 요혈을 때린다.

퍼퍼퍼 퍼퍼퍼퍼퍽.

특별한 무공이 아닌 그저 내공을 담아 쏘아낸 지풍은 우악스런 주먹질에 가까웠다.

명현은 마치 수십의 거한들에게 몰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진소운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강호를 지키겠다는 인간의 각오가 그 정도뿐인가?”

소정대원들은 내공이 비루했던 탓에 동귀어진이 일상이었다.

선천진기를 건드는 것은 당연했고, 폭혈단을 먹을 수 있을 때면 지체하지 않고 입안에 털어넣었다.

별 볼 일 없는 삼류무사의 삶에서 선천진기마저 훼손당했을 경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면서도 그랬다.

당장 미력한 힘으로 강호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선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으니까.

“쥐꼬리만 한 월봉을 받는 삼류 무사도 그럴진대, 무림맹의 장로라는 인간이 선천진기가 무너질 게 무서워 동귀어진의 각오도 갖지 못하는가? 정말이지 살려두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퍽!

진소운의 발길질에 명현이 몇 바퀴나 굴러갔다.

“이익! 네, 네놈!”

명현도 이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억지로 내공을 일으키려 했다.

그 모습에 진소운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걸린다.

“사도가 위협할 때도 아니고, 제자들의 목숨이 위험해진 것도 아니고, 결국…….”

진소운이 가볍게 권형을 날렸다.

“제 목숨이 위험해져야 동귀어진의 각오가 서는 것인가?”

그의 손에서 뻗어나온 만화무적권의 권형이 그의 하단전과 중단전, 주요 혈맥을 때리어 운공을 방해했다.

“커허헉!”

핏물을 마구 쏟아내며 바닥에 구른 명현 도장의 꼴은 말 그대로 폐인에 가까웠다.

진소운은 그럼에도 멈출 생각이 없는지 계속 명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명현은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점창의 제자들에게 외쳤다.

“네놈들은 뭘 하고 자빠져 있느냐!”

“…….”

“당장 저 죄인을 잡아 족치지 않고!”

“…….”

하지만 또다시 찾아온 고요.

명현 도장의 말에 움직이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분에 찬 명현이 힘겹게 사지를 주위로 뻗치며 다시 호통친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죄인을 무릎 꿇리라는 내 말이 우스운 것이냐! 이기풍!”

명현이 이기풍을 지목하자, 점창과 속가문파 제자들의 시선이 이기풍에게로 향했다.

“이기풍! 점창의 제자들과 함께 저 녀석을 단매에 제압해라!”

“…….”

이기풍은 진소운과 명현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떼었다.

“나머지는 뭣들 하느냐! 어서 움직이지 않고!”

진소운과 명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 이기풍.

진소운의 여유로운 눈빛을 잠시 응시하다가,

“잠시 지나가겠소.”

이내 그를 지나쳐 명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어서 저놈을 제압하…… 커흑.”

삿대질을 하던 명현 도장이 부지불식간에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기풍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명현 도장의 말을 끊어내고 그를 기습한 이는.

“네, 네놈이…….”

다름 아닌 그를 부축해 주었던 이기풍이었다.

털썩.

명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기풍을 보다 기절해 버렸다.

쓰러진 명현 도장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이기풍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명현 장로께선 사기에 오래 노출되어 이지를 상실하신 것 같군.”

“…….”

“…….”

이기풍이 다른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잘못하면 기사멸조의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

다른 제자들도 결심이 섰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음, 그럴 수밖에. 우리들도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

“나는 아직도 헛것이 보여.”

“명현 도장님이 예전부터 약간의 치매기가 있으셨지.”

점창의 제자들이 하나둘 그렇게 동조하자, 속가문파의 제자들은 감히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명현 도장을 다른 제자에게 넘긴 이기풍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러곤 정중하게 포권을 쥐었다.

“진소운 대표, 명현 장로님의 실언에 대해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소.”

진소운은 신기하다는 듯 이기풍을 바라보았다.

“종벽기보다 못한 놈. 방금 그 행동 수습 가능하겠냐?”

“……나를 기억하오?”

“그럼, 선착장에서 꽤 날카로운 한 수를 보였으니까.”

“…….”

이기풍은 실로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정시 때, 합격 여부를 떠나 오직 상대를 떨어뜨리기 위한 방해를 시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상대가 자신들을 구해주고 모욕까지 뒤집어썼다.

그 사실에 더욱 미안함이 느껴졌다.

“기사멸조의 죄는 문파의 가장 중한 죄로 처벌될 텐데. 차라리 나한테 몇 대 맞고 끝나는 게 낫지 않았나?”

이기풍이 고개를 들어 진소운을 바라봤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스스로가 더욱 부끄러워졌다.

“나는 명예를 알고 부끄러운 생을 살지 않기 위해 무인이 되고 싶었소. 이렇게 부끄러운 생을 살게 될 바엔, 차라리 기사멸조의 죄를 짓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오.”

“점창의 금옥에 갇힌다면 아쉽겠군. 그대가 어찌 변할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기풍은 한동안 복잡한 눈으로 진소운을 바라봤다.

대체 이 자는 얼마나 그릇이 크길레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일까?

이기풍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함에 압도되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자에게 우리가 해온 정치질은 한낱 협잡에 불과했던 것이겠지. 부끄럽구나.’

이기풍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쥐었다.

“이 어리석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초개와 같이 싸워준 것에 다시금 감사드리오. 은혜는 뼈에 새기고 언제가 반드시 갚겠소.”

이기풍을 시작으로 점창의 제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은인에게 감사드리오. 은혜는 뼈에 새기고 언제가 반드시 갚겠소!”

“은인에게 감사드리오. 은혜는 뼈에 새기고 언제가 반드시 갚겠소!”

점창의 제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자, 이어 점창 속가무문의 제자들이, 뒤이어 소림의 제자와 소림 속가문파의 제자들까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진소운에게 포권을 쥐었다.

“은인에게 감사드리오. 은혜는 뼈에 새기고 언제가 반드시 갚겠소!”

“은인에게 감사드리오. 은혜는 뼈에 새기고 언제가 반드시 갚겠소!”

진심이 담긴 목소리들이 메아리처럼 사방에 울려 퍼졌다.

강철궁의 시위에 손가락을 걸었던 모용재화가 활을 내리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은설란은 어쩐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쩝…….”

복잡한 표정으로 흑룡검을 다시금 집어넣은 진소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 그만하고 얼른 돌아들 갑시다.”

휙 몸을 돌려 도망치듯 걷는 진소운.

남화성이 그런 진소운을 쫓아가며 물었다.

“좋냐? 원수인 이들에게 저렇게 칭송받으니까 좋아?”

“넌 좀 꺼져라! 짜증 나니까!”

그러나 그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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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현 도장을 안정시킨(?) 후에 혜성 대사와도 비슷한 일이 있을 뻔했지만, 어쩐지 일각이 재빨리 나서준 덕에(?) 혜성 대사와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다.

나는 부대를 정비한 후에 그들을 먼저 출발시키고, 예의 그 봉우리에 남아있었다.

남화성이 부대에 끼기에 어색하다며 나를 따라가겠다 말했지만, 또 철강시를 만날 수도 있다 겁을 주자 정색하며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부대에 합류했다.

“저어……. 형님…….”

모용재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응? 왜?”

“그…… 전 왜 아직 남아있는지…….”

다들 돌아가는데 자신만 남아있는 것이 못내 불안했나 보다.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벽력시, 아직 완성 못 시켰잖아.”

“……네? 아, 그, 그쵸.”

“여기에 이렇게 좋은 과녁들이 있는데, 여기서 완성시키고 가야지. 그치?”

“하, 하지만 분명 철강시가 나온다고…….”

쳇, 남화성에게 한 말을 들은 건가?

“안 나올 거야. 아마도.”

“……아마도라고요?”

“아무튼 걱정 마라. 너는 남화성과 달리 가벼워서 들고 도망칠 수 있으니까.”

“네?”

재화의 눈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나는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더욱 쓰다듬어 주었다.

“뭐, 옷이 찢기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그런 불행한 일은 안 일어나겠지?”

모용재화는 갑자기 자신의 의복을 더듬더듬 만져봤다.

“그게 무슨 말씀…… 아, 아니 그보다 여기 남아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승호당이 이편으로 오고 있거든, 저들 선발대를 막지 않으면 피해가 더욱 커지겠지.”

재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린다.

“그럼 저랑 둘이서 저 선발대를 막자고요……?”

“응. 왜?”

“……그거 가능한 겁니까?”

“네가 벽력시만 완성시키면 가능하지.”

“…….”

전쟁의 피해는 퇴각할 때 가장 크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소림과 점창을 비롯한 선두 조들은 사술의 후유증에서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

이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면 정도회뿐만 아니라, 내 일행이 입을 피해가 커질 것도 자명한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적광검…… 아니, 혈해옥을 놓칠 수는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석이조의 효과.

나는 넋이 나간 재화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뽕 따러 가볼까?”

“네? 그게 무슨…….”

이럴 때일수록 몰아쳐 혼을 빼놓아야 한다.

조련…… 아니, 훈련의 기본 상식.

“자, 저기! 저기! 붉은 막사 보이지?”

“네? 이백 장 거리에 있는 저 막사 말입니까?”

“그래. 거기에 일단 벽력시 한 방 먹여줘.”

“저…… 형님, 강철궁이라 해도 사거리가 백오십 장이 최대인걸요.”

“에이, 무슨 소리야. 삼백 장 거리에도 쏘는 걸 봤는데.”

진짜다. 전생의 파궁은 평균 삼백 장, 최대 사백 장 거리의 표적을 향해서도 척척 활을 쏘았다.

‘자신의 무공이 완성되면 이론상으론 오백 장까지도 가능하다고 했었지.’

물론 전생의 파궁도 결국 그 경지에 닿지 못했지만, 이번 생엔 더 빨리 궁을 잡았으니 정마대전 전에 가능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뭐 해, 얼른 안 쏘고?”

빨리 혈해옥 회수해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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