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원수의 은혜(2)>
무림학관 대마장.
평소 무림학관에서 사용하는 말들을 관리하고 보관하는 곳에 말 대신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장의 중심엔 간이로 만든 전각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기문진을 시험하기 위해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았던 듯했다.
“확실히…… 이상하군.”
송정무의 말마따나 대마장에 펼쳐진 기문진의 모양이 매우 이상했다.
본래 기문진은 나무와 바위 등, 일상적인 겉모습으로 사람들의 경계를 허문 후.
안에 들어선 이들의 이지를 혼란케 하여 기문진 바깥으로 유도하는 것이 기본적이었다.
칠성칠금진이 강호 전체에서 유명했던 건, 팔문을 자유로이 조절하여 기문진 안에 들어선 이들을 자연스레 함정에 빠뜨리거나 금옥에 떨어지게끔 만들 수 있었기 때문.
헌데 지금 대마장에 펼쳐진 양의팔괘만상진은 검은 안개로 둘러싸여 뚜렷하게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형태를 숨겨 사람들을 사지로 인도하는 본래의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
아아아아악!
아흐흐흐흑.
제발…… 제발…….
더구나 어찌 된 일인지 기문진 안에선 고통스런 비명이 연신 들려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내가 진법가에게 다가가 묻자 신경질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 수습하고 있는 중이다. 뒤로 물러서라!”
낯빛이 창백해진 진법가의 무례에도,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난 무림학관의 대표인 진소운이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제야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진법가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진소운?”
“네. 내가 그 진소운입니다.”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뒤로 물러서라.”
“…….”
하, 이거 말이 안 통하네.
나는 약간의 내기를 실어 다시 물었다
“제갈정기는 어디 있습니까?”
“무, 물러나라니까!”
“지금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압도적인 기운에, 진법가와 그의 주변에 서있던 무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알을 뒤굴뒤굴 굴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송정무가 나선다.
“난 형산파의 송정무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 들었소.”
“아! 칠살멸혼 대협!”
갑자기 반색하며 허리를 구부리는 진법가.
이것들 봐라? 진짜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잠시 내 눈치를 살핀 송정무가 진법가에게 물었다.
“기문진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갑자기 나를 부른 건 무엇 때문이고?”
“그, 그것이…….”
말꼬리를 늘이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진법가.
참나, 내가 있을 땐 죽어도 말 못 하겠다 이건가?
내가 한소리 하려는 찰나, 송정무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나까지 부를 정도면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일 터. 그런데도 계속 권력 싸움이나 하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이오!”
“…….”
송정무는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이런 식이라면 나도 도와줄 순 없소.”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눈치를 한참이나 보던 진법가가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은 양의팔괘만상진의…….”
그가 내막을 말하려는 찰나, 다른 목소리가 진법가의 입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노호성이 들려온 곳에 모여 있던 학관생들이,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정기.
그가 씩씩거리며 진법가를 문책하려는데.
“관계자가 아닌 자에게 가문의 비밀을 밝힐 셈……!”
진법가의 시선이 성난 강아지처럼 ‘캉캉’ 대는 제갈정기의 뒤로 향한다.
그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하고.
“태상문…… 아니, 총군사님?”
소란을 떨던 학관생들도, 일제히 입을 다문다.
시장통 같던 대마장이 순식간에 장서고 내부처럼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런 침묵도 총군사에겐 거슬렸는지, 그가 옆에 선 학관장에게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소란스럽군.”
“조치하겠습니다.”
북원평이 교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학관생들을 대마장 밖으로 인도했다.
학관생들 또한 총군사까지 등장한 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 여기고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온전한 침묵이 내려앉은 대마장.
근엄한 표정의 제갈소명이 그제야 제갈정리에게 시선을 던진다.
“그래, 상황이 어찌 된 것이냐?”
뒷짐 진 총군사의 물음에 제갈정기는 재빨리 답을 하려다가 다시금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왜 남아있냐는 경계 어린 눈빛.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 시선에 제갈소명의 눈썹이 위로 치솟는다.
“분명 나를 불러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이라더니, 아니었던 것이냐?”
나를 그냥 두라는 제갈소명의 간접적인 명령에, 제갈정기가 입술을 한 차례 질끈 문 뒤 입을 열었다.
“……양의팔괘만상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도 눈이 있다. 넌 보고의 기본을 모르느냐?”
제갈소명의 냉기 가득한 질타에 제갈정기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개량판을 선보이고자 하다가…….”
“허……! 이제 막 완성된 기문진에서도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건만, 아직 시험도 안 끝난 개량판을 건드렸다고?”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이놈!”
제갈소명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나왔다.
대마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이 자리에 내가 네 조부로서 온 것이더냐!”
“…….”
그때.
아흐흐흐흑.
그, 그만! 제발 그만! 내가…… 내가 잘못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난 아냐…… 난 아니라고!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기문진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순식간에 대마장을 가득 메웠다.
탄식을 흘린 제갈소명이 고개를 돌려 나와 송정무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내부 인원들의 정심이 흔들리는 것 같으니 형산파를 데려온 것이더냐?”
송정무가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쥐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군사님.”
“오래간만에 보는데 하필 그리 유쾌하지 않은 자리군. 그래,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형산파의 파사가 도움이 되겠나?”
“…….”
송정무의 침묵에, 제갈정기가 고개를 휙 치켜들며 나선다.
“형산파의 파사와 제령은 천하제일입니다! 분명 안에 있는 인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
“네놈에게 묻지 않았다!”
“…….”
제갈정기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제갈소명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송정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총군사께서도 아실 테지요. 안타깝게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제갈정기가 당황하여 몸을 움찔거린다.
“그, 그게 무슨! 서, 설마 지금 진소운을 돕고 계시다고 제갈세가와 등 돌리시겠다는 겁니까?!”
제갈정기의 말에 송정무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명백한 경멸의 눈초리였다.
“자네는 내가…… 그리고 우리 형산파가 그리 우습게 보이는가?”
“…….”
입을 열 때마다 오히려 제게 불리한 쪽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제갈정기.
왜인지 제갈소명이 제 손자와 나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미안하네. 진명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내 분명 그리하지 말라 수차례 일렀거늘.”
“지금 여긴 총군사님으로 오신 것 아닙니까.”
“내 나중에 문주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제갈소명과 송정무의 대화에, 제갈정기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할아…… 아니 총군사님, 그게 무슨.”
“넌 좌도방문의 기운과 우도정문의 기운의 차이도 모르는 것이냐?”
“……네? 그게 무슨…….”
제갈소명이 한심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형산파의 파사는 올바름으로 그릇됨을 해소하는 힘. 애당초 올바른 기운으로 만들어진 양의팔괘만상진의 환상이 형산파의 기운으로 해소가 되겠느냔 말이다.”
“…….”
제갈정기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에 몇이나 들어가 있느냐?”
제갈소명의 질문에 진법가가 바짝 긴장하며 말했다.
“치, 칠십팔 명입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에 제갈소명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많이도 집어넣었구나. 들어간 지는 얼마나 됐지?”
“이, 이각…… 아니, 삼각이 되어 갑니다.”
“후……. 해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그, 그것이…….”
진법가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어 작게 의논하는 소리가 오고 간 후, 이윽고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사, 사흘……이 걸릴 듯합니다.”
제갈소명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눌렀다.
“그것도 최소한이겠지?”
“……그게.”
“개량판의 장비들이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모를 테니까 말이다.”
“네…….”
진법가의 힘없는 답변에 장내의 인원들이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도회의 행사가 재개된 만큼, 지금 양의팔괘만상진 안에 들어간 인물들은 백도회와 밀접한 관계인 이들이 대부분.
그러니까, 백도회 내에서든 강호 전체로 보아서든,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지위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압박감이 제갈정기로 하여금 제갈소명까지 데리고 오게 만들었다.
“할아……, 아니 총군사님. 총군사님께선 방법이 있으시지요?”
절박한 물음에도 제갈소명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양의팔괘만상진이 어떤 절진인데.’
무려 그 제갈세가가 이십 년에 걸쳐 연구 끝에 만들어 낸 희대의 기문진이다.
더구나 끝없는 개량을 통해 지고한 수준에 다다른 기문진.
제갈세가가 돈에 미쳐 기문진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는 세간의 비판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개량판들 덕분에 마교의 마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
지금 제갈세가의 입장에서 양의팔괘만상진을 해진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제갈소명이 희망을 품은 제갈정기의 눈을 바라보았다.
“있다!”
“그, 그럼…… 그것을 어서!”
그리고, 그 희망의 빛을 가차 없이 꺼트린다.
“대신 안에 인원들이 모두 죽겠지.”
“네? 그게 무슨…….”
“개량 장비로 인해 안정적인 기문진이 흔들리고 있다. 그 때문에 안에 들어간 아이들의 정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지.”
제갈소명의 이야기를 듣는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동시에 침을 삼켰다.
제갈소명이 무심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부술 수 있다.”
“부수다니요!”
제갈정기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대경했다.
그러나 제갈소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럼 달리 방법이 있느냐?”
지금 기문진을 부순다는 것은, 곧 팔문을 비롯한 모든 문을 단숨에 무너뜨리겠다는 의미.
빈대가 나온다고 사람이 들어간 초가집에 불을 지르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갈정기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내부의 인원들이 죽지 않습니까!”
“아니면 사흘 뒤에 광인이 된 녀석들을 보거나.”
“……!”
제갈소명이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선택하거라. 시체를 볼 것이냐? 광인이 된 아이들을 볼 것이냐?”
“……으.”
“이 일을 지시했을 때부터 책임에 대한 각오는 가지고 있었겠지?”
제갈소명은 제 손자가 아닌 마치 죄인을 대하듯 제갈정기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쩐다…….’
그러는 와중, 나도 제갈정기 못지않게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서는 게 맞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였다.
괜히 나섰다간, 그나마 관계가 나쁘지 않은 제갈세가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반대로 나서지 않으면, 백도회가 무너지고 내 자리를 공고히 다지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지.
‘분명 그러한데…….’
아아아아악!
어, 어머니! 아버지!!!!
미안하오! 잘못했소!
다시금 양의팔괘만상진 안에서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
내가 택해야 할 답은 명확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총군사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린다.
나는 제갈소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책임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
“…….”
“…….”
내 한마디에 대마장 내부에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학관의 교두들은 물론이고 제갈세가의 진법가들도 마치 미친놈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제갈소명만이 올곧은 시선으로 내게 되묻는다.
“그럼?”
“일단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왠지 모르게 제갈소명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하다.
“……구할 방도가 있겠느냐? 내부의 기둥들이 뒤틀린 탓에 진로(陣路)가 계속 바뀐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 한들 길이 바뀌면 무슨 소용이더냐.”
“저도 안에 들어가서 찾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의 눈에 의아함이 깃든다.
“그럼?”
나는 제갈세가 진법가들을 한번 쭉 둘러보다가 제갈소명에게 물었다.
“파진……해도 되겠습니까?”
“파진?”
그때, 제갈정기가 눈을 부릅뜨며 발악했다.
“진소운! 감히 그 입에 파진을 올리다니! 제갈세가의 기문진을 어떻게 보고……! 뭐 하느냐, 당장 저놈을……!”
짝!
청명하게 울리는 따귀 올려붙이는 소리와 함께 제갈정기가 놀란 얼굴로 제갈소명을 바라봤다.
“하, 할아버님…….”
믿었던 동료에게 칼침을 맞은 듯 배신감 가득한 얼굴이 된 제갈정기.
제갈소명은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네 이놈!!! 지금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거늘! 한낱 가문의 위세가 네게 그렇게 중요하더냐!”
“…….”
그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가 다시금 제갈정기에게로 옮겨간다.
“네놈은 이곳에 있을 자격도 없다! 뭐 하느냐! 당장 이놈을 끌어내라!”
주춤거리던 무사들에게 다시금 불호령이 날아든다.
“당장 끌어내라 하지 않았더냐!”
“네, 넷!”
마치 시체처럼 축 늘어져 두 발이 질질 끌리며 끌려나가는 제갈정기.
제갈소명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파진을 할 수 있다고?”
제갈소명도,
제갈세가의 진법가들도 쉬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갈소명만 아니었으면 나한테 달려들고 싶어 하는 표정들.
그도 그럴 게 ‘파진’이란 그 진법의 약점을 알고 외부에서 강제로 해체하는 법을 말하니까.
천재들의 이십 년 정수가 담긴 양의팔괘만상진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을 쉬이 믿고 싶지 않을 터.
전생에서도 마뇌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양의팔괘만상진을 ‘파진’한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내가 마뇌와 똑같이 파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문진에 깔려 죽어있는 수십의 시체를 보는 것보다, 광인이 되어 나타날 학관생들을 보는 것보단.
‘이편이 낫지 않겠어?’
이 일로 인해서 제갈세가와 어떤 관계가 될지 예측조차 안 되지만.
아아아아악!
아흐흐흐흑.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시오! 잘못했소!
일단은 사람부터 구하고 보는 게 옳은 선택이니까.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했다.
오직 그것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