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불편한 사절단>
내가 승낙은 했지만, 막상 어찌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대장인 악병비가 말해야 하지만, 어쩐지 그는 입을 꾸욱 다물고 나를 죽일 듯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악병비가 심검의 경지에 오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머, 소녀를 걷게 하실 생각인가요?”
결국 염귀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능청스럽고 뻔뻔한 그녀의 말에, 표사 둘이 악병비의 눈치를 보다가 말에서 내려 타던 말을 건넸다.
염귀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어머, 고마워라. 전 같이 타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는데.”
묘한 눈빛과 미소를 발산하는 그녀의 행동은 충분히 유혹적이었지만, 표사들은 되려 바짝 긴장하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
아무리 절세 미녀라 한들, 손을 피로 물들이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던 여자다.
강호의 경험이 충분한 그들에게 있어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수밖에.
“…….”
나는 한쪽에서 여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얼치기 산적들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네, 넷? 아, 예, 옛!”
염라대왕님 앞에서 이름과 삶의 이력까지 호명당했던 이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흉년이 들어 힘든 것은 알겠으나, 산적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처자식이 하루하루 말라가는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있는 가장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살아있어야 뭐라도 해볼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더구나 최근 산서성에 흑도 연맹이 생기며 오가는 사람들 상당수가 무인일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그만 산을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다신 산적질하지 않겠습니다.”
얼치기 산적들을 바라봤다.
한 명 한 명 볼이 홀쭉 들어간 모양새가, 정말 참다 참다 산에 올라 산적질을 한 것이지 싶었다.
나는 품에서 은전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하지만 얼치기 산적들은 도통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손만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다시는 타인의 짐보따리를 노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억지로 그들의 손을 끌어 주머니를 들려주었다.
“일단 이걸로 식구들 끼니를 채우십시오.”
꽤나 묵직한 은전 주머니를 주었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의 가정은 물론이고, 마을의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배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손에 든 주머니를 차마 꽉 쥐지 못하는 얼치기 산적들을 보며 덧붙였다.
“더구나 죽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 소소하게라도 장례는 치러줘야지요.”
“…….”
결국 손에 힘을 주어 주머니를 꽉 쥐는 얼치기 산적.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는데,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사실 저 사람들은 저희 일행이 아닙니다.”
“응?”
“저기 저 두 사람의 일행입니다.”
“…….”
다들 하나같이 얼굴이 짓뭉개지고 대가리가 터져 있어서 몰라봤는데, 실은 염귀비와 혈투의 일행이었단다.
“저희도 이상함을 느껴서 길을 막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들끼리 싸우더니, 저렇게…….”
뭐지?
아무리 극악무도한 흑도 거물이라 한들 왜 갑자기 자기 일행들을 쳐죽인 거람?
거기다 얼치기 산적들을 끌어다가 인질극을 벌인 건 또 뭐고.
“……저, 그러니 이건 주지 않으셔도…….”
눈치를 보며 다시금 전낭을 내미는 얼치기 산적.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됐습니다. 가져가셔서 마을에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쌀이라도 사다 주십시오.”
나는 곧장 시선을 염귀비와 혈투에게로 돌렸다.
더구나, 저 얼치기 산적들을 죽이지 않는 대가로 제시한 것이 그냥 동행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람…….’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동료로 만든 다음에 죽이면서 쾌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변태들인 건가?’
왠지 그럴 법하다.
흑도가 달리 흑도인가.
상식이고 나발이고, 제 본능이 꼴리는 대로 사니까 흑도 아닌가.
더구나 저 두 사람은 그런 꼴통 중에서도 왕 꼴통.
충분히 변태적 성향을 갖고 있을 만했다.
불안한 생각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 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이제 출발할 거 같아요~!”
마치 본래부터 일행이었던 듯 내게 소리치는 염귀비.
나는 지끈거리는 생각을 털어내며 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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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군사 제갈소명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무림맹에 입맹한 이후 겨우 세 번째였다.
게다가 그전 두 번은 탁자와 탁자 끝 사이에 자리하여, 감히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런 무서운 이의 앞에 앉았지만, 터져 나오는 질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징계…… 입니까?]
사흑련의 사절단으로 다녀오라는 말.
악병비는 앞에 앉은 사람이 만통부의 제갈소명이라는 것도 잊고 스스로 무례하다 생각하는 질문을 던졌다.
스륵.
차를 마시던 제갈소명이 주름진 눈꺼풀을 움직여 악병비를 응시한다.
순간, 악병비는 속이 훤히 꿰뚫리는 듯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득한 높이에 앉아 천하를 움직이는 이가 하는 말인 만큼, 단순한 질문임에도 느껴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악병비는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에 굵은 침을 삼켰다.
이미 질문을 먼저 했기에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겨우 목소리를 짜내 대답했다.
[사흑련과의 동맹이란 임무는 실패가 확실…… 아니, 실패할 확률이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흠…….]
제갈소명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했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네. 실패할 거라는 걸.]
기운을 전혀 끌어올리지 않았음에도 제갈소명에게선 표현하지 못할 커다란 압박감이 풍겨나온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천하의 안위가 달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맹은 실패가 당연한 일로 자네를 판단하지 않을 걸세.]
제갈소명의 말에 어떤 음모가 숨어들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맹 내에서 어느 세력에도 치우치지 않은 냉혹한 사람이다.
자신의 가문에게도 가혹하리만치 냉정했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왜 감찰각 소속인 자신이 사흑련에 가야 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악병비의 눈빛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자, 제갈소명이 말을 덧붙인다.
[음……. 그건 징계라고 생각하게. 결과가 어찌 되었든, 자네가 진소운을 건드리고, 감찰각의 권력을 사유화한 건 사실이니까.]
꿀꺽.
제갈소명의 두 눈이 비수가 되어 악병비의 전신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역시나 제갈소명은 다 알고 있었다.
[사절단장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그대가 할 일은 별로 없네. 적당히 협상을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그냥 돌아오게나.]
하지만 이렇게 넘기기엔 사안이 너무 심각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제갈소명이 말을 이었다.
[단, 무림맹을 나간 이후부턴 진소운 녀석이 하자는 게 있다면 그대로 따르게. 굳이 자네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니까.]
[…….]
제갈소명과의 독대를 떠올리던 악병비가 질끈 눈을 감았다.
‘총군사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것일까?’
총군사님의 명령대로 진소운의 의도대로 움직인 결과가, 바로 혈투와 정체 모를 여인의 합류였다.
당최 제갈소명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허수아비 단장을 원했다면 다른 후보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굳이 진소운에게 원한을 가진 자신이 아니라, 진소운에게 호의적인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설마……, 이 또한 의도를 숨기고 있었던 건가?’
진소운 생각에 무조건 따르라는 명령은 곧 그가 어떤 속내를 가진 이인지 판단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속내를 보다 보면 그가 의도를 숨기고 들어온 흑도의 간자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고.
생각해 보면 단순한 것이었다.
흑도와 척을 진 감찰각의 인원이 사절단에 포함된 이유.
결국 간자를 찾으라는 특명 아니겠는가!
‘그렇구나!’
악병비는 고개를 돌려 진소운을 바라봤다.
흑도의 거물들이 옆에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
어린 시절부터 흑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지 않고선 저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올 수 있겠는가?
더구나 혈투와 일전을 벌일 때 진소운이 쓴 검법을 혈투가 아는 눈치였다.
이런 단서만 보아도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자신의 의심의 눈초리를 느꼈는지 진소운이 여인을 가리키며 말한다.
“단장님, 혹시 이분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머나?”
악병비는 어이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진소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다.
“자꾸 이쪽을 보시기에. 충고를 드리자면 마음 접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주 무서운 분이시거든요.”
“저, 저! 쳐죽일!”
악병비가 이를 부득부득 갈지만, 진소운과 여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여인은 오히려 제 몸을 두 팔로 감싸며 교태까지 부린다.
“공자! 그게 무슨 말인가요! 소녀 매우 연약하고 가녀린데…….”
진소운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어머! 들켰나요?”
저것 보라지, 어찌 명망 높은 백도 문파의 정예가 흑도와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반드시 이번 행로에서 네 가면을 벗겨주마!’
악병비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때, 표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물통을 건넸다.
“……뭐지?”
“아니, 얼굴이 붉으신 게 더운 신 듯 보여서 말입니다.”
“아니다!”
“……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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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생각이냐?
처음엔 악병비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사람들을 그냥 죽게 둘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절단은 무림맹의 사절단이다! 흑도가 끼어선 안 되는 일이란 말이지!
그리고 이내 그 물음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날 갈구고 싶어서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혈투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는 듯하던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역시나 흑도의 간자였더냐?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
-역시나 흑도의 간자였던 거지? 그렇지?
아, 미치겠다.
사람이 대답을 안 하면 안 하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야지, 뭔 나오지도 않을 대답을 계속 채근하고 있냐고.
나는 홱 하니 고개를 돌려 악병비를 바라봤다.
“그렇게 저들이 따라오는 것이 불만이시면 직접 이야기하십쇼!”
꽤나 큰 목소리였던 탓에 염귀비와 혈투의 시선이 이편으로 몰린다.
“……!”
악병비는 죽일 듯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말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당서희가 쫄래쫄래 내 옆으로 다가온다.
“……저 두 사람, 악의 축인 것이야? 저들을 죽이면 강호의 정의가 서는 것이야?”
하아……. 넌 또 왜 그래.
난 당서희에게 당부했다.
“절대! 절대! 절대! 저 두 사람에게 먼저 손을 쓰지 마세요. 절대! 절대! 절대!”
혈투는 몰라도 염귀비는 당서희와 상성이 너무 안 좋다.
음양대법으로 양기를 축적해 사용하는 염귀비의 화기는 일반적 양가 무공과 궤를 달리한다.
남성의 가장 뜨거운 기운만을 흡수하기에 화력 자체가 기존 양기 무공보다 더 강하고, 내부에 운용되는 기운도 워낙 강하여 어지간한 독을 써도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다.
그야말로 적(敵) 당가 그 자체.
혈투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이미 만독불침을 이뤘을 테니.
“……왜 난 협행을 하지 못하는 것이야?”
무표정하게 볼을 부풀리는 당서희.
“……객잔에 가서 적당한 얼치기를 찾아보죠.”
대충 젓가락 과녁이 되어줄 만한 놈을 찾으면 되겠지?
마침 염귀비의 외모가 얼간이들 꼬이기에 괜찮은 얼굴이고.
젓가락 몇 번 던지고 대사 몇 번 치다 보면 이 짓에도 심드렁해질 거다.
애들은 원래 그러지 않나.
물론 그 애가 나보다 두 살 많다는 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쯤 되자 도통 내가 사절단에 합류한 건지, 나이대별 말 안 듣는 애들 데리고 소풍을 나온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그 와중에 일명은 좀 정상적인 사람이라 다행이다.
혈투와 염귀비를 상대로 무작정 경계를 드러내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
‘근데 이 인간 어디 갔지?’
보통 악병비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대머리가 안 보이기에 주변을 둘러보니, 뒤쪽에서 반짝하고 태양에 반사된 빛이 보이는 것 아닌가?
그는 염귀비와 혈투 옆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청력을 돋우어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여, 부처님께서 세속의 온갖 부귀영화를 버리시고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드셨습니다. 이후에…….”
너 뭐 하냐? 이 와중에 포교? 그것도 흑도 거물을 상대로?
내가 저를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친 일명이 빛나는 머리만큼 환히 웃는다.
“아! 진 시주. 마침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진 시주도 함께 들어보시겠습니까? 일각 사제에게 듣기로 믿음이 부족하시다지요?”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 염귀비와 혈투가 일명을 미친놈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저 미친 인간들에게 저런 눈빛을 받다니…… 역시 소림 제일 기재는 다른가?
하아…….
자꾸 한숨 쉬면 복 떨어진다고 그랬는데.
이러다 얼마 없는 복마저 다 잃어버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