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내일의 운세(3)>
군유현 그자가 남긴 말이 그냥 도박에서 진 인간의 추잡한 발버둥 정도일 거라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조.때.따.’
내 머릿속은 저 세 글자로 가득 메워졌다.
저 미친 이념 심문관이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요.’라고?
뭐어어? 어어쩌얼 수 없지요??
나뿐만 아니라 일명 또한 뜨악한 눈으로 악병비를 바라봤다.
입술을 달짝이는 걸 보니 전음을 보내는 것 같은데, 움찔움찔 반응하기만 할 뿐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악병비.
옆에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날아든다.
“클클클…… 그럴 줄 알았지. 위선 가득한 백도 놈들의 소갈머리야 뻔할 뻔자 아닌가?”
황사문의 문주라 했던가, 아까부터 비웃음을 날리던 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마 사절단이란 이유로 이곳에 온 것도 우리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함이었겠지.”
남자의 말에 악병비의 눈초리가 어쩐지 날카로워졌다.
“우리 무림맹이 그런 치졸한 방법을 쓸 것 같은가?”
악병비의 말에 남자가 오히려 반색하며 말했다.
“엄한 사람 죄를 뒤집어씌워 단죄하는 게 무림맹의 특기 아니던가!”
남자의 말에 악병비가 드물게 분노를 터트렸다.
빠드득.
“……감히 그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다니.”
아니, 아저씨 여기 적진 한가운데라고요!
이제는 더 이상 동맹이 맺어지냐, 협정이 맺어지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선포를 문서로 할 것이냐, 사절단의 목으로 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사실 전쟁 선포로 사절단의 목을 베는 것만큼 확실한 의사 표시가 없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
“그만, 왜 손님을 모셔두고 그따위 말을 하는 건가? 이러니 흑도 놈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소릴 듣는 거지.”
황사문의 반대편에 선 사내가 일갈했다.
흑사방의 방주 강맹지.
나와는 마령고원에서의 인연이 있는 흑도 거물이다.
그가 차석두를 바라보며 피력했다.
“련주. 우리 사흑련은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세력이요. 처음부터 전쟁으로 시작할 필욘 없다 생각하오. 개파식의 취기가 깨기도 전에 전쟁을 하려 한다면 세간의 사람들이 우릴 뭐라 생각하겠소.”
강맹지 주변에 선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자, 황사문의 문주가 이죽거렸다.
“단체를 만들었더니 권력 놀음이 하고 싶었던 건가?”
그는 보란 듯이 제 무기를 어루만지며 강맹지를 도발했다.
“하지만 어쩌지, 그쪽이 련주가 될 일은 평생에 가도 없을 듯한데.”
“……아가리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켈켈켈, 금방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역시나 흑도무리답게 토론장에서 금방이라도 손을 내뻗을 듯한 모습에 사흑련주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탕. 탕. 탕.
“그만!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마시오.”
“…….”
“……크흠.”
장내의 분위기는 소나기가 내린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흑련주 차석두를 바라보자, 그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 사안에 대해선 당장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니, 차후 개파식이 끝난 이후 다시금 논의하도록 하겠소.”
효시 결말이 아닌 것만으로도 난 감동하여 깊게 고개를 숙이며 일행들과 대전을 나섰다.
#
쾅.
마지막으로 내실에 들어선 나는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악병비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실에 돌아오자마자 다시금 술잔을 집어 들려 하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술을 마시려 하고 있다.”
“…….”
내가 그게 궁금한 거 같아?!
나는 최대한 감정을 정제하며 말했다.
“이곳에 뼈를 묻고 싶은 겁니까?”
“…….”
그는 술잔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결심한 듯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 뭐가 불만인 거지?”
“뭐가 불만이냐고요?”
사흑련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본래 역사에서 혈교와의 전쟁으로 흘린 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은 본 역사에서보다 더 위태한 상태로 마교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 꼴을 절대 좌시할 생각이 없다.
“수많은 피가 천하에 흐른다 해도 상관없습니까?”
“…….”
“산처럼 쌓인 시체 중에는 분명 악가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악병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겁니까?”
탕.
악병비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분위기에, 옆에서 지켜보던 일명이 나를 막아섰다.
“진 시주……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난 일명의 손을 뿌리쳤다.
“일명 선배도 사흑련과의 전쟁이 일어나길 바랍니까? 그렇게 수많은 피가 흐르는 게 소림이 말하는 ‘정의’란 말입니까?”
“진 시주…….”
“단장의 행동과 결정이, 무고한 이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정녕 그걸 그냥 두고 보기만 할 겁니까?”
“…….”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악병비가 이제는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나더러 어쩌라는 것이냐?”
“단장이 어찌해야 하는지는 만통부에서 듣지 않았습니까?”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이야기군.”
나는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퍼져 올랐다.
“뭐가 불가능한 일이란 말입니까! 이미 사흑련도 협정 정도는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악병비가 다시금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답답하면 네가 하든가.”
“뭐라고요?”
“네가 하란 말이다!”
나를 흑도의 간자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감찰각을 끌어들이긴 했어도, 최소한 책임감은 있는 인간이라 생각했었다.
전생에 내가 봐온 악병비의 모습은 이 정도로 저열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숙인 악병비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겨우 이 정도의 인간이 ‘정의’를 바르게 세우는 존재라니…… 감찰각도 끝났군요.”
“…….”
내 경멸이 가득 담긴 이죽거림에도 악병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진 시주…… 잠깐 바람을 쐬시지요.”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잡아끄는 일명.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나가며 말했다.
“좋습니다. 앞으론 제가 하겠습니다. 단장은 그냥 술독에 빠진 채로 가만히나 있으십시오.”
내가 일명과 당서희의 손에 이끌려 내실을 나설 때까지 악병비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
감정을 갈무리하는 사이, 일명이 머뭇거리며 내게 가까이 다가섰다.
“진 시주…… 조금만 단장님을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명이 이렇게 물색없는 인간이 아니었는데…….
이번 일은 분명 단장의 잘못이다.
우리 사절단은 그저 축하만 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사천에서 피 흘리고 있는 무림맹의 무사들, 그들이 안전하게 싸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고, 제길.
“제가 뭔가 잘못을 한 겁니까?”
기분이 상하니 목소리도 절로 냉랭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일명의 기분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일명이 제 머리를 천천히 흔든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뭘 이해하란 겁니까?”
“…….”
일명이 주저하며 당서희를 바라본다.
그녀도 뭔가를 아는 눈치인지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나도 진소운이 조금 심했다 생각하는 것이야.”
“…….”
내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게 느껴졌는지, 당서희와 일명이 서로 복잡한 시선을 나누었다.
이윽고, 일명이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진 시주…… 지금 들은 이야기는 오직 진 시주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뭘 말입니까.”
몇 번이나 주저하던 일명이 결국 입을 열었다.
“황사문의 문주 구계악. 그자가 ‘청주 사태’의 주범입니다.”
청주 사태는 흑도인 수백이 악가의 행단을 습격한 일을 말한다.
이때의 일로 악가의 인물 서른 명과 이백에 달하는 흑도인들이 죽었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
“악가의 원수가 이 자리에 있었기에 단장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겁니까?”
강호에선 지금도 크고 작은 싸움과 전투가 수없이 일어난다.
그 일로 인해 죽는 사람을 셀 수조차 없을 정도.
청주 사태?
분명 악병비의 마음에 상흔을 남겼겠지.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악병비와 같은 아픔, 아니 더한 고통을 느낀 이들이 강호에 수두룩하다.
당장 나만 해도…….
‘빌어먹을…….’
그러니까, 개인적인 원한으로 대업을 망치는 일은 두고 볼 수 없다.
강경한 내 태도에, 일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인다.
“그때, 단장님의 정인이 죽었습니다.”
“…….”
“그리고 그 정인이셨던 분은 아이를 잉태하고 계셨고요.”
순간 난 용광로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머리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전생에 내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아버지와 사제들, 소정대원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를 만큼.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지, 일명의 입술이 다시 움직인다.
“단장님의 정인이셨던 분을 시해한 건 다름 아닌…… 구계악 그자였습니다.”
머리가 차게 식은 탓인지 입도 얼어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단장님은 구계악 그자를 찾기 위해 천하에 안 뒤져본 곳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렇게 십오 년이 흐른 뒤…… 감쪽같이 사라졌던 구계악 그자가 황사문의 문주로 단장 앞에 나타난 겁니다.”
“제길…….”
나도 모르게 나온 욕지거리에 당서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욕은 나쁜 것이야.”
나라고 욕하고 싶어서 했나. 할 수밖에 없으니까 한 거지.
제갈소명 이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런 내막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사절단으로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혹시 제갈소명은 몰랐던 것일까?
“총군사님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절단의 단장으로 보낸 연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 깊은 뜻이 있으셨겠지요.”
제아무리 깊은 뜻이 있다고 한들, 이딴 짓은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세상의 어느 누가 제 처자식을 죽인 원수를 앞에 두고 평화와 안정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왜 진작 이야기를 안 해주신 겁니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아…….”
어쩐지, 악주평의 사건 때 과민 대응을 한 악병비의 행동이 납득이 가기도 했다.
인간은 자신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힌 격렬한 감정적 충격을 쉬이 잊을 수 없는 존재니까.
정리가 도통 되지 않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자니 일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단장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심일 겁니다.”
“뭐가 말입니까?”
“진 시주에게 뒷일을 맡긴다는 말 말입니까.”
정확히는 ‘답답하면 네가 하든가.’였다.
“아마 자신의 한계에 스스로도 답답함을 느끼신 거겠지요.”
막상 내막을 들은 나로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사절단의 단장인 원수가 눈앞에서 주전론을 펼치고 있다.
그걸 무시하고 협정을 맺자니, 악병비의 마음이 찢어 발겨져 걸레짝이 될 것이 눈에 보이고, 반대로 이야기를 안 하자니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복잡한 생각 사이로, 일명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단장께서도 협정을 맺길 바라실 겁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평소엔 술은 입에 대지도 않는 분이 저리 술을 드실 리 없으니까요.”
“…….”
누구보다 큰 고통을 참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악병비였던가?
“……그렇다고 단장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부러 냉랭하게 말을 해 보았지만, 일명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분 또한 그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당장은 임무 수행에 집중하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
어찌 되었든 단장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맹은 커녕 평화협정도 꽤나 어려워 보인다.
황사문의 문주 구계악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이들이 이미 과반을 넘어 보였으니까.
차석두를 비롯한 흑사방의 강맹지와 마령고원의 인연들을 모두 동원한다 해도, 협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적진 한가운데 서서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
최소 사흑련의 내부 사정이 어떤지라도 알 수 있다면 회유책이라도 세워볼 수 있으련만, 지금 이곳은 하오문의 인력을 끌어다올 수도 없는 사흑련 정 가운데.
일명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어려운 일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을 순 없는 노릇이죠.”
그렇게 우린 어디로 나가보지도 못한 채, 정자 주위에서 이런저런 작전들을 세워보았지만 뚜렷한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발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일명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천관문의 군유현이었다.
“여긴 어찌?”
“그간 도박장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시기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해서 찾아왔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말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하하, 저도 도박을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군유현이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기셨다고요?”
“…….”
“협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나는 드러내진 않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뭐 기밀이긴 하나, 귀를 크게 열고 있는 이들에겐 다 들리는 법이지요.”
“그래서요?”
군유현이 내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난 일명과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서로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활용할 수 있는 건 모두 활용해야 한다. 그의 제안 역시 들어볼 가치는 있을 터.
“어째서 도움을 주신다는 겁니까?”
군유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흑도 문파라 해서 모두 피와 전투에 미친 인간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각자 사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흑도의 길을 택한 이들도 있는 거지요. 더구나 저희 천관문은 지금 무림맹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잃을 것이 많아서 말입니다.”
전쟁은 모두에게 피해를 끼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힘없는 자에게 큰 피해를 끼친다.
군유현은 그 영특한 머리로, 지금 당장의 사흑련과 무림맹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는 바로 자신들이 되리란 점을 계산했나 보다.
이번엔 일명이 나서서 물었다.
“군 시주께서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겁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사흑련에선 련주 개인의 의견보단 연맹의 주요 문파들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요.”
대전의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차석두는 연맹을 결성했단 명분을 토대로 련주의 직책을 차지했지만, 그 자리와 권력이 공고하진 않아 보였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자, 군유현이 기밀을 밝히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대신, 대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질적인 힘을 가진 이라는 말입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 련주께서 흑도 연맹 결성의 명분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결국 기틀을 다진 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게 누구입니까?”
“련주님 옆에 있는 사내를 보셨지요?”
“담악…….”
내가 사내의 이름을 내뱉자, 군유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그자입니다.”
“그가 대의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사흑련을 움직이는 실무자들은 대부분 담악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와 련주의 의견이 합치한다면, 분명 다른 문주들이 반대한다 해도 협정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복룡 담악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현생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담악 그자가 우릴 만나주겠습니까? 아까 보니 무림맹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한 듯 보이던데요.”
내 의문에 군유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공식적이진 않지만 따로 만날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흑도 무림의 신성들이라 할 수 있는 자들끼리 연회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사적인 연회라, 그것도 흑도인들의.
철검문에서 당한 굴욕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굴욕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총군사인 담악이 나오기로 되어있고요.”
하지만 이미 정공법으론 모든 일이 틀어졌다.
“함께 참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좋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