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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97화 (197/357)

197. <학관에 방문한 불청객(2)>

“어, 어떻게…… 네가 연화(蓮花)를…….”

야율극은 처음으로 제 나이대에 어울리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연화?”

나는 모른 척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쓴 연화는 제갈삼식으로 변환한 상승식이니까.

“이화접목의 술을 이야기하는 건가?”

“……연화가 아니라고?”

“아니다.”

눈초리에 의심의 기색이 진하지만 지가 뭐 어쩔 건가? 내가 아니라는데.

유운문이 이화접목의 술을 독점한 것도 아니고.

“더 안 덤빌 거냐? 역시 내 말대로 네놈이나 네놈 형제들이나 하등 쓸모없는 존재들이었나?”

“…….”

야율극이 다시금 악에 받친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네놈만…….”

“응?”

“어째서 네놈만 사형제들을 다 데리고 온 것이냐!”

놈이 이토록 내게 발작하는 이유.

“그것 때문에 내가 싫었던 거냐?”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다른 결과를 낸 나.

내가 빛날수록 녀석은 제 어둠이 더욱 짙게 느껴졌을 터.

“그 이유를 진정 모르는 것이냐?”

“이유?”

야율극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제 머리론 상상하지 못한 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표정.

“네놈이 못나서이지.”

“…….”

나는 녀석의 열등감이 오히려 기꺼웠다.

정말 자포자기했다면, 자신의 어둠에 잠식당해 모든 것에 무감해졌을 테니까.

“네놈이 못난 것을 왜 남탓으로 돌리는 것이냐?”

조금이라도,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있기에, 이토록 내게 분함을 느끼는 것이겠지.

“어디 한번 그 찌질함을 더욱 분출해 봐, 이 한심한 놈아.”

“으아아아악!”

그렇기에 나는 녀석을 계속 자극했다. 야율극이 자신의 어두움과 초라함을 활용해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야율극은 내공을 있는 대로 가져다 쓰며 덤벼들었다.

강뇌권법이나, 폭우장법을 쏟아붓지만, 애당초 비전도 아닌 무공들이 상대에게 유효하게 먹힐 리 없다.

타타타탁.

양손도 아닌 한 손으로 녀석의 무공을 무력화시키자,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녀석이 유운신공 설화(雪花)를 시전한다.

연화가 이화접목의 술을 쓰는 반격기라면, 설화는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둔 공격기.

작은 힘으로 상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야 하건만…….

“이건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녀석의 설화는 그저 손장난에 불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타악-

“으아악!”

손목이 꺾인 야율극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선다.

“위치력과 운동력을 이해하는 건 이화접목과 사량발천근의 기본이다.”

인상을 찡그리며 제 손목을 어루만지던 야율극이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공중으로 던졌다.

“으아아악!”

야율극은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자세를 잡으려 했다.

나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높게 올라간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위치력.”

퍽.

그리고 녀석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으윽.”

아래로 떨어진 야율극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두른다.

나는 녀석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는 동시에, 녀석의 발을 걸며 놈이 움직이던 방향으로 옷을 잡아당겼다.

“움직이는 존재가 갖는 힘은 운동력이다.”

퍼퍼퍽.

바닥을 쓸며 몇 바퀴나 돌던 녀석은 고통이 꽤나 심한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문의 무공이 이화접목과 사량발천근의 묘리에 집중되어 있다면 기본 개념을 배웠을 텐데. 익히지 못한 건가?”

“……씨익, 씨익, 씨익.”

야율극은 내 말 따윈 들리지 않는지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다.

녀석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 형에 그 동생이로군.”

녀석에겐 들리지 않게 작게 읊조렸다.

야율극도 그렇지만 야율재도 여간 괄괄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화접목의 술을 쓸 때 억지로 힘을 부여하고, 사량발천근을 사용할 땐 평소보다 몸에 더 힘이 들어간다.

제 성미만큼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다 보니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패도적인 무공이라면 효과가 있겠지만, 상대의 힘을 사용해야 하는 무공에선 효과가 있을 리 만무.

정마대전 말년에 결국 유운신공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매번 내공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싸워야 했기에 강제로 힘을 빼고 유운신공을 펼친 덕분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모순적이다.

‘힘을 좀 뺄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힘을 빼는 데에는 역시나 매가 제일이지 않던가.

물론 악주평처럼 무식하게 폭력을 가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내 목표는 그딴 놈의 목적과는 다르니까.

추궁과혈을 해줌과 동시에 내공 회복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계속 괴롭히다 보면, 녀석도 어느 순간 깨닫지 않을까?

더구나 나라는 훌륭한(?) 스승이 가르침도 줄 것이고.

세상에 이런 맞춤 교육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지간히 짜증 나는 형제라니까.’

야율극의 호흡이 여전히 거칠다.

“벌써 지쳤나?”

내 말에 녀석은 당장 눈이 돌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금 덤벼든다.

참으로 알기 쉬운 놈이다.

탁, 탁, 탁, 퍼펑.

강뇌권법과 폭우장법에 이은 연환식.

야율재도 지겹도록 사용했던 방법이었기에 눈에 익을 대로 익어있다.

여기에 살짝 반격을 가해주면.

텁.

역시나 곧장 유운신공이 들어온다.

“쯔쯧. 안 통한다니까.”

난 녀석의 연화를 되돌려 주며 녀석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퍼퍽.

“끄응…….”

이번엔 꽤 강하게 들어갔는지 놈이 몸을 비튼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이기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라. 이화접목이든 사량발천근이든 한낱 기술이 아니다. 묘리의 근원에 대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평생에 가도 네 사문의 무공은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야율극은 드러누운 상황에서도 나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다.

“…….”

마치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캬악캬악거리는 것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어쨌든 연화(蓮花)와 설화(雪花)의 단서를 보여줬으니, 또다시 포기하는 짓거리는 안 하겠지.

나는 녀석을 한번 비웃어 주곤 자리를 떴다.

“시, 시바! 진소운! 뒤통수 조심해라!”

하…… 저 새끼는 아직도 내 뒤통수를 노리고 자빠졌네.

#

다음 날 아침에 의복을 정제하고 전각을 나서자, 머리 위에서 기감이 느껴졌다.

“나 참…….”

야율극이 예의 모난 돌멩이를 쥐고 지붕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던 것.

“습격하기엔 학관에서 받은 검이 더 낫지 않나?”

당최 대가리 속에 뭐가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애당초 야율재의 성격도 이해가 안 갔으니, 동생인 이놈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다.

‘내뱉은 말을 안 지키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나.’

아무리 그래도 매번 뒤통수만 노리는 것도 여간 이상한 게 아니다.

나는 뒤로 살짝 물러나며 못난 사내들의 특기라는 돌려차기로 녀석의 복부를 때렸다.

퍽.

삼(三) 장 가까이 날아가 개인 연무장의 바닥을 구른 야율극은 속이 뒤집어졌는지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식물 대신 노란 위액만 쏟아낸다.

“쯧……. 아침도 안 먹고 온 것이냐?”

뭐, 어차피 내 쪽에서 찾아갈 생각이었기에 직접 찾아와 준 건 고맙긴 하지만,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둬줄 만큼은 아니었다.

“평화로운 아침을 보낸 후에 상대해 주려 했건만, 내 아침 일상을 방해하다니.”

만화무적권을 내지르며 전신에 추궁과열을 시전했다.

한마디로 몸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때려줬다는 의미.

“크흑.”

다시금 일(一) 장을 날아간 녀석이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몸에 이상을 느꼈는지 한 번 더 토악질을 한다.

이번엔 노란 위액이 아닌 검붉은 핏물.

몸 안에 장기간 쌓여온 울혈이 내장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빌어먹을…….”

보통 무인이라면 내상을 입은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주저할 법도 하건만.

입가를 한번 쓱──. 문대며 핏기를 지운 야율극은 다시금 기수식을 준비했다.

이어 섬전같이 나에게 뛰어든다.

‘오, 하루 만에 이렇게 회복한 건가?’

어제 추궁과혈을 좀 해줬다고, 혈맥이 조금 타동되었나 보다.

움직임 자체가 어제보다 훨씬 부드럽고 신속하다.

하지만──.

“유능제강! 유능제강! 이 멍청한 새끼야! 어제 알려준 걸 벌써 까먹은 거냐?!”

유운문의 무공의 묘리는 전혀 적용시키지 않은 패도적인 움직임.

나는 한숨을 삼키며, 한 손으로 유운신공 연화(蓮花) 상승식을 펼쳐 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으윽…….”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몸을 뒹군 탓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는지, 놈이 밟힌 지렁이처럼 한참을 꿈틀거렸다.

나는 놈을 살짝 즈려밟았다.

“무작정 덤빌 거면, 다른 무공을 쓰든가. 사문의 무공을 쓰려면 묘리를 살리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거 아니냐.”

“씨익── 씨익──.”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노려보는 야율극.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와라. 노려보기만 해선 내 뒤통수는 절대 깨지지 않는다.”

“으아아악!”

악을 내뱉으며 덤벼드는 야율극.

나는 이각이 지나기도 전에 녀석을 완전히 탈진시켜 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야율극.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안 덤빌 거냐?”

“……너, 너. 내가…… 유운신공만 완성시키면…….”

“걱정 마라. 내가 보기엔 넌 영 소질이 없으니.”

“이익!”

발작적으로 두 눈을 부라리지만, 그래서 지가 뭐 어쩔 건가.

누워서 숨을 쉬는 게 다인데.

“진소운님.”

그때, 전각에서 시비장이 나왔다.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식사는 친구분과 함께하시겠습니까?”

나는 야율극을 바라보며 물었다.

“먹을 거지? 대표가 쓰는 기숙사의 음식은 맛있기로 유명하거든.”

“……아, 안 먹어!”

어쩐지 얼굴을 붉히는 야율극.

뭐지?

“이 녀석이 들어가서 먹기 싫다고 하네요.”

시비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곳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시비장이 그렇게 말하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야율극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안 먹는다고!”

무슨 안 먹겠다는 말을 저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해 외치는 건지.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먹어라. 나는 네놈을 더 패주고 싶은데, 자빠져 있는 놈 때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개새끼!”

잠시 뒤 시비장을 필두로 세 명의 시비들이 쟁반에 간편하게 먹을 만한 음식들을 가져다 우리 앞에 내려주었다.

안 먹겠다고 버티던 녀석은 주변의 시비들이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자, 결국 한 숟갈을 떴다.

“!!!”

한 입만에 두 눈이 토끼처럼 커다래지는 야율극.

“맛있지?”

“……이런 건 내가 대표가 되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놈의 말에 나도 모르게 푸핫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하! 그 실력으로?”

“……!!!”

입을 꼭 다문 야율극이 나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떤다.

“유운문의 유운신공은 어떤 무공이든 받아칠 수 있다! 너라고 안 당할 거 같아!”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간다.

놈이 그간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았던 이유.

악주평에게 매일 맞으면서도 계속 덤벼들었던 이유.

놈이 가시 같은 방어기제를 날카롭게 세웠던 이유를.

‘이놈…….’

숭고한 자부심을 지키려 애를 쓴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거절하는 건, 형제 이외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

쥐어 터질 줄을 알면서도 계속 덤벼들었던 건, 자신을 위해 희생한 형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을 터.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쳐온 것이다.

놈의 의지력에 헛웃음이 나온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네.’

야율극은 나를 노려보면서도 음식들을 빠르게 비워낸다.

내게서 시선은 떼지 않은 채, 나보다 더 빨리 먹기 위해 식기를 빠르게 움직인다.

탁.

“자, 잘 먹었습니다.”

그러곤 시비들에게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는 다시 나를 쳐다본다.

“언제까지 먹을 거지?”

이 새끼…….

왜 나한테는 여전히 그 싸가지 없는 눈빛인 건데?

엄연히 대접한 건 나이건만.

하여간 다방면으로 교육이 필요해 보인다.

“넌 뒈졌다.”

수련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인성 교정이 먼저다.

아니 왜, 야율재도 계속 맞다 보니 나중엔 유해지지 않았던가.

이미 검증된 방법이란 이 말이야.

#

야율극에게 삼시 세끼를 다 대접하고, 이후 곧장 먹은 것들을 다 토하게 만든 나는, 하루를 마치고 저녁 약속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곧 다시 시작할 학사 일정에 대비하여 대표단을 꾸릴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일단 장우재 한 명.’

총 네 자리의 공석 중 한자리가 채워졌고 세 자리가 남은 상황.

그리고 그 세 자리 중 한자리가 예상치 못하게 채워졌다.

‘남화성이라…….’

생각지도 못한 녀석이 등장했다.

만약 내부 사정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면, 철순직이 직접 올 거라 생각했건만.

‘애당초 그 인간이 누굴 믿고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화성이 대표단에 지원했다.

지원한 의도가 뭔지 물으려 몇 가지 질문을 했건만, 녀석은 그저 ‘그냥 하고 싶었다. 문제 있나?’, ‘왜 난 대표단 간부를 못 할 거 같나? 난 그렇게 무식하지 않다.’ 등의 말로 얼버무리기만 했다.

“수상하긴 하지만, 애당초 대표단을 꾸릴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견제는 하더라도 최소한의 협력만 해준다면 나로서도 그다지 손해 볼 게 없는 상황.

“나머지 두 자리만 채우면 대표단도 본격적으로 출범할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무한의 유흥가는 다른 지역 유흥가에 비해 병기를 찬 무인들이 많다.

덕분에 시비가 걸릴 일도 많고.

나는 살짝살짝 태을판만신보의 묘리를 이용해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갔다.

‘어라?’

그런데, 한 사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분명 환영을 뿌리고 빈공간으로 파고들었건만, 사내가 어느새 내 앞을 다시금 막고 선 것이 아닌가.

이는 명백히 의도적인 행동.

고개를 드니 거구의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진소운이 맞는가?”

‘역시나…….’

사내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감찰각에서 나왔다. 따라와라.”

사내가 우악스럽게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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