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과거로부터 온 전령(3)>
무림학관은 사천 사태에서 부상당한 인원들을 배려해서 보름간 잠정 휴식기에 들어갔다.
덕분에 그간 무리를 해왔던 우리 일행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할 일이 없던 나는 그간 미뤄두었던 수련에 다시금 매진했다.
“다시 봐도 이해가 안 가네. 무슨 검법이 이 난리람.”
세상에 사람들의 수만큼 특이한 무공이 많다곤 하지만 백월제천삼식은 그중에서도 특히 유별나다.
세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단지 세 개의 초식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초식을 이루는 요소가 규칙성을 띤 동작의 연결이 아닌 움직임 그 자체이기에 어떤 동작이든 초식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정확하게 초식을 따라도 초식이 아닐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유운신공이랑 비슷한가?”
유운문의 무공이 반쪽짜리란 놀림을 받긴 했지만, 이는 태을문의 것처럼 무공이 소실되거나 실전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무공은 온전한 데 반해 그것을 직접 익히는 법은 글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선대의 어느 지점에서 유운신공의 전달이 끊겼고, 온전한 가르침이 없는 유운신공은 반쪽짜리 무공으로 전락해 버린 것.
“그나마 나는 백 사부의 동작을 상세히 기억하니 혼자서 수련이 가능한 거지.”
본래 유운신공과 같은 무공은 혼자서 익힐 수가 없다.
야율재가 실전으로 무공을 완성시키겠다 생각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너무 늦게 완성시키긴 했지만, 결국 그의 생애에 무공이 완성되긴 했다.
모용재화에게 그랬듯, 야율재가 전생에 목숨을 걸고 완성시킨 무공을 야율극에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아! 몰라! 그 애새끼가 싸가지 없는 걸 날더러 어쩌라고!”
상념을 털어낸 나는 다시금 수련에 집중했다.
백월제천삼식의 일(一) 초식의 묘리가 극쾌(極快)라면, 이(二) 초식의 묘리는 완벽(完璧)이다.
공격기보단 방어기에 가깝지만, 앞서 말했듯 방어에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얼마든지 공격기로 변할 수 있는 초식이란 뜻.
“정확히 말하면 방패로 때리는 개념이지.”
이는 내가 생각해 낸 표현이 아닌 백해광의 비급에 쓰여있는 내용이다.
[방패로 막고 방패로 때려라. 그럼 따로 검을 뽑을 필요 없다.]
검막을 이따위로 서술하는 인간은 천하에 검마밖에 없을 것이다.
비약이 좀 심하긴 했지만, 이(二) 초식 완벽(完璧)은 뒤로 물러나는 검막이 아닌 나아가는 검막이다.
검마의 성향이 무공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백월제천삼식의 비급을 계속 읽어나갔다.
[막에는 틈이 있어선 안 된다. 흑도의 암기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막은 금강석처럼 단단해야 한다. 산동악가의 패도는 막은 상대를 날려버릴 버릴 정도로 강맹하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의 실전을 통해 만들어 낸 검식답게, 비급은 난해한 문자 없이 직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안에는 간간이 자신이 경험했던 고수들과의 일전도 적혀있었고, 자신이 결국 패배한 비무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혀있었다.
그 서술이 너무도 상세하고 자세하여, 실제로 보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으로 상대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좋아. 시작해 볼까!”
차분하게 머릿속에 정리된 글자들을 그림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틈부터 메꾼다.’
상대는 암귀라 불리는 전대 흑도 고수.
암기 세계에서 흔하게 쓰이는 우모침을 귀신같이 쏟아내는 상대다.
머릿속으로 만들어 낸 암귀를 현실에 그대로 가져다 놓는다.
본래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는 일(一) 초식을 익혔던 것처럼 심상비무를 치러야 하지만, 그건 너무 고통이 심하고 부작용도 강하다.
당장 내일 이(二) 초식을 써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차근차근 나아가는 게 더욱 중요한 법.
스르릉.
흑룡검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흑색의 검신을 드러낸다.
암귀는 양손을 소매 안에 넣은 채 느긋하게 날 기다리고 있다.
나는 기수식을 펼친 후 곧장 백월제천삼식의 이(二)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공기를 가르는 검의 소리가 점차 날카로워진다.
이윽고 검극을 따라 허공에 궤적을 남기던 검기가 촘촘한 그물망처럼 변한다.
쉬익- 쉬익-
촘촘한 그물망 사이로 다시금 검기가 궤적을 남기고, 이제 그물망에는 조금의 틈조차 남아있지 않다.
분명 그렇게 보였다.
“으아아악!”
벌써부터 근육이 심하게 땅겨오고 온몸에선 땀이 쭉 샘솟는다.
일 장 넓이의 커다란 검막은 그대로 암귀를 집어삼키려는 듯 그를 덮친다.
그때, 암귀가 소매 속에 넣어둔 손 한쪽을 슬쩍 꺼내어 휙 하고 휘두른다.
순식간에 쏘아진 우모침.
완벽해 보이는 검막 앞에, 세 개의 우모침은 속절없이 막힐 듯 보였다.
하지만.
쒜액-
어느새 우모침 세 개가 요혈을 노리고 검막을 파고든다.
‘실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다.’
분명 검막의 틈을 완벽하게 막았다고 생각했건만, 암귀는 그 빈틈을 찾아내 우모침을 격침시켰다.
‘다시.’
그렇게 스물세 번의 비무를 반복했지만, 나는 오 초식을 채 넘기지 못했다.
“허억, 허억, 허억.”
몸을 직접 움직인 탓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二) 초식을 펼치는 것 자체가 워낙에 고되어 금방 숨이 찬다.
거기에 심상비무까지는 아니지만, 상대를 뚜렷하게 그려야 하는 데에도 심력 소비가 꽤 커서 머리에 불이라도 붙은 기분이었다.
“어이구, 힘들다…….”
나는 더운 숨을 내뱉은 후,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비무를 복기했다.
분명 빈틈이 없어 보였던 검막.
그리고 이를 뚫어낸 암귀의 우모침.
“……검이 지나간 궤적의 틈을 노리다니, 과연 괴물은 괴물이구나.”
이런 괴물 같은 존재도 결국 천명을 모두 누리지 못하고 죽은 걸 생각해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는 침잠하려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급해하지 마라. 이제껏 잘 걸어왔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가면 된다.”
그렇게 잠시 맑은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급해하지 마라. 이제껏 잘 걸어왔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가면 된다.”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목소리.
“…….”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니, 금은동 형제가 어느샌가 뒤에 와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냐?”
은호가 팔을 뻗어 손바닥을 쫙 폈다 주먹을 꽉 쥐더니, 목소리를 내리깐다.
“조급해하지 마라. 이제껏 잘 걸어왔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가면 된다.”
의미심장하게 대사를 내뱉던 은호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린다.
“……라는 이야기를 하실 때 도착했습니다.”
“…….”
요즘 내가 이놈을 조금 덜 팼었지, 아마?
나는 주먹이 근질거려 녀석들을 노려보다가, 조금 놀랐다.
가만, 놈들에게 가르쳐 준 귀식행보의 성취가 벌써 이만큼까지 오른 것인가?
나도 모르게 대견해하고 있을 때, 은호의 목소리가 다시금 끼어든다.
녀석은 포권까지 쥐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사형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니. 놀릴 생각이면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마라.”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뭐야, 저 표정은.
녀석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 보여서, 결국 나는 질문을 허락했다.
“……뭔데?”
“혹시 사춘기 오셨습니까?”
“…….”
방금의 공손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사탕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눈이 반짝거린다.
“혹시 막 어른들한테 반항하고 싶고, 뭔가 스스로가 비밀을 감춘 악의 존재가 된 것 같고 그러십니까?”
“…….”
“아니면 정의를 수호하고 협의를 실천하는 영웅이 될 거 같은 기분이 드십니까?”
이야, 진짜 요새 좀 덜 맞았나 본데.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막 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고, 손을 펴면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올 것 같…….”
“……은호야.”
“아! 대사형, 다 이해합니다. 저희도 다 겪었던 거거든요. 금표 형은 담벼락 위에서 허공답보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어!”
백월제천삼식의 일(一) 초식 극쾌가 호쾌하게 손에서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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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금·은·동 형제가 사 온 간식거리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시장엔 무슨 일로 다녀온 것이냐?”
“동룡이 검에 또 금이 가서 말입니다.”
“으음?”
벌써 두 번째 바꾼 동룡이의 검.
동룡이는 과거 견성사자가 방문했을 때, 무림맹 하사품으로 검을 받았고, 정시 중간엔 남궁세가의 창궁검도 선물 받았다.
두 개의 검 모두 평범한 검과 비교해 좋은 검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동룡이에겐 여의치 않았나 보다.
‘그럴 수밖에. 워낙에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검을 쓰는데 검이 버텨낼 재간이 있나.’
보통 검은 찌르기와 베기의 균형이 맞도록 제작된다.
그렇기에 대부분 검극에 신경을 쓰고 검신 중앙엔 철심을 넣어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동룡이는 검신 전체를 자유롭게 쓰기에, 검에 작용하는 부하가 점점 심해지는 것이다.
나는 금·은·동 형제에게 일렀다.
“일단은 학관에서 나오는 보급품을 쓰도록 해라. 한번 금이 간 검은 언제 부러질지 모르니.”
“일반 청강검 말입니까? 그건 동룡이 손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요.”
“괜찮다. 일단 임시로 쓰고 있으면 곧 다른 검을 구해다 주마.”
“다른 검이요?”
만통부를 통해 받은 금강무괴철과 풍오동, 혈해옥을 왕가장의 표국에 의뢰해 태을문으로 보냈다.
대장간이 완성되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전에 미리 장도원이 재료들에 조금이라도 친숙해지길 바라서다.
그 시간이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적광검이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할 시기가 더 당겨지겠지.
그리고 흑룡검을 동룡이에게 주면 다시는 검을 바꿀 일이 없을 것이다.
다른 부분은 다 제외하더라도 강도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금강무괴철로 만든 흑룡검이 동룡이에게 잘 어울리겠지.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어라. 보급품으로 쓰는 검이 부서지면, 시장에서 청강검을 새로 사서 쓰도록 하고.”
“네…….”
동룡이는 왠지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뛰어나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난 되려 돈을 쓰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정말요?”
금세 강아지처럼 좋아하며 미소 짓는 동룡.
그렇게 오랜만에 사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똑똑똑.
“진 대표님, 저 장우재입니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 내실로 들어온 장우재는 금·은·동 형제와 인사를 나눈 뒤 나를 바라봤다.
그와 약속 같은 건 잡은 일이 없는데?
“어쩐 일이야?”
“……그, 야율극 그 친구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금·은·동 형제를 내보낸 후 장우재와 독대했다.
“대표님이 가신 후에 제가 야율극을 계속 지켜봤습니다.”
딱히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장우재는 스스로 일 처리를 해주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아주 잘 본 모양이군그래.
흡족해하는 나와 달리, 장우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근래에 들어 야율극 그 친구 상태가 영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다고?”
“네……. 그래도 이전까지는 적어도 얼굴엔 상처가 없었는데, 요즘 들어 얼굴에 상처도 계속 늘어나는 데다, 말수도 많이 줄었고요.”
그때 이후로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 악주평이 독심을 부린 건가?
“이전 같으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대뜸 욕부터 내지르던 친구가, 이제는 입을 다물고 수업시간에도 고개만 숙이고 있습니다.”
“…….”
“제가 사흘 전쯤 자세히 묻다가…….”
장우재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이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옷 소매를 당기면서 옷 안쪽을 슬쩍 봤는데…… 피부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아…….”
북방에서 군 생활을 했던 좌대기가 말하길, 군대의 폭력이 짧고 깔끔한 반면, 무인들의 폭력은 집요하고 질척여 더욱 두렵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무공을 공부하면서 인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는 만큼, 어떻게 하면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는 군인보다 무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야율극은 지금 어디 있지?”
“이틀째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우재도 곧바로 따라 일어선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가서 만나봐야지.”
빌어먹을 애새끼.
지 형이나 그놈이나 사람 애먹이는 게 왜 이리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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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八)인 기숙사에 들어가자, 임시 휴강 덕에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학관생들 사이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흑염룡이다!”
“진소운이 팔인 기숙사에는 왜?”
“여긴 맨날 같이 다니는 이들이 있는 곳도 아닌데?”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야율극의 방으로 들어섰다.
“헙!”
“뭐, 뭐야!”
방안에 있던 야율극과 같이 방을 쓰는 학관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방 안을 휘휘 둘러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별거 아냐. 누구 좀 만나러 왔어. 야율극 여기 있지?”
“응?”
“그 또라이는 왜……?”
“여기 있다는 거 듣고 왔어.”
침상 한쪽에서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있는 녀석을 보곤, 다가가 확 이불을 젖혔다.
곧바로 들려오는 당황이 어린 목소리.
“뭐, 뭐야?”
“엥?”
이불 안에서 울고 있을 거라 예상한 바와 달리, 처음 보는 얼굴이 나타났다.
“뭐야, 넌 누구냐?”
“……그건 내가 할 질문 아닌…….”
휙-
다시금 이불로 놈의 얼굴을 덮어버리곤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한 녀석이 조심스레 알려준다.
“걔 자리는 여기야. 그리고 어제부터 안 들어왔어…….”
“안 들어왔다고?”
“응.”
야율극이 사용한다는 자리를 살펴보았다.
다른 학관생들의 옷장과 사물함에는 이런저런 사제 용품들이 가득했지만, 야율극의 자리에는 오로지 학관에서 받은 물건들만 있었다.
그마저도 오래 썼는지 다 닳고 헤진 것들이 대부분.
‘개방도들도 이 정도로 없이 살진 않는데.’
있는 것이라곤 보급품으로 받은 무복 몇 벌과 기본적으로 지급받는 청강검뿐.
그 외에는 마땅한 물건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겨우 다잡았다.
“야. 얘, 물건도 빼앗기고 다녔냐?”
“…….”
야율극의 자리를 알려준 학관생을 보고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야율극이 괴롭힘당하고 있다는 거 이미 알고 있다. 혹시 니들도 거기에 동조했냐?”
“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아무튼 물건도 뺏겼어, 안 뺏겼어?”
학관생이 우물쭈물하며 답한다.
“뺏기진 않았을 거야.”
“그건 무슨 소리야.”
애매한 답변에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애당초 가진 게 없었으니까.”
“……응?”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들려온다.
“뭐, 우린 매일같이 생활하니 알잖아. 얼마나 돈이 없는지. 난 걔가 학관 밖으로 나가는 것도 못 봤어.”
유운문 사정이 힘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돈도 없다는 건 몰랐던 사실이다.
이거 예감이 영 좋지 않다.
“최근에 얘 이상한 점 있었어?”
“…….”
“아무거나 말해도 돼.”
“……뭐, 백도회 애들한테 맞고 다닌 건 알 거고.”
대답을 하던 학관생이 볼을 긁적였다.
“그저께 밤에 갑자기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더라고.”
“사과?”
“어, 내가 가끔 시장에 나가면 간식 같은 걸 사 와서 걔 서랍에 넣어뒀거든.”
“근데?”
“그럼 그걸 발견하고 나한테 던져버리더라고.”
“진짜 미친 새끼네.”
별일 아니라는 듯, 학관생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뭐, 그렇지. 암튼 이상해서 왜 그러냐 물어봤더니 자기 둘째 형이 시켰다고 하더라고.”
“둘째 형??”
“잠결에 들은 거라 잘은 기억 안 나.”
두 사람 사이에 형제가 더 있었나?
근데 학관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놈이 둘째 형한테 이야기는 어떻게 들었다는 거지.
“너 이름이 뭐냐?”
“나? 갑자기 왜?”
“그냥.”
“남을용.”
“신의방 남을용?”
오, 훗날 강남 십권 안에 드는 남을용이 학관에 다닐 때는 팔(八)인 기숙사를 썼던 건가?
“나를 아나?”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음, 학관 대표니까?”
나는 녀석이 또다시 의문을 표하기 전에, 품에서 금전 열 냥을 꺼내 건넸다.
“절반은 너 가지고, 절반은 예전처럼 그 미친놈 챙기는 데 써줘. 계속 거부하면 나머지 돈도 네가 가지고.”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는 그때, 의아함이 서린 음성이 들려온다.
“……야율극하고 무슨 사이야?”
우뚝.
나는 문손잡이를 돌리려다 말고 멈춰 섰다.
사이, 무슨 사이…….
방대한 기억의 바닷속에서, 악에 받친 얼굴로 내 앞을 막아서던 야율재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미소가 새어나온다.
“내가 그 새끼 형한테 은혜를 좀 입었거든.”
보은하기 졸라 어렵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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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를 나와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야율재는 형제에 대해선 따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둘 이상의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멸문한 문파지만 유운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자주 자랑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소정대원들이 망해버린 문파라고 놀렸고, 싸움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랬던 인간이 다른 동생은 그렇다 치고, 왜 학관에 들어간 동생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야율재의 이야기와 야율극의 현 상황.
그간 야율극이 견뎠을 답답한 상황에 그가 남을용에게 남긴 말까지.
하나하나 조각들을 모아 조합하다 보니,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시발……!’
내공을 급히 끌어올려 두 발에 보내었다.
펑.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천하독행신을 전력으로 펼쳤다.
‘빌어먹을…… 왜 이리 안일하게 생각했지?’
내 불온한 예상이 맞다면,
야율극은 죽는다.
아니, 어쩌면 벌써 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