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08화 (208/357)

208. <원수의 은혜>

“후우… 끝…이 없네…….”

은호는 서류 업무에 꼬박 하루를 다 쏟았음에도 눈앞에 가득한 서류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장우재가 데려온 스무 명에 달하는 학관생들(상인이나 관리의 자제들)과 일을 나누어 처리하고 있지만 당최 일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본래 진소운이 하던 일의 절반만을 가져온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한숨이 길게 나왔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은호를 비롯한 간부단들이 진소운이 혼자 처리하던 서류 업무를 모두 가져와야 했으니까.

이 일을 자처했던 장우재 또한 막상 업무들이 눈앞에 닥치자 아득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대표님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겁니까?”

“……글쎄요.”

의문 가득 담긴 장우재의 물음에 은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인간이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적응될 만하면 또 다른 면모를 자꾸만 보여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지 않은가.

“예전부터 예측이 안 되는 인간이긴 했습니다…….”

“…….”

뭔가 장우재는 진소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이렇게 그 환상을 깨버려도 되는지 걱정했지만 은호는 이내 걱정을 털어냈다.

‘어차피 이상한 인간이란 건 금방 다 들통날 텐데 뭐…….’

어차피 맞을 매라면 하루라도 빨리 맞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야 도망갈 시간이라도 갖지.

자신이 뭣도 모르는 시절, 대사형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의 학관 입학을 돕겠다는 말도 안 되는 환상을 꿈꾸다가 그 개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지금에서야 그걸 다시 하라 하면 때려 죽어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라고 하면 또 하겠지. 에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태을문의 제자이자 진소운의 사제이기에 가능한 것.

선량한 장우재가 진소운의 마수(?)에 빠져 굳이 고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를 한 명이라도 줄여야 한다.

“아무튼…… 도망가려면 빨리 도망가는 게 나을 겁니다.”

“응? 그게 무슨……?”

진소운은 주변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드는 사술을 익힌 게 분명하다.

당장 남궁선화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남궁선화와 함께 대외업무를 도맡은 홍사련이 말하길, 남궁선화는 교두와 교관들이 백도회를 편파적으로 두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는 창궁검을 탁자에 꽂아 넣었다고 했다.

[만약 제갈세가는 두렵고 남궁세가는 두렵지 않은 분이라면 얼마든지 수작을 부려보세요. 그 대가는 철저하게 돌려받을 겁니다.]

애당초 남궁선화는 자신의 가문을 앞세우거나 등 뒤에 세워 상대를 압박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티 내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누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순박한 동네 누나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까 싸울 때 말고는 살짝 바보가 되는 동룡이도 남궁선화를 제 잃어버린 누나인 양 쫓아다녔던 거겠지.

그런 사람이 어쩌다 저리 냉철하고 과감한 인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대사형……. 진짜…….’

뭔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캬캬캬캬’ 웃는 대사형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일이 돌아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말 본받을 만하긴 한데.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다.

자신도 익힌 태을진경은 정심한 무공이 분명한데…….

그 안에, 운용을 다르게 하면 마공이 되는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은호가 대사형을 의심하고 있는 사이.

아직 도망치지 않은(?) 장우재가 피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래도 얼추 이제 자리를 잡았군요.”

“이게 다 장우재 학관생 덕분입니다.”

“그게 저 혼자만 가능하겠습니까. 은호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열심히 하셨기 때문이죠.”

진소운의 대표단은, 진소운이 외부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알아서 자신들의 일을 잘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은호와 장우재는 대표단 운영에 필요한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성모란과 남화성은 백팔봉을 중심으로 인원들을 만나가며 설득하는 일을.

그리고 남궁선화와 홍사련은 대외적인 업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다.

인원은 적지만 다들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히 해주고 있는 것.

이렇게 순탄하게 굴러가기만 하면 앞으로의 대표단 생활에도 더 이상의 중대한 위협은 없겠지.

그리고 더 이상 진소운의 대표단이 실각의 위기에 놓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잘 넘기면…….

“크흠, 그…… 어쨌든 행사 참여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장우재가 수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뱉자, 은호도 저도 모르게 함께 한숨을 내쉰다.

“……쩝.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은호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지요…….”

양손과 머리까지 저으며 부정하는 장우재.

이내 그가 조심스레 입을 뗀다.

“근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

그러곤 주위를 휘휘 둘러본 후 목소리를 더욱 낮춘다.

“소림사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은데.”

괜찮을 리가 있나.

천하의 일각을.

그것도 소림사의 역근경을 익힌 제자를 데리고 나가 호객행위를 하다니.

소림사는 차치하고, 부처님께서 노하셔서 천벌을 내려도 달게 받아야 할 정도로 불경한 일 아닌가?

아마 이번 일에서도 뭔가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건 다 대사형 잘못일 것이다.

그래, 다 대사형 잘못이다.

“모르겠습니다. 뭔가 일이 터지면 그 인간이 알아서 수습하겠죠. 다 자기 잘못인데요. 뭐.”

“…….”

아무튼 그렇다.

#

두 번째 학기의 첫 번째 행사가 시작되면서 학관 내엔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교두와 교관들이 진행하는 일반적인 학사 일정보단, 대표단들이 진행하는 행사 일정에 흥미가 더욱 동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더구나 이번 행사는 진짜 대표단과 가짜 대표단의 경쟁.

학관생들은 두 행사 중에 하나에만 참여함으로써 그들에게 지지를 표할 수 있는 선택권까지 가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행사 내용과는 별개로, 두 세력 간 경쟁의 결과 값이 궁금한 것도 사실.

“그럼, 진소운 대표가 지면 실각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쨌든 그가 최고 성적으로 입학하여 대표가 되지 않았나. 당연히 그가 계속 대표를 해야지.”

“그럼 자네는 진소운 행사에 참석하겠군.”

“크흠…….”

“왜 대답이 없나?”

“……이번에 사문으로부터 기문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오라는 전갈을 받아서 말이야.”

그렇게 하나둘 자신의 상황과 주변 영향으로 선택을 해나갈 때쯤.

“크흠, 시주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

“이, 일각 스님?”

“여긴 어찌…….”

우스꽝스러운 어깨띠를 매고 한 손엔 전단지를 가득 든 일각이, 어쩐지 복장과 어울리지 않는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었다.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음.”

“……어.”

“네?”

저마다 얼빠진 표정을 짓던 학관생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각 대표단의 행사에 참여하러 가고 싶은 이들이었지만, 천하의 일각과 대화를 나눠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쉽게 오는가.

거기다 학관 행사는 일주일간 진행되지만, 일각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이번뿐이었다.

“예! 뭐, 그, 그러시죠.”

학관생들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정심(正心)에 관해서 아십니까?”

너무나 근본적이고 허무한 질문.

“그, 바른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일각은 눈부시게 반질거리는 머리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정심은 단지 바른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자신들이 모르던 현기 어린 가르침이 나올 듯한 분위기에 학관생들이 일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심이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심기를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타고난 기둥을 뜻하지요.”

“……그게 그거 아닌가…….”

일각의 설파에 학관생들의 얼굴에 왠지 모를 의문과 불신이 어리는 그때.

일각의 두 눈에서 정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 시주! 그대는 본인이 흔들리지 않는 정심을 가졌다 생각합니까?”

형형한 기세에 학관생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크흠…… 저, 전 나름 남궁세가의 속가문파 제자라 누구와 비교해도 흔들리지 않는…….”

“틀렸습니다!”

“네? 그게 무슨…….”

일각이 금방이라도 얼굴을 뚫어버릴 듯 강렬한 눈빛으로 학관생들을 직시한다.

“정심은 자신의 소속이나 무학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강호의 흔한 이야기로, 정심은 내공심법을 단련하면서 강해지는 마음의 힘을 말한다.

그렇기에 남궁세가와 같이 정종무학의 맥을 이어받은 정순한 심법을 익힌 이들이, 흑도 무림의 무학을 익힌 이들보다 더 흔들림 없는 정심을 가졌다 일컬어지지 않던가.

일각은 그런 상식을 단호히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심은 단지 내공심법을 익히고 명상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힘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열변을 토하던 일각이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처연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저는 사천에서, 동료들을 잃지 않았겠지요.”

정도회가 사천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는 이들이었기에, 다들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저는 흔히 이야기하는 정심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제가 오만하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깨달음에 이른 수도승처럼 맑고 투명한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지는 일각.

학관생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일각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다.

“……그, 그럼 어찌해야 정심을 키울 수 있는 것입니까?”

혈교가 아니라도 흑도 무림의 인원들은 종종 사람을 삿되게 하는 사술을 부리곤 하지 않던가.

일각 앞에 선 학관생들은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일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종이뭉치를 든 손으로 합장을 했다.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파사(破邪)와 제령(制靈)에 관해서 익히는 것이지요.”

“…….”

“…….”

“…….”

일각은 재빨리 손안에 쥔 전단지를 학관생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금 형산파의 행사에 참석하시면, 마장에 펼쳐진 잔학무도한 혈교의 간교한 환술진을 통해 파사와 제령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번 행사 특전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학관생들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 정말입니까?”

일각의 번쩍거리는 머리가 위아래로 세차게 움직인다.

“네. 그렇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혈교의 환술진만 일단 체험해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한번 겪어보고 나면 정심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될 테니까요. 나무아미타불.”

형산파의 수업에 학관생들의 마음이 쉬이 동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당장 배운들 써볼 구석이 없다는 점이었는데.

바로 실습을 해볼 구역까지 갖춰뒀다니, 마음이 동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스님! 그럼 전 형산파의 행사에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성취감을 느낀 일각이, 제 마음을 부정하며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럼 얼른 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점점 대기 인원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자네들도 나중에 보세!”

“이, 이보게! 같이 가! 나도 참석할 거니까!”

“나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장으로 달려가는 세 사람을 자애롭게 지켜보던 일각이,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그때.

짝. 짝. 짝. 짝. 짝.

누군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진 시주…….”

일각의 표정이 더욱 복잡다단해진다.

진소운이 제가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사과해야겠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역시 소림을 이끌어갈 인재는 달라도 다르군요. 크─”

진소운이 쌍엄지까지 치켜들며 극찬을 했지만…….

일각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심정에, 손에 들린 전단지만 더욱 꾹 쥐었다.

#

“어찌 이것밖에 안 되는 거지?”

행사 삼(三) 일 차.

예상치의 절반도 안 되는 참여 인원 숫자에 제갈정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 그것이…….”

기문진의 운용과 진행을 맡고 있던 제갈세가의 진법가가 제 잘못이라도 되는 양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표기가 잘못된 거로군.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게, 정확하게 표기한 겁니다.”

“뭣?”

제갈정기가 종이를 더듬거리며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진소운의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직면한 현실은 냉혹했다.

무려 제갈세가에서 발표한 새로운 기문진이다.

천하의 모든 문파들이 설치하고 싶어 하는 칠성칠금진, 그것을 뛰어넘은 새로운 기문진.

그런데, 그 물건에 대해서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거지?

더구나 무림맹에 올라가면 자연스레 배울 수 있는 파사와 제령 따위 때문에 말이다.

“그게…… 진소운의 행사장에 설치된 환술진이 워낙 기묘하고 현실감이 넘쳐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현실감 넘치다니?”

제갈세가의 진법가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사천에서 일을 겪은 학관생들 말로는, 혈교가 사용했던 환술진 안에서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허…….”

“그런 이야기가 돌다 보니, 다들 형산파의 파사와 제령을 배워 환술진을 뚫는 연습을 하느라 마장이 매일 미어터질 지경이라고…….”

꽈악-

제갈정기가 분한 듯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각이 호객행위라는 웃기지도 않는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학관생들 몇몇이 움직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나다니.

제갈정기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개량판……. 개량판 장비들은 챙겨 왔습니까?”

제갈정기의 물음에, 진법가의 얼굴에 깊은 당혹감이 어린다.

“도, 도련님…… 그건 아직 연구 중인…….”

“당장 설치하세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세요. 양의팔괘만상진의 개량판도 바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그건 안 됩니다. 도련님!”

강경한 외침에도, 제갈정기는 핏발 선 눈으로 진법가를 노려보았다.

“그럼, 천하의 제갈세가가 진법으로 누군가에게 져야 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제대로 된 기문진도 아닌 한낱 환술진 때문에!!”

“…….”

“당장 설치하세요. 뒷일은 내가 책임집니다.”

그의 눈에 서린 열패감에, 결국 제갈세가의 진법가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개량판 장비를 챙기러 멀어지는 진법가들.

‘진소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정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손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

“참으로 대단하군……. 그때의 그 어린 후기지수가 벌써 이렇게 대단한 이가 되었다니…….”

얼굴을 빤히 보며 하는 금칠에, 평소 유려하게 흘러가던 혓바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칠살멸혼 대협께 그런 이야기를 듣자니 송구합니다.”

그는 다름 아닌, 마령고원에서 복마부를 선물로 주었던 하민중의 대사형인 송정무였다.

이번 형산파의 행사에 그가 직접 참여했던 것.

이는 형산파가 이번 행사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는 단초나 마찬가지였다.

“대협께서 직접 오시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내 공손한 태도에 송정무가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후후. 문주님께서 직접 나를 지목하여 행사에 빈틈이 없게 하라 명하셨다네. 그렇담 당연히 내가 와야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마령고원에서의 빚이 있다곤 하나, 이미 복마부로 갈음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 형산파가 이리 신경 써주는 것이 사뭇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흠……. 자네는 자네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르나 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흑염룡’이 선택한 파사의 기물이란 상징성 덕분에 우리 형산파가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는지 아는가?”

“네?”

별안간 들려온 별호에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잠시.

그러고 보니 얼마전 성모란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송정무는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설명했다.

“무림맹의 대량 주문은 물론이고, 강호 전역에서 예약 주문이 쇄도하고 있네. 본산의 도사들은 매일 밤낮으로 복마부를 찍어내느라 기력이 다 고갈될 지경이지.”

표정을 보아하니 성모란의 말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듯했다.

근데 왜 내 배가 살살 아프지?

더불어 형산파가 돈을 버는 것과는 별개로 효험 좋은 복마부를 쟁여 놓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아쉬웠다.

사천의 일을 처리하느라 지난번에 받은 복마부 대부분을 써버렸으니까.

“쩝.”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자, 송정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돈을 번 것이 아깝나?”

나는 거짓을 조금 담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형산파의 파사와 제령의 힘은 다른 문파들이 쉬이 따라갈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미리 복마부를 사놓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아마 가격이 많이 올랐겠지요?”

송정무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만들어지는 속도가 팔려나가는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니 말일세.”

“그게 좀 아쉬울 뿐입니다. 앞으로도 쓸 일이 많을 텐데. 미리미리 구매해 둘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말입니다.”

“흐음…… 그런가?”

잠시 턱을 쓸던 송정무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혈교의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복마부를 쓸 일이 많아지리라고 생각하는 거로군?”

복마부에 신경이 쏠려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미래의 일을 누설해 버렸네.

하지만 뭐, 그 정도는 상관없으려나?

“이미 무림맹이 금공으로 지정해 두었던 사도의 무공이 나왔으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또 어떤 무학이 자라고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흐음…….”

나는 서둘러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하는 말이라 흘려들어 주십시오.”

그러나 송정무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닐세. 아니야. 그래도 천하의 흑염룡이 하는 이야기 아닌가. 새겨들어야지.”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영향이 있다고.”

송정무가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이번 행사의 경쟁 상대가 제갈세가에서 새로이 만든 기문진이었다지? 우리도 오는 길에 소문을 들어 이번 행사의 참여자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

그러곤 이내 환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하하.”

“자네의 말은, 당연히 새겨들어야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행사는 성황리에 종료가 될 예정이었다.

이미 백도회의 행사와는 삼 일 차 만에 두 배 이상의 인원 차이를 기록했고, 사 일 차엔 결국 백도회에서 행사를 일시중단하면서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으니까.

이제 ’명사 초대‘만 깔끔하게 끝낸다면.

백도회가 만든 시설과 멋들어진 의자, 그리고 칠색화 모두가 내 차지가 된다는 이 말씀.

음화하하하. 아팠던 배가 다시금 회복되는 것 같다.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송정무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잠시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일세.”

“네, 말씀하시지요.”

“음…… 자네, 형산파의 복마부를 계속 쓰게 된다면 어떨 거 같나?”

응? 무슨 질문이 이래?

나는 즉답했다.

“당연히 좋겠지요.”

“크흠, 대신 다른 문파의 파사 기물은 쓰지 못한다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생에서 정마대전이 일어나고 많은 문파들이 사문의 파사와 제령 기물을 내놓았지만, 정작 도움이 된 기물을 제공한 곳은 형산파와 모산파를 비롯한 일부 문파에 한정된다.

더구나 형산파의 것은 그중 가장 탁월한 효능을 보였고.

그러니까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란 말씀.

“당연히 형산파의 복마부만 계속 쓰겠지요.”

“그런가?”

내 단언에, 송정무는 어쩐지 기쁜 얼굴로 두툼한 가죽 주머니 세 개를 내밀었다.

“이게 무슨……?”

송정무가 더없이 분명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자네가 앞으로도 형산파의 복마부를 계속 써준다면, 형산파는 자네의 손에 복마부가 마를 날이 없게 해줄 걸세.”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정말이십니까?”

“물론이네. 자네가 약속만…….”

“물론입니다! 약속하고 말고요! 다른 문파의 기물 따윈 다 치워버리라 하십쇼!”

내 격한 반응에 송정무가 도리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어, 어. 그, 그런가?”

아무렴요, 그렇고말고요.

형산파가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냈는지 나와 크게 상관없지만, 내게 복마부를 무한정 지원해 준다면야 나로선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법.

“……근데 어찌 이런 통 큰 결정을?”

“지금 자네가 어떤 물건을 쓰는지가 강호의 유행을 선도하지 않나. 그래서 이참에 자네를 선점하고자 이리 지원하는 것이지.”

“역시나 대문파는 다르군요!”

아무리 상관없다고 하기로서니, 사실 내 덕이 맞긴 하잖아?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송정무에게 물었다.

“아 참, 그리고 제가 우연한 기회로 복마신목을 하나 구했는데. 그걸 호부로 만들 수 있게 의식을 좀 치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뭐, 물건까지 준비되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네만. 자넨 정말 앞으로 사술을 쓰는 자들이 많을 거라 예상하는군?”

사술뿐이겠나, 그보다 더 심한 마기를 쓰는 놈들도 나올 거다.

유비무환이라고 난 마기에 절여져서 마인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기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쿠당탕.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일었다.

“뭐지?”

“잠시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처음 보는 인원이 간부단의 손에 붙들려 제압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백도회 사람인데. 송정무 대협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송정무 대협을?”

내가 턱짓을 하자, 장우재가 백도회의 사람의 아혈을 풀었다.

백도회 인원이 급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제, 제발 송정무 대협을 만나게 해주시오!”

“무슨 일입니까?”

“…….”

대답 없는 백도회의 인원.

이윽고 송정무가 나와 백도회 인원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을 피운 겁니까?”

적잖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

그러나 백도회 인원은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는 듯, 다급히 소리쳤다.

“대협!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급한 일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야기하시지요.”

“……그건…….”

백도회 인원은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송정무의 얼굴이 불쾌하게 굳었다.

“할 말이 없는가 보군요. 아니면 급한 일이 아니거나.”

공개된 이곳에서 말하라는 간접적인 압박에, 백도회 인원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국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 도, 도와주십시오! 저희 행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나를 비롯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에 의아함이 어린다.

백도회 인원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하, 학관생들이 기문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송정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러 온 겁니까?”

“그, 그것이 저도 자세히는 모르나 기문진에 새로운 장비를 결합했는데……. 그것이 학관생들의 정심을 흔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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