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의자 뺏기(2)>
“일단 들어가죠.”
나는 넋이 나간 일행들에게 말했고, 다들 정신을 차리며 따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복도를 거닐며 일하던 이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마치 이방인의 방문에 달갑지 않아 하는 모습들.
개중엔 나서서 제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여긴 대표 간부실이 있는 곳입니다. 외부인은…….”
하, 이거 봐라.
“뭐.”
말을 하던 백도회 인원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곤 돌아가 버렸다.
성모란이 콧김을 내뿜었다.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녀의 심경은 내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일을 하던 이들이 하나둘 이편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달갑지 않아 하는 시선은 물론이고, 불편함을 표출하는 인원, 작게 욕지기를 내뱉는 이들까지.
마치 우리는 적진 한가운데 똑 떨어진 인원들 같았다.
“본격적으로 꾸며놨군요.”
장우재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본래 창고로 쓰이던 장소들을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서랍과 책상들이 가득 들어와 있고, 그 안에는 서류들이 가득하다.
마구잡이로 서류를 쌓아놓았던 우리 간부실보단 훨씬 더 간부실 같아 보이는 그들의 공간.
‘학관에서 비용을 대줬을 리는 없고, 백도회에서 비용을 지불한 건가?’
현실도피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간부대표실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곳의 우두머리인 듯, 사방에서 건네는 보고와 서류를 한눈에 살피고 바로바로 넘기는 이들.
대표실을 나선 이들도 몇 걸음 걷다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일하지 않고 뭐 하는…….”
“정기 오라버니. 이게 뭐 하는 거죠?”
남궁선화의 말에 제갈정기가 우리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질문한 남궁선화 대신 나를 바라본다.
“진짜 왔군요.”
“못 올 데를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학사 과정 중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두시고선……. 이 정도로 뻔뻔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
이 새끼, 뭐라는 거야?
아직 대표의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
이번 공백은 어디까지나 정도회가 싸지른 똥을 내가 열심히 치우다가 발생된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제갈정기를 비롯한 오대세가가 이리 움직인 이유가 무엇일까.
‘대체 뭘 믿고 있는 거지?’
제갈정기 옆에선 남궁기표가 그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고, 제갈정기가 고개를 끄덕인 후 나를 쳐다본다.
“괜찮다면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마치 주인이 객을 맞이하는 듯한 태도.
분명 잘못된 관계였지만, 심히 하찮아 보여 나는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군산은침 있습니까? 요즘 그게 입에 맞더군요.”
제갈정기와 남궁기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왜?
시설에 이렇게 돈지랄을 해놓고 손님을 위한 차는 준비하지 않은 건가?
#
쪼르르.
찻잔에 김이 나는 뜨거운 물을 붓자 꽃봉오리가 하나하나 펼쳐지기 시작한다.
꽃잎의 색깔은 각기 다른 색깔로 펼쳐지는 순간부터 투명한 물을 자신들의 색깔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 기묘하고 신기한 모양에 잠시 넋을 잃고 보고 있자니 제갈정기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칠색화라고 한답니다.”
“칠색화?”
“요즘 북경의 고관대작들은 이걸 주로 마신다고 하더군요.”
그가 살짝 고개를 치켜든다.
“……군산은침이나 용정차를 개나 소나 마시게 되면서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뭐, 확실히 이 신기한 차를 보고 나면 그저 말린 차가 펴지는 모습이 다인 용정차나 군산은침에는 관심이 덜 갈 것 같긴 하다.
제갈정기가 고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입에 가져다댄다.
“범인(凡人)들은 운 좋게 특별한 것을 한번 맛보고 나면, 자신도 특별한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그 재화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기에 맛볼 수 있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그가 빙긋 미소 짓는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제갈정기는 다시 칠색화를 입에 가져가더니 잠시 찻물을 입에 머금고 향을 만끽하는 듯 눈을 감았다.
칠색화를 마시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가?
나는 일부러 칠색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제갈정기가 이내 찻물을 삼키곤 눈을 떴다.
“조금 당황스러우셨겠습니다.”
“제갈세가에선 ‘조금’이란 단어를 다르게 배웁니까?”
잠시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더니 모르는 사람이 집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이걸 보고 ‘조금’ 당황스럽다 이야기할 수 있나?
“대가리를 깨부숴도 할 말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꽤나 과격한 내 말에도 제갈정기가 피식 웃음을 내비친다.
“역시나 자리가 달라져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것이로군요.”
나를 도발하려는 제갈정기.
하지만, 너무도 풋내기 같은 공격에 실소만 나온다.
“그 근본 없는 이가 성격이 지랄 맞다는 걸 모르셨나 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악주평에게 장애를 남겼다지요?”
“전 도를 넘는 행동에 대해선 자비가 없는 법이라서 말이지요.”
제갈정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확실히 주평이 그 친구가 조금 실수를 하긴 했죠.”
“보통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간 걸 두고 ‘실수’라고 하진 않죠.”
“하핫!”
제갈정기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웃음이 몹시도 거슬렸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했고 그간 뻔뻔히 대함으로써 상대를 더 열 받게 한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뭐가 그리 웃깁니까?”
“정시를 통과하기 위해 손에 적잖은 피를 묻힌 분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우습지 않습니까.”
왠지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제갈정기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덧붙인다.
“정시의 과정을 다시금 살펴보니, 그쪽은 다른 이들의 다섯 배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더군요.”
내 죄의식을 건드려 보려 한 듯한데, 이걸 어쩌나.
“난 내 목숨을, 내 자리를 노리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네놈이 생각한 만큼 내가 무르진 않아서 말이지.
제갈정기는 애써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죠. 그게 무림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헌데 말입니다…….”
입가의 미소를 지운 채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제갈정기.
“앞으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일 겁니까?”
“…….”
“그쪽이 자리를 탐할수록 더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 겁니다. 당신이 올라갈수록 악주평 같은 자들은 계속 당신 앞을 가로막겠죠.”
나는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그 말의 저의가 뭡니까?”
난 더 차가워질 수 없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백도회가 내 앞을 막아서겠다, 이 말입니까?”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말을 던져놓고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제갈정기.
“난 그저 그쪽에게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이 행위는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하는데.”
“별것 아닙니다. 백도회에겐, 임시로 사용할 공간이라도 격식을 차리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제갈정기는 ‘임시’라는 말에 힘을 주어 한발 물러서는 듯 보였다.
“학관대표가 복귀했으니 우리가 진행하던 것들은 차츰 정리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의미심장한 의도가 가득 들어있었다.
“……물론 현 대표가 계속 대표직을 유지한다면 말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정기가 나를 따라 고개를 움직인다.
“이런 그냥 가시는 겁니까?”
“더 할 이야기가 있습니까?”
제갈정기는 내가 손대지 않은 차를 가리켰다.
“귀한 겁니다. 맛은 한번 보시지요.”
“…….”
나는 칠색화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마시는 방법이 잘못된 것인지, 혀끝에 쓴맛만이 진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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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있는 대표실은 복도의 소란으로 인해 더욱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듯 느껴졌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열패감에 짓눌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지?’
남궁선화는 현재의 상황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진소운이 잠시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그것이 대표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원인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말마따나, 대표가 없는 동안 학사 진행을 하기 위해 임시 간부회를 조직했다는 건 허울뿐인 명분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남궁선화가 진소운을 보며 물었다.
“진 공자님. 정기 오라…… 아니, 백도회장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오셨나요?”
당장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의 의도.
과연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얼마나 자신 있는 일이기에 본격적으로 대표단 행세까지 하며 일을 벌이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
단순히 진소운이 없는 자리를 메꾸겠다고 저리 일을 벌일 일은 없으니까.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신기한 차를 한잔 대접받고 왔죠.”
서류를 보며 태연히 대답하는 진소운.
“차요?”
“네. 칠색화라고 하던가요? 꽤나 쓰더군요.”
“…….”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진소운의 표정이 묘하다.
분명 커다란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는 모습.
그리고 남궁선화는 진소운의 그런 모습을 과거 다른 사람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할아버지.
절대적인 힘과 명분을 가지고도 암계와 모략에 휘청였던 창제신검의 모습과 비슷했다.
‘위험해…….’
훗날 이야기를 듣기론 그녀의 조부는 가문 내에서 피를 볼 각오까지 했었다고 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진소운.
진소운의 도움으로 창궁운위검법을 완성치 못했다면, 어떤 계기로든 간에 남궁세가는 두 쪽이 났을 것이 자명했다.
‘이번엔 내가 도와야 해.’
남궁선화는 진소운과 생사를 함께 넘으면서 그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진노하게 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진소운이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진소운이 백도회의 암계에 넘어가 모든 걸 망쳐버리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힘든 걸 보고 싶지도 않다.
‘백도회가 바라는 게 바로 그의 동요일 테니까.’
남궁선화는 이후 사흘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백도회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속가문파 제자에게서 결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갈정기가 교두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진소운…… 쪽과 경합을 하게 해달라고.]
[학사 일정을 개최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면 자신들을 대표단으로 인정해 달라고요.]
[제가 이야기했단 사실은 기표 공자님에게 절대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교두들은 학관 내에서 독립적 의결권을 가진다.
기득권들이 교두와 교관들을 섭외해 진소운을 뒤흔들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정되었던 일.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지?’
교두와 교관들이 할 수 있는 건 판을 깔아주는 일밖에 없다.
결국 선택은 학관생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고, 지금은 백도회의 입장에서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진소운은 사천의 일을 해결함으로써 학관 내의 기류 변화를 가져왔으니까.
남궁선화가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들 중의 하나는 사천의 일로 정도회가 신뢰를 많이 잃었고, 그에 반발하듯 진소운에 대한 지지가 올라갔다는 것.
그렇기에 분명 백도회에게 유리할 게 없는 상황이 분명할 텐데…….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남궁선화의 이야기를 듣던 성모란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진 공자의 자리가 공고해져 버릴 테니까. 백도회로선 마지막 기회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네요.”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백도회가 이렇게 움직였다는 건 뭔가 궁극의 한 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과연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리 자신 있게 일을 벌인 것일까?
그런 남궁선화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듯 연이어 일이 터졌다.
“강사님이 강의 중단 고지를 받으셨답니다.”
학관 대표실에 방문한 모용재화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진소운이 검토하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는다.
“그게 무슨 소리지? 누가 강의 중단을 고지해?”
“새로운 대표 간부단이라고…….”
지금 학관 내에는 궁도 강의가 따로 없기에 모용재화만을 위한 개인 과외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
귀궁문의 여삼통이 돌아가게 되면 모용재화는 더 이상 궁도를 배울 곳이 없었다.
“하핫.”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짓는 진소운.
빠드득.
진소운이 이를 갈았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