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25화 (225/357)

225. <초대받은 불청객(3)>

사흑련 본관.

최고층에 위치한 련주실 뒤쪽으론 암실이 존재한다.

련주 이외에 몇몇의 사람들만이 존재를 알고 있는 이 공간에 아직 사흑련 소속이 되지 않은 두 사람이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자리에 앉아있던 사황봉주…… 아니, 이제는 사흑련주가 된 차석두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직접 나갔어야 하는데.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평생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 없는 차석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되었다. 이제 서는 위치가 달라졌으니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건 숙명인 게지.”

“신경 쓰지 마요, 동생. 우리가 그런 걸 일일이 다 신경 썼다면 애당초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

혈투와 염귀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 공간의 주인인 양, 차석두보다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차석두의 물음에 혈투가 웃음을 흘렸다.

“그딴 안부나 묻자고 우릴 부른 건 아니겠고. 본론으로 들어가거라. 왜 부른 것이냐?”

“…….”

“말을 안 듣는 놈들이 있느냐?”

차석두가 힘없이 웃음 짓는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여간 힘에 부치는 게 아닙니다.”

“끌끌. 흑도가 백도에게 당하며 살아온 이유가 달리 있겠느냐? 그래도 얼추 기둥은 세운 듯 보이더구나. 네 머리에서 나온 건 아니겠고……, 괜찮은 녀석이 있었나 보지?”

이미 다 아는 듯한 혈투의 말에 차석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것 또한 네 복이다.”

“감사합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염귀비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동생이 대놓고 깽판을 쳐달라고 우릴 부를 일은 없을 테고. 혹, 기둥을 갉아 먹는 이들이 있나요?”

여태껏, ‘나 먹는다’, ‘나 싸운다’밖에 모르는 놈들만 상대하던 차석두는 어쩐지 이 답답한 암실에서 청량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몸을 앞쪽으로 더욱 숙이며 속삭였다.

“용의주도합니다. 세력 속에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사흑련의 이익을 위한 척 이야기를 흘리고 있습니다.”

“본래 암수(暗數)보다 모략(謀略)이 더 무서운 것이라 하였다.”

차석두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차석두의 태도에 혈투마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의심 가는 놈들이 있느냐?”

“그조차 아직 모르겠습니다.”

“흠…….”

고심하던 혈투가 말했다.

“그렇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줄 일이란 건 별로 없겠구나.”

“죄송합니다. 두 분이 와 주시면 제 마음이 조금은 안정될 것 같아서…….”

“훗, 너도 정치를 하더니 혓바닥으로 백도심공을 부리는구나. 흐음…….”

잠시 침묵한 후, 고개를 끄덕인 혈투가 차석두의 의도를 읽어내고선 말을 이었다.

“천천히 찾아보마, 너무 걱정 말거라.”

혈투와 염귀의 말에 한결 표정이 좋아진 차석두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제 이야기만 했군요. 오시는 길은 고되지 않으셨습니까?”

혈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괜찮았다. 오는 길에 재미난 녀석을 만났거든.”

“진소운과 함께 오셨다지요?”

“그래. 소문보다 더 재미난 녀석이더구나, 아마 실제 흑도연맹의 공동전인이 있다 해도 그놈만큼은 못 할 것 같다.”

차석두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특이한 구석이 있는 친구지요.”

혈투가 일순 정색하며 말했다.

“듣자 하니 네놈이 초대장을 보냈다던데. 네놈에게도 그놈에게도 좋지 않을 짓을 굳이 한 연유가 무엇이더냐.”

“……흑도야행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혈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흑염룡이 흑도 귀신을 이끌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을 듣긴 했다.”

사흑련 결성에 중대한 명분이 되었던 흑도야행을 주도한 이가 흑염룡이란 소문이 돌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마도 흑도 문파와의 어떤 인연으로 인해 그 행사에 몸을 의탁할 순 있겠으나, 이제 막 약관이 지난 녀석이 주도할 수 있을 만한 행사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혈투의 단언을 깨뜨리듯 차석두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게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응?”

“……어머?”

혈투와 염귀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렸다.

이윽고 차석두는 무림 정시 당시 진소운이 사황봉에 쳐들어왔던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짧지 않은 이야기였건만, 듣는 내내 혈투와 염귀비는 단 한 순간도 집중을 놓친 적이 없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혈투가 침음을 흘렸다.

“허어……, 정말 그놈이 주도한 거였다니.”

지금에 와선 그 소문들이 옅어지며, 사흑련 결성의 지대한 공을 세운 존재가 차석두 본인이라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흑도 연맹 결성의 신호탄을 쏜 것은 진소운이 맞았다.

“하여, 이번 개파식에 초대를 했습니다.”

혈투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놈에게도 우리만치 기대를 하고있는 것이냐?”

차석두가 머슥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마는…….”

눈빛을 빛내며 말한다.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을 기대하고 있긴 합니다.”

혈투와 염귀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눈을 마주친다.

“재밌구나. 흑염룡과 경쟁이라.”

“흠…… 소녀는 낭군님과 사랑 싸움만 하고 싶은데.”

차석두는 순간적으로 ‘낭군님’이 누굴 지칭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이후 날아들 염귀비의 화염이 떠올라 입을 꾸욱 다물었다.

#

사흑련의 전야제는 백도 문파에서 흔히 치르는 연회보다는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의 뒷골목과 비슷한 분위기다.

한마디로 개판이라는 말씀.

“골라골라 아무거나 골라! 안 고르면 손해, 고르면 대박!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흑도 무림에서 가장 많이 쓰는 암기들을…….”

연무장에서 암기를 파는 놈부터.

“자, 기대하십시오. 지금부터 이 검을 삼킬 건데. 절대 따라 하시면 안 됩니다!”

무인들 앞에서 차력을 선보이는 유랑단.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게 백도 문파의 태산북두라 하는 소림사에서 만든 바로 그 영약! 소환단이라는 겁니다! 이 소환단이 사흑련 개파식 기념으로 오늘만 단돈 은전 열 냥!”

얼씨구, 소환단을 파는 놈도 있네.

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는걸?

아무리 흑도 놈들이 무식하다고 해도, 저런 사기에 걸려들 놈이 있을까 싶었는데…….

“나 소환단이 사고 싶은 것이야.”

여기 그 호구가 있었네?

나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당서희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됐습니다. 저런 거 먹으면 안 돼요.”

“나 돈 있는 것이야!”

“돈 문제가 아닙니다. 정체 모를 약초를 섞어 잘못 먹으면 설사만 오지게 할 겁니다.”

당서희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묻는다.

“어떻게 아는 것이야?”

어떻게 아냐고?

전생에 먹어 봤으니까.

어이 없게도 전생엔 대환단도 먹어봤다.

난 그거 먹고 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를 줄 알았는데.

절정 고수는 개뿔, 사실 설사하다 등선 시키는 약이었다.

“……더 알려고 하지 마십쇼. 다칩니다.”

그나저나 이 대머리는 대체 어디 간 거지? 소림사의 영약을 저렇게 뻔뻔하게 파는 놈이 있는데.

잡아서 족쳐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명 선배가 안 보이는군요.”

“가르침을 줄 사람을 찾았다며 벌써 움직인 것이야.”

“그렇습니까?”

그래도 일명은 당서희처럼 사고는 안 치겠지. 뭐, 싸움이 일어난다고 해서 맞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용소아의 빛나는 이름에 가려서 그렇지, 용소아만 없었다면 지금 천하엔 용소아 대신 일명의 이름이 쩌렁쩌렁하게 울렸을 것이다.

이 사흑련 안에서도 그를 해할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고, 정 급하면 도망치면 될 테니까.

나는 당서희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끼리 움직이죠.”

“좋은 것이야!”

신이 난 당서희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저 암기들 사고 싶은 것이야.”

“저거 썩은 철로 만든 겁니다. 한번 던지면 부러져요. 그리고 암기는 당가에서도 만들지 않습니까.”

“저 칼 던지기를 하고 싶은 것이야.”

“저 칼, 일반 사람들이 던질 땐 날이 안 갈린 걸로 바꿉니다. 나무 벽에 박히지도 않고요.”

당서희가 양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

“돌멩이 들기 대회에 나가고 싶은 것이야!”

“내공 못 쓰는데 괜찮습니까? 저건 외공 대결인데?”

“…….”

내 손을 잡은 당서희의 아귀 힘이 약해지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당서희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러면 나온 의미가 없는 것이야.”

아차, 이거 기운 빼려고 나온 거지.

나는 얼른 가판에서 파는 당과 두 개를 구매해 당서희에게 넘겼다.

당서희는 능숙하게 품안에서 침 두 개를 뽑아 당과를 푹푹 찔러보더니, 침을 확인하곤 다시 하나를 내게 넘겼다.

“적당한 걸 찾아보죠.”

“그럼 저거라도 하고 싶은 것이야!”

당과를 오물거리던 당서희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열 명의 사내들이 작은 탁자 앞에 서서 턱을 쥐고 고심하고 있었다.

“자, 돈 놓고 돈 먹기 지나가는 애들도 맞히는 바로 그 놀이! 여자는 분칠값, 남자는 화주값, 애들은 용돈 일 푼! 단돈 일 푼이오! 일 푼! 돈 놓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지나가는 개도 맞히는 바로 그 놀이! 콩을 찾으세요, 콩!”

탁자 위에 세 개의 술잔이 엎어져 있고, 남자는 그 세 개의 술잔을 어지러이 움직여 콩의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노름?’

진짜 대애단하네. 하다 하다 이제 도박까지?

더 대단한 건 저 노름꾼이다. 노름판을 벌일 데가 없어 무인들이 가득한 이곳에다 벌이다니.

어쨌든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가격도 비싸지 않다.

당서희도 세상 공부 좀 해야겠지. 첫 공부로 나쁘지도 않아 보이고.

나는 순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우리 두 사람이 당과를 하나씩 물고 탁자에 다가가자 구경꾼들이 슬쩍 주위로 물러서며 길을 터준다.

노름꾼이 당서희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아이고 귀여운 아가씨와 훤칠한 미남께서 오셨네. 어떻게 한판 하시겠소?”

“난 다 맞힐 자신이 있는 것이야!”

“그렇지! 지나가는 개도 다 맞히는 놀이인데. 시작하겠습니다.”

노름꾼은 빨간 콩을 가운데 잔에 넣어 보여준 뒤 잔을 재빠르게 섞기 시작했다.

“자, 돈 놓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지나가는 개도 맞히는 바로 그 놀이! 콩을 찾으세요, 콩!”

제법 빠르게 움직이는 잔들 사이로 당서희가 집중하여 콩을 쫓았다.

그리고 노름꾼이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당서희가 은전 열 개를 맨 오른쪽의 잔 앞에 놓았다.

“흐익! 여, 열 냥이나?”

“왜, 안 되는 것이야?”

왜 저렇게 담이 큰 것이야.

나는 당서희를 말렸다.

“이런 건 재미로 하는 겁니다. 동전 없습니까?”

“은전밖에 없는 것이야. 그리고 난 자신 있는 것이야!”

하긴 세상 살이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를 사천당가의 금지옥엽 당서희인데, 주머니가 마를 일이 있겠나.

난 그냥 두기로 했다.

모두의 시선이 판 위로 쏠렸다.

“꿀꺽.”

긴장하던 야바위꾼이 당서희가 돈을 건 잔을 열자…….

“아으……. 이걸 어떻게 맞혔지?”

붉은 콩이 툭하고 튀어 나왔다!

“와아아아! 내가 맞힌 것이야! 내가 맞힌 것이야!”

당서희가 방방 뛰자, 노름꾼이 앓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잔을 굴리기 시작했다.

당서희는 콧김을 뿜으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이번엔 여기인 것이야!”

당서희는 맨 왼쪽의 잔 앞에 방금 전에 딴 은전까지 모두 합쳐서 총 스무 냥을 걸었다.

하지만 노름꾼이 잔을 여는 순간.

콩은 존재하지 않았다.

‘허, 이놈 봐라.’

내가 속으로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터트리는 동안 노름꾼이 당서희를 약올렸다.

“아이고! 귀여운 아가씨, 이번엔 못 맞혔네.”

노름꾼이 스무 냥 전부를 가져가자, 당서희가 품에서 다시금 스무 냥을 꺼내었다.

“자, 돈 놓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지나가는 개도 맞히는 바로 그 놀이 콩을 찾으세요, 콩!”

노름꾼의 손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당서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기까지 끌어올리고 잔들을 쫓았다.

“여기 인 것이야!”

노름꾼뿐만 아니라 구경꾼들까지 긴장감이 최고로 오른 상황.

지나가는 자들도 크게 벌어진 판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야바위꾼이 잔을 슬쩍 열었다.

“어? 어? 왜, 왜? 없는 것이야?”

당서희는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섰다.

노름꾼이 일부러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안타깝네요. 쪼금만 더 빨랐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더 하실려?”

“……금전도 받아주는 것이야?”

“……그, 금전?”

노름꾼의 동공이 처음으로 커졌다.

“뭐, 뭐. 하시겠다면야.”

“좋아, 그럼 금전으로…….”

나는 당서희의 앞을 막아서며 나섰다.

“이번엔 내가 한번 해보지요.”

“응?”

“혼자만 즐길 겁니까?”

당서희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그대가 못 맞히면 내가 다시 할 것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하시죠.”

“…….”

내가 은전을 짤랑거리며 눈짓하자 호구를 잃은 노름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이내 호구가 다시 하겠다 하자, 눈을 빛내며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 돈 놓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지나가는 개도 맞히는 바로 그 놀이! 콩을 찾으세요. 콩!”

세 개의 잔.

처음 본 콩의 위치만 맞히면 돈을 벌 수 있는 놀이.

노름꾼의 말대로 이 놀이는 지나가는 애도 맞힐 수 있는 놀이다.

노름꾼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본다.

“어디에 거실 겁니까?”

“어디냐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노름꾼을 상대로 이 놀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애당초 이 놀이는 전부 사기니까.

“전부.”

“응?”

난 잔마다 은전 하나씩을 다 가져다 놓았다.

“뭐 하시죠? 여시죠?”

애당초 사기인 걸 알고 있었다.

처음 잔을 돌릴 때부터 느꼈으니까.

그럼에도 그냥 두었던 이유는 이 노름꾼에게서 특이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노름꾼이 일부러 허세를 부린다.

“참 내, 이런 친구들이 있다니까. 자, 보십쇼.”

잔을 동시에 뒤집는 노름꾼.

분명 세 개의 잔 중 하나의 잔에 붉은 콩이 있었다.

“자자, 다음 귀여운 아가씨 다시 자리하시죠?”

나는 잔을 덮어 섞으려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무, 무슨! 뭐 하는 짓이야!”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

“사기? 사기는 무슨! 분명 너도 보았…….”

난 방금 콩이 있던 잔을 다시금 열었다.

본래 있어야 할 붉은 콩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황한 노름꾼이 몸을 움찔거린다.

“이, 이건…… 시발! 애들아 쳐라!”

탁자 주위에 서서 구경하던 이들은 일당이었는지, 동시에 노름꾼을 잡은 내 손을 쳐내려 하지만.

퍼퍼퍼퍼퍼퍽!

순식간에 휘둘러진 당서희의 손날에 억소리를 내며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사기, 사기였던 것이야?”

당서희가 어느새 흑도인들의 공포의 대상인 백수신녀로 돌아가 있었다.

“본래 이런 노름이 다 그렇습니다.”

“……진정, 진정 그런 것이야?”

당서희가 노름꾼을 노려본다.

“히익!”

귀신이라도 보듯 당서희를 바라보는 노름꾼.

“사, 살려주십시오! 아까 뜯어낸 돈과 오늘 번 돈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턱을 쓸었다.

“으흠? 아니야. 그건 돌려줄 필요 없어.”

“네? 그, 그게 무슨?”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지?”

“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통상 노름꾼들은 놀이가 시작될 때 애초에 콩을 넣지 않는다.

그리고 호구가 잔을 선택한 이후에 콩을 도로 넣곤 한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무인들에겐 이 노름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헌데 이 노름꾼은 처음 일부러 패배해 줄 때를 제외하곤 콩을 다시 넣은 적이 없다.

“콩을 만들었다가 사라지게 했던 거.”

내가 궁금한 건 바로 그 콩의 존재다.

마치 목소리를 기 안에 담아 던지는 혈투처럼, 이 노름은 붉은 기를 기 안에 담아 콩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왠지 이것도 공멸권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노름꾼의 동공이 확장된다.

“에엑? 그, 그건 사문의 비전…….”

노름 따위로 사문까지 있어? 대단하네.

“응, 아까 그 돈 줄 테니. 그 비전 내놔.”

“하, 하지만……. 사부님이 아시면…….”

호오, 사부님도 있어?

그럼 고민될 법하지.

난 녀석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입을 열며 박수를 쳤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개도 승낙할 최고의 조건! 팔모가지와 발모가지가 반대로 돌아가기 싫다면 얼른 선택하세요! 자! 골라 골라!”

따라 한다고 따라 해봤는데, 뭔가 음정이 틀린 건지 노름꾼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하, 정말 여러 모가지를 날려줘야겠는데?

#

노름꾼에게 사문의 비전을 무상으로 전수받고 난 뒤.

나는 세상의 잔혹함을 알고 조금 시무룩해진 듯한 당서희를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당서희가 땅에 발을 붙인 채 꼼작도 하지 않았다.

“……일명도 데려가야 하는 것이야.”

“에?”

“세상은 생각보다 무서운 곳인 것이야. 일명도 누구에게 당할지 모르는 것이야.”

에이, 천하의 일명이 너랑 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당서희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외쳤다.

“일명을 구해야 하는 것이야! 어디선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야!”

전생에 일명은 수라마참대를 홀로 대면하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겨우 흑도 나부랭이들을 두려워할까?

그러나.

“내 감이 말하고 있는 것이야! 일명을 구하러 가야 하는 것이야!”

기운이 이상하게 뻗친 당서희의 말도 그렇고, 혹여나 이 대머리가 포교한답시고 엄한 흑도놈들 족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점점 날도 깊어져 가니까.”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에게 대머리의 출처를 묻자, 의외로 그의 행적은 금방 드러났다.

하긴 흑도놈들 사이에 승복을 입은 승려라니.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다.

그렇게 행적을 쫓고 쫓다 보니, 이상한 곳에 도착했다.

‘도박장?’

소연무장 전체에 간이 막 같은 것들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서 수많은 인간들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 인간 뭐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앉아있는 사람들을 휘휘 둘러보던 중 당서희가 말했다.

“진소운! 저기! 저기 있는 것이야!”

당서희의 말대로 도박장의 한 가운데 대머리가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포교를 하겠다던 일명이 검패를 들고 있는 것 아닌가?

‘뭐지? 파계할 셈인가?’

더구나 상태도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몸 전체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지?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일명 선배, 여기서 뭐 하십니까?”

내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일명.

일명의 얼굴색은 파리하다 못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지, 진 시주…… 나, 나 좀! 사, 살려주시오!”

……아니, 당신 대체 여기서 뭐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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