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학관에 방문한 불청객(4)>
대표 간부단 회의는 그럭저럭 진행되었다.
“형산파에서 이번 행사를 주관해 주기로 했답니다.”
은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관이라니? 술사들만 파견해 주는 게 아니라?”
“네. 직접 파사(破邪)와 제령(制靈)에 관한 교육과정을 제공하겠다고 해왔습니다.”
술사를 파견해 달라 요청했을 때도 일정상 문제로 올해 말이나 돼야 시간이 나는 술사들을 보내줄 수 있다 했는데.
행사를 주관하고 교육과정까지 제공한다면, 최소 무림맹에 버금가는 커다란 행사로 진행해야 할 터.
하나 얻을 것 없는 무림학관의 행사에 형산파가 갑자기 이리 공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딱히 이유는 언급하지 않길래 저도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흠……. 뭐, 좋은 일이긴 하다만…….”
마령고원 사태 때 형산파와 좋은 인연을 맺어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움직일 만큼은 아니었다.
갑자기 이들이 이리 움직이는 이유가 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진 공자 때문 아닐까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성모란의 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듣기로 이번 사천의 일로 형산파의 복마부가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고 들었거든요.”
“네?”
“어쩐 일인지 자체적인 파사와 제령 방법이 있는 무림맹도 복마부를 급히 구했고, 그 때문에 강호의 무인들이 하나둘 복마부를 필수적인 호신용품으로 사들이면서 가격이 몇 배나 더 올랐다고 해요.”
“아…….”
한마디로 돈벼락을 맞아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뭐, 노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형산파가 내 덕을 본 거 아닌가?
제대로 뽑아먹어야겠군.
“우리로선 잘된 일이군요.”
“그렇죠.”
어쨌든 형산파가 행사를 주관해 준다면 이번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도회가 아니더라도 사천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듣다 보면 절로 파사와 제령에 관심이 생길 테니까.
“저…… 진 공자님.”
남궁선화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네.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 관련해서…….”
말을 흐리는 남궁선화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이번 행사 이후에 치러질 ‘명사 초대’.
무림의 이름 높은 명사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다른 학관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앞서, 남궁선화는 자신만만하게 창제신검을 초대하겠다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나 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제 겨우 남궁세가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창궁운위검법을 새로이 창안하면서 방계의 세력을 꽉 부여잡은 창제신검 남궁태하.
하지만 그 이야기가 제왕적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더구나 현재 무림학관에는 남궁기표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방계 인물들과 그들을 따르는 문파의 제자들이 남궁선화와 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
아마 저쪽에서도 ‘명사 초대’에 창제신검을 초청했을 테고, 몸이 하나뿐인 창제신검은 양쪽 모두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확답은 하지 않으셨으니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정 안되면 제가 세가에 한번 다녀오도록 할게요.”
어차피 안 될 일은, 억지 부린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한발 물러서야 하는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한 법.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신검님께 더 이상 부탁을 드린다면 부담을 지우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했음에도 남궁선화는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더욱 추켜세웠다.
“더구나 선화 소저도 대표단으로서 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제게는 무척 중요한 존재이죠. 이 일로 세가까지 다녀오는 건 시간 낭비라 생각합니다.”
“……네.”
이해한 듯 살짝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표정.
아마도 몇 번 더 요청을 할 모양이었다.
‘그것까지 막을 순 없지. 혹시 신검님께서 와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명사 초대’는 나에게 있어 가장 까다로운 행사가 될 거다.
다들 최소 무림맹의 각주 이상의 인물들이 오기를 기대하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대천상단의 상단주를 초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어딘가 숨어 잘 움직이지 않는 인물을 초대해야 한다는 건데…….
‘당장 새 학기의 첫 행사보다 두 번째 행사가 더 까다롭겠군.’
나는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회의를 마저 진행시켰다.
다음으로 성모란과 홍사련이 차례차례 현안들의 처리 상황을 발표했다.
그리고 장우재가 입을 열었다.
“일단 대표단에서 일할 만한 친구들을 추려봤습니다.”
서류에 빼곡히 쓰여있는 이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일할 사람들은 왜?”
내가 되묻자 오히려 장우재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다.
“왜라니요……. 지금은 대표님 혼자 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서류 처리라면 문제없이 되고 있을 텐데?”
장우재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문제없이 되고 있는 것이 문제 아닐까요?”
“…….”
“현재 대표단이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대표님 한 사람의 뛰어난 능력에 기반한 것 아닙니까. 이번과 같이 대표님이 부재중일 경우, 대표단 존속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긴, 사천에서의 일이 워낙 컸기에 임시 휴식기에 들어간 것이었지, 혈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터.
“절대적인 인원 자체가 부족하긴 하지만, 대부분 상단이나 관리 쪽의 자제들인지라 업무처리를 배워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흠, 생각보다 더 똘똘한 녀석이었네.
내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장우재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린다.
“그리고 차츰 인원을 채워가며 대표단을 제대로 꾸리는 일도 생각해 봐야 하고요.”
하긴 이번 일로 인해서 나는 주말마다 만통부에 출퇴근을 하게 됐다.
일이 점점 늘어날 것을 고려하면 인원을 충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
나는 새삼 장우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찌 나보다 내 상황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거지?’
다른 인원들도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충분히 일해주고 있지만, 장우재는 특히 인사 관리 부분에서 특별한 능력을 뽐낸다.
인사 관리는 조직 운영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
한 명을 얻음으로써 수십, 수백의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난 흐뭇하게 장우재를 바라보았다.
“혹 더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머쓱했는지 내 눈치를 살피는 장우재.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훌륭하게 해주고 있어!”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해한다.
겸손하기까지. 인성 역시 탁월하다.
좋아, 아주 좋아.
뒤이어 남화성이 입을 열었다.
“나, 난 이번 행사에…….”
“회의는 이걸로 마치자.”
“……!”
“응? 왜?”
남화성은 예의 소같이 눈을 끔뻑끔뻑거린다.
“간자가 하는 거라야 행사 방해밖에 더 있냐.”
남화성이 벌게진 얼굴로 탁자를 탁! 치며 벌떡 일어선다.
“시부럴! 나, 난 간자가 아니야!”
“그래. 그래. 그렇다 하자.”
“진짜 아니라니까! 나도 행사에 인원을 동원할 예정이다!”
“알았어. 그렇다 치자고.”
하여간 저 성질머리부터 먼저 고쳐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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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치고, 나는 주루의 별채를 나섰다.
별채를 빌린 김에 남아서 술을 마실 사람들은 마시고, 학관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자 했는데.
남화성이 장우재와 은호를 부여잡으며 남았고.
성모란과 남궁선화도 술이 당긴다며 남았다.
결국 사련과 단둘이서만 무림학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둘만 있는 시간은 간만이었다.
“대사형. 괜찮은 건가요?”
“뭐가 말이냐?”
사련의 얼굴에 걱정이 어려있다.
녀석은 전생에서부터 항상 나를 걱정했었다.
“남화성 말이에요.”
“아…… 그거.”
“남화성은 12봉성 중에서도 상위에 든 삼원문의 제자예요. 분명 그냥 들어왔을 리 없어요.”
나도 사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어째서요?”
“남화성의 움직임에서 철순직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으니까.”
“…….”
사련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아마 철순직이라면 본인이 직접 대표단에 들어왔거나 다른 사람을 보냈겠지. 남화성이 왔다는 건 녀석 스스로가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 말에도 사련은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고 피식 웃어주었다.
“어차피 장차 더 높이 올라가게 되면 온갖 군상들이 밑으로 들어차기 시작할 거다. 때론 철순직 같은 자와 협력해야 할 때도 있겠지.”
“더 높이……?”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그때를 대비해서 연습한다고 생각해라.”
“……듣기 좋네요.”
“응? 뭐가?”
사련의 목소리가 선선한 밤공기 사이로 울려퍼진다.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는 말 말이에요.”
사련을 바라보니 녀석이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사형이 더 높이 올라간다는 건, 우리들도 함께 높이 올라간다는 뜻이잖아요. 장차 태을문도 더 높이 올라간다는 말이고요.”
“그렇지.”
“너무 듣기 좋은 말이네요.”
“…….”
사련은 신이라도 난 아이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전생에 어땠더라.
문득 기억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과거가 떠오른다.
[철영 대사형이 소집을 명했어요. 막내 제자까지 모두 다요.]
[태을문을 위한 길이라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걱정돼요. 진정 이게 태을문을 위한 일인지. 사제들을 위한 일이 맞는지.]
계철영의 요청으로 예정되었던 모집일보다 빠르게 무림맹에 가게 됐을 때, 사련은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한 치 앞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때 그 아이에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대사형의 말대로 앞으로가 계속 기대돼요!”
사련은 아직 오지 않은 앞날을 기대하고 있다.
고민과 우려로 밤을 새우는 것이 아닌.
빛나는 앞날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하리라.
“이게 다 대사형 덕분이에요.”
사련이 근심 없이 밝게 웃는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도 기꺼워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쓸데없는 말을 다 하는구나.”
“…….”
내 손길에 순간 녀석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전생에서의 아픈 기억들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가 이내 뒤로 밀려난다.
다시는 나를, 내 사문을, 내 소중한 이들을 덮치지 못하게 하리라.
사련은 이번에도 내 말이 퍽이나 감동스러웠는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설마…… 또 감동하여 울어버린 것이냐?”
녀석을 놀릴 심정으로 고개를 숙여 녀석의 얼굴을 봤는데.
“……으드득.”
어라?
“내가 머리 만지지 말라고 했죠!”
순식간에 도끼눈을 뜨고 내게 달려들기 시작한다.
“아! 아! 사매, 잠깐만!”
아니, 어차피 기숙사 가서 씻을 건데 머리 좀 만진 게 무슨 죽을죄라고……!
나는 천하독행신을 전력으로 펼치며 도망쳤다.
“거기 당장 서요!”
두 번째 생을 살고 있지만, 도저히 여자 마음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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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휴식기의 마지막 날.
내일부터는 본래 학사 일정이 다시금 시작된다.
아마 야율극과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터.
‘그래도 얼추 유능제강의 개념은 잡힌 듯하니. 이전처럼 무식하게 상대를 메다꽂으려 하진 않겠지.’
대충 의복을 정제하고 있자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소운님. 오늘도 식사를 밖에다 준비해 드릴까요?”
전각에 들어선 시비장이 조용히 묻는다.
나는 연무장을 한번 바라본 후. 시비장에게 대답했다.
“아침은 그냥 거르도록 하겠습니다. 녀석이 온 것 같지 않으니.”
“……혹여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별일 아닙니다.”
우려하는 시비장을 뒤로하고, 전각을 나서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한가운데 바윗덩이 같은 존재가 좌선을 한 채 앉아있었다.
‘엄청난 풍채구나.’
방두칠의 풍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몸을 지닌 사내였다.
발치에 놓인 거대한 창은 보통 사람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더 길다.
내가 지근거리에 도착했음에도 사내는 눈조차 뜨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네가 진소운이더냐?”
낮게 깔린 목소리는 호랑이 울음소리같이 매서웠다.
현생을 살면서 외공을 익힌 자들에게 위압감을 느낀 적이 없건만, 그는 말 한마디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물러서는 건, 전생의 소정대원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 이거지.
게다가 말과 깡으로는 세상 제일가는 곳이 소정대 아니었던가.
“알면서 온 거 아닙니까?”
꿈틀.
내 도발에 사내가 한쪽 눈을 치켜뜨자, 혈광이 쏟아져 나오는 듯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내가 오리라는 것도 예상했다는 말인가?”
풍채도 풍채이지만 말하는 본새가 심상치 않다.
단지 가문의 무공을 과신한 자의 말투가 아니다.
‘직계 중 한 사람인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니면…… 내가 누구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더냐?”
분명 내기를 끌어올리지 않고 있음에도 거칠게 느껴지는 투기.
무엇보다.
평범한 인간에게서 풍겨나선 안 될 짙은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머릿속에 경종을 울린다.
“참으로 오만한 놈이구나.”
개들은 개장수가 나타나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고 도망치기 바쁘다고 했다.
정제된 의관과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그를 보고 있자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또다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울린다.
“그러니 주평이를 상대로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악주평은 악가 직계 후계자 중 하나.
그를 주평이라 부른다는 건, 사내의 신분 역시 악주평에 못지않음을 시사한다.
이내 사내의 바위 같은 몸체가 태산같이 커진다.
팔 척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풍채.
비이상적으로 길고 무거워 보이는 창을 왜 쓰는지 이해가 갔다.
쿵.
“어디 내게도 보여 보거라!”
쐐액-
엄청난 크기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창이 맹렬하게 베어 들어온다.
창을 찌르기로 쓰지 않는다니 멍청한 짓거리 같았지만, 애당초 사내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쿵.
흑룡검을 뽑아 막았음에도 몸이 붕 떠올라 날아간다.
촤르르르륵.
겨우 보법을 펼쳐 자리를 잡자, 어느샌가 사내는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뭔 놈의 속도가!’
훙.
철판교의 수법으로 창대를 피했다.
얼굴 바로 위로 스쳐 지나가는 창대를 보며,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파악했다.
‘강철 창대라니…….’
흑룡검으로 흘려냈음에도 손이 저릿한 이유가 있었다.
쐐액- 쾅.
머리를 쪼갤 듯 날아오는 창을 피해내자, 이내 창이 연무장 바닥을 강하게 때린다.
단단한 대리석이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날린다.
그리고 그제야 머릿속에 기록된 인물록에서 한 사람을 떠올랐다.
“감찰각 삼(三)당 당주 악병비.”
그의 한족 눈썹이 치켜떠진다.
나는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강호에선 혈귀비창이란 이름으로 불린다죠?”
공격을 가하던 그가 일순 멈추더니, 자세를 다잡는다.
“백도의 동도들은 내 별호를 두고 손가락질을 하곤 하지.”
“…….”
놈이 제 두 손을 잠깐 내려다본다. 그러곤 이내, 초연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는다. 난 백도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흑도와 사도들에게 얼마든지 ‘혈귀’가 될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이자가 직접 올 줄이야.
“그래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감찰각의 인물로 온 겁니까?”
“…….”
나는 악병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백도의 정의를 위협하는 존재입니까?”
악병비의 시선엔 한 톨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무림맹을 수호하는 일곱 개의 별.
“명백한 것은. 네놈이 순수한 백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중 혈성(血星)을 차지하고 있는 악병비가 나를 적으로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