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26화 (226/357)

226. <내일의 운세>

검패.

사람들이 즐기는 가장 흔한 도박.

얇은 대나무 조각에 그림과 숫자를 그려놓고 순서나 짝의 높낮이에 따라 승부를 가린다.

가끔 검패로 운세를 보는 사이비 점쟁이들도 있지만, 대체로 돈을 걸고 상대방의 돈을 따내려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된다.

무림맹에서도 검패는 흔히 하는 도박인데.

보통 너댓이 모여 할 일이 없을 때면 동전과 검패를 들고 나타나는 이가 있다.

전생에 소정대에는 할 일이 있어도 동전과 검패를 들고 나타나는 놈이 있었는데, 바로 독안귀검 서운창이란 사기꾼 놈이었다.

이놈이 끼어들면 그 판에서 싸움이 안 나는 날이 없었다.

맨날 손장난을 치는 탓에 칼부림이 나고, 자리에 있던 이들이 중상을 입은 적도 다수 있었고.

이 웃기는 새끼는 차후 정마대전 때에도 검패를 들고 다녔다.

매일 밤, 전투로 지친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오면 다들 다음 날의 죽음을 기다리며 침잠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 서운창은 내일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검패를 뽑아 들었었다.

평생 남의 등이나 처먹던 놈에게 무슨 신통력이 있겠느냐마는, 서운창이 손장난으로 좋은 패를 꺼내주고 나면 어쩐지 다들 그날 밤은 편하게 잤다.

물론, 좋은 패가 나온 놈이 다음 날 죽었다 해서 원망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밤의 침묵이 주는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서운창에게 다가가 다시금 내일의 운세를 점쳐볼 뿐이었지.

내가 잠시 검패를 보며 추억에 잠겨있는 동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진 시주…… 사, 살려주시오.”

아니, 그러니까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건데?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그의 두피를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파계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그, 그런 게 아니오.”

내가 다 의아해질 만큼 일명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 사람이 이렇게 격한 감정을 표현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그게.”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하고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도통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며 틈을 주지 않는 탓에 제대로 말씀을 전달하지 못했는데, 유독 이곳에 앉은 인간들은 귓등으로라도 들어주더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와중에 한 사람이 자리를 뜨자 다들 자리를 파하고 떠나려 했고, 자신이 앉으면 법문을 들어주겠다는 이야기에 이 순진한 인간이 덥썩 그 자리에 앉았단다.

들을수록 가관이네, 이거 참.

“하아……. 그래서요?”

“그, 그게…….”

“담보로 금강주를 맡기셨다?”

“그렇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금강주면 소림의 칠(七)대 보물 아닙니까?”

일명이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지, 진 시주! 그런 말을 크게 하면…….”

그런 보물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일명의 부동심이 깨질 만하다.

“그냥 제압하고 도로 뺏어 오면 되지 않습니까.”

“……어찌, 소림의 제자가 그런 무도한 짓을…….”

“어차피 다 나쁜 놈들입니다. 서로 치고 박는 게 일상인 이들인데.”

“……그, 그래도 그건…….”

일명은 순간 엄청난 유혹에 이끌리듯 빼앗긴 염주를 보다가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분은 그리 나쁜 분이 아니오. 내가 진 것도 정당한 놀이의 결과였고.”

일명의 금강주를 앗아간 인간은 부드러운 인상의 유생 같은 인물이었다.

금강주가 귀한 물건임을 아는지, 예의를 차리듯 자신의 발치에 작은 천을 놓고 그 위에 조심스레 보관하며 예를 차리고 있었다.

나는 금강주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일광에게 물었다.

“금강주를 도박으로 날려버리면 지옥 갈 텐데, 두렵지 않습니까?”

“…….”

일명의 얼굴이 진짜 심각해진다. 더 놀렸다간 나도 함께 지옥에 가버릴지도.

“빚이 얼마입니까?”

“그, ……은자 이백 냥.”

“…….”

와…… 그 짧은 시간에 많이도 잃으셨네.

나는 품에서 금자 이십 냥을 꺼내어 유생처럼 생긴 사내에게 건넸다.

“빚은 대신 갚겠소. 그러니 그 낡은 염주를 돌려주시겠소?”

유생은 조심스레 염주를 내 쪽으로 슬쩍 밀더니 말했다.

“이것은 돈을 대신하여 받은 게 아닙니다. ‘승부’를 대신하여 받은 거지요. 원하신다면 도로 따가셔도 좋습니다.”

이거 봐라? 분명 우리가 신물이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텐데. 아무렇지 않아 한다고?

“도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전생엔 나도 도박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서운창이 죽고 난 후, 손장난을 쳐 운세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남지 않으면서 도박에 점점 흥미가 사라졌다.

더구나 왠지 지금 검패를 만지면, 전생에 내 운세를 듣고 죽은 놈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단 말이지.

유생이 금강주를 다시 제 쪽으로 가져간다.

“그렇다면 돌려줄 순 없겠군요.”

“금자 삼십 냥을 주겠소. 금자 삼십 냥이면 무려 열 냥이나 이득을 보는 것이오.”

유생이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키지 않습니다.”

나는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누르며 말했다.

“방금 들어서 알겠지만, 그건 소림사의 신물이오. 함부로 처분할 수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이곳에서 가지고 나갈 수도 없다는 말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무력으로라도 제압하고 되찾아 가겠소.”

“흑염룡 대협이 꽤나 합리적인 사람이라 들었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봅니다. 역시나 흑도 신성이라는 말이 맞았을까요?”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사절단의 존재는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근데 이 유생은, 일명은 물론이고 나까지도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이렇게 하는 게 어떠십니까?”

유생이 금강주를 조심히 들며 말했다.

“흑염룡 대협께서 얼마를 잃으시든 제게서 이백 냥만큼 따가신다면, 금강주는 그냥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엔 총 네 명이 앉는 것 같은데?”

“상관없습니다. 제가 계산을 할 테니 이백 냥만 따신다면 이건 흑염룡 대협께 드리겠습니다.”

애당초 나에게 용무가 있었던 건가?

“도박을 상당히 좋아하시는 것 같소?”

유생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승부’를 좋아합니다. 허나 보다시피 제가 워낙에 약골인지라.”

외공을 많이 익히는 흑도인들 사이에서 유생의 체구는 유달리 왜소해 보였다.

흐음, 이렇게까지 승부를 걸어오는데 더 이상 피할 이유는 없지.

“좋소. 대신 약속은 지키시오.”

유생의 입가에 부드런 미소가 어렸다.

“물론이지요.”

나는 이제 곧 먹물을 뒤집어쓴 문어가 될 듯 안색이 파리해진 일명에게 말했다.

“대머리 선배는 나가 있어.”

“아, 알겠소. 부디! 부디!”

부처님에게 절하듯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일명.

뿌드득. 우드득.

나는 손가락과 목을 풀며 자리에 앉았다.

감히 백랑각 공인 도신(賭神)을 상대로 ‘승부’라는 말을 내뱉다니.

후회하게 해주지.

옆에서 불안한 듯 떨리는 당서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이겨야 하는 것이야…….”

#

커지는 판돈에 사람들이 동요한다.

쌓여가는 금자와 은자에 눈이 휘둥그래지며, 달콤한 향기에 이끌린 개미처럼 도박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승자에게 점점 쏠려가고 있었다.

“지, 진 시주…… 이게 무슨…… 검패를 할 줄 모르는 것이오?”

“……왜 멋있게 앉은 것이야? 꼴 사나운 것이야!”

아, 물론 내가 이기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걱정 마십시오. 본래 도박이란 흐름을 먼저 보는 겁니다.”

나는 품에서 전표 한 장을 더 꺼냈다.

“그런데 왜 손을 떨고 있는 것이야?”

응? 내가 손을 떨었다고? 그럴 리가.

전생에 이런 일이 너무너무 많아 하나하나 다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다.

월봉을 다 까인 적도, 성과급을 다 털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승리했던 이는 나였지 않은가.

“……진 시주. 식은땀을 흘리고 계시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걱정 될 수 있다.

암, 그럴 수 있고말고.

만약 나 혼자 이 자리에서 금전 이십 냥을 털렸다면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명명백백히 내가 이 자리의 호구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 탁자에 앉은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모두 저 유생에게 털리고 있었다.

이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저놈이 잘하고 있다는 것. 후후.

‘아! 그렇다고 이게 좋은 일은 아니지!’

“좀 하시는군요.”

유생이 빙그레 웃는다. 해맑은 웃음이 보는 사람 기분마저 좋게 만든다.

사람 보면 볼수록 호감이네, 약 올리는 것만 빼면.

“먹고살려 머리를 쓰다 보니 절로 이렇게 되더군요.”

“그렇습니까? 머리를 많이 쓰시나 봅니다.”

“강호의 일이란 게 대부분 힘으로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 제게 무력으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지요.”

유생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폭풍처럼 몰아쳤던 이전 판들이 다시금 복기된다.

검패는 숫자 싸움이다.

각자가 쥐고 있는 패의 숫자를 비교하여 누가 승리하고 패배하는지 승부가 나는 놀이.

나는 저주에 가까운 완벽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에 판에 나온 패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승패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이리 압도적으로 진다는 건…….

‘이 새끼 숫자를 세고 있군.’

확신에 가까운……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떤 판에서든 내가 이토록 일방적으로 질 리가 없으니까.

나 또한 기억력을 기반으로 숫자를 세는 방법을 쓰지만, 이리 일방적으로 밀리는 걸 보니 녀석의 셈법이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어쩐다…….’

이미 이전 판들을 통해 녀석의 숫자 세는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다 파악했다.

아마 이대로 계속 도박을 이어 간다 한들, 내가 그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검패의 패들은 숫자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경우의 수 역시 줄어든다.

게다가 유생은 수많은 경험을 쌓아왔기에, 상대들이 버리는 숫자를 토대로 웬만한 패의 조합을 다 떠올려 가며 숫자를 세고 있을 터.

내가 기억력만으로 우위를 점하긴 힘들다.

“조금 판돈을 낮춥시다. 살벌해서 못 하겠네.”

나와 마찬가지로 판돈을 잃어가는 흑도인이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돈 없으면 빠지시오.”

“뭐?”

“돈 없으면 빠지시라고. 난 되찾아야 할 물건이 있으니까.”

“이 새끼 말하는 뽐새 보소!”

내 얘기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흑도인. 돈을 잃고 있는 상황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다.

그럼에도 난 멈출 수가 없었다.

금강주를 되찾아야 하니까.

여전히 내 손에 들린 패만 바라보며 일갈해 주었다.

“내가 못 할 말 했나? 돈 없으면 도박을 안 해야지. 추잡스럽게 판돈을 낮추자고 합니까?”

내 태도에 오히려 일명과 당서희가 당황해서는 나를 말린다.

“지, 진 시주…….”

“그, 그만하는 게 좋을 듯 보이는 것이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흑도인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내게 주먹을 날렸다.

부지불식간에 주먹에 맞은 나는 옆 탁자를 뒤집어엎으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흑도인은 분한 듯 여전히 씩씩거린다.

“건방진 애새끼가 말 더럽게 싸가지없게 하는구만. 덤벼, 이 새끼야!”

같잖은 도발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한 대 맞고 나니 어지러웠던 머리가 한층 정리되는 기분이다.

“분 다 풀었으면 꺼져. 이 거지 새끼야.”

난 내게 주먹을 날린 흑도인에게 일갈한 뒤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흑도인이 다시금 내게 주먹을 날렸다.

부웅-

탁.

“시주, 이미 한 차례 주먹을 휘두르셨으니,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이거 안 놔?”

그러나 이는 일명에게 단숨에 막혔다.

“저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진 시주의 말대로 돌아가 주십시오.”

흑도인은 중키의 일명이 어찌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으나, 압도적인 신위에 결국 콧방귀를 끼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진 시주,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아요.”

검패를 정리하곤 다시금 패를 나누기 시작하자, 내 상처를 살피던 일명과 당서희가 뒤로 물러났다.

판에 참여하던 다른 한 사람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판돈을 챙겨 탁자를 벗어났고.

이제 탁자에는 유생과 나만이 남아있었다.

제 패를 확인하던 유생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치료를 받고 오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전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그 와중에 나를 생각해 주는 건가?

이 사람은 참 다른 도박사들이랑은 다른 느낌이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도박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몸도 풀렸고, 여기서 끊으면 흥이 떨어질 것 같군요.”

“그러시다면야.”

두 사람끼리 판을 진행하자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여태껏 승패가 한쪽으로만 몰렸다고 하면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유생이 세 판을 이기면 한 판은 내가 이겼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엔 유생이 두 판을 이기면 한 판을 내가 이겼다.

다만 문제는 내가 이기는 판마다 오가는 판돈이 너무 작다는 것.

그에게서 따야 할 돈이 은전 이백 냥이건만, 이제껏 따낸 돈은 겨우 삼십 냥에 불과했고, 그가 따간 돈은 이제 은전 오백 냥에 다다랐다.

좀 전까지 와글거리며 모여들어 구경하던 사람들도 어느샌가 입을 꾸욱 다물고 승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유생은 그런 건 부담도 되지 않는지 이전과 다름없이 검패를 나누고 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로, 강호의 신성 중 진 공자의 지략이 가장 뛰어나 별호에 생각할 ‘염’자가 붙었다 하더군요.”

“소문엔 과장이 많이 섞여있는 법이지요.”

“겸손하시군요.”

유생이 다시금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한번 본 것은 잊지 않으시는 신기한 재주가 있으시다지요?”

“재주라기보단 저주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도 나의 패배.

유생은 중간에 쌓인 돈을 쓸어갔다.

이윽고 다시 패를 나눈다.

“그게 저주라면 진 공자의 이름이 이리 널리 퍼지지 않았겠지요.”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번엔 나의 승리.

유생이 가져간 것보다 적은 돈을 힘없이 챙겼다.

그는 지체 없이 패를 섞은 후 나누었다.

“그렇습니다. 그 재주가 없었다면 태을문도, 진 공자도 이리 훨훨 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런 면에서 진 공자에게 굉장히 큰 호기심이 갔습니다. 저 또한 진 공자와 비슷하거든요.”

“기억력이 좋으십니까?”

유생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전 원치 않아도 계산이 되더군요.”

“계산이라……. 힘든 건 없었습니까?”

“없었다면 거짓말이겠군요. 원치 않아도 어떤 일의 결과가 예상되어 버리니, 삶이 재미없다고나 할까요? 그나마 이런 도박만이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버렸지요.”

이번엔 나의 승리가 될 줄 알았건만, 다시금 유생이 돈을 쓸어갔다.

역시나 숫자 세기 실력은 녀석이 더 뛰어난 것 같다.

“제가 돈을 잃는 이유가 있었군요.”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도박이란 덴 운이 크게 작용하지 않겠습니까?”

“운이라……. 단지 운이라고 하기엔 금액의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 군요.”

유생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쨌든 이번엔 내가 승리했다.

나도 머리가 좀 풀린 건지.

슬슬 녀석과 승률을 맞춰가고 있다.

녀석이 숫자를 센다는 것을 확신한 이후부턴, 내가 질 판에 거는 돈도 조금씩 줄였고.

어느 샌가부터 우리는 서로가 조금씩 잃고 조금씩 따는 상태를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규모가 작아진 판에 다들 지루해졌는지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생겨났고.

그때, 유생이 검패를 섞으며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검패로 자신의 운세를 점쳐보는 것을 아십니까?”

“많이 쳐봤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나보다 검패로 운세를 많이 쳐본 놈은 없겠지.

유생이 검패를 나눈 후 제 패를 확인하며 제안했다.

“이번 판으로 운세를 점쳐볼 겸 마지막 승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지막 판이라 하면?”

“이번 판이 끝나면 결과가 어떻든 금강주를 돌려드리지요. 다만 패배하신다면 금강주를 돌려드리는 대신 흑룡검을 제게 주시는 겁니다.”

나는 유생의 손을 살폈다.

양손에 굳은 살이 조금씩 박혀있긴 하지만, 검을 잡는 이의 손은 아니었다.

“검을 무기로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검이 필요한 겁니까?”

“증표로 삼고 싶어서 말입니다.”

“증표?”

내가 반문하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흑염룡을 이겼다는 증표.”

“나 같은 이에게서 이겼다는 증표가 굳이 왜 필요합니까?”

“흐음, 그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나는 내 패를 살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 절박한 일명의 전음이 들려왔다.

-지, 진 시주…… 그 패론 확실한 승리를 장담키 힘들지 않습니까?

얼씨구? 어느새 도박 전문가가 다 되셨대.

난 도박 전문 대머리의 말을 무시하곤 유생을 계속 바라봤다.

“흑룡검이 기물이기는 하나, 금강주에 비할 바는 아닌데. 괜찮겠습니까?”

“전 일명 스님을 이겼다는 이야기보단 흑염룡을 이겼다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말이지요.”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뭐라고.”

우린 한 개씩 패를 더 가져가며 각자의 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탁자 위에 은전 하나씩을 올려두었지만, 그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이번 판에 걸린 판돈은 금강주와 흑룡검이었으니까.

유생이 제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흑염룡의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이 정도의 사람이 있을 거라 상상치 못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 또한 제 사문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탓에 더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 홀로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결국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건…….”

십(十)이란 숫자가 적힌 패를 버리고 새로운 패를 집어 가는 유생.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인 거죠.”

이윽고 유생이 씨익 이빨을 보이며 미소 짓는다.

“아무튼 운세는 제가 조금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지랄하네.

처음 패를 보고서 승부를 걸었던 주제에 운이 어쩌고 저째?

“…….”

“그럼 까볼까요?”

금강주를 탁자 위에 올려두는 유생.

나 또한 흑룡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렸다.

유생이 천천히 자신의 패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아쉽게도 이번 승부는 제가 이겼나 봅니다.”

다섯 개의 숫자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연환검(連環劍)패가 나타나자 일대에 깊은 탄성이 울렸다.

“세상에 십(十)패를 버릴 때 설마설마했건만!”

“연환검이라니……! 결국 저 유생이 이겼네그려.”

“그렇겠지. 나도 이제 겨우 세 번밖에 못 본 패인데.”

어이가 없을라니까.

진짜 연환검패가 나와버리다니.

너무 개연성 없는 패라 독안귀검도 사기도박을 칠 때 잘 안 꺼냈던 팬데.

그것도 가장 중요한 것이 걸린 마지막 판에?

결국 놈은 처음 패를 받았을 때부터 연환검이 나오리란 걸 예상했다는 말이었다.

난 보기 좋게 녀석의 계산 속에서 발버둥 쳤던 거고.

유생이 흑룡검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사문의 동료들에게 자랑을 해야겠군요. 제가 흑염룡을 이겼다고 말입니다. 후후.”

유생은 생글거리는 모습으로 금강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흑룡검에 손을 뻗었다.

“동작 그만.”

나는 흑룡검을 집은 유생의 팔목을 잡아챘다.

“어디서 함부로 손을 놀리시나.”

무공의 차이가 여실함에도 유생은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연신 싱글거린다.

“결국 무력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지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저 대머리가 이 자리에 앉은 시점부터 잘못됐던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이 자리에 당당히 앉은 건 아니란 말씀.

“아직 내 패는 까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훗, 어차피 봐봐야…….”

탁- 탁-

나는 패를 하나씩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내가 패를 하나하나 깔 때마다, 생글거리던 유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 이 무슨…….”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란 말, 못 들어봤습니까?”

내가 한 장 한 장 패를 깔때마다 주변의 도박사들의 눈이 계속 커졌다.

“어…… 어엇?! 어어엇!”

이윽고 모든 패가 다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앓는 듯한 신음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세상에…… 저걸 내가 보다니.”

“저 패가 원래 나올 수 있는 팬가?”

일(一)패 네 장에 왕(王)패 한 장.

검패의 최강패인 오천왕이었다.

“오, 오천왕이 왜?!”

유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와 내 패를 뚫어져라 번갈아 봤다.

“운이 좋았나 보지요.”

나는 놈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왜, 뭐?

도신이 왜 도신이겠어. 어떻게든 이기니까 도신이지.

짜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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