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내일의 운세(2)>
유생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검패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분명…… 분명…… 구 할 구 푼 삼 리의 확률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다른 검패들을 하나하나 뒤져보기 시작하는 유생.
나는 얼른 일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에게 뛰어드십시오.
-응?
-금강주 되돌려 받기 싫습니까?
-아, 아니!
일명이 흥분한 얼굴로 버럭 외쳤다.
“지, 진 시주! 대단하오! 정말 이겼소!”
대머리 선배는 어색한 연기를 펼치며 내게 안기듯 뛰어들었고, 나는 그의 옷채를 잡아당겨 그를 탁자 위에 던져 버렸다.
“쯧, 징그럽게 왜 덤벼들고 난리람.”
내가 손을 툭툭 터는 사이.
탁자가 부서지고 그 위에 놓였던 은전과 금전이 마구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주변에서 구경을 하던 도박꾼들이 슬금슬금 발을 내밀어 동전 하나씩을 발치에 숨기고 있었다.
자신이 따낸 돈들이 알음알음 사라지고 있건만, 유생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되찾아 가겠소.”
내가 바닥에 떨어진 금강주와 흑룡검을 집자 그제야 고개를 드는 유생.
“……정말 그 확률을 뚫어낸 겁니까?”
“뭐 보다시피.”
“그렇다면…… 정말 운이 좋으신 분이군요.”
운이 좋다라…….
글쎄, 운이 좋았으면 소정대까지 흘러 들어갔을까?
소정대는 백랑각 내에서도 제일 재수 없는 놈들만 들어가는 곳이었으니까.
이뿐이랴. 얼마나 재수가 없었는지, 손장난을 치지 않으면 운세를 뽑을 때마다 계속 최악의 패만 나오곤 했으니까.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운을 만드는 것도 운이라고 친다면.
그래, 운이 좋은 편이긴 하겠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렸다.
주변을 둘러쌌던 도박사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흐음, 모두 단단히 한몫을 챙긴 듯한데…….
유생은 자신이 딴 돈의 절반 이상을 모두 털린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일단 돈부터 챙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생은 자신의 발치에 흩어진 금전과 은전들을 보더니, 관심도 없다는 듯 그것들을 툭 하고 발로 찼다.
눈치를 보던 도박사들이 이젠 대놓고 눈에 불을 켜고 승냥이 떼처럼 달려든다.
유생은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
“어쨌든 재밌었습니다. 전 제 운세가 가장 좋을 줄 알았는데. 저보다 더 좋은 운세를 가진 분이 나올 줄이야…….”
유생은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흑염룡의 이름이 천하를 울리는 이유가 있나 봅니다.”
나는 의아함에 그에게 물었다.
“한 판으로 뒤집긴 했으나, 종합적인 승률을 따지자면 그쪽이 더 높으니 낙심할 필욘 없을 것 같은데요?”
유생이 고개를 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판을 승리한다 한들 무의미한 것이죠. 오늘의 승부처럼…….”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던 유생이 이내 다시 호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전 천관문의 군유현이라 합니다.”
“태을문의 진소운이요.”
“또 인연이 닿는다면 즐거운 승부를 겨뤘으면 좋겠군요.”
사흑련의 개파식에 참여한 것으로 봐선 흑도인이 분명할 텐데, 참으로 흑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 참, 그리고 그거 아십니까?”
“……응?”
“오천왕패 말입니다. 운세에서는 대운을 표하기도 하지만…….”
꾸욱-
그가 바닥에 떨어진 패를 발 끝으로 지그시 밟은 후, 생긋 웃는다.
“그와 정반대로 모든 것의 소멸을 뜻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 뒤돌아 가버리는 군유현.
허 참. 저놈.
“깐죽거리는 말투를 보니 분명 흑도인 맞네.”
멀쩡한 인간이 스스로 흑도 무림에 투신할 리 없으니 말이다.
#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난 머릿속을 계속 뒤져가며 군유현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진 인간인 데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다.
더구나 돈 앞에서의 그 태도.
‘평범한 놈은 아니야.’
하지만 머릿속 장서고를 탈탈 털어보아도 놈에 대한 자료는 없었다.
더구나 천관문이란 문파도 처음 들어본 곳이었고.
“일명 선배, 천관문이란 문파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금강주를 볼에 부비며 헤벌쭉 웃던 일명과 눈이 마주쳤다.
“…….”
그게 무슨 새끼 강아지냐고.
일명이 스스로도 머쓱했는지 헛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으흠…… 글쎄요. 소승의 짧은 식견으로는 잘 모르겠군요.”
“……그렇습니까?”
“흑도야행 사건 이후로, 숨죽이고 있던 흑도 문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문파들 중 하나인 거겠지요.”
“흠…….”
확실히 전생보다 흑도 무림의 덩치가 확실히 커졌다.
역사가 바뀌고 있다는 점에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어쨌든 나쁜놈이 많아지는 건데 이걸 과연 좋다고 해야 할지…….
“그보다 진 시주…….”
일명의 부름에 다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한 겁니까?”
“뭐가 말입니까?”
“마지막 판에서 말입니다.”
“응?”
일명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진 시주, 부끄럽지만 소승도 검패의 규칙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승부는 분명 군 시주의 승리가 확실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보다 운이 좋았나 보지요.”
“겨우…… 칠(七) 리의 확률로 말입니까?”
“어쨌든 십(十) 할의 승리란 없지 않습니까?”
일명이 답답하다는 듯 이번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진 시주는 인세의 기준을 벗어난 운을 가지고 있는 거로군요.”
그러고 보니, 소매에 든 것들이 거추장스러워 빼내었다.
“으잉?”
일명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한다.
“진 시주, 그건…… 검패가 아닙니까?”
난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게 소매 안에 들어와 있더군요.”
“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일명.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 옆자리 놈한테 맞았을 때 말입니다. 일어나서 제자리에 도로 앉으니 소매가 묵직하더군요. 참으로 운이 좋았지요?”
“그럼…… 사기 도박을 한 겁니까?”
“에헤이! 사기는 무슨 사기. 운이 좋았다니까요.”
이 사람이 왜 생사람을 잡고 그런데.
그저 운이 좋았다니까.
물론 직접 만들어 낸 운이긴 하다만, 어쨌든 그것도 운은 운 아닌가.
그때, 옆에서 당서희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진정 무서운 건 그대였던 것이야? 난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야.”
에헤이, 이 사람들이 정말. 진짜 운이었다니까?
#
첫날 그렇게 난리를 치고 나선 크게 별다른 일이 없었다.
당서희도 첫날 당한 일들이 꽤 충격이었는지, 더 이상 뭘 하겠다고 나가는 일이 없었고. 일명도 포교 대신 수행이 부족하다며 면벽을 시작했다.
깨 있는 내내 술을 주야장천 마시는 악병비가 옆에 있는데 면벽을 하고 싶나?
“네놈…… 히끅. 분명 간자가 확실하려…… 히끅. ……다.”
그리고 악병비는 술에 취해 있는 내내 날 취조했다.
아무런 강제성 없는 취조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사흘 내내 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정신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히끅, 히끅……. 분명 간자가…… 히끅. 간자가……. 히끅.”
저 인간은 집요해서 감찰각에 들어간 걸까? 감찰각에 들어가서 집요해진 걸까?
나 또한 악병비를 뒤로하고, 일명 옆에 앉아 면벽을 하며 노름꾼에게 얻어낸 무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노름꾼이 전수해 준 사문의 비전은 오직 단 하나만을 추구했다.
간교할 교(狡).
상대를 속이기 위해 무공을 이리 발전시켰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물론, 그 용도가 대부분 노름에 국한된 건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지만.
교교신공(嬌狡神功).
진짜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아름다운 사기?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이따위 이름을 붙이다니.
어쨌든 전수받은 교교신공을 천천히 떠올렸다.
‘이게 일(一) 식. 일두도안’
손안에 콩알만 한 기운이 형상화된다.
기운은 붉은색으로 번졌다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종국엔 검정색으로 바뀐다.
노름꾼이 콩을 만들었다 사라지게 만들 때 썼던 기술이다.
‘이(二) 식. 송하사혁’
두 개의 바둑알만 한 기운이 나타나 서로 색깔을 뒤바꾼다.
주로 고관대작들과 사기 바둑을 둘 때 썼던 것 같은데. 노름꾼은 이걸 쓰다가 손목이 잘릴 뻔했으니 조심하라는 조언(?)까지 줬다.
‘삼(三) 식. 화전월하.’
바둑알만 한 기운이 흩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때.
“으흠…… 왜 이리 눈이 뻑뻑한지.”
갑자기 옆자리에서 일명이 면벽을 깨고 눈을 부빈다.
삼 식인 화전월하의 영향 때문에 눈이 뻑뻑해진 것.
‘하아…….’
무공을 시전하던 나는 깊은 자괴감에 움직임을 멈췄다.
어쨌든 내게 필요한 것은 이 콩 안에 색깔을 넣는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었으니까.
혈투가 목소리를 낸 것처럼, 노름꾼이 색깔을 집어넣은 것처럼.
의지를 집어넣을 수 있다면 공멸권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분명 콩의 색깔은 손안에선 마음대로 바뀌었다. 내가 연상하는 순간 기운의 색깔이 가지각색으로 변화하는 건 신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손에서 벗어나면 색깔은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색깔을 변화시키려 해도, 색깔은 도통 변하지 않고 오히려 사라져 버렸다.
노름꾼이 그렇게 전수하기 아까워하던 교교신공은 공멸권의 단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렵네.”
“……뭐가 그리 어려우십니까?”
“응?”
눈을 부비던 일명이 나를 보며 합장을 한다.
“내 기운과 자연의 기운은 서로 상극이 아닙니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기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가 시작입니다.”
“불가에 이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까?”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것이 있지요. 바로…… 백보신권.”
“아!”
백 보 밖의 상대의 팔방을 제압하는 백보신권.
그 백보신권 또한 자신과 분리된 내공을 변형시키지 않는가?
어찌 보면 공멸권에 가장 흡사한 형태.
일명이 설명이 이어진다.
“백보신권의 첫걸음은 자신의 기운과 자연의 기운을 합치하는 겁니다.”
“이론상으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이론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진정 자연의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음을 느낄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을 담은 설명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건 소림의 비전 아닙니까? 이렇게 막 가르쳐 주셔도 되는 겁니까?”
눈이 시뻘개진 일명이 빙그레 웃었다.
“금강주를 되찾아주신 값이라 생각하시지요.”
“흠…… 그럼 부담 없이 받겠습니다.”
알려준다는데 굳이 점잔 뺄 이유는 없지. 그리고 내가 보물을 찾아준 건 맞잖아?
“혹시 자연의 기운이 관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백 일 밤낮으로 면벽을 하며, 물과 소금만으로 화기를 뺀 후에…….”
저저 태연한 표정으로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릴…….
“잠깐, 잠깐! 사람이 할 수 있는 수련으로 알려주십시오.”
되려 일명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반문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소림사에선 상식 공부 같은 걸 따로 안 시키나?
#
개파식 전야제가 일주일째 이어지고, 이제 사흑련 내부는 정말로 천하의 흑도인들이 다 몰려든 듯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린 닷새째, 그러니까 내가 취조를 받은 지 나흘째 되어 미쳐버리기 직전에 련주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련주의 집무실로 가는 길.
사흑련 내부에서는 우리가 왔던 날보다 세 배는 많은 흑도인들이 바글거리며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주독 때문에 시뻘게진 눈으로 흑도인을 바라보던 악병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천하의 버러지들은 다 모였군.”
이 양반아, 당신 협정 맺으러 온 거라고.
그런 태도로 뭘 하겠다는 거야 진짜.
일명이 악병비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 협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강호에 피가 흐를 겁니다.”
“굴욕적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뭐가 중요한지는 아는지 정관을 정리하고 다시금 걷기 시작하는 악병비.
우리 사절단 일행들은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거대한 대전이었다.
중앙을 바라보니 현 련주인 차석두가 철좌에 앉아있었고, 대전 양옆으론 흑도 무림의 악명 높은 악당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슬쩍 악병비를 바라봤다.
‘체포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겠네.’
악병비로선 그야말로 먹잇감들이 한곳에 몰려있는 상황.
하지만 사절단장으로 왔다는 책임감은 있는지,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무림맹의 사절단장 악병비라 합니다. 사흑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어서 오시구려. 쉽지 않은 걸음이었을 텐데. 이리 와주어 고맙소. 자리는 불편하지 않았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참을 만했습니다.”
“…….”
가시 돋친 악병비의 말에 나와 일명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련주도 만만치 않았다.
“흐음…… 그럴 수 있지. 위선자들은 쓸데없는 격식을 많이 따지지 않소? 이리 솔직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불편한 것은 당연할 터.”
“……감내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간에 살벌한 설전이 잠시 오가고, 악병비가 일명을 바라봤다.
그러자 일명이 양손에 든 두루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천하제일 무림맹의 총군사이신 제갈 군사께서 보내시는 축전입니다.”
차석두가 턱을 쓸며 말했다.
“그 말은 이제 틀린 것이오. 천하제일의 연맹인 사흑련이 생겼으니.”
“그거야 두고 봐야 할 일이지요.”
맹렬한 기 싸움에 사위가 일순 고요해진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련주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쨌든 축전을 보냈다니 보겠소이다.”
일명의 손에 들렸던 두루마리가 사용인의 손을 거쳐 차석두에게 건네졌다.
차석두가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읽는 동안.
난 슬쩍 고개를 들어 내부에 있는 면면을 살폈다.
‘흑사방, 구룡방, 혈호문, 사룡문, 마도문, 혈검문, 황사문…….’
흔히 흑도무림의 제일 세력이라 칭해지는 오문이방일봉 모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어 차석두 왼편에 선 황부식과 오른편에 선 사내를 살펴보았다.
‘저자는……?’
차림새로 보아선 무사의 그것과 달랐는데.
인상이 날카로운 것이 인상적이어서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복룡(伏龍) 담악! 왜 저자가 여기에?’
담악은 전생에 무림맹의 총군사였다.
제갈소명이 암살로 죽은 뒤, 정마대전을 진두지휘했던 병법의 천재!
사흑련이 자리한 위치나, 사흑련의 건물들이 자리한 모양이 범상치 않다 했더니.
그게 다 저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사이 두루마리를 모두 읽은 차석두가 길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흐음, 이거 꽤 어려운 문제를 가져왔군.”
그러곤 지체 없이 담악을 돌아본다.
“총군사, 그대가 한번 보겠나?”
우리를 꿰뚫을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하던 담악이 작게 고개를 조아리며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찰나 만에 읽더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군요. 동맹과 협정이라니…….”
담악이 내뱉은 협정이라는 단어에 각 문파의 수장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반가워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비웃음을 날렸다.
잠시간의 소란이 지난 후, 차석두가 우릴 보며 말했다.
“그런가? 난 좀 고민을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은데 말이야?”
담악이 고개를 내저으며 반박했다.
“그간 흑도인들이 무림맹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이제 와 손을 내미는 건 잠시 자신들의 위험을 넘기기 위해, 그간의 과오를 면피하려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런가?”
“더구나 사절단장으로 보낸 이의 이력을 보십시오. 흑도연맹을 능멸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어찌 악명 높은 감찰각 삼당주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흐음…….”
담악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차석두가 다시금 우릴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 총군사께서 그렇다는군. 안타깝지만 동맹은 할 수 없겠소이다.”
하긴 이제 사흑련주가 된 차석두의 입장에서 갑자기 협정이나 동맹을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방금 그가 이제껏 한 말들을 보았을 때,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도 역시 물씬 느껴졌다.
흐음, 저 담악이 이야기한 명제만 부수고 괜찮은 제안을 한다면, 동맹까진 못가더라도 평화 협정 정도는 충분히 맺을 수 있을…….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응? 뭐라고?
이대로 대화를 끝내려는 악병비의 말에 나는 뜨악하는 심경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인간 아직 술이 덜 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