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19화 (219/357)

219. <불편한 사절단(2)>

사흑련의 개파식에 참석하는 무림맹 토벌대…… 아니, 사절단은 무한을 출발해 북쪽으로 향했다.

사흑련이 자리한 곳은 산서성.

무한에서 그리로 가기 위해선 호북성을 넘어 하남을 지나야 했다.

행단의 여정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유능한 표사들이 좋은 길을 안내하여 편하게 움직였고, 행단의 선두엔 무림맹의 깃발을 달아 작은 시비들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이야.”

어쩐지 남들보다 더 커 보이는 말 위에 앉은 당서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자고로 행단의 여정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긴다고 들은 것이야.”

거 무서운 소릴 하시네.

지금 이 인원들로 사건에 휘말리면 답도 없다.

있는 사건도 막아야 할 판에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린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당서희의 시무룩한 표정은 풀릴 줄 모른다.

“당 선배는 강호에서 활동한 지 꽤 되지 않았습니까?”

“용봉지회와 함께 다니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야.”

“……좋은 거 아닙니까?”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바람을 넣었는지 당서희의 볼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협객으로서 악당을 제압하고 싶은 것이야.”

“…….”

끄응, 저 표정은 대체 뭔데?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붙들었다.

아니, 용봉지회 활동을 하면서 충분히 협객 놀이는 하지 않았나?

흑도 무림에서 백수신녀라고 하면 치를 떠는 이유가 뭔데.

바로 그녀의 손속에 죽은 이들의 수가, 용봉지회 전체 인원이 처리한 수보다 많았기 때문인데…….

“우린 사절단입니다. 되려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지요.”

더구나 하남까지야 소림사의 영역이라 볼 수 있으니 흑도들도 알아서 행동에 조심을 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들어서는 산서성은 무림맹의 영향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로서도 바짝 긴장을 해야 한다는 말.

‘그나저나 절묘한 곳에 자리를 잡았네.’

흑도 연맹이 세워질 곳은 전생과 같은 하남의 대별산 인근이리라 생각했건만, 이번 생에서의 흑도 연맹은 산서성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강호의 어떤 곳에 뿌리내린다 해도 무림맹의 영향에서 벗어날 순 없겠지만, 산서성은 자리가 미묘하다.

하남 대별산에 흑도 문파들이 많이 있으니, 무림맹과 일전을 벌일 땐 대별산을 전진 기지로 쓰면 되고.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을 노릴 땐 대별산과 산서성에서 양쪽으로 포위망을 구축하면 된다.

반대로 무림맹이 사흑련을 정벌하기 위해 무사를 일으켜 북으로 향하면, 바로 옆 북경에 자리한 황제의 털이 바짝 서며 ‘역모’가 아닌가 무림맹을 의심할 터.

무림맹으로선 사흑련을 치기 전에 북경의 눈치를 먼저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흑련에 두뇌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나?’

전생에선 워낙 마교의 공격이 재빨랐기에 흑도 연맹의 결성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이뤄졌었고,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하고 해체되어 버렸는데.

현생에선 더 빠르게 흑도 연맹이 결성된 데다 전략적인 위치까지 선점했다.

어쩌면 진정 미래의 역사가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우리 사절단의 이념심문관……. 아니, 단장인 악병비가 말했다.

“지금부터 깃발을 걷는다.”

“네?”

악병비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뭐지? 불만 있나?”

“이제부터 산서성입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깃발을 내리다니요.”

“산서에서 깃발을 올리고 있으면 우리 무림맹이 사흑련에 굴복한다는 신호로 오인될 수도 있다.”

아니, 보통 반대로 하지 않나?

위험한 곳에서 굳이 왜 자존심을 세우는 건데?

“사흑련의 개파로 산서성 일대의 흑도들도 많은 물자가 오간다는 사실을 알 겁니다. 분명 사고가 일어날 거고요.”

내 차분한 설명에도 악병비는 특유의 무감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흥! 흑도 놈들 따윈 두렵지 않다!”

시바,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건데.

차라리 무공을 모르는 행정가가 왔으면 깃발을 내리자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겠지.

혼란한 분위기 속에 일명이 머리를 반짝이며 차분히 합장을 한다.

“진 시주 너무 걱정 마십시오. 흑도들도 다 사람. 아무에게나 패악질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스님이 뭘 알겠나.

내 한숨이 깊어지는 사이, 당서희가 드물게 눈을 반짝반짝거리며 말했다.

“두근두근한 것이야!”

나도 심장이 벌렁벌렁거린다. 젠장.

#

정주를 지나 낙양을 거처 제원을 건넌 우리는 금방 산서성에 들어섰다.

내 걱정과 달리 작은 도시에서는 큰 시비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우리 행단이 워낙 특이해야지.’

철창을 든 거구의 사내. 염주를 굴리는 승려. 불온한 기운의 초록색 비단을 걸친 소녀가 일행인 무리라니.

제아무리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왈패라 할지라도 감히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할 터.

생각해 보면 흑도 무림 내에서도 괴상한 복색의 인물들을 더 경계하는 면이 있지 않던가.

거물들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덤벼들 리 없고, 거물들은 애당초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테니.

어쩌면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랬어야 했는데…….’

산서성에 들어선 뒤 처음 머무는 대도시인 고평.

고평의 한 객잔에서 어색한 식사를 하던 우리의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씨벌럼이 뒈지고 싶나? 눈 안 깔아?”

“이 개발바닥 같은 놈이! 오늘 네놈 창자로 줄넘기 좀 해볼까?!”

객잔에서 흔히 있는 시비.

더구나 사흑련의 개파식으로 전국의 흑도들이 모두 모이는 만큼, 객잔 내부에선 평소보다 더 빈번하게 싸움이 일어났다.

“이 씨벌럼이 진짜!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너 사검방 알어? 거기 방주가 내 큰형님의 의형제여!”

“이 개발바닥 같은 놈이! 너! 악호문 알어? 거기 장문인이 내 사촌 형님의 친구 부인의 사촌이야!”

목소리가 커지자, 싸우는 이들의 일행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작은 몸싸움이 주변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본격적인 싸움으로 이어지진 않겠군.’

애당초 싸울 마음이 있었다면 무기를 꼬나쥐고 서로 덤벼들었겠지.

하지만 양쪽 인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기에, 서로 이리 신경전만 펼치다 끝낼 것이다.

그렇게 내가 신경을 끄고 고개를 돌렸을 때.

푹-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객잔 내부를 가득 채우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크아악!”

“끄어억! 저, 젓가락?!”

시비를 주도했던 두 사람의 팔엔 나무젓가락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이내 내 옆에서 왠지 모르게 약간의 흥분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인 것이야. 더 이상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란 것이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당서희를 바라보니.

……그녀의 손엔 젓가락이 다발로 들려 있었다.

당서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뿌듯한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연습한 것이야.”

‘미친!!!’

아니, 우리한테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지들끼리 처싸우는데 왜 젓가락을 던지는데?

내가 황당함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젓가락이 꽂힌 놈들이 눈깔을 뒤집으며 달려들려 했다.

“이런 개씨벌럼이! 갑자기 암습을 해?”

“이런 시부럴개발바닥 같은 놈이 뒈질라고?!”

젓가락이 박혀 눈이 돌아간 흑도인들은 옳다구나 하며 우릴 적으로 규정했다.

마흔 명에 가까운 인원들끼리 싸우는 것보다는, 복색은 특이하지만 넷밖에 안 되는 우리를 조지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까닭.

나는 얼른 일명과 악병비를 바라봤다.

일명이 가만히 염주를 굴리며 흑도인들을 보는 것과 달리, 악병비는 언제든 출수하겠다는 듯 철창을 쿵 하고 바닥에 내려찍는 것 아닌가.

아니, 당신 단장이잖아! 같이 싸울 게 아니라 막아야지!

‘하…… 골이야…….’

나도 이제 모르겠다.

난 할 만큼 한 것 같으니까.

뭐, 천하의 혈성과 백수신녀, 소불이 흑도 나부랭이들에게 죽기야 하겠나?

그냥 이번 일로 사흑련과 사이가 뒤틀어져서 동맹 망치고 협정 파기되고, 전쟁이나 하고 그러겠지.

쩝.

뭔가 머릿속의 끈이 끊어진 듯 힘이 풀린 내가 자리에 앉아 술을 입에 털어넣으려는 찰나.

“어?”

흑도 무리에 섞여 있는 두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이립에 들어선 듯한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과 팔십은 되어 보이는 깡마른 노인.

두 사람은 싸움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 사람들…….

나는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얼얼해졌다.

‘염귀비와 혈투!’

분명 외모는 달랐지만, 전생에 본 버릇과 행동, 눈빛까지 똑같았다.

악명 높은 흑도의 절대 고수들이 자신의 기운을 숨기고 흑도 나부랭이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것!

나는 왜 저들이 이곳에 숨어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외쳤다.

“자, 잠깐!!!!”

내 목소리가 객잔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제 막 싸움을 시작하려던 이들 모두가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얼른 그 중앙으로 들어가 품을 뒤적거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 일행이 실수를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내 태세전환에, 흑도 놈들의 눈초리가 삐죽해진다.

그러곤 내게 눈을 부라리며 자신들의 팔에 꽂힌 젓가락을 가리켰다.

“실수?”

“이 개발바닥 같은 놈이 뭐라는 거야?”

나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분은 당가의 여식이신데, 무공을 너무 연마해서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손이 뻗어나가곤 합니다.”

“다, 당가의 여식?”

두 사람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용봉지회의 백수신녀라 들어보셨지요?”

“헙…….”

나는 품속에서 금전 하나씩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상처의 아픔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겠으나, 괜한 싸움을 일으켜 더 다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눈앞에서 금전이 아른거리자, 고민하던 흑도가 손을 뻗어 금전을 쥐었다.

“흥! 앞으로 단속 잘해라! 다음번에도 같은 실수를 하면 내 큰형님의 의제인 사검방주님을 뵙게 될 것이니.”

“내 사촌 형님의 친구 부인의 사촌인 악호문주님도 만나고 싶지 않다면 조심해라!”

“눼, 눼. 그럼요. 그럼요.”

흑도 무리들이 홱 하니 돌아서며 우르르 객잔을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염귀비와 혈투 또한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객잔을 나섰다.

“하아…….”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자, 당서희와 악병비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끼어든 것이야? 너 때문에 강호의 정의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이야!!!”

내가 저를 구해준 줄도 모르고……!

애당초 저놈들 단죄한다고 정의가 올바로 서지도 않거든!

“네놈…… 흑도인들의 피해를 걱정하는 걸 보니, 확실히 흑도에 근본을 둔 놈이로구나!”

이념심문관인 악병비는 당장이라도 ‘정의 구현’을 하고 싶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 시바, 니들 여기서 다 뒈질 뻔했다고!’

내가 이번 사절단에서 죽게 된다면 그건 아마 화병 때문이리라.

그렇게 싫어하던 염불이라도 외고 싶은 심정이다.

#

고평을 지나 상치에서 하루를 묵고 진중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우린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끼니를 챙겼다.

표사들은 주변을 경계하고 표물과 마차들을 점검하는 한편, 쟁자수들은 말들에게 먹이와 물을 먹이고 우리가 먹을 밥을 챙겼다.

표국과 여행을 하면 이런 점이 참 편하다.

다른 사람들이 내 할 일을 대신 다 해주니까.

내가 만족스럽게 밥을 먹고 있자, 옆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근데 저희랑 식사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중년에 들어선 쟁자수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괜찮습니다. 저쪽에서 먹으면 체할 거 같아서요. 혹시 제가 있어서 불편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저흰 괜찮습니다.”

본래 나는 사절단 일행과 함께 밥을 먹어야 했지만, 숟갈 한번 뜰 때마다 의심 가득한 눈깔로 나를 응시하는 악병비 때문에 도통 죽이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수명이 못해도 일 년은 깎일 듯.’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이라면 단박에 제압하고 더욱 신경을 박박 긁어주겠지만, 악병비는 그날 이후로 내게 딱히 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를 탐탁지 않아 할 뿐, 단원으로선 충분히 대우해 주고 있었기에 되려 내가 더욱 불편해진 마당이었다.

중년 쟁자수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 공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네? 뭐가 말입니까?”

쟁자수들과 표사들에게 그렇게 말을 편히 놓으라 했지만, 학관생이란 신분이 그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것 같았다.

“그, 항상 싸움을 말려주시고 그러지 않습니까.”

중년 쟁자수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싸움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는 건 가장 약한 자들이니까.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이제 곧 산채들을 만나게 될 텐데. 깃발도 내려버려서……. 단장님이 통행세를 내도록 내버려 둘까 걱정되는군요.”

나는 의아해져 되물었다.

“산채요? 산채가 많습니까?”

“본래 상치에서 진중으로 가는 길에 큰 산채는 두 개밖에 없었는데, 올해 산서성에 가뭄이 들면서 많이 생겨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생계형 산적.

추수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간단 말인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서성 관리들이 어지간히 부패한 인간들인가 보다.

“그래도 통행세는 많이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나 무인들이 보인다 싶으면 그다지 달려들지도 않을 거고요…….”

무슨 말인지 대략 알아들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사절단의 임무는 태원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이지 소란을 일으키며 가는 게 아닙니다.”

물론 흑도 냄새만 맡아도 터지는 벽력탄 같은 인간과 무협 소설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인간이 있지만…… 어찌어찌 여기까지 잘 오지 않았나.

중년 쟁자수가 감격한 듯 눈을 빛내며 고개를 숙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다른 쟁자수들도 그게 퍽이나 걱정이었던 듯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관도를 벗어나 이름 모를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행단 앞줄에 섰던 표사가 손을 들어 행단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인가?”

악병비의 물음에 표사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의 인물들이 길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산채인가?”

“본래 없었던 곳인데. 최근에 생긴 듯합니다. 아마 먹을 것이 없어 산에 올라간 이들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넘고자 하면 통행세를 내야 할 테고, 통행세를 내지 않고자 하면 싸워야 할 것이다.

물론 사절단 일행이 얼치기 산적들에게 당할 일은 없겠으니, 표사의 의중은 저들에게 돈을 주고 넘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겠지.

그들도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현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기에.

그러나.

“무림맹은 타협하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저, 저 꽉 막힌 것 좀 보소.

악병비의 말에 표사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다른 표사들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들 검 대신 손에 몽둥이를 들기 시작했다.

최소한 돈을 주진 못해도 목숨까지 빼앗진 않겠다는 의도.

그렇게 언덕의 끝에 올라갔을 때쯤.

요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설픈 산적들로 보이는 이들 수십 명이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그 반대쪽엔 남녀 두 사람이 선 채로 산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을 타고 불쾌한 냄새가 훅 끼쳐든다.

‘피?’

내 시선은 한쪽에 쌓여 있는 시체 쪽으로 향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피를 뚝뚝 흘리는 시체들.

표사들이 얼른 몽둥이를 내려놓고, 검을 고쳐 쥔다.

사절단 인원들도 저마다 조심스레 검을 뽑아 들 때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고평에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산적들을 내려다보던 미모의 여성이 이편을 보며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연이라고?

표사들이 가는 길이야 정해져 있다지만, 고평에서 태원으로 가는 길은 수십 갈래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절묘하다.

나는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과,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길……. 우릴 기다린 건가?’

두 남녀의 정체는 바로 염귀비와 혈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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