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18화 (218/357)

218. <불편한 사절단>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하던가?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사흑련 개파식에 다녀와라.”

제갈소명이 아무렇지 않게 말한 탓에 난 순간 사흑련이 무림맹 근처에 새로 생긴 주루 이름인 줄 알았다.

“거기가 어디라고 제가 갑니까?”

전생에서보다 더욱 이른 시기에 만들어지는 흑도 연맹.

더구나 아직 마교가 발원하지 않아 천하의 모든 흑도 문파들이 개파식에 몰려들 터다.

드디어 무림맹에 대항할 흑도 연맹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난다 긴다 하는 문파들이 한 발 걸치기 위해 모조리 모여들겠지.

“개파식이면 모든 흑도 문파들이 다 모일 거 아닙니까. 그런 곳에 일개 학관생이 가는 건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용담호혈(龍潭虎穴) 속에 다녀오라니.

“뭐가 무서운 게냐? 넌 그놈들이랑 친하지 않더냐?”

“치, 친하긴 누가 친하답니까. 억울합니다!”

가뜩이나 흑도의 전인이라는 둥 신성이라는 둥 개 같은 소문에 시달리는 나다.

그런 내가 사흑련의 개파식에 참석한다?

‘꺼져가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거지.’

이제 겨우 학관생들 사이에서 의심의 눈길이 줄어들고 있다.

더구나 대표로서 겨우 대접을 받기 시작했는데.

괜한 곳에 참석해서 눈총에 휩싸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 친하다고?”

“네!”

“흐음?”

제갈소명이 턱을 쓸며 나를 봤다.

“그럼, 사황봉주 그 인간이 왜 굳이 너를 콕 집어 사절단으로 보내달라 한 것이냐?”

“네?!”

이 미친!

또라이 아니야?

아무리 초대할 사람이 없다 해도 장차 무림맹의 정예로서 흑도의 큰 적이 될 나를 사절단으로 지목하다니.

‘가만…… 혹시 나의 성장세가 두려워 내게 흠결을 만들기 위함인가?’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하니 말도 안 되는 의심만 늘어난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튼 가지 않겠습니다.”

“뭬야?!”

“전 아직 정식 맹원도 아니고, 만통부의 소속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만통부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맹 부장님의 일을 돕기 위해서일 뿐.”

한쪽에 찌그러진 채 이쪽으로 귀를 열고 있던 맹주원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치켜든다.

당신 이뻐서 이러는 거 아냐!

“……사흑련에 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구나 총군사님의 부.탁.을. 받기엔 제가 대표로서 너무 바쁜 것도 있고 말이지요.”

내가 꽤나 무례하고 단호하게 거절했건만, 어쩐지 제갈소명은 담담히 말했다.

“학관장에겐 다 말해뒀다.”

“네?”

“이번엔 네가 없다 해서 학관생들이 마음대로 대표단을 만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과 달리’ 제대로 된 명령서가 내려갈 테니까.”

이어 서류 뭉치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진 서류 한 장을 꺼내어 건넨다.

“그게 네 명령서다. 그 맨 아래 뭐라 써 있느냐?”

“……맹주전이라고 쓰여있네요.”

누군가 코 풀고선 다시 편 것 같은 서류가 왜 맹주전의 명령서인 거지?

“맹주전과 만통부에서 동시에 내린 명령은 절대적이다. 설사 그것이 학관생이라 할지라도 말이지. 아님, 장로원에 가서 따져보기라도 할 테냐?”

맹주전과 만통부의 명령서를 반려 시킬 수 있는 건 장로원 뿐이다.

하지만 장로원에 가져간다 한들 그 양반들이 퍽이나 명령서를 반려시켜 주겠다.

아니, 이참에 가서 죽으라고 등 떠밀지도 모르지.

제갈소명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어디, 금옥에 갇힐 테냐, 다녀올 테냐?”

나는 이를 앙다물며 대답했다.

“……다녀오는 게 낫겠군요.”

“그렇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형산파에게 제사 한번 거하게 지내달라 부탁할 걸 그랬다.

“근데 사흑련과의 동맹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애당초 흑도 연맹인 사흑련은 무림맹의 대응단체로서 발촉한 것이다.

시작부터 무림맹과 동맹을 할 계획이라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터.

당연히 무림맹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다.

더구나 무림맹도 그렇다.

현재 무림맹의 주적은 사라졌다 알려진 혈교나 마교가 아니다. 바로 흑도.

그런 무림맹에서 먼저 흑도에 동맹을 제안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혈교와의 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사흑련이 이 상황을 기회라고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되겠지.”

“…….”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전 못 할 거 같습니다.”

“어째서지?”

“무림맹을 견제하기 위한 단체 아닙니까. 그들이 저를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제갈소명은 어쩐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또한 동맹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원만한 동맹 관계란 건 아마도 먼 훗날의 일이겠지. 그렇다면 최소한 사천의 일이 끝나기 전까진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

“그리된다면 우리로서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어버릴 테니.”

혈교나 흑도나 사실 서로 완전 적이라고 보기도 좀 그렇지 않나?

혈교를 전멸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무림맹의 모습이 흑도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더구나 사흑련으로선 지금이 무림맹을 칠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이기도 하고.

‘어쩜 사절단의 목을 쳐 선전포고를 하고자 할지도…….’

이번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면 흑도의 간자로 의심받을 것이고, 잘못되면 사흑련과 무림맹 간에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명령서까지 나온 이상 원칙적으론 설득이 안 되겠지.

그렇담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답이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무리 저라고 한들, 흑도 연맹과 그런 큰 협정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과대평가를 하신 듯합니다.”

“걱정 마라. 네 일은 ‘도움’에 국한될 것이니.”

“……흑도 무리들의 한가운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무섭습니다.”

“네 내공이 삼 갑자에 달한다는 것을 알건만, 뭐가 걱정이냐? 혈교의 소교주 목까지 잘라온 놈이 엄살은, 쯧.”

크흑.

공훈 좀 쌓겠다고 나댄 결과가 이리 내 발에 족쇄를 채우다니.

아니, 그리고 이 영감 정말 만만치가 않다.

제갈소명이 어느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걱정 말거라. 사절단엔 고강한 무공의 인물이 동행할 테니.”

나는 최후의 발악을 해보았다.

“도, 독! 독에는 어찌 대항합니까? 흑도 놈들이라면 음식에 독을 탈지도 모르는 일인데…….”

태을진경과 막대한 내공 덕에 백독불침 정돈 되겠으나, 만독불침은 아니다.

내 불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해 놨다.”

“…….”

뭐? 준비 했다고?

시바, 뭐 이리 철저해?

“진소운 학관생은 이번 임무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라.”

갑자기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엣헴 기침을 한 뒤 자리를 떠나는 제갈소명.

어느새 다가온 맹주원이 힘내라는 듯 어깨를 두들겨 주었지만, 전혀 힘이 나지 않았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 출세를 하나 안 하나 내 팔자는 계속 고생만 하는 걸까?

#

흑도 연맹의 결성은 강호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흑도 문파들은 이번 기회에 그간 무림맹에게 당해왔던 것을 돌려줄 수 있겠다며 기대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백도 문파들은 흑도의 성세가 커지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림맹 내부에서도 미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강경파들은 당장이라도 무사를 파견하여 사흑련이라는 단체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로 온건파들은 일개 단체의 설립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따윈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대중들의 뚜렷한 의사와는 반대로 윗선에선 어떤 정치적 입장도 취할 수 없었다.

사흑련이란 단체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일을 벌인 것이 아니기에 단죄할 수 없다.

자기들끼리 모여 친목 다지겠다는데, 그거 하지 말라고 상을 뒤엎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게 흑도가 아니고 뭔가?

무림맹이 무슨 왈패 집단도 아니고.

더구나 지금은 사천에서 치열한 전투가 연일 지속되고 있는 상황.

승기가 보이지만, 멸문의 길을 걸어야 하는 혈교의 저항은 심했고, 그들의 본진까지 쳐들어가 발본색원(拔本塞源)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다.

결국 사흑련 개파식 관련해서는 적당한 선물과 총군사 명의의 친서, 몇 명의 사절단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강경파와 온건파 양쪽에서 항의가 빗발쳤지만, 사천의 상황을 내밀자 ‘씻자’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 버렸다.

혁무강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 아이는 뭐라 하던가요?”

“죽어라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더군요. 하지만 제깟 놈이 어쩌겠습니까.”

제갈소명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이었지만, 혁무강의 얼굴엔 살짝 그늘이 졌다.

“어쩐지 그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별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믿고 맡길 마땅한 인물이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상 누가 가도 실패할 임무.

그나마 진소운은 흑도 연맹의 형성 과정에 영향을 끼쳤고, 마령고원에서의 일로 사황봉주를 비롯한 다수의 흑도 거물과 안면이 있기에 시도해 보는 것이었다.

제갈소명 또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번에도 녀석의 의외성에 걸어 보는 수밖에 없지요.”

제갈소명은 이런 식으로 예측되지 않는 일들을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그 와중에 피해도 막대하니까.

하지만 이번에 한해서만큼은 운으로라도 성공하길 바랐다.

“실패한다면…… 전쟁일 테니까요.”

오랜 기간 무림맹을 향한 흑도 무림의 원한은 뿌리 깊다.

이제 막 힘을 모으기 시작한 그들은 내부를 단속하기 위해서라도 외부로 힘을 뻗어낼 필요가 있다.

무림맹 또한 이제 와서 흑도에게 선뜻 손을 내밀 수 없다.

그간 무림맹과 그 안에 속한 백도의 성세가 어찌 커왔던가.

흑도를 누르고 강호의 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분 때문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전쟁은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부디 더 많은 피를 흘릴 상황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혁무강의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

“대사형, 팔 내미십쇼. 봇짐은 들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은호는 움직이지 않는 내 팔에 끈을 끼워 무거운 봇짐을 메어 주었다.

“아 참, 그리고 올 때 기념품 잊지 마십쇼.”

“……넌 내가 어디 유랑이라도 가는 줄 아느냐?”

은호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제 할 말만 이어간다.

“흑도 무림인들 중에 기이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지 않습니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구경해 보겠습니까.”

“……근데 금표 넌 꼬라지가 왜 그러냐?”

넝마가 된 옷가지와 온몸에 가득한 멍자국을 한 금표가 배시시 웃는다.

“요즘 외공 수련을 한다고…….”

“……그래. 수고가 많다.”

“사형. 조심하세요.”

그나마 날 가장 걱정해 주는 사련이 앞으로 나섰다.

“역시 너밖에 없…….”

“누가 시비 건다고 마음대로 머리 부수고 그러시면 안 돼요. 거긴 흑도 무림의 한가운데나 마찬가지니까요. 철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지 마시라고요.”

“…….”

사제들의 애틋한(?) 배웅과 함께 나의 지인들에게 인사를 한 후, 난 곧장 무림맹으로 향했다.

‘사절단……. 동맹이라…….’

확실히 사흑련과의 동맹은 필요하다.

전선이 늘어난 순간, 강호 전체에 무사들의 피가 강처럼 흐를 테니까.

문제는 무림맹 안에 흑도와 좋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없다는 점.

그렇기에 이번 사절단의 면면이 몹시도 궁금했다.

사흑련의 사절단으로 가 동맹을 체결할 정도라면, 무림맹 내부에서도 사흑련과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번 협정이 잘 체결된다면 이번 사절단 인원들은 차후, 마교의 발원에 대항해 무림맹과 사흑련의 가교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잘 기억해 둬야겠군.’

약속된 장소에 다다르니 작은 행단이 보였다.

준비를 미리 마쳤는지 표국의 표사들이 마차를 점검하고, 쟁자수들이 말들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 사절단에 합류하신다는 학관생님이십니까?”

한 쟁자수가 허리를 반쯤 접으며 물어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아,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쟁자수는 마치 중요한 사람을 모시듯 조심조심 행동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음…… 혹시 사절단분들이 먼저 와계십니까?”

“네. 공자님께서 마지막이십니다.”

나도 예정된 약속 시간보다 이각은 빠르게 왔건만, 벌써 도착해 있다니.

쟁자수의 안내로 마차를 돌아 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가자, 사절단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순간.

“시발…….”

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내 목소리에 여인이 내 쪽으로 돌아본다.

“……욕은 나쁜 것이야.”

짜리몽땅한 키. 흑단같이 긴 머리. 무표정한 얼굴에 말투가 이상한 당서희.

“…….”

“어서 오시죠. 진 시주. 오랜만이군요.”

그 옆에는 소불(小佛) 일명이 합장하며 인사를 한다.

“감히 단원 따위가 단장보다 늦다니.”

마지막으로 얼마 전 악주평의 다리뼈를 박살 낸 일로 나를 고문하려 했던 악병비까지.

‘미치겠네.’

면면을 확인한 나는 기함하는 심정이었다.

흑도보다 더한 손속의 당가의 여식.

태산북두 소림의 다음 대 방장이라 불리는 대제자.

흑도인은 물론이고 멀쩡한 백도인도 의심스러우면 흑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념심문관.

‘이게 무슨 사절단이야!! 토벌단이지!!!’

일부러 흑도인들이 싫어하는 인물들만 꼽아도 이렇게 조직하기 힘들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것이야.”

당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나 안 해! 이 씨!’

나는 가뜩이나 가기 싫었는데.

더욱 격하게 가고 싶지 않아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