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16화 (216/357)

216. <원치 않는 초대(5)>

모용강.

무공 고수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았던 강호의 황금기 시대.

흑도와 백도를 초월하여 꼽은 십존(十尊)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절대 고수.

혼란한 정마대전 시기,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는 무림맹 대신 무사들을 일으켜 강북을 수호했고, 가문의 무공을 공개하여 마도에 저항하도록 독려했었다.

정마대전 이후 모용세가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존경받을 존재로서 길이길이 남아 있었다.

‘분명 공이 과를 덮은 유형의 인간이었지.’

예상되지 않는 사고의 과정.

제어할 생각조차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

신경질적인 분노를 상대에게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무력과 모용세가라는 거대한 가문까지 가진 무소불위 왈패.

이게 그의 민낯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존경받진 못했을 테지.

하물며 저 영감탱이의 말 따위에…….

“왜 대답이 없지? 모용세가의 이름이 네게 만족스럽지 않은 게냐?”

나는 생각을 멈춘 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태을문 출신인 내가 모용세가의 데릴사위라니?’

소설로 집필되어도 개연성이 없다며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이야기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기회인데, 만족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전의 남궁세가에서도 물어왔던 것처럼, 방계의 여인과 혼인하여 그 가문에 종속되는 선택은 할 수 없다.

나에겐 태을문과 소정대를 비롯해 지켜야 할 사람이 많으니까.

‘더구나, 모용세가엔 설 소저도 있으니…….’

모용설은 전생의 나에게도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여인.

그런 여인을 가까이 두고 다른 이와 혼인을 올린다는 건, 나에게도 나와 혼인을 올릴 사람에게도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모용강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아니면, 네 눈엔 설이가 못나 보이는 것이냐?”

“네?”

뭔 소…….

엄마야, 지금 말하는 게 모용설이었어?

“끝없이 드나드는 중매쟁이로 인해 문간에 철을 덧대었고, 매일 날아드는 청혼서를 불쏘시개로 쓴다.”

모용강이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고는 슬쩍 내게 턱짓한다.

“네놈도 사내라면 우리 설이에 대해선 들어봤겠지?”

모용설…… 모용설…… 모용설이라니…….

그, 그러니까.

그녀가 나의 부인?

나는 그녀의 부군?

세상에나…….

그럼 내 부인이 검후(劍后)라는 거잖아?

머릿속에서 모용설과 혼례를 올리고 자식을 나은 뒤, 그 자식의 손자와 손녀까지 보고서 마지막으로 모용설의 손을 부여잡고 임종을 맞이하는 상상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당신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니까. 그렇게 살아남아…….]

소정대를 뛰쳐나와 산천으로 도망치던 나에게 실망한 그녀가 한 이야기.

그날의 차가운 얼굴과 눈빛, 냉랭하게 돌아서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어 전투 후에 지친 몸으로 내게 다가와 아버지 이야기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가문을 잃고 파궁으로 죽은 동생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차례차례 선명하게 떠오른다.

‘후훗.’

나도 모르게 조소가 입가를 비집고 삐져나온다.

대체 무슨 환상을 갖는 건지.

애당초 나는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지 않았던가.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소정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검후라는 별호를 얻는 일은 좀 더 늦춰지겠지.

가문을 잃지 않는다면 소정대에 들어올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진정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 그것을 바란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비틀었다.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

“요즘 같은 세상에 정략결혼이라뇨. 손녀분께 미안하지도 않으십니까?”

“뭬야? 감히 네놈이!”

나는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제가 말한 건 다른 겁니다.”

“다른 거?”

분명 모용강은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다.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부류라면…….

감성을 뒤흔들면 그만 아닌가.

“애당초 모용세가가 검문입니까?”

“네놈이 지금 내 가문을 욕보이는 게야?”

나는 그의 말을 가벼이 무시하고, 그의 몸을 훑었다.

“그렇다면 어르신의 검은 어디 있습니까?”

모용강은 무공에 미친 인간이다.

그 괴랄한 성정만큼이나 무공에 관한 실험정신도 뛰어나다.

방금 공간을 일그러뜨릴 괴상한 무공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의 감성은 무공에서만큼은 철벽처럼 꽉 막혀 있지 않다.

모용강이 ‘헹’ 하고 콧방뀌를 뀌었다.

“네놈같이 알량한 놈은 모른다. 나 정도 되면 내가 쥐는 것 행하는 것 모든 것이…….”

“만약, 모용세가의 검법이 모두 사라져 버리면, 모용세가는 더 이상 모용세가가 아닌 겁니까?”

“……?”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겠지.

정마대전 이전엔 무림맹의 어떠한 문파와 가문도 멸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 테니.

하물며 천하의 모용세가가…….

나는 그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재차 물었다.

“모용세가가 더 이상 검을 쓰지 못한다면, 모용세가는 더 이상 모용세가가 아닌 것입니까?”

모순적이게도 전생에 모용세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던 존재가 바로 파궁이다.

사람들은 그 조부에 그 손자라며 이미 멸문하여 사라진 모용세가를 한껏 치켜세웠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모용강의 눈초리가 스산하게 바뀌었다.

여태껏 보여준 왈패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진지하게 그의 감정을 건드려 버렸다는 이야기.

내가 바라던 바다.

여기서 한 번 더 건드려 주면-

“모용세가의 공의(空義)는 무엇입니까? 파검입니까?”

“……!”

파검은 역대 모용세가의 가주에게 붙었던 별호.

모용세가는 파검의 이름을 지킨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나의 비아냥 어린 도발을 참을 수 없게끔 만들겠지.

역시나.

부들부들.

고개를 숙인 모용강이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겨우 작은 흠결을 숨기자고 큰 잘못을 저지르다니.”

예의 도망칠 때 보았던 공간의 일그러짐.

빠르게 지나치며 보았을 때와는 달리 어마어마한 압력이 온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이쁘게 봐주었더니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태을문엔 이미 충분히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를 단죄할 자격은 되겠지.”

드득, 드득, 드드득.

온몸의 피의 순환이 멈춘 것처럼 피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칠공으로 피가 쏟아져 나올 듯했고, 눈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또 유지했다.

“가주께서 생각하시는 모용세가의 공의가…… 파검이 맞습니까?”

“허? 아직도 그 간악한 혀를 놀리려 하느냐? 그래 맞다. 파검. 그것이 우리 모용세가가 지난한 세월 동안 지켜온 것이다.”

나는 겨우 숨을 몰아쉬면서도 또박또박 내뱉었다.

“……전, 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라?”

전생에서 철응처럼 전장을 누비던 파궁의 모습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마교를 막는 파궁의 신위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하늘조차 부술 기세……!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모용세가의 진정한 공의(空義)는…… 크흡, 바로 파천(破天) 아닙니까……!”

“……!”

일순, 실시간으로 조여들던 압력이 우뚝 멈췄다.

여전히 고통스럽긴 했지만 죽을 것 같은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나는 더운 숨을 겨우 토해냈다.

“저희 태을문의 공의가. 만검이라 생각하십니까?”

“…….”

“태을문은 오백 년간 만검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태을문은 계속 이어져 내려왔지요.”

잠시 숨을 고른 후, 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모용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어린 시절 처음 검을 잡으며 배웠던 태을문의 공의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태을문의 공의(空義)는 변화다.]

비록 재능의 부족으로 이류에 머물렀지만, 홍문기는 문파의 뿌리를 잃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잇는 것 또한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태을문은 지난 오백 년간 이름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

“…….”

잠시간의 침묵이 공간을 훑고 지나간 후, 모용강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파천…… 파천…… 파천…….”

마치 머리에 인이 박인 듯, 한 단어를 끊임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럴 수밖에.

파검만으론 볼 수 없는 세계.

오직 파천이 되어야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있으니까.

“하늘을 부수는 데 검인지, 권인지가 중요한 것입니까. 하물며 궁이라 한들 어떻습니까?”

모용강의 시선에서 적대감이 서서히 사라진다.

오직 오묘한 눈빛만이 남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재화는 궁 한 자루로 혈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일시당천이란 별호까지 붙여주었고요.”

그렇다. 사천에서 그가 궁으로 보여준 신위는, 놀랍고도 놀라웠다.

“재화가 가문의 무공을 이용해 장차 하늘을 부술 건데, 그것이 검이 아니라 궁이라 한들 문제가 있겠습니까?”

“허! 네놈은 확신을 하는구나?”

확신할 수 있다.

이미 전생의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파궁이 탄생했으니.

이번 생엔 재화의 말마따나 파천신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재화가 파검의 별호를 넘어 파천의 별호를 얻을 거라 확신합니다.”

“……파천이라.”

“그렇다면 모용세가의 대가 끊긴 거라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모용강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새로운 무학이 생긴 거지요.”

모용강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놈은 진정…….”

슬픈 것인지,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시선.

어쨌든 분노가 풀렸다는 점은 확실했다.

모용강이 파천이란 말을 듣고 가슴이 뛰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이제 이것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좀만 더 있다간 죽을 것 같아서 말이죠.”

“……아, 미안하다.”

응? 미안하다고?

생전 그에게서 들을 리 없다고 생각한 단어가 들려옴과 동시에, 몸을 옥죄던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멈췄던 피의 순환이 재개되면서 온몸에 전류가 흐른 듯 찌르르거렸다.

“어우…… 몸이야…….”

“괘, 괜찮으냐?”

이성이 돌아온 모용강의 태도가 어쩐지 신중해졌다.

역시나 파천이란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른지 알게 된 것이겠지.

나는 욱씬거리는 어깨를 일부러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어쨌든 전 모용세가를 위한 선택을 해왔던 건데……. 제 이야기도 듣지 않으시고.”

“크, 크흠. 그러게 진즉 이야길 했으면 되지 않았느냐?”

“이야기할 기회는 주셨습니까? 아니, 애당초 이야기하고 있는데 절 죽일 듯이 옥죄었던 그 기운은 뭡니까?”

모용강이 은근슬쩍 내 시선을 피한다.

“커흠……. 내 필생의 무학을 네게 견식시키고자…….”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저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순간, 모용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이냐?”

이 양반 이거, 다시 왈패 모습이 나오네.

그의 표정이 더욱 뻔뻔스러워진다.

“맞은 만큼 되돌려 주겠다 이거냐?”

다른 이들이라면 이런 모습에 쫄아 뒤로 물러났겠지만, 어디 내가 그럴 소냐.

“후, 됐습니다. 제 주먹이 닿아봐야 얼마나 아프시겠다고. 그냥 깽값이나 물어주십시오.”

“뭐?”

“왜요? 때렸으면 깽값 물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용강이 입을 쩍 벌리고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게다가 모용재화 대신 맞았으니, 깽값도 두 배로 청구하는 건 당연하지. 암 그렇고말고.

#

무림학관의 ‘명사초대’에 모용강이 나온다는 소문은 학관생들을 흥분시키게 만들었다.

“세상에! 파검 그분이?”

“내 평생에 그분을 직접 뵐 날이 올 줄이야!”

“그, 그럼 모용설 소저도 함께 오는 건가?”

“야! 내가 쟤랑 놀지 말라 그랬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아니, 애당초 넌 정도회 소속이라 진소운을 달가워하지 않았잖아?”

“……무슨 소리! 난 그가 백도회의 인원들을 구해준 모습을 보고 진정 협객이라 인정하기로 했네.”

학관생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소속과 사문을 뛰어넘어, 오직 행사에 참여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로 인해, 일부 개인 강습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인원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행사에 참여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가까운 무림맹에도 전달되었다.

사천의 전투가 길어지면서 내부에 팽배했던 긴장이 조금 가시자, 맹원들 중에도 학관의 행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인원들이 생겨났지만 학관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맹 내부에선 학관을 편애하여 그런 거물(?)을 초청한 것 아니냐는 불만 어린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쯔쯧, 평생을 제멋대로 살던 놈답게 이번에도 알차게 피해를 끼치는구나.”

제갈소명의 말에 모용강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소갈머리! 피해를 끼치기는 무슨 피해를 끼쳐!”

언성이 높아지자, 혁무강이 중재에 나섰다.

“허허. 그만들 하시오. 밖에 있는 아이들이 듣겠소.”

“헹! 맹주 자리에 앉아 어울리지도 않는 점잖을 떠는 모습을 보려니 어색하기 그지없구나.”

모용강의 공격이 제게로 향하자, 혁무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도통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유대는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대체 무슨 심경 변화가 있어서 갑자기 행사에 참석한 것이냐? 더구나 진소운의 부탁이라면서?”

제갈소명의 말에 모용강은 뜨끔하는 표정으로 얼른 차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크흠. 녀석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정도 부탁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

제갈소명의 눈빛에서 의심의 빛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제 손자 입학식에도 오지 않았던 놈이 타 문파 제자의 부탁을 들어주러 여기까지 왔다고?”

“커험! 커, 컥!”

“더구나 어쩌다가 손은 팅팅 부은 것이냐?”

손뿐만이 아니다.

목과 얼굴에 작은 생채기 같은 것이 나있고, 팔 전체에 멍 같은 것이 슬쩍슬쩍 보인다.

제갈소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쯧, 그 나이 먹고도 그렇게 싸우고 다니는 것이냐?”

“싸우긴 누가 싸웠다는 거냐! 이, 이건…… 그래. 다 가르침을 내리다가 그런 것이다.”

“가르침? 재화 그 녀석에게 말이냐?”

모용강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 빌어먹을 손자…… 아니, 그놈 말고 다른 빌어먹을 놈.”

“진소운?”

“그래.”

모용강의 말에 제갈소명과 혁무강이 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과연 파검과 진소운이 무슨 관계이기에 가르침을 주고받고, 부탁을 주고받는 사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의문을 풀어주듯 모용강이 덧붙였다.

“사위로 들일 놈이다.”

“사위?”

“……!”

모용강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치켜든다.

“장차 모용세가를 크게 세울 놈이지. 움하하.”

혁무강과 제갈소명은 마시던 차를 입 밖으로 내뿜으려던 걸 겨우 참았다.

천하의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모용강이 누군갈 저렇게 인정하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아니, 글쎄 그놈이 내 공멸권을 가뿐하게 피해내더라니까? 이제 약관을 넘긴 놈이 말이다! 더구나 그놈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우리 가문의 앞날까지도 생각하고 있더라. 세상에 그런 놈이 어디 있을꼬. 으하하하!”

생각만 해도 좋은 듯 웃음 짓는 모용강을 보고 제갈소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위인데 가문을 세운다라…… 혹, 데릴사위를 말하는 것이냐?”

“그래.”

“풉……!”

결국 제갈소명과 혁무강은 찻물을 내뿜었다.

모용강이 모용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아는 것을 넘어서, 외부인을 가문에 들인다는 결정을 저리 손쉽게 할 사람이 아니란 점을 잘 알기에 놀랐던 탓이다.

그러다 문득, 제갈소명은 모용강의 이야기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녀석이 태을문의 대제자라는 것은 알고 있냐?”

모용강이 당당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들었다.”

“태을문은 주로 대제자가 문의 전통을 이어간다.”

“……으잉?”

제갈소명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한숨을 내쉰다.

“……네놈, 진소운의 의향이나 상황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구나.”

“크흠……. 뭐, 같이 겸직하면 되는 거지. 명색이 모용세가의 사위 자리인데!”

“헹!”

그런 모용강을 제갈소명이 비웃어 주었다.

“역시나 네놈은 옛날과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무, 무슨 소리야! 녀석도 이야길 꺼내자 분명 좋아했었다!”

“좋아하긴……! 또 주먹으로 두들겨 협박한 것이겠지!”

모용강이 분을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자식이! 네놈도 내 주먹으로 설득당해 볼 테냐?”

“호오라! 이전처럼 팔금진에 갇혀 보름 정도 쫄딱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결국 혁무강이 나서는데.

“그만들 하시게. 밖에서 다 듣겠…….”

“넌 조용히 있어!”

“맹주께선 가만히 계십시오!”

씨알도 먹히지 않고.

이제는 강호의 명숙들이 된 이들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서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한바탕 투닥거린 후.

“그나저나 오는 길에 듣자 하니 사천 쪽이 꽤나 시끄러운 것 같더구나.”

모용강의 말에 제갈소명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화로운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이지.”

“무사들을 더 보내야 하는 것 아니더냐?”

제갈소명이 고개를 가벼이 내저었다.

“승기가 넘어오고 있다. 어차피 전쟁은 승리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인 게지.”

“흑도 놈들이 연맹을 꾸린다고 깐죽대는 것 같던데. 어떻게 내가 가서 한바탕 휘저어 주랴?”

어깨를 으쓱이는 모용강의 태도에 제갈소명이 눈빛을 이글이글 쏘았다.

바야흐로, 이(二) 차전의 시작이었다.

“그딴 짓을 하기만 해봐라! 내 당장에 무사를 끌고 네놈 가문으로 가, 풀뿌리 하나까지 남김없이 다 뽑아낼 터이니!”

“아니, 도와준다 해도 지랄이야!”

제갈소명이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며 비아냥댔다.

“전선을 두 개로 나누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거냐? 목 위에 달린 거로 생각이란 건 하고 있느냔 이 말이다.”

“헹! 나이 들면서 간도 소갈딱지만큼 작아졌구나. 그래서 연맹 꾸리는 것을 그냥 두겠다고?”

“네놈도 마인들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제갈소명은 모용상원이 습격받았던 일을 꺼내었다.

그제야 모용강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진지하게 보고 있는 거냐?”

“정시 중에 일어난 일도, 사천에서 일어난 일도 무엇 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다. 아마 흑도보다 더한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하는 거냐?”

“그건 아니네.”

“응?”

모용강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돌아간다.

대답은 혁무강에게서 나왔다.

“아마 어둠이 세상을 덮었을 땐, 우리도 흑도도 함께 싸워야 할 것이네.”

잠시 굳은 표정을 짓던 모용강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게 가능하겠나?”

“최선을 다해보아야지. 그게 불가하다면 그만큼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테니.”

강호가 생긴 이래로 흑과 백이 싸우지 않았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모용강은 어쩐지 생전 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앞으로 강호가 재밌어지겠네.”

묘한 미소를 짓던 모용강이 말했다.

“동맹을 생각한다면 사절단을 보내야겠군.”

모용강이 다시금 제갈소명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누굴 보낼 거냐? 네놈한텐 정적을 처리할 수 있을 기회 아니냐? 말 안 듣는 무당 놈들을 보낼 거냐?”

“…….”

“…….”

묘한 정적이 모용강의 심기를 건드렸다.

“……설마 용봉지회를 보낼 생각이냐?”

이런 자리는 가장 상징적 존재가 참석하는 것이 관례니까.

문제라면 용봉지회 내부에 모용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참석하는 자리가 흑도 무리 한복판이라는 것이다.

제갈소명이 목을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아니다…….”

“그럼?”

“진소운을 비롯해…….”

“으잉? 우리 소운이를 보낸다고?!”

모용강의 말에 제갈소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깟 놈이 뭐라고 ‘우리 소운’이라는 거야.

진짜, 이 인간 노망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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