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84화 (184/357)

#184. <다시 쓰는 사천혈사(4)>

[사천에서 정도회가 당했다.]

처음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장로원의 다른 장로들은 조소를 금치 못했다.

치열한 경쟁자가 자빠져 코가 깨졌다는 소식은 어떤 음식보다 포만감을 불러일으키는 법.

알량한 정도회의 행사에 불편함을 느끼던 백도회와 12봉성의 인원들은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무림맹은 사천에서 전해온 소식에, 곧장 파견할 부대를 꾸리고자 준비했다.

그와 달리, 정도회가 곤란한 상황을 좀 더 겪길 바랐던 장로원은 부대를 꾸릴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무림맹의 무각(武閣)들은 준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득의양양하던 장로원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청성파 및 속가 문파 사상자 다수.

-아미파 및 속가 문파 사상자 다수.

-화산파 및 속가 문파 사상자 다수.

-공동파 및 속가 문파 사상자 다수.

-청성파 은희광 장로 실종.

-아미파 정명 장로 실종.

-화산파 소충현 장로 사망 확인.

-공동파 정사익 장로 사망 확인.

-소림사 혜성 장로 사술에 의한 부작용.

-점창파 명현 장로 사술에 의한 부작용.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부정적인 소식들에 장로원은 물론이고 무림맹 전체가 기함했다.

문서 말미, 정확한 사상자 구분이 어려워 숫자를 기재하지 않았다는 부분에 몇몇은 혼절했을 지경.

이에 더 이상 사천에 맹의 무사를 파견하는 사안을 가지고 제동을 거는 인사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면 무림맹이 무림맹이 아닌 법.

이번엔 파견 규모를 가지고 제동이 들어왔다.

“제갈 군사. 이게 말이나 된다고 보시오? 무슨 백흑대전이라도 일어났소? 청룡각에 적룡각에 흑무각과 금봉각까지? 어디 사천 전체와 싸울 작정이시오?”

“장로원에서 당금의 사태를 진중하게 바라보지 않는 모양이군요. 화산과 공동, 청성과 아미의 장로들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습니다. 더구나 소림의 혜성 장로와 점창의 명현 도장도 사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요.”

“아무리 그래도 도가 지나치잖소. 도가!”

“도를 아시는 분들이 무사 파견에 의문을 제기하고 제동을 거신 겁니까?”

“이보시오! 총군사!”

젊은 시절 강호를 함께 질주했던 이들은 체면도 잊은 채 호기롭던 젊은 날처럼 삿대질을 하며 말싸움을 이어갔다.

막말로 직위와 사람들 보는 눈만 없었다면, 무공으로 결단을 내고 싶을 정도로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고, 진실을 아는 제갈소명은 속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혈교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진소운이 전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도 진소운의 이야기에 신빙성이 있다 생각했기에 최소한, 정말 최소한의 인력만을 파견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장로원과 다른 문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마찬가지.

더구나 한편에선 또,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사천에서 장로들이 실종된 청성과 아미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무인들을 일으켜 흉수를 잡겠다고 나대는 상황.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다.

누군 왜 이리 인력을 많이 보내냐고 딴지 걸고,

청성, 아미는 지들이 바로 자체적으로 무인 파견하겠다고 나대고.

시장바닥도 이거보단 질서정연해 보일 지경.

“빌어먹을 놈. 문제를 던졌으면 해결책까지 내놔야 할 것 아닌가!”

제갈소명의 말에 이마의 혹이 아직까지 가라앉지 않은 맹주원이 툴툴거렸다.

“장로원 설득은 본래 총군사님의 소관 아닙니까?”

“……이 새끼가 왜 혼잣말을 엿듣고 난리야!”

물론 이게 진소운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지만 제갈소명의 입장으로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혈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믿자니, 저 많은 인원도 적어 보이고.

그저 장로들이 죽은 사건으로 보자니, 만약 진짜 혈교라면 이건 적은 인원들로 해결 볼 일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든다.

그런 고민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금 전서가 도착했다.

-철강시 출현.

-적의 정체가 혈교인 것으로 확인.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면 머리가 굳는다고 하던가.

진소운이 보낸 전서는 무림맹 전체를 돌로 만들었다.

혈교로 예측하고 있던 제갈소명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 강시? 가아아앙시? 철강시이이이?”

“총군사님, 고정하세요.”

“야, 인마! 이게 고정이 되겠냐?! 강시라잖아! 강시! 다른 것도 아니고 가아아앙시!”

사천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밀로 처리되고 있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무림맹 전체에 소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무림맹은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럽게 변했다.

초조한 입시생이 발을 떠는 듯 잔진동이 멈추지 않았던 무림맹은 결국 최정예 인원들을 사천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파견의 규모나 소속의 구분을 두지 않았고, 장로원들도 무조건적인 승인으로 파견안을 처리시켰다.

무림맹 맹주전.

장로원과 만통부의 파견 승인서를 가지고 온 제갈소명이 맹주의 승인도장을 받기 직전 맹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철강시라……. 어찌 보십니까?”

혁무강의 물음에 제갈소명은 근심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부디……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총군사께서도 진짜라 생각하시는군요.”

“조금 의문스런 점은 있습니다. 과거 기록들을 찾아보아도, 혈교에서 철강시를 제조할 수 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결국 마교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걸까요?”

혁무강이 가벼운 어투로 물었지만, 제갈소명은 입을 꾸욱 잠갔다.

제아무리 무림맹의 총군사라 할지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란 게 있기 때문.

대비는 충실히 하되, 애당초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그였다.

“그렇다 한들, 결국 벌어진 일이라면 마주해야겠지요.”

“…….”

혁무강의 말에 제갈소명 또한 무언의 긍정을 보냈다.

“파견 무사의 숫자가 대단하군요.”

“만약의 경우이긴 하지만, 혈교에 철강시까지 나타났다면 이 정도 숫자로도 부족합니다.”

“흑도 연맹이 불편해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의 대규모 인원 동원은 경쟁자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터.

가뜩이나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연맹을 만들려는 흑도 무림으로선 무림맹의 행사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

더 나아가 이 일이 시발점이 되어 혈교와의 전투 중 흑도 연맹까지 상대해야 한다면, 무림맹은 사면초가에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제갈소명은 차오르는 한숨을 억누르며 답했다.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여 불만을 잠재워야 할 듯합니다.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혈교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혁무강이 근심 어린 표정을 펴지 못했다.

“사황봉주가 뭘 요구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제갈소명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혈교와 철강시입니다. 그들이 강호에 나온다면 피해는 흑도들과의 드잡이질과는 격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내줘야 할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학관생들은 어찌 되었답니까?”

그 물음에 총군사의 표정이 다시 복잡해졌다.

“……사천으로 갔던 승호당 덕분에 큰 피해는 막았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이것도 진소운 그 아이 덕분이라지요?”

혁무강이 왜인지 신난 표정을 보이자 제갈소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다만, 절차상의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벌을 내려야 할지 상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 좋다.

가서 학관생들을 구하고, 혈교의 존재를 밝히고, 철강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렸으니 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학사 일정을 무시했고, 만통부의 부장을 꿰어 승호당을 출동시켰다.

겉으로 보기엔 절차상의 문제가 없다곤 하나, 꼬투리를 잡자면 또 잡을 수 있는 문제들.

가뜩이나 산재한 문제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와중인데, 진소운의 일까지 더해질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상을 내려야지요.”

혁무강의 담담한 음성.

제갈소명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것이 그리 쉽게…….”

“절차상의 문제 또한 큰 문제에 빗대면 사소한 것 아니겠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위기에 대처할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탁-

맹주가 손에 들었던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그런 이에게 벌을 내린다면, 앞으론 그 누구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느라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

제갈소명 자신도 너무 잘 아는 사실이기에 말을 덧댈 수 없었다.

인간이란, 체계 안에서 얼마나 순응하는 존재인가.

의심하고 성찰하려는 의지를 상실해 체계에 잡아먹히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또 잘못된 것을 보아도 그냥 넘어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하급 학사였던 맹주원을 만통부에 데려온 것도, 태을문 출신의 진소운을 데려오려 하는 것도.

모두 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이번 일에 상을 내리는 것을 두고, 어떤 누구라도 제동을 건다면, 맹주전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혁무강의 단호한 음성에 제갈소명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통부 또한 그리하겠습니다. 대신 상벌은 혈교의 일이 끝난 후에 하시지요.”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얼추 해야 할 이야기를 모두 끝낸 제갈소명이 출정명령서를 내밀었다.

“그럼, 여기…….”

서류를 쭉 읽던 혁무강은 금쇄를 들어 인장을 찍으려다 우뚝 멈춰 섰다.

“이걸 찍으면 돌이킬 수 없겠지요?”

“…….”

대답 없는 제갈소명의 반응에도 혁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다 도장을 무겁게 눌렀다.

쿵.

썩은 고목처럼 꼼짝도 못 하고 있던 무림맹이란 거대한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당주님.”

진소운의 부름에 구정룡이 돌아봤다.

“일행은 다 챙겼나?”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요.”

구정룡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내가 뭘 신경 써준 거지?

사실상 이번 일에서 자신이 한 거라곤 부상자 후송밖에 없었다.

사천에서 벌어진 일을 주도적으로 수습한 이는 진소운.

감히 예상컨대 진소운이 사천에 오지 않았다면, 무림학관 정도회는 사천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니 또 새삼 진소운이 궁금해지는 구정룡이었다.

“자네, 도대체 뭔가?”

“네?”

“정체가 뭐냐 말이야.”

“제 정체요? 태을문의 제자이자, 무림학관 대표고…….”

“됐네. 내가 괜한 걸 물었군.”

고개를 젓는 구정룡의 모습에 진소운은 자신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나저나 왜 불렀나?”

“아,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응? 나한테?”

“네. 몇몇 승호당원 분들께서 저한테 자꾸 ‘파사제령’을 언제 살 거냐고 물어보시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

구정룡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커흐음……. 그게…….”

“파사제령이 혹시 제가 아는 파(破邪)와 제령(制靈)을 뜻하는 겁니까?”

구정룡의 헛기침 소리가 더욱 커졌다.

“커흐흐흠! 커헉! 커흠!”

“혹시 내상을 입으셨습니까?”

“끙…… 아니네. 그냥 좀 개인적인 일이 있었는데. 그, 저기…… 적당히 아무 음식이나 사주면서 파사제령이라고 알려주겠나?”

“…….”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진소운.

구정룡은 결국 품속에 손을 넣어 은전 몇 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돈은 내가 내도록 하지. 고생한 친구들이니 자네가 적당히 얼러주게.”

그러자 진소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넙죽 은전을 받는 것 아닌가.

순진한 표정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그럼요. 고생하신 분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해야죠.”

“…….”

왠지 찝찝함이 남는 구정룡이었다.

그는 얼른 말을 돌렸다.

“슬슬 행렬의 속도를 올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부상자들이 많은데 괜찮겠습니까?”

“보아하니 사천에서 돌아가는 일들이 심상치가 않네. 혈교라니……. 그들이 절대 포기할 리 없네.”

“아, 그건 괜찮습니다.”

구정룡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괜찮다고?”

“네. 소교주 목을 잘라놨거든요. 일단 그에 관한 보고 때문에라도 혈교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

태연자약한 설명에 구정룡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목을 잘랐다니……. 자네가 말인가?”

“네. 아무래도 쫓아올 것 같아서 미리 싹을 잘라놨죠.”

“…….”

구정룡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린 보따리로 향했다.

수박만 한 크기에, 적당한 원형 모양.

아침저녁으로 은설란이 빙공을 쓰는 모양새까지…….

“설마 그거…….”

진소운이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생각하시는 그겁니다.”

“…….”

그걸 네가 왜 들고 있어?

라는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왔지만, 구정룡은 꾹 참아 눌렀다.

애당초 사천의 일을 예상한 것부터 시작해 진소운에게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 들어버리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질 듯했다.

구정룡은 빠르게 관심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흠, 그렇군. 자네 아주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동시에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도 속도를 올리는 게 좋을 듯하네. 이번 일에 혈교뿐 아니라 녹림채들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거든.”

“……아. 그거 말입니까?”

“자네도 시체를 봐서 알겠지만…….”

“그거 제가 그런 겁니다.”

“……뭣?”

구정룡은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달리, 진소운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하다.

“뭐, 도저히 혈교 인원들을 뚫어낼 방도가 없어서 녹림도들을 끌고 와서 싸움을 붙인 거죠.”

“…….”

구정룡은 또 한 번 애써 복잡한 이야기를 무시하려 했지만,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네, 미쳤나? 혈교도 버거운 상황에서 녹림까지 끌어들였다고?”

“아, 그건 제가 다 해결할…….”

그때, 감천악이 드물게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당주님.”

“왜!”

괜히 신경질적으로 변한 대답.

평소 같았으면 똑같이 성질을 냈을 감천악이 여전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에 녹림이 나타났습니다.”

“뭣?”

“한 천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

감천악이 구정룡의 가시 돋친 말투를 참은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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