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00화 (200/357)

200. <학관에 방문한 불청객(5)>

혈성(血星), 악병비를 향해 다시금 물었다.

“감찰각의 당주로서 온 겁니까?”

“그게 중요한가?”

“어제 절 찾아왔던 자는 스스로가 감찰각에서 나왔다 하더군요.”

“…….”

“감찰각 소속도 아닌 이가 감히 감찰각 행세를 하다니……. 이거 아주 중죄 아닙니까?”

긴장감으로 팽팽한 공기 속에서도 내가 할 말을 이어가자, 악병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고개는 치켜든 채 눈만 내리깔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가장 중한 사실은 바로, 이 내가 널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감찰각의 눈에 띄었다는 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말과 다름없다.

감찰각엔 상대를 조사하고 여죄를 들춰낼 권한이 있으니까.

무림맹 내에서 불리는 별명은 ‘저승사자’.

감찰각에 한번 끌려간 이들은 멀쩡한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기에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묻습니다. 지금, 감찰각의 당주로 온 겁니까?”

“…….”

“아니면 악가의 오운경이 그랬듯, 감찰각의 위세를 사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네놈이 감히……!”

아무리 감찰각이라도, 제대로 된 명분이 서지 않은 상황이라면 아무나 잡아다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겐 ‘아무나’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고.

“감찰각이 출동했음에도 집행각의 인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어째서입니까?”

“…….”

“결국 감찰각 지위를 이용하여 상대를 압박하러 왔다고밖에 볼 수가 없군요.”

그 흔한 명령서나 신분패도 빼 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곳에 감찰각의 삼(三)당주가 아닌 악주평의 삼촌으로서 왔다 이 말씀.

놈의 얼굴에 교만의 빛이 어린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

“내가 곧 감찰각의 삼당주다. 명령서는 나중에 발급해도 그만.”

“……그렇습니까?”

감찰각에선 명령서가 떨어지지 않을 경우 대상을 먼저 납치하여 고문을 통해 진술을 받아내기도 한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가?

“역시나 그냥 왔을 리가 없겠군요.”

어제 감찰각을 사칭해 오운경을 보낸 일까지 모두 내게 들켰다.

악병비로선 이대로 넘어갈 순 없었을 터.

일단을 나를 데려간 후, 뒤처리를 하겠다 그런 의도 같은데.

이거 어쩌나.

난 더 이상 예전처럼 그냥 당하기만 하는 등신이 아니다.

타앗-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네 개의 환영을 만들어 악병비의 시선에 혼선을 주었다.

“…….”

하지만 악병비는 어쩐지 우둑하니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곧장 천하독행신을 펼쳐 학관장실로 달려가려 하는 순간…….

악병비가 쿵 하고 창대를 바닥에 찍는다.

쩌저적.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든 연무장 바닥이 마른 잎처럼 부서져 나간다.

악병비로부터 시작된 진동이 묘한 파동으로 전달되어, 내가 밟을 대리석이 퍽 하고 튀어오른다.

혈성이 이런 수법까지 쓴다고?

디딜 곳을 잃어 걸음이 엉킨 발을 풀고 다시금 도약하려 하자, 악병비가 무감하게 읊조린다.

“어딜 가려 하는 것이냐.”

그의 말과 동시에 연무장 일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인기척이 느껴진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무인들.

어느새 악병비와 내 주위를 둘러싼다.

“네가 갈 곳은 감찰각뿐이다.”

가속이 붙으려던 발걸음의 속도가 서서히 다시 줄었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준비했다니…….’

악가의 무인들이 모두 고수들은 아니겠지만, 악병비와 동시에 덤별들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해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악병비가 돌아서며 말했다.

“다만, 선택할 기회를 주마.”

그의 창이 악가의 무인들을 가리킨다.

“악가의 창진을 빠져나가거나, 내게서 벗어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거라.”

“…….”

말 같지도 않은 선택지를 내미는 악병비.

“제가 선택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군요.”

“그런가? 패배자들은 항시 선택에서 도망치는 법이지.”

“전 본래 불리한 선택지에 절 몰아넣지 않습니다.”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자신의 입맛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악병비가 말하는 사이, 내 시선은 슬쩍 전각의 지붕으로 향해있었다.

‘야율극.’

오늘도 내 뒤통수를 노리기 위해 기습을 시도한 야율극이 지붕을 슬금슬금 넘어오고 있었던 것.

나는 곧장 녀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야율극! 지금 당장 소란을 일으켜서 시선을 끌어라. 그럼 내가 곧장 학관장실로…….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야율극이 움직였다.

‘저 새끼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최대한 움직임을 작게 하며 뒤로 물러서는 야율극.

나는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야율극! 당장 학관장실로 가서 이곳에 감찰각이 떴다 전해라!!”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놈이 화들짝 놀라며 죽일 듯 나를 노려본다.

저 겁많은 새끼.

네가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악가의 무인 하나가 곧장 야율극의 뒤로 다가가 녀석을 제압하곤 악병비 앞에 야율극을 던져놨다.

붙잡혀 온 야율극은 이 상황에서도 나를 노려본다.

“……진소운! 이 더럽고 간교한…….”

“이 새끼야!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나 때문이라고?”

“그래! 여기 있는 인간들 다 악가에서 나왔으니까.”

야율극이 마혈이 집힌 상태에서 눈알만을 굴려 악병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악가라고……! 진소운, 이거 풀어. 내가 다 죽여버릴…….”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나는 녀석을 발로 차서 연무장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야율극을 한번 바라본 악병비가 말했다.

“다 하였나?”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마지막 보루였던 야율극이 저 꼬라지가 됐으니까.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니깐.

나는 흑룡검을 고쳐 잡았다.

도망칠 수 없다면, 뚫고 나가면 그만.

“이제 포기한 건가.”

나는 악병비를 노려봤다.

“오늘 벌인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주평이에게 장애가 남았다지…….”

그의 창극에 기가 어린다.

전날 보았던 어설프게 흩날리는 기가 아닌 반듯하게 조각해 낸 듯 완벽한 모양새의 창기(槍氣).

“네놈부터 그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될 것이다.”

애당초 혈성을 상대로 무위를 측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나 또한 내공을 끌어올려 만해천지검결 펼쳤다.

“해볼 수 있으면 해보시지.”

여섯 자루의 만검.

거기에 검기가 어린다.

말도 안 되는 양의 내기가 뽑혀 나갔지만, 지금은 뒤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감찰각에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찌하여 네가 주평이와 갈등을 겪었는지 알겠다. 버릇이 없는 놈이구나.”

“누가 할 소리!”

여섯 자루의 만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기를 뿜어내는 만검들이 다시금 쌍천검결을 펼치기 시작하고.

작은 연무장의 하늘에는 이제 틈 샐 곳 없이 수많은 검들이 수놓아진 채, 악병비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악병비의 얼굴에는 일말의 위기감도 없다.

“오라!”

“차앗!”

창을 크게 휘두를 준비를 하는 악병비.

나는 태을팔만신보를 밟으며 그에게 짓쳐들어갔다.

쐐액──

쐐액──

쐐액──

공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짓쳐드는 소천검법이 그의 요혈을 노리고.

대천검법이 그의 두 눈을 혼란케 만든다.

기세 좋게 기수식을 편 악병비는 검들을 피해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그의 발이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게 되었을 때.

“열화창!”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입에서 무공 이름이 터져 나왔다.

‘미친…….’

검법을 외치거나 초식을 외치는 행위는 동네 애들이 전쟁놀이를 할 때나 유효한 것 아닌가.

그가 혹, 기만행위를 하는 건 아닌가 싶었건만, 그의 창극에 어린 창기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진짜 외친 대로 펼친다고?’

화르륵.

후끈한 열기와 함께 타오르는 창기가 쌍천검결을 집어삼킨다.

퍼퍼퍼펑!

기와 기의 부딪침 사이로 압력이 터져나오며 몸을 밀어냈다.

나는 천근추의 수법으로 버티는 동시에, 다른 만검들을 이용해 그의 오방(五方)을 찔러 들어갔다.

콰콰콰콰쾅!

만검이 내리쳐지자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한 움직임으로 만검을 피하는 악병비.

동시에 나는 왼손으로 만화무적권을 펼쳐 그의 퇴로를 막아섰다.

“화광충천권!”

“…….”

이번에도 무공명을 외치며 손을 뻗어내는 악병비.

그의 오른손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며 쏟아져 들어왔다.

파파파파파파팍!

순식간에 삼 초식을 주고받은 우리는 기파에 밀려 서로 떨어져 나왔다.

촤촤촤──

밀려나는 인력을 최대한 버티며 섰지만, 나는 결국 일곱 걸음이나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내공에서 내가 밀렸다고?’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겨우 세 걸음만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악병비는 방금 전 권법을 주고받았던 주먹을 바라보더니 예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꿰뚫었다.

“놈……. 태을문의 제자가 이 정도의 내공이라니. 과연 수상하기 그지없구나.”

아무리 칠성(七星)이라도 그가 내 수준 이상으로 내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악가에서는 물 대신 공청석유라도 마신답니까? 그쪽도 수상하기 그지없군요.”

“……그래. 모든 이야기는 감찰각의 지하에 가서 하면 될 것이다.”

그가 다시금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돌격 자세를 취했다.

“묵운섬전창!”

악가를 창의 명가로 만든 대표 창술.

제대로 된 무위를 본 이는 북방의 이민족이나 흑도 무림의 악인들밖에 없다던데.

허, 그걸 내가 보게 되네.

퍽.

바닥을 딛고선 발을 얼마나 강하게 차냈는지, 대리석이 깨져나가며 돌멩이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가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음에도 난 쉽사리 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피하면 죽는다…….’

묵운섬전창의 진정한 무서움은 단순한 공격 속에 숨은 암계에서 비롯된다.

목표물이 정면승부를 피하는 순간, 두 번째 발돋움을 통해 상대가 어디로 피하든 몸을 꿰뚫어 버린다.

검보다 긴 창의 길이를 활용하는 무공.

나는 피할 생각을 접고 흑룡검을 반대 손에 쥔 후, 놈에게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놈!”

퍽!

두 번째 발돋움과 함께 대리석이 깨져나가고 흙더미가 물보라처럼 사방에 흩어진다.

악병비의 신형은 창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단숨에 몸을 꿰뚫을 듯 달려들었다.

난 역수로 쥔 흑룡검을 들어 필사적으로 창을 막았다.

끼기기기긱.

검 면 전체를 팔뚝에 붙여 충격을 해소했지만, 잔존한 충격만으로도 팔이 부러질 것 같았다.

이어, 다른 손으로 창대를 부여잡고 극성으로 연화(蓮花)를 펼쳤다.

“흡!”

갑작스러운 이화접목의 수를 예상치 못했는지, 그가 달려오던 힘을 해소하지 못하고 창대와 함께 내 쪽으로 끌어당겨진다.

나는 이어 설화(雪花)의 수법을 펼쳐 그의 거대한 몸채를 전력으로 내던졌다.

콰콰쾅!

연무장 밖으로 떨어져 나간 악병비.

그가 바닥의 모래 먼지를 사방으로 풍기며 벽에 처박힌 순간.

나는 모래 먼지를 향해 검기를 미친 듯이 날렸다.

퍼퍼퍼퍼퍼퍼퍼펑!

한 호흡에 스물에 달하는 검기가 쏘아져 나가며 터져나갔다.

주변에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악가의 무사들 몇이 움찔거리며 악병비를 향해 움직이는 순간.

나는 곧장 천하독행신을 펼쳐 포위망을 뚫었다.

“발진!”

하지만, 금세 눈앞을 막아서는 악가의 무사.

나는 쌍천검결을 흩뿌리며 놈을 단숨에 뿌리치고 달려나가려 했으나…….

‘벌써?’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파에, 뒤돌 새도 없이 필사적으로 태을팔만신보를 펼쳤다.

콰콰쾅!

벽력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이 움푹 파여 들었다.

구덩이의 끝에는 창을 내려친 악병비가 우뚝 서 있었다.

“왜 이번엔 무공을 호명하지 않으십니까? 비겁하게.”

“…….”

그가 입가에 묻은 선혈을 쓰윽 닦아낸다.

“네놈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구나. 어찌 학관생의 실력이 이 정도일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거라면 감찰각에 가지 않아도 답변드릴 수 있을 텐데요.”

“…….”

이번 한 수로 확실하게 알았다.

그는 내 예상만큼 엄청난 내공을 가진 존재는 아니다.

여태껏 기파의 충격을 외공으로 흡수하여 흘려내고 있었을 뿐.

더불어…….

그는 소란이 밖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놈에겐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악가의 무사를 상대하기 위해 내가 등 뒤를 보이고 있었을 때.

분명 난 방심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대비하지 못했고, 의외인 상황이었기에 그저 천잠보의를 믿고 안일하게 있었건만…….

악병비는 그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냈다.

‘왜냐면…… 여기서 싸웠다간 밖에서도 이곳의 일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여태껏 무공을 호명하거나 초식을 외친 것도 그 염려의 연장선일 터.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어 외부로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였군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놈의 속이 다 훤히 들여다보였다.

“담대한 척 우직한 척하더니. 곰의 탈을 쓴 교활한 여우였군요.”

악병비는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뭐라 말하는 것이냐?”

“역시나 이 소란이 밖으로 커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 것이지요?”

“…….”

“창진을 펼쳐 저를 붙잡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고요.”

악병비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는다.

분노를 참아내거나 하는 것이 아닌 당황을 숨기기 위한 필사적인 표정.

“……네놈이 그걸 알아차렸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래서 오만을 떠는 놈들과 싸우는 게 너무 좋다.

그런 놈들은 안일하기에 상대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면…….

‘이보다 더 짜릿할 수가 없지.’

코오오오오.

대기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바람이 강하게 인다.

마치 동굴 안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가듯 손안으로 기류가 거칠게 모여든다.

대기의 흐름에 집중하는 나를 보며 악병비가 이를 바드득 간다.

“네놈 무얼 꾸미는 것이……!”

천하의 혈성이 광천신장을 피하지 못할 리 없지.

하지만 상관없다.

무림학관에서 광천신장이 터지면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아도 이곳을 보게 될 테니까.

콰과과과과과과광!

호쾌한 폭음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악가와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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