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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92화 (192/357)

192화. <과거로부터 온 전령(2)>

소정대 출신 중엔 무림학관 근처에라도 가본 놈이 없었다.

하자 있는 무공을 가지고 겨우 월봉이나 받아먹는 놈들에게 무림학관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나 다름없었으니.

동경하는 것조차 사치인 그놈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림학관 출신들을 극렬히 싫어하는 것뿐.

그중에서도 특히 심했던 게 야율재.

평소엔 말도 별반 없는 놈이 무림학관 출신만 보면 눈깔이 뒤집어지곤 했다.

그렇게 시비를 걸다가 상대가 가볍게 손을 쓰면, 반쪽짜리 무공으로 반격했다.

물론, 그 시비의 결말은 항상 야율재가 바닥에 쓰러져 모멸을 받는 것으로 끝이었다.

질리지도 않는지, 야율재는 매번 무림학관 출신들에게 시비를 걸어댔고 매번 뒈지게 맞았다.

분명 그랬는데.

녀석과 무림학관 사이엔 절대 연이 있을 수가 없어 보였는데…….

‘쟤는 대체 뭐지?’

야율재는 무림학관에 사문 사람이 들어갔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애당초 유운문의 무공은 일격 필살기가 없는 종류의 것.

무인을 꿈꾸는 이들이 선호하는 문파가 아니다.

거기에 무공까지 완성되지 않아 사문은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했다.

야율재도 반쪽짜리 사문의 무공을 완성시키기 위해 평생을 낭인 생활을 이어가다 무림맹에 들어왔다 했으니까.

힘도 없고 돈도 없는 문파가 정시를 치른다는 건 현시점에서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던…….

“야, 이 개새끼들아! 다 덤벼!”

부지불식간에 상념을 깨우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는 전방을 바라봤다.

덩치를 패대기친 작은 체구의 학관생은 다음 놈 나오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지켜보는 이들 중에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역시나 아직 반쪽짜리군.’

뒤쪽에서 패대기쳐졌던 덩치가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체구의 학관생의 어깨춤을 잡아당기며 다리를 툭 찼다.

털썩.

힘없이 자세가 무너지는 학관생.

퍽.

이어 덩치의 발길질이 학관생의 얼굴에 꽂히고 학관생의 얼굴은 금방 피범벅이 되었다.

‘이럴 게 아니군.’

나는 내공을 끌어올려 가볍게 살기를 쏘아냈다.

“!!”

주변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이들이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경고했다.

“그만하지?”

덩치도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놈을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저 표정.

뭐, 애당초 이해시키려고 했던 말도 아니고.

나는 파리 쫓듯 놈의 면전에다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좀 꺼져 주겠나?”

빠득-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오며, 놈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말이 심하군, 진소운.”

그때, 지켜보던 이들 중 산동악가의 옷을 입은 이가 입을 열었다.

악주평인가 했던 거 같은데.

“이건 개인적인 은원의 문제다. 상관 말고 그냥 가라.”

오호라, 저놈이 우두머린가 보네.

“흠, 설마 ‘개인적이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건가? 니들 수가 몇인데.”

나는 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한껏 과장되게 이마를 ‘탁’ 쳤다.

“아! 악가에선 글공부를 안 가르친다 했었지!”

놈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오른다.

“감히 가문을 욕보이는 것이냐!”

“이제 너랑 나 사이에도 개인적인 은원이 생긴 거군. 그렇지?”

“…….”

“학관 대표로서 이런 꼬라지는 그냥 보고 넘길 수 없다.”

나는 놈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자신 있으면 드루와 한판 붙든지, 아니면 꺼지시고.”

내 말에 놈이 피식 웃는다.

“아직도 자신이 학관 대표라고 생각하나?”

이 새끼 봐라? 끊임없이 앵앵대네?

이래서 멍청한 것들은 말로 타이르면 안 된다니까.

나는 귀를 후비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아, 좀 꺼지라고 새끼들아!”

이내 살기를 폭사시키자 놈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선다.

“……이익!”

뒤늦게야 자신들이 물러섰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놈들.

입술을 질겅질겅 짓씹던 악주평이 홱 하니 돌아섰다.

“가자.”

멍청한 대장 놈이 깨갱 하며 한발 물러서자,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놈들도 나를 한 번씩 노려보고는 그를 따라 반대편으로 가버렸다.

“쯧. 하여간 곱게 말로 하면 안 들어먹어요.”

혀를 찬 나는 여태껏 두들겨 맞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여나 야율재와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닐까 살펴봤지만 그와는 인상이 전혀 다르다.

유일하게 같은 점이라곤 옷에 새겨진 문파의 상징인 문양이 똑같다는 것 정도.

“이봐, 괜찮나?”

어깨를 흔들자 몸을 웅크린 채 머리를 보호하던 학관생이 번쩍 눈을 치켜떴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더, 덤벼! 덤벼, 이 새끼들아악!”

그러곤 곧장 전투 태세를 취한다.

깡 하나는 타고났네, 타고났어.

“놈들은 갔다. 그만해라.”

“……갔다고?”

그제야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학관생.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곤 놈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려 했다.

“너, 유운문 출신…….”

“이 새끼들, 어디 갔어!”

“…….”

그러나 흥분한 놈이 눈알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본다.

“내가 쫓아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고…….”

“쫓아냈다고?”

작은 체구의 학관생이 몸을 부르르 떤다.

“네가 뭔데 그 새끼들을 쫓아내! 조금만 더 하면 참교육시켜 줄 수 있었는데!”

“…….”

근데, 이 새끼고 저 새끼고 글공부를 하나도 안 했나 보다.

‘참교육’이란 단어를 참 이상하게 쓰네?

“당장 그 새끼들 데려와! 데려오라고!”

아니, 쫓아낸 놈들을 어떻게 데려오냐고.

“그럼 네가 그놈들 대신 맞아라!”

작은 체구의 애새끼가 내 손을 잡더니 유운신공 설화(雪花)를 펼치려 한다.

연화가 반격기라면 설화는 공격기.

상대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기운을 극대화하는 것이 묘리이건만, 작은 체구의 애새끼는 그런 것도 모르는지 억지로 내 손을 비틀려 한다.

‘이 애새끼가…….’

선을 넘네?

더 이상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내공을 살짝 끌어올려 놈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메다꽂았다.

펑!

“커흑!”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먹은 걸 토해내는 애새끼.

이제는 말이 좀 통하겠지.

“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애새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 두고 보자! 진소운! 내가 반드시 복수할 테니! 뒤통수 조심해라!”

그렇게 말하곤 별로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쩔뚝거리며 도망쳤다.

“하!”

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결국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야율재와 뭔가 관련이 있는 놈이다.

아니, 아마도 형제일 것이 분명했다.

‘저 지랄 맞은 성격이 저리 똑같은 건, 핏줄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할 테니.’

왠지 모를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

나는 기숙사에 방문해 장우재를 찾았다.

소속이 없는 자들의 구심점인 장우재가 아마도 그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 그 독종 말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외형에 대해서 조금 설명했는데도 장우재는 금방 알아차렸다.

“유훈문? 유운문? 아무튼 그런 사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유운문 출신이라고?”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전 처음 들은 이름이라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아아, 나는 들은 적이 있어서.”

장우재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좀 특이한 친굽니다. 누구랑 어울리는 일도 없고, 술을 마시러 나간다거나 사적으로 외출하는 것도 못 봤습니다. 매일 시간을 쪼개어 수련을 하는 것 같은데,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게 늘지도 않는 것 같고요.”

“다른 이들이 소외시키는 건가?”

장우재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뭐, 백도회와 정도회, 12봉성들이야 원래 저희를 사람 취급도 안 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저희끼리는 그래도 잘 뭉치는 편입니다.”

“근데 왜?”

“그게…… 그 친구가 평소에는 워낙 말수가 없습니다.”

“……아까 그 독종이란 말은 뭐지?”

장우재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알을 굴린다.

“그게, 일전에 백도회 인원이랑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뭐, 큰 일은 아니었고요. 그 친구가 사과를 요구했는데 백도회 소속이었던 이가 그걸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죠.”

“그래서?”

장우재가 잠시 말을 멈춘 후,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답한다.

“그때, 그 친구가 돌로 백도회 소속 인원의 머리를…….”

하, 미친…….

하는 짓거리도 어디 누구랑 똑같다.

“그 이후에 백도회에서 단체로 그 친구에게 복수를 했는데. 그 친구가 상대를 하나하나 찾아가 또 해코지를 하고……. 그게 벌써 석 달째 이어지고 있는 중인 거죠.”

“가관이군.”

“더구나,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도 공격하는 통에……. 저희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고요.”

“역시나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고…….”

“네?”

“아, 아니야. 그냥 혼자 생각한 거야. 그런데…….”

장우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꾸 존댓말을 쓰는 거지?”

“아, 하하. 그냥 이게 편해서 말입니다.”

“…….”

“혹시 불편하십니까?”

“아니, 딱히 그건 아닌데.”

장우재가 주인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망울을 반짝인다.

“그럼 앞으로 계속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겠지요?”

“뭐,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장우재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미처 묻지 않았던 질문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이름이 뭐였지?”

“이름이요? ……아! 특이한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하다고?”

장우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네. 야율극이라고 하더라고요.”

“…….”

거봐, 내 말이 맞다니까.

뇌 대신 객기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그놈은, 야율재의 혈육이 분명하다.

#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겨난다.

어째서 야율재는 자신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일까?

말이 없는 친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꽁꽁 숨기는 녀석도 아니었다.

돈 없는 사문, 반쪽짜리 무공.

야율재는 젊은 시절 이 두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낭인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독문무공을 완성하는 가장 빠른 비결이 실전을 많이 치르는 것이듯, 야율재는 가난한 사문에 돈을 보냄과 동시에 유운신공을 완성하려 했었다는 것.

하지만 독보강호행을 성공적으로 마쳐 결국 무공을 완성했다는 동화같은 이야기는 혁무강 같이 특별한 존재들에게나 가능한 것.

내 사문의 선배들이 그랬듯, 야율재 또한 결국 반쪽짜리 무공을 완성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들어 온 곳이 무림맹 소정대.

모순적이게도 모든 걸 다 포기했을 때 야율재는 결국 유운신공을 완성했지만, 그때는 이미 정마대전이 일어난 지 한참 후.

유운문이 풀뿌리까지 모두 뽑힌 지 칠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결국 완성이 되어버리다니.]

야율재는 무공을 완성한 자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괴로워하며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거지? 두 사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건가?’

어쨌든 야율극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녀석을 찾았다.

전생의 이야기대로라면 야율재는 지금쯤,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낭인 생활을 접고 폐인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야율극을 통해 야율재에게 완성된 유운신공을 전해줄 수 있다면, 녀석의 현생도 조금은 변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학관의 교실, 녀석이 묶고 있는 8인실 기숙사 어디에서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백도회 놈들에게 또 맞고 있는 건가?’

결국 녀석을 찾는 걸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뒤에서 뭔가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피해냄과 동시에 날아드는 그것을 손으로 잡아챘다.

‘짜, ……짱돌?’

손안에는 여러모로 날카로운 각이 진 짱돌이 들려있었다.

“허…….”

어이가 너무 없어,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새끼가!”

당황한 표정의 야율극이 미친 듯이 몸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면서도 입은 열심히 놀린다.

“지, 진소운! 밤길 조심해라!”

저번에 뒤통수 조심하라는 말을 남긴 후 짱돌을 날렸으니, 이번엔 밤에 습격이라도 하겠다 이건가.

“누가 야율재 혈육 아니랄까 봐.”

야율재가 동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아마도 사이가 극히 안 좋아서일 게 분명했다.

본래 성격 더러운 인간은 자신과 같은 성격을 가장 싫어한다고 하지 않던가.

일종의 자기혐오라고 하던가?

“이건 뭐, 도움을 주려 해봐야 골치만 아파지겠군.”

아직은 놈과 대화할 때가 아닌 듯했다.

나는 놈을 쫓는 걸 포기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

“헉, 헉, 헉.”

한참을 도망쳐 건물 뒤편으로 들어선 야율극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진소운이 쫓아오는지 살폈다.

다행히 쫓아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헹! 거보라지! 이제 내 습격이 무서워서 잠도 못 잘 거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던 야율극이 서서히 웃음을 거뒀다.

“극아, 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야율극은 자괴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진소운은 전설적인 존재다.

백팔봉 소속이라곤 하지만 유운문과 비교해도 하등 보잘것없는 문파 출신.

그런 상황에서 사제들만 데리고 정시를 치러 수석을 쟁취했다.

반면 자신은 형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학관까지 왔지만, 무공을 완성시킬 생각을 하기는커녕 매일 쌈박질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안 오겠다 한 건데.’

일찍이 반쪽짜리 무공을 완성시키겠다 강호에 나선 큰형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며 학관에 넣어주었다.

정시를 치르면서 둘째 형이 죽고 셋째 형이 불구가 되었다.

큰형은 전혀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 매진하라 이야기했지만 그게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그래도 형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죽어라 노력한 결과,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할 수 없다.’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이대로 눈을 감아버렸으면 좋겠다고.

다시는 내일 뜨는 태양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진소운이 싫었다.

너무나 빛이 나서.

너무도 커 보여서.

강자들의 앞에 당당히 서는 모습이.

어떤 문제가 닥치든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경멸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경멸의 화살이 방향을 틀어 제게로 날아온다.

‘아니야……. 경멸스러운 건 나 자신이겠지.’

하지만 이제 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뒤로는 둘째 형의 죽음과 셋째 형의 잘린 팔이, 앞으로는 넘을 수 없는 단단하고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다.

“언제쯤 둘째 형을 보러 갈 수 있을까…….”

오늘따라 유달리, 부드럽게 웃던 둘째 형이 떠올랐다.

그는 상념을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밤에 기습하기 위해선 지금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때.

“여기 있었군.”

등 뒤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음성에 고개가 번쩍 들린다.

악주평.

이 악연의 시작이었던 놈.

그의 주변엔 늘상 붙어 다니는 백도회 놈들이 주르륵 서 있다.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숫자.

“씨발 새끼들. 치사하게…….”

“걱정 마라. 널 상대하는 건 한 놈씩이니까.”

“조까!”

주먹감자를 먹인 야율극이 놈들이 나타난 반대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해 골목에서 튀어나온 발길질에 몸이 붕 떠올랐다.

콰당.

“커흑.”

얼마나 강하게 찬 건지 내부가 울렁거린다.

악주평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는다.

“진소운과 무슨 관계지?”

쪼그려 앉은 악주평이 지그시 바라본다.

놈도 진소운은 두려운 모양인가?

“그게 왜 궁금하지?”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서 말이야. 네놈이 진소운과 관계가 있다면 체벌은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지.”

진소운의 이름을 팔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말인가?

“풋.”

“웃어?”

야율극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조소를 집어삼켰다.

경멸하는 놈의 이름을 팔아야 할 정도로 추해진 건가?

“내가 왜 진소운 같은 놈이랑 관계를 맺지?”

“…….”

살쾡이처럼 번뜩이는 야율극의 눈빛.

악주평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그거 다행이군. 나도 네놈 짓밟는 걸 미루자면 영 찝찝해서 말이야.”

악주평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둘째 형과는 정반대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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