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원수의 은혜(4)>
무림학관.
사(四)인 기숙사.
악주평은 가문의 비전으로 치료받은 발을 풀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진소운이 제갈세가의 기문진을 파진하겠다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네.”
“뭐?”
다시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진이라니.
세상에 나온 지 십오 년이 넘은 칠성칠금진도 아직 파진 방법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제갈세가의 회심의 기문진인 양의팔괘만상진을 파진하겠다니.
“그게 백도회장이 양의팔괘진을……. 그래서 그 안에 사람들이……”
뭔가 이야기가 더 들려왔지만 악주평의 귀에는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대신 ‘진소운’과 ‘파진’, ‘사람들’이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번개가 친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기회다! 기회!’
진소운이 실패한다면, 그 책임을 물어 학관에서 쫓아내고 죄를 뒤집어씌워 사문도 망하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진소운이 성공한다면?
이제 막 새로이 개발된 기문진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니, 무림맹의 간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외통수!
벌떡!
그는 부상당한 발은 상관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응? 왜 갑자기 일어서나?”
“대마장에서 백도회의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했지?”
“그렇네.”
쩔뚝쩔뚝.
“이보게, 주평이 어디 가는 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가뿐하게 무시한 악주평은 쩔뚝거리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가문에서 보내준 의원이 말하길 결국 장애가 남을 거라 말했다.
완벽하게 회복한다 한들, 신법을 펼치는 데 어색함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무인으로서 발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남들보다 몇 걸음은 뒤처진 상태로 그들을 쫓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진소운! 네놈이 이따위 짓을 하고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냐?’
부지불식간에 당한 기습으로 인해 자신은 장애를 얻었건만, 진소운은 여전히 대표로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려 한다.
악주평은 절대 이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문의 힘을 이용해 태을문을 압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진소운 개인에게도 복수를 해줘야겠지.
이번 일로 악병비에게 조금 혼이 나긴 했지만, 악병비도 진소운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시금 감찰각의 힘을 동원하면 이번에야말로 진소운을…….
그때.
“악주평.”
골목 안에서 거지처럼 머리를 치렁하게 기른 웬 쬐끄만한 놈이 나타났다.
“……야율극?”
“드디어 나왔군.”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야율극의 얼굴을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썩 비켜라. 지금은 네놈을 상대할 시간 따윈 없으니.”
그러나 야율극은 악주평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더 다가선다.
그에게 맞던 나약한 소년의 기세가 아니었다.
“그래? 난 너한테 볼일이 있는데.”
“이 망할 새끼가……. 어차피 훗날 네놈도 사지를 잘라놓을 테니 그날까지 팔다리 잘 간수하고 있어라.”
“왜? 지금은 내가 무서운가?”
발이 불편한 악주평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소리만 질러댔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장애가 남았다는 것이 소문이 돌았던 탓일까?
이젠 하다 하다 별 같잖지도 않은 것들까지 만만하게 보고 달려든다.
“네놈은 아직도 왜 자신이 그렇게 처맞았는지를 모르는구나.”
철컥, 철컥.
악주평이 허리춤에서 꺼낸 조립식 창을 완성시킨다.
그에 맞춰 야율근이 양손을 치켜들며 기수식을 펼친다.
악주평은 묵천암뢰신공을 끌어올려 악가창법을 준비한다.
“그래, 네놈의 단죄를 미뤄둘 필요도 없겠지.”
악주평의 창이 섬찟하게 공기를 가른다.
묵운섬전창을 가장 주력으로 사용해 왔지만, 발에 남은 장애 때문에 효과적인 돌격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 한들, 지금의 악가를 만든 악가창법이 결코 떨어진다 볼 수 없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의 팔·다리 정도는 잘라낼 수 있는 것인데…….
스륵, 파팍!
야율극의 심장과 단전을 꿰뚫던 악주평의 창의 궤적이 이상하게 틀어진다.
“으윽?”
충분한 힘을 불어넣었음에도 창로는 뒤틀려 엄한 곳을 찔러대고, 결국 품에 파고든 야율극의 양 정권이 악주평의 복부를 후려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낀 악주평이 황급히 몸을 돌려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퍼펑.
“커흑!”
다섯 걸음 밀려난, 악주평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맞은 타격 때문에 아침에 먹은 식사들이 울렁거리며 올라오는 기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야율극의 실력이 달라져 있었다.
악주평은 자신이 저 나약하고 쪼그만 녀석에게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칠성의 내공을 불어넣어 창기를 만들어 낸 악주평이 불편한 발을 겨우 움직여 야율극을 향해 수십 차례 창을 찔러넣었다.
쐐액- 쐐액-
삼방 전체를 가득 채우며 야율극의 온몸에 구멍을 낼 것 같은 창극을 보며, 야율극이 작게 읊조렸다.
“역시나, 그놈하고 비교할 바는 아니었군.”
차갑게 눈을 내리깐 야율극이 두려움 없이 악주평의 품속을 파고든다.
일전에 감찰각 당주 악병비를 상대로 하던 진소운의 모습을 떠올린다.
악주평의 것보다 더 삼엄한 기세로 날아드는 창날 속을 파고들던 그때의 진소운을.
야율극이 바짝 세운 수도로 창봉을 잡고 연화(蓮花)를 펼친다.
끼기기긱.
본래 창이었다면 낭창낭창하게 구부러졌을 부분들이 뒤틀리며, 결국엔 부서졌다.
퍼퍽.
갑작스레 창을 타고 흐르는 반탄력에, 악주평이 결국 창을 놓쳐버리고.
당황한 와중에 야율극을 향해 봉황신권을 펼친다.
그러나 야율극은 악주평을 내려다보며 조소를 지었다.
“내가 그간 이걸 수련한다고 그놈한테 얼마나 처맞았는지 아나?”
“……뭐?”
야율극의 눈빛이 번쩍 빛난다.
“그니까 넌 뒈졌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던 야율극은, 악주평의 주먹을 쥐곤 그대로 설화(雪花)를 펼친다.
악주평의 몸이 힘없이 끌려가며 붕 떠오른다.
‘이, 이게 무슨…….’
중력에 저항하듯 붕 떠오른 몸이 곧장 수직으로 바닥에 처박힌다.
콰쾅.
난생처음 느껴보는 수법에,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
그리고, 절대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공포감.
“크으윽…….”
신음하는 악주평에게 다가간 야율극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방금 전까지 진소운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찼던 악주평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무림학관.
학관장실.
“크흠…….”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학관장실은 환기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왠지 공기가 답답한 느낌이 든다 이거지.
“커흐흠!”
어쩌면, 여기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르고.
제갈세가의 기문진을 파진한 뒤, 실컷 엄살을 피며 버텨보려 했건만.
의약당에서 긴급하게 불려온 사마정이 내 손 상태를 보곤 ‘괜찮습니다.’라는 진단을 내려버렸다.
이리 상태가 중한 환자를 괜찮다며 금창약 바르는 것으로 끝내다니.
거참 눈치가 없구만.
이렇게나 아픈데.
“어우…… 내부의 혈맥이 뒤틀렸는지, 자꾸 손이 떨리는군요. 어서 빨리 돌아가서 요양을 좀…….”
나는 격하게 진동하는 손을 내보였지만, 제갈소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상태가 심해 보이는 건 왼손인데, 왜 오른손을 떨고 있는 것이냐?”
제갈세가의 진법가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그랬나?
너무 아파서 정신이 좀 없었나 보다.
“본, 본래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위중한 것입니다.”
“사마정은 의술 하나로 특별히 영입된 사람이다. 현재 의원각에서도 실력으론 견줄 사람이 얼마 없지. 나이를 생각하면 더 그렇고.”
“…….”
내가 입을 다물자 장내에 정적이 감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사람을 구해왔는데, 이런 취조의 자리를 만드는 게 말이 되나?
이러니 무림맹이 마교의 손에…….
“일단 가장 중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소.”
제갈소명을 중심으로 내 반대편에 앉은 진법가들이 눈초리를 매섭게 빛내며 물어온다.
“양의팔괘만상진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요?”
그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찍찍 반말을 내뱉진 않는다는 거?
하지만 그런 거로 위안으로 삼기엔 난 너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몰랐는데요.”
“…….”
여기서 잘못 꼬투리가 잡혔다간 진짜 감찰각의 지하실에 끌려갈지도 모르니까.
나를 둘러싼 이들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몰랐다?”
그러곤 이내 일제히 허탈한 비웃음을 터트린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미래에 겪어 봐서 알고 있다 말할 순 없잖아.
진법가 중 한 명이 의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묻는다.
“양의팔괘만상진은 제갈세가 내에서도 일부 중의 일부 인원만 연구를 해왔던 기문진이오. 외부 사람은 물론이고, 세가 내부 사람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단 이야기지.”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
질문을 하던 진법가는 말문이 막히는지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거렸다.
물론, 이대로 계속 어깃장을 놓을 수만은 없다.
제갈세가의 기문진은 무림맹에서 따로 지정하여 관리할 정도로 백도연맹의 기밀 중에서도 기밀.
그냥 ‘아 몰라!’ 하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씀.
‘하아…… 어쩐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
‘너네 기문진, 미래의 마뇌한테 다 털림.’이라고 해봤자, 이 이야기를 믿어주지도 않을뿐더러.
자존심에 상처 입은 제갈세가가 어떤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니까.
내가 고뇌하는 사이에도, 제갈사가 진법가들은 끊임없이 나를 압박한다.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것이오. 이번 사태의 공과를 떠나 이는 기밀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으니.”
시부랄…… 배은망덕한 새끼들.
하지만 중요한 문제이긴 해서, 마냥 욕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어떤 변명이라도 짜내보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때.
“천기, 그놈에게 들은 것이겠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게 무슨……?”
제갈소명이 북원평이 준비해 준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
“저놈 사문이 천기를 데려가지 않았더냐. 일전에 천기가 가문 내에 문제를 일으켰던 부분도 생진에 관한 것이었고.”
오호라.
제갈천기가 금옥에 갇혔던 이유가 단지 기관진식을 연구해서만은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또 몰랐던 사실이네.
“그, 그럼 기밀 유출자가 천기 공자란 말입니까?”
“쯧.”
얼빠진 물음에 제갈소명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네놈은 천기가 그 정도 주변머리도 없는 놈이라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천기 그놈이 생진에 관한 존재를 알려준 것이겠지.”
“하지만 태상문주…… 아니 총군사님. 아무리 생진의 존재를 안다 한들 파진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갈소명이 찬찬히 고개를 돌려 턱 끝으로 나를 가리킨다.
“저놈이잖나.”
“네?”
“마령고원에서 무량불괴멸혼진을 파훼한 놈이 저놈이다. 모르고 있었더냐?”
“…….”
그의 눈빛에 단단한 신뢰감이 어린 듯 보이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인 걸까.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모산파의 도움을 받아 멸혼진을 제집 안방 드나들던 놈이니. 양의팔괘만상진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겠지.”
어쩐지 제갈소명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큰 엿을 먹은 상황에서 왜 웃고 있지?
실성했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양의팔괘만상진은…….”
탁!
제갈소명이 탁자를 내리치며 진법가의 입을 막았다.
“아직도 우물에 갇혀 있는 것이냐?! 내 항시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을 넓게 보라고! 네놈들이 반푼이 같은 진법을 급하게 만들어 발표한 것도 멸혼진의 영향 때문임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더냐?”
“…….”
진법가들이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제갈소명이 노기가 어린 얼굴을 쉬이 풀지 못한 채, 날 보며 말했다.
“나머지는 네가 설명해라.”
아니, 설명하긴 설명합니까?
갑자기 던져진 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난 살기 위해 입을 털기 시작했다.
“천기에겐 생진에 관한 개념을 들었을 땐, 천고에 다시 없을 절진이 탄생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허나 생각해 보면 세상에 완벽한 무공이 없듯, 완벽한 기문진이라는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당당한 태도에, 진법가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몇 주, 아니 몇 달을 내리쏟아 가상의 생진이란 걸 만들고 머릿속으로 실험을 해보다 보니, 어쩐지 파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몇 주야?”
“몇 달?”
내가 제시한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들.
아니, 근데 마뇌 그 자식은 만상진을 석 달도 채 되기 전에 파진시켰다고.
그래서 나도 그 기준으로 말한 거란 말이야.
이쯤 되자 나도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옮겨가는 기분이었다.
이, 이러다 마인이 되어 버릴지도…….
“네. 그래서 그냥 생각대로 해보니 되던데요.”
“…….”
“…….”
진법가들의 얼굴이 일제히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시발. 그러게 예의를 갖출 때 잘했어야지.
그러나 내 대답이, 수재라 불리는 제갈세가 진법가들의 발작 지점을 눌렀나 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우리 제갈세가가 몇 년에 걸쳐 이걸 만들어 냈는데. 어디 태을문 따위가…….”
탁.
제갈소명이 탁자를 치는 소리에 진법가가 멈칫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그가 내뱉지 않은 문장들이 절로 완성이 되어버린 후였다.
“……태을문 따위가 뭐요?”
“…….”
“태을문 따위가 뭐냐니까? 말해봐요? 아니 말해보라니까!”
내가 벌떡 일어나 진법가의 멱살을 쥐어 당기자, 대경한 다른 진법가들이 나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되겠나?
평생 책상 놀음만 했던 인간들이 사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가진 괴물을 상대할 수 있겠냐고.
“말해보라니까! 태을문이 뭐! 태을문이 뭔데?!”
“으어억, 으어어억.”
진법가를 마구 흔들던 내 손을 북원평이 잡았다.
“그만하게나.”
나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사형! 지금 감히 사문을 욕보인 놈을 용서하자는 겁니까?”
“…….”
북원평의 눈에도 당황이 어린다.
진법가들이 놀란 것도 당연한 상황.
이것들이, 감히 누구의 사문을 건드린 줄 알아?
속가제자이긴 하지만, 무려 무림학관 학관장의 사문이다 이 새끼들아!
“감히 저놈들이 사형의 사문인 태을문을 욕보이려 했다니까요! 날 말릴 게 아니라 저놈의 목을 잡아채야지.”
“그게 무슨? 삼청무상검이 태을문에 왜…….”
“……하아.”
북원평도 결국 손을 놓아 버렸겠다 나는 본격적으로 진법가를 들어 올려 마구 흔들려 했다.
그러나
“그만.”
찻물을 들이켜며 내뱉은 고요한 한마디에 나도 움찔하여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조금만 더 하면 이대로 무마 할 수 있었는데.
산발이 되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진법가를 놓아주자, 다른 이들이 그를 엄호하며 나를 향한 경계의 눈빛을 멈추지 않는다.
“이번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겠다.”
“총군사님!”
“총군사님! 좀 더 면밀한 조사를!”
“이대론 안 됩니다!”
진법가들이 일제히 반발하자 제갈소명의 눈초리마저 사나워진다.
“자네들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지고 싶은 것인가?”
“…….”
“조사를 진행하면 자연스레 네놈들의 잘못이 부각 될 것이다. 세가의 공자를 꾀어 완성되지도 않은 장비를 설치한 대가를 치르고 싶은 게냐!”
“…….”
세상 콧대 높은 진법가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여기서 일을 마무리 짓겠다. 아직도 할 얘기가 있는 사람이 더 있나?”
진법가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가봐라.”
제갈소명의 축객령에 진법가들이 일제히 일어났고, 나 또한 더 이상 볼 일이 없었기에 나가려 했는데.
“진소운은 나가라 하지 않았다.”
“……차가 모자라서 더 채우려는 중이었습니다.”
“학관장 자네도 나가보게.”
“……네.”
“아니, 왜……?”
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늙은 사형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늙은 사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나갈 뿐이었다.
저, 저! 도움 안 되는 늙은 사형 같으니라고.
쪼르르.
“차가 넘친다.”
“…….”
아무리 천천히 담아도 찻잔의 크기는 정해져 있는 법.
결국 난 제갈소명 앞에 앉았다.
“…….”
내가 자리에 앉았음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는 제갈소명.
그가 나를 독대하면서 할 이야기라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또 만통부로 오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려고 하는 건가?
내가 애써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때.
제갈소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 정체가 무엇이냐?”
“네? 그게 무슨…….”
“아무리 천기가 너를 따른다 한들 가문의 기밀을 말했을 리 없지.”
“…….”
“너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냐?”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시발, 이렇게 변검을 꽂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