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90화 (190/357)

#190. <다시 쓰는 사천혈사(10)>

학관장실 내부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인상을 찡그리고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제갈소명 때문은 아니었다.

무거운 긴장감이 감도는 진짜 이유는…….

“허허허, 학관장의 차 취향이 이리 좋은 줄 알았다면 종종 찾아올 걸 그랬습니다.”

“……네? 아,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같은 걸로 맹주전에…….”

“아닙니다, 아니에요. 맹의 돈을 그리 쉬이 쓰면 되겠습니까. 내가 종종 들르겠습니다.”

“…….”

혁무강의 말에 북원평이 뜨악한 표정을 억지로 숨긴다.

무림맹주가 시도 때도 없이 차를 얻어먹겠다고 찾아온다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 무림맹주 이 양반, 한술 더 뜬다.

“혹, 내가 자주 오는 것이 불편하겠습니까?”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야말로 자주 찾아주신다니 너무 감사할 따름이지요.”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입꼬리와 눈가는 파르르 떨린다.

표범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토끼 같은 북원평의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를 상쾌함을 느꼈다.

고거 참 쌤통이네.

대제자의 부탁을 단매에 거절하니 태사조께서 벌을 내리신 거겠지.

혁무강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이 나이쯤 되면 찾아주는 곳이 없어서 말입니다. 맹주전에 매일 있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

“전대 무상검의 전인과 강호를 주유하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지요. 참으로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느그 사부랑도 잘 알고, 어? 강호 주유도 하고, 별거 다 했어 인마!

……같은 늙은 아재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마치 제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해야 하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가 강호에 남긴 족적은 백과 흑을 초월하여 강호에서 활동하는 모든 무인들의 경외심을 자아낼 만한 것이었으니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그를 맹주의 자리에서 끌어내지 못하는 것만 봐도 당연한 일인가.’

심지어 그는 사문도 사부도 없다.

독문무공으로 천하 십 인의 자리에 올라 온갖 암계와 암투를 이겨내고, 끝내 무림맹주의 자리에 추대되어 올라간 이야기는 강호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웅심을 울리기 충분한 것.

더구나 나는 그에게 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고, 가장 최일선에서 치열하게 싸운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우리가 구파일방에 실망하고, 오대세가에 환멸을 느낄 때도 백수신검은 우리의 신의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어쩜 그랬기에 그가 실패한 걸지도 모르겠군.’

결국 그 또한 정마대전 중에 스러져 간 커다란 별 중의 하나였지만, 정마대전이 끝난 후에도 우리의 가슴 속엔 영원히 지지 않는 등불로 남았었다.

먼발치에서 봤던 영웅을 눈앞에서 보자니 가슴에 묘한 떨림이 인다.

‘……그냥 불안해서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필이면 제갈소명에게 혼나는 시간에 함께 찾아왔으니까.

제갈소명에게 혼날 것을 각오하고 왔다 해서, 백수신검에게까지 털리고 싶진 않으니까.

땀을 삐질거리는 북원평과 대화를 나누던 혁무강이 슬쩍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혹여라도 북원평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이를 바드득바드득 가는 제갈소명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진소운…… 네놈이 당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더냐?”

꿀꺽.

‘솔직히 말해서 제가 좀 잘못을 저지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제 덕에 학관생들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라고 준비해 온 말을 목 아래로 꾹 삼켰다.

그냥 방어를 도외시한 고기방패(?)의 심경으로 욕지거리를 들으려 했다.

전생에서의 고기방패 경력은 충분하니까.

헌데…….

“허허, 총군사. 그러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예의 느긋하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끼어든다.

‘뭐지?’

내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총군사. 그럼 약속이 무의미한 것 아닙니까.”

제갈소명은 화를 맘껏 표출하고 싶어 미치겠는 표정인데 반해, 혁무강은 생글생글 웃으며 제갈소명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진정 혁무강은 영웅의 풍모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혁무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진소운 대표, 이번에 아주 장한 일을 해주었네.”

혁무강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린다.

반면 제갈소명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오호라?’

머릿속에 상황이 생생히 그려진다.

제갈소명은 분명 공치사를 하기 전에 혼을 내놓고 싶었었던 듯하다.

반면, 혁무강은 이에 반대했을 테고.

때문에 제갈소명은 혁무강의 눈을 피해 무림학관까지 왔지만, 어쩐 일인지 혁무강에게 뒤를 잡혀버린 모습으로 보였다.

‘대충 이게 맞는 것 같은데?’

계산이 서자, 내가 해야 할 일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혁무강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그 당연한 일도 누구나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더구나 듣기로는 학관 대표 일을 하며 정도회와의 갈등도 심했다 들었네.”

“끌어줄 이 없는 사람이 출세하려면 당연히 겪어야 할 어려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맹주님이 겪으신 정도만큼은 아니기에 그리 힘들다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허허허, 암! 그렇고말고. 사내대장부라면 허물을 가진 자도 품을 줄 알아야 하네. 그럼, 그럼.”

혁무강이 기분 좋은 웃음을 한참이나 터트렸다.

이 정도면 필요한 만큼 아부는 했고.

이제는 내 잘못을 수습할 차례.

나는 포권을 쥐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럼에도 전 스스로가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응?”

갑작스러운 내 태도에, 한참이나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던 혁무강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

나는 참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비록 ‘수백 명’에 달하는 이들을 구하고, 사천에서 더 크게 번질 뻔한 ‘혈교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여 가깝게는 학관생들을, 멀게는 무림맹의 무사들을 구했다곤 하지만…….”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은근슬쩍 제갈소명을 한 차례 쳐다보았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어, 혁무강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심히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만약 벌을 내리신다면 그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제갈소명의 눈초리가 도끼처럼 변했다.

혁무강은 ‘허허’거리며 슬쩍 눈을 감았다.

신선처럼 길게 자란 하얀 수염을 몇 번이나 쓰다듬는 혁무강.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그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황금색 안광이 일순간 반짝였다.

“나는……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에 애정이 가득 어려있다.

“내 대에 이런 훌륭한 후기지수가 나왔으니, 이 정도면 무림맹주로서의 일도 충실히 했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찬을 넘어선 경탄……!

나는 덩실거리려는 어깨를 꾸욱 부여잡으며 더욱 겸손하게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옆에서 팡팡 콧바람이 느껴진다.

“이, 이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알량한 혓바닥으로 잘못을 피해 가려 해!”

제갈소명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되었다.

역시나 그를 속이기엔 조금 부족한가?

근데 뭐 어떤가? 이미 무림맹주가 내 편인데, 후훗.

나는 일부러 더욱 죄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총군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저로선 대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만약 벌하신다면…… 정말 그래야 하시겠다면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흥분한 제갈소명이 급기야 삿대질하며 말한다.

“하아……! 맹주 보셨습니까? 이놈 이거, 아주 무서운 놈입니다. 저한테 혼날 걸 알고 맹주를 등에 업으려고…….”

“자자, 총군사. 고정하시지요. 우리 어린 영웅에게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와…… 와……. 진짜! 와…….”

제갈소명을 진정시킨 혁무강이 다시금 나를 불렀다.

“진소운 대표. 고개를 들게. 물론 과정이 잘못되었다 하나, 결과적으로 강호에 흐를 막대한 피를 사전에 막았으니 과실보다 공로가 더 크다 할 수 있네.”

자애로운 미소가 걸려있던 그의 얼굴에 잠시 근엄함이 서린다.

“물론 그렇다고 결과가 좋으면 모두 괜찮다는 말은 아니네.”

그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이 이어진다.

“우리가 결과에 모든 합리성을 맞출 때, 과정에서의 불법이나 범칙이 일어나는 법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항시 그대의 행동을 스스로 점검하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알겠다면 이만 표정 풀고 고개를 들게. 지금의 모습은 영웅의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으니.”

나는 고개를 들다, 잠시 멈칫하며 제갈소명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제갈소명이 기가 찬다는 듯 제 가슴을 팡팡 때렸다.

“와…… 이놈 이거 연기가 어마어마한 놈이었네. 만통부에 올 게 아니라 경극을 하라고 보내야겠어.”

“…….”

혁무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총군사, 그만하세요. 이미 충분히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하……. 후…….”

할 말을 잃은 제갈소명이 이내 포기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숨겼다.

혁무강이 이리 당부해 놨으니 제갈소명에게 혼날 걱정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

‘생각보다 너무 잘 풀렸는데?’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학관장실을 나가기만 하면 되겠다 생각한 순간.

“그보다 큰 공을 세웠으니 상을 줘야 할 텐데. 뭐가 좋겠습니까?”

역시나 혈혈단신으로 무림맹주의 자리에까지 오른 영웅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인가?

“상은 뭔 놈의 상 말입니까? 벌을 안 받는 게 저놈에게 상이지요.”

역시나 제갈소명에게선 영웅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다.

혁무강이 허허 웃으며 제갈소명을 쳐다본다.

“총군사도 짓궂으시군요. 진 대표에게 줄 것이 뭐가 있을지 누구보다 고민하신 분께서.”

“거야…… 저놈이 벌을 달게 받은 후의 일이었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 아이에게 줄 만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혁무강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제갈소명이 한숨을 내쉰다.

“글쎄요. 아직 정식 맹원이 된 것도 아니니 승진을 시켜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관생에게 재물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갈소명이 말을 흐리자 혁무강이 내게 물었다.

“진소운 대표, 혹시 필요한 게 있는가?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보게나.”

나는 재빨리 머릿속 장서고를 뒤졌다.

상으로 받을 수 있으려면 당장에 무림맹이 소유하고 있는 형태의 것이 좋다.

동시에 공을 넘을 정도로 너무 과하지 않은 물건이어야 하고, 가치 평가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물건이면 더욱 좋다.

이 모두를 고려해 보았을 때.

현시점에서 무림맹의 소유물 중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금강무괴철과 풍오동을 가지고 싶습니다.”

“금강무괴철……은 그렇다 치고, 풍오동은 어찌 필요한가?”

“제가 개인적으로 쓸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곰곰이 고민하던 혁무강이 되물었다.

“혹시 검을 만들려 하는가?”

“예.”

“흠…… 그렇다면 현철이 더 낫지 않겠는가?”

“맹주님!”

옆에서 제갈소명이 아연실색한다.

그도 그럴 게 금강무괴철이나 현철이나 귀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강호에선 현철을 더 훌륭한 금속으로 치켜세운다.

현철은 무엇보다 기의 수용력이 높아 똑같은 검기를 쓸 때도 효율이 더 잘 나오는 편이니까.

전생에서 적광검도 현철로 만들어진 신기였다.

‘하지만 금강무괴철보다 강도가 약하다는 건 다들 잘 모르는 사실이지.’

강도(剛度)에 관해 밝혀지는 것은 정마대전이 벌어지고 마교의 마물들이 나타난 이후니까.

이번 철강시 사태 때도 느꼈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피부 강도를 가진 마물(魔物)들을 상대하기엔 금강무괴철만 한 물건이 없다.

장차 내가, 그리고 강호인들이 맞붙어야 할 존재들을 생각하면, 현철보다 금강무괴철로 만든 무기를 준비하는 쪽이 더욱 나은 선택.

더구나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풍오동과 금강무괴철의 숨겨진 효능.

금강무괴철에 풍오동을 섞어 제련하면 현철보다 더 뛰어난 기의 수용력을 보여준다.

금강무괴철, 풍오동, 혈해옥 이 세 가지로 적광검을 만든다면 전생에 봤던 것 이상의 물건을 볼 수 있을 터.

“현철은 제가 쓰기에 너무 과분한 물건입니다. 제겐 금강무괴철과 풍오동이면 충분합니다.”

“허허…… 무릇 무인이라면 무기에 더 큰 욕심을 낼 법도 한데.”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혁무강이 제갈소명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어떻습니까? 우리 어린 영웅이 그걸 바라는데. 보고에 물건이 있습니까?”

제갈소명은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어찌 보고에 있는 물건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지…….”

그러다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쉰다.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되었군요. 총군사께서도 덧붙이실 의견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혁무강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나를 바라본다.

“진소운 대표, 시상식은 사천의 일이 모두 끝난 후에야 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물건은 먼저 쓸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네.”

시상식이 중요한가. 물건이 중요하지.

정말 강호의 영웅다운 배포다.

나는 총군사를 흘깃 바라본 후, 재빨리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얼추 제갈소명 빼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자, 자연스레 담소를 나누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화제는 자연스레 사천의 이야기로 넘어갔고, 무림맹 내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몰랐던 나로선 궁금함을 채울 좋은 기회였다.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조용히 경청했다.

“다행히 독왕 그 늙은이와 청성의 말코가 나서주기로 했습니다.”

“다행이군요. 나서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저들 앞마당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나서야 하겠지요.”

무림맹으로선, 충분한 인력을 파견한 상태이기에 전투를 벌이는 데 문제는 없는 상황.

반면, 절대고수의 반열에 든 이의 숫자가 부족한 만큼 혈교의 강자를 어찌 상대할지가 무엇보다 난제였다.

다행히 사천의 절대고수들이 나서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되겠군.’

전생엔 적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시간을 오래 쏟아 대응이 늦어졌고, 사술이 얼마나 강력한지 몰라 피해가 막심했다.

거기에 더불어 철강시와 혈마라는 절대적 무력을 가진 존재들 때문에, 무림맹이 휘청일 정도의 사망자 수를 기록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현재는 피해가 전무하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의문입니다. 어째서 혈교 놈들이 동진을 멈춘 걸까요?”

“흠…….”

그 명석한 제갈소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제기한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정체가 모두 드러난 와중에 시간을 끌어봤자 그들에게 결코 유리하진 않을 텐데 말입니다.”

“일단은 주의하도록 이야기를 전해주는 게 좋겠습니다. 혹여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저…….”

여태껏 묵묵부답이던 내가 입을 열자, 모두 내게 주목한다.

“아까 말씀드려야 했었는데 말입니다.”

나는 예의 챙겨 온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이번에도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게 뭔가?”

보따리를 바라보는 혁무강의 눈에 의아함이 서린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게, 음. 혈교 소교주라는 자의 목입니다.”

“…….”

“……?”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 세 사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응?!”

북원평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허…….”

부지불식간에 공격당한 충격으로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맞이한 혈교 소교주의 얼굴이 튀어나오자, 세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마저 보고했다.

“그 아마…… 동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이자가 죽어서일 겁니다. 혈교 내부에서 꽤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거든요.”

사실은 혈해옥과 환상지를 잃어버린 탓이 더 컸겠지만, 굳이 그걸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이, 이자를 이렇게 만든 게 너라고?”

제갈소명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퇴각할 때 왠지 뒤에서 공격해 올 거 같아 미리 싹을 제거했습니다.”

제갈소명과 북원평이 차례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혁무강의 시선도 흔들리기는 매한가지.

“…….”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눈빛들.

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조용히 차를 홀짝거렸다.

호로록.

오, 역시나 맛있다.

혁무강이 자주 오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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