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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83화 (183/357)

#183. <다시 쓰는 사천혈사(3)>

구정룡이 흡수한 무림학관의 인원들은 행로 내내 불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그들로서는 공식적으로 학사를 땡땡이 치고 여행을 즐길 수 있던 일정이 갑자기 일방적인 행군으로 바뀐 것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

거기다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고,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 이야기를 해도 수허 장로와 상원 장로의 불만이 하루에 일곱 번 정도 터져나왔다.

‘무림맹의 장로라는 이들이.’

‘아마 잘못된 정보일 거다.’ ‘지금 시절에 사도가 웬말이냐.’ ‘진소운이 수작을 부린거다.’는 둥 극한의 현실도피를 하는 그들의 작태를 보며, 구정룡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러나 그들의 불만은 청성과 아미의 학관생들을 만나면서 쏙 들어갔다.

12봉성의 인원들이 호위하듯 이끄는 정도회의 인원들은 그야말로 패잔병 그 자체.

하나같이 똑바로 걷는 자가 드물고, 개중에는 들것에 실려 오는 자들도 있었다.

일부 인원을 배정하여 그들을 보호하게 한 뒤, 구정룡은 속도를 더 올렸다.

본래 같았으면, 어찌 이리 급하게 가느냐는 불만을 터트릴 법도 한 수허와 상원이 입을 꾹 다문 채 구정룡과 승호당의 속도에 발맞췄다.

이윽고 그들은 화산과 공동의 무리들을 만났을 때 기함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소 장로는? 네놈들! 소 장로는 어디 간 것이냐……?”

얼마나 정신없이 도망쳤는지, 학관생들 중에는 무인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검을 잃어버린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피해 규모가 제 삼(三)선인 청성과 아미의 학관생들보다 두 배는 컸다.

“분명 전서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분명…… 이 정도의 피해가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커다란 피해.

특히나 공동은 속가문파들의 학관생들이 대부분 불구가 되거나 실어인이 되었고, 일부 공동파의 제자들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대, 대피한 이, 이후에 또, 또, 또, 스, 습격을……, 바, 받았……습니다,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더듬는 학관생의 상태에, 보고를 듣던 구정룡과 수허, 상원 그 누구도 딱딱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제 이(二)선이 이렇다면……. 제 일(一)선의 피해는 더욱 크겠군요.”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장로들을 바라보며 구정룡이 혀를 찼다.

“우선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말인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지요. 지체하다간 어찌 될지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구정룡의 말에 수허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자네 말대로 이곳이 이렇다면 저 앞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수허.

그 모습에 구정룡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크흠!”

“확실히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네.”

구정룡은 승호당과 학관생들 중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화산과 공동 소속의 학관생들과 함께 청성파의 인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러곤 다시금 기수를 돌려 제 일(一)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지잉──

기감을 극대화시켜 달리던 구정룡의 머릿속을 찌르는 기이한 음성을 들려왔다.

“멈춰라!”

급하게 행군을 멈추며 뒤로 물러서는 구정룡의 모습에 감천악이 다가왔다.

“그, 사술입니까?”

“느껴지냐?”

“약간 심장이 두근거리는군요.”

“저거 뚫을 수 있겠냐?”

감천악이 불량한 눈으로 구정룡을 바라봤다.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너 방금 ‘개소리’라고 했냐?”

“제가 언제요?”

“……그래서 할 수 있어 없어?”

감천악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길 뚫고 간다고 한들, 저 앞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삼 조와 이 조의 상태도 이렇다면, 일 조는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천하의 소림과 점창이라 한들, 아직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학관생들만으론 그 아수라장을 버텨내지 못했으리라.

구정룡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근데 진소운이 가지 않았냐.”

“…….”

“녀석이 저 길을 지났다면 우리도 최소한 가는 노력이라도 보여야겠지.”

감천악이 혼자 읇조리듯 말했다.

“후…… 빌어먹을 새끼. 지는 명령만 하면 된다고 별 이상한 말을 다 지어내네.”

“뭐, 인마?”

감천악이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말 안 했습니다.”

“…….”

감천악이 눈앞에 일렁거리는 붉은 기류를 보며 말했다.

“어째 절진이 조금 불안정해 보이지 않습니까?”

“위쪽은 제대로 막지 못한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이군요.”

“가능하겠냐?”

감천악의 건조한 시선이 구정룡의 얼굴로 향한다.

“까라면서요. 그럼 까야죠.”

감천악이 뒤를 돌아봤다.

“야! 한 네 명만 나와봐!”

감천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호당원 네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여기 지나가야 하거든. 괜찮지 니들?”

“……지금 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걸 지나가자고요?”

승호당원들의 표정도 감천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 감천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구정룡을 가리켰다.

“어. 저 빌어먹을…… 아니, 당주님께서 여길 지나가길 원하신다.”

“완전 미친 새끼네…….”

“또라이 아닙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구정룡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나 옆에 있다, 이 새끼들아.”

“……참나, 왜 부하 말을 엿듣고 난리람.”

웅성거리는 승호당원들 사이에서, 감천악이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무튼, 여기 지나가야 하니까. 그렇게 알아.”

“지나가면 뭐 나옵니까?”

감천악 구정룡을 슬쩍 본 후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여길 지나서 진소운을 구해주면 그놈이 ‘파사제령’이란 사천 특산물을 사 줄거야.”

“오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된다.

“파사제령이라!! 이름만 들어도 뭔가 맛있을 것 같네!”

“나 파사제령이란 음식은 처음 들어! 역시 부자랑 친해져야 한다니까!”

기뻐하는 승호당원들을 보며 감천악도 방긋 웃음을 지었다.

“븅신들 진짜…….”

구정룡마저도 감천악의 말에 동의하며 들뜨는 승호당원들을 한심하게 보는 사이.

감천악이 네 사람의 혈도를 짚었다.

“지금부터 시각이랑 촉각을 마비 시킬 거다. 아마 환청 같은 게 들릴 건데. 그건 최대한 무시하고 전음에만 따라 움직여.”

“알겠습니다!”

감천악이 구정룡을 바라봤다.

“시작하시죠.”

“……조심해라.”

“그렇게 걱정되시면 당주님이…….”

“너를 믿는다!”

구정룡이 재빨리 감천악의 시각과 촉각을 마비시켰다.

탁, 타탁, 타타탁.

혈도가 짚힌 감천악은 제 손으로 눈앞에 손을 가져가 흔들었다.

그러다 구정룡을 향해 주먹감자를 먹였다.

“당주님, 제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명백한 하극상.”

“오! 그렇습니까? 안 보여서 몰랐습니다.”

구정룡에게 감자를 먹인 감천악이 검을 뽑아 들었다.

구정룡은 얼른 나무 위로 올라가 절진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계속 가! 지금 오른쪽으로 꺾였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 틀어 앞으로 가!

구정룡의 지시에 승호당원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진 안에는 예의 혈의인들이 나타났다.

구정룡이 다급히 외쳤다.

-적이다!

그러자 감천악으로부터 전음이 들려왔다.

-‘적이다!’만 하지 말고 위치를 알려주쇼! 진짜 답답해서 같이 작전하겠나!

구정룡은 아차 싶으면서도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새끼가…….’

구정룡의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검을 펼치는 승호당원들.

채채채채채챙!

그들의 이 기이한 용태에, 학관생들은 물론이고 장로원들마저도 넋을 놓고 바라봤다.

크억!

아아악!

큭!

다행히 혈의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다들 상태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섬전과도 같은 승호당의 칼날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

마지막으로 기습하던 혈의인이 결국 감천악의 손에 고혼이 된 후, 더 이상의 습격은 발생하지 않았다.

구정룡의 지시대로 절진을 통과한 승호당원들은 감천악을 시작으로 감각을 되돌린 후.

술사들이 있는 곳으로 전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술사들을 보호하고 있던 혈의인들마저 쓰러뜨린 후. 술사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그들이 설치한 도구들을 부수자, 길을 막고 있던 불온한 절진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부대로 돌아온 감천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째 애들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뭐가?”

“어디서 줘 터진 것 같기도 하고, 며칠 간 잠을 못 잔 거 같기도 하고. 내력은 그렇다 치고 그동안 살수를 벌여온 놈들치곤 살기가 무뎌요.”

구정룡 역시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생존자들이 이야기 한 습격자들의 숫자와도 많이 차이가 나고.”

“저희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다시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승호당과 학관생들.

이후 그들이 마주한 광경은 처절한 전장이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진짜 전쟁이라도 일어난 거야?”

그 승호당들마저도 기함할 정도로 많은 숫자의 시체들.

바닥엔 장맛비가 내린 듯 피가 시내처럼 흐르고, 시체가 돌멩이처럼 흔하게 널려 있었다.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마라!”

감천악의 명령에 승호당원들이 기강 잡힌 모습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구정룡 역시 처절한 전투의 현장에 접근했다.

‘응?’

헌데 사체의 상태들이 요상했다.

혈의인들이야 학관생들을 습격한 이들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그들과 함께 죽어있는 자들의 복장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무림학관의 정예인 정도회의 것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산적……?’

옷가지가 제각각인 건 다반사고, 어떤 놈들은 동물 가죽으로 제 몸을 가리고 있다.

심한 놈은 웃통을 아예 안 입은 경우도 있었다.

“이 근방 녹림채 놈들인 것 같습니다.”

감천악의 말에 구정룡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산적 놈들이 왜?”

“……거야 모르지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적이 정체불명의 혈의인들에 국한된 게 아니라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계속 가실 겁니까?”

사술을 쓰는 적에다 규모가 압도적인 녹림채까지 함께 몰려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승호당이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감천악의 냉정한 목소리가 주위로 울려퍼진다.

“계속 가면 저희들도 위험해질 겁니다.”

“…….”

그는 답이 없는 구정룡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진소운도…….”

그때, 경계를 서던 승호당원이 버럭 외쳤다.

“신원 미상의 인원들이 접근 중입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구정룡의 고개가 퍼뜩 치켜 올려졌다.

만약 일 조를 처리한 혈의인들이 이곳으로 오는 것이라면?

혹은 왜인지 알 수 없는 녹림도들이 오는 것이라면?

“전원 전투 준비!!!”

구정룡의 외침과 동시에 승호당원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검을 뽑았다.

채채채채채채챙!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승호당원 전원이 청룡반월진을 이루었고, 이 기세에 압도된 학관생들도 저마다 군침을 삼키며 조심히 검을 빼 들었다.

“후우…….”

누군가 내뱉은 한숨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릴 만큼 침묵이 감도는 사이.

신원 미상의 인원들이 눈앞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슨 조합이지?’

맨 앞에 선 자들의 조합이 특이하다.

누군가는 궁을 들었고, 어떤 이는 거대한 체구를 가졌으며, 한 사람은 여자였다.

그리고 가운데 선 사내는 손에 수박만 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안력을 돋우던 구정룡이 어처구니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진소운?”

감천악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전방을 바라본다.

“어? 진짜네요. 그 뒤에 있는 애들은 소림과 점창 소속인 거 같은데요?”

“…….”

진소운도 이편을 발견한 건지 여유로이 손을 흔든다.

그 모습에 평소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감천악마저 헛웃음을 내뱉는다.

“진짜 대단한 놈이네요. 이 아수라장에서…….”

그의 시선이 진소운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사람들을 결국 구해냈네.”

감천악이 탄성을 내지르며 검을 집어 넣을 때.

구정룡이 은밀하게 말했다.

“야, 방금 신원 미상의 인원들이라고 한 새끼 있지.”

“네.”

“그 새끼 좀 조져.”

“……알겠습니다.”

바짝 돋았던 긴장감을 풀며 길게 한숨을 내쉰 구정룡.

그는 새삼 신기한 눈으로 진소운을 바라보았다.

이선과 삼선의 피해도 막심하건만, 정작 제 일선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전투의 현장으로 보건대, 혈의인과 녹림마저 뚫고 나아갔던 것 같다.

놈은 자신이 한 말대로.

자신의 사람들을 구해서 돌아왔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이게 일개 학관생이 한 일이라고?’

흑염룡이 무림 신성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일은 무림 신성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니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맹주원의 부탁으로 진소운을 도와주기로 한 그였지만, 어쩐지 진소운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지는 구정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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