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33화 (233/357)

233. <어둠 속의 어둠(3)>

숙고 끝에 차석두는 허락을 했다.

다만 도와줄 방안은 없기에 조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담악은 극렬히 반발했다.

“가뜩이나 혼란스런 사흑련 내부를 무림맹 소속인 흑염룡이 휘젓고 다니면 반향이 심상치 않을 겁니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네. 휘젓고 다닌다니.

난 양쪽의 상황을 생각해서 미끼 역할까지 자처했건만.

급기야 담악은 나를 향해 손가락까지 치켜들었다.

저걸 확 부러뜨려 버릴…….

“더구나 흑염룡은 백도의 정예 중의 정예. 무림맹에만 유리한 쪽으로 일을 해결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와……. 난생처음 흑도인에게 백도의 정예라는 말을 들어봤는데, 하필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라니.

진짜 이것들은 내가 마음 편한 꼴을 보면 주화입마라도 오나?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는 다시 없을 단호함이 감돌았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전 무림맹을 믿지 않으니까요.”

대체 이번 생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까지 무림맹에 신뢰가 없는 거지?

어쨌든 지금으로선 차석두가 담악에게 꽤나 큰 신뢰를 가지고 있는 상황.

이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다.

그리고 똑똑한 놈들을 설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모든 게 음모를 꾸민 자들의 의도대로 흘러갈 겁니다.”

바로, 자존심을 살살 긁어주는 거다.

“놈들이 우리가 죽어라 싸우는 모습을 보며 비웃고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만당하는 걸 싫어한다.

“놈들은 제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다며, 목 위에 달고 다니는 건 장식품에 불과했냐고 저희를 몹시 경시하겠지요.”

“…….”

나는 담악에게로 몸을 더욱 숙였다.

“백도의 정예인 제가 무림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이익 안엔 사흑련과의 협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탐탁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담악의 얼굴에도 고민의 기색이 짙어진다.

나는 마지막 점을 찍었다.

“최소한 현재로선 무림맹과 사흑련의 이익이 공통된다는 겁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상대의 계략에 휘둘리는 ‘멍청한 짓’만큼은 절대 하지 않는 부류가.

바로 담악 같은 자들이다.

자, 이제 낚일 때가 됐는데…….

이내 담악이 숙고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성공이다.

“대신 감시자를 붙여도 불만은 없겠지요?”

“이미 붙여놓고선 무슨 말입니까?”

내가 혈투를 바라보자, 담악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차석두가 껄껄 웃었다.

“총군사, 걱정할 것 없네. 저 녀석은 애당초 백도의 정예도 아니고, 무림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놈도 아니니까.”

그러곤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야, 갑자기.

저 눈빛 굉장히 불쾌한…….

“강호인들이 달리 흑염룡이라 부르겠나? 하하하.”

그 별호 당신이 붙였잖아!

#

진소운과 혈투가 암실을 나선 뒤, 차석두는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아쉽군, 아쉬워.”

담악은 자신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듯한 말에 차석두를 바라봤다.

“무엇이 말입니까?”

차석두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

“흐음…….”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라는 말을 삼킨 차석두는 복잡한 심경으로 담악을 바라봤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결론적으론 담악이 무림맹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운 좋게 그를 사흑련의 총군사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이 흑도인이 아니었기에, 그는 흑도 연맹에 쉬이 스며들지 못했다.

뛰어난 머리 덕분에 젊은 나이임에도 총군사로 활동하는 덴 어려움이 없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너무도 뛰어나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조금은 기대를 했었다.

비슷한 처지의 진소운과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며 친해지지 않을까 하고.

자신의 아들뻘 나이대인 담악이 친구 하나 없이 쓸쓸히 살아가는 건 조금 아쉬웠으니까.

“어떤 녀석 같으냐?”

그래서 대신 슬쩍 떠보았다.

차석두의 말을 복합적으로 해석하던 담악이 짧게 평했다.

“위험한 사내입니다.”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차석두는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다.

“어째서?”

“목적을 위해선 자신의 목숨도 개의치 않고 거는 사내를 달리 표현할 말이 있을까요?”

“하지만 강호가 흑염룡을 칭송하는 이유 또한 그것이기 때문일 텐데.”

담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 위험하다 하는 겁니다. 저자가 적일 때 어떤 짓을 할지 예상 불가하니까요.”

그러곤 뭔가 불안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차석두는 꽤나 새로운 기분이었다.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혈투님을 통해 련주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혈투님이 만만치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심계 또한 결코 얕다 볼 수 없지요.”

“하긴 그렇군.”

자신도 혈투 어르신이 진소운과의 대담을 꺼냈을 때 속으로 얼마나 놀랐던가.

애당초 차석두는 진소운의 그런 예측불허한 모습에 호감을 느꼈지만, 담악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나 보다.

‘하긴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는 곧 경쟁자이기도 하니까.’

원수가 되었다가 친구도 되는 곳이 바로 강호임을 깨닫기엔, 담악이 아직 어린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공통의 적이 있는 상황이니 되려 안심이 되지 않는가?”

담악이 담담한 눈빛으로 차석두를 바라봤다.

“련주님께서 흑염룡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후후, 녀석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하는군.”

차석두와 진소운의 관계에 대해 잘 아는 담악이 잠시 미소를 지은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저희 또한…….”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리 애를 먹고 있지 않습니까.”

차석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인해 혈투와 염귀비까지 모셔왔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적들은 이제 대놓고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마전.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기대를 하고 있네.”

“…….”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담악.

차석두는 그런 담악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그는 늘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거든.”

차석두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차석두가 진소운을 인정하는 말에 대한 질투일까.

담악의 눈초리가 평소보다 더욱 사나워졌다.

차석두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 그를 도와주게. 아마 그 친구도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게야.”

“사흑련의…… 피해가 없는 선에서 돕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담악.

불만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아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런 미숙함이야말로 젊음의 상징이자 특권인 것이겠지.

그런데…….

“놈에게선……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재미가 없단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담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차석두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혼잣말이네. 신경 쓸 필요 없어.”

#

사절단 내실.

경비를 핑계로 전각 주위를 맴돌던 무사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혈투와 염귀비는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린 두 사람을 애써 무시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 시주…… 정말로 흉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즉각적인 내 다답에 일명과 당서희가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차근히 부연해 주었다.

“첫째로, 두 사건 현장의 공통점 때문입니다.”

“공통점이 있단 것이야?”

“네. 구계악과 악병비 두 사람의 피가 내실에 낭자했는데도 부서진 집기는 없었습니다.”

특히 악병비가 당한 현장에는 피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암습을 하고 반격까지 하며 서로에게 중상을 입혔다면, 분명 그 여파가 주변에 퍼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계악과 악병비 둘 다 고수의 반열에 든 사람들이다.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당했다 치더라도 반격을 했을 것이며, 그 반격의 여파가 사방에 퍼졌을 터.

그런데도 방 안의 집기들이 멀쩡했다.

“두 번째는 구계악의 시체입니다.”

구계악은 죽은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놀란 표정을 생생하게 지은 채로 죽어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 것이야?”

“단장에게 기습을 당한 거라면, 그렇게 예측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고 죽었을 리 없죠.”

“……암습을 당하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일 듯합니다만.”

“물론 그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일명을 뒤로 돌려 앉혀 문 쪽을 보지 못하게 만든 후, 당서희와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별반 관심이 없던 혈투와 염귀비도 우릴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나간 나는 당서희와 차례로 방에 들어선 후, 일명에게 물었다.

“방금 누가 먼저 들어왔습니까?”

“진 시주,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대답해 보시지요. 누가 먼저 들어왔습니까?”

여전히 벽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일명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당 시주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발걸음 소리라든가, 기척이라든가…….”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아시겠지요?”

“……네?”

일명과 당서희는 물론이고 혈투와 염귀비까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단장은, 습격을 받은 그날. 우리가 들어온 줄 알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했지요.”

“……네.”

“단장이 아무리 술고래가 되었다 한들, 다른 사람과 우리를 헷갈릴 수 있겠습니까?”

“……!”

혈투를 비롯한 네 사람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더구나 단장은 ‘네놈들’이라고 언급했었죠. 암살자들은 의도적으로 혼자가 아닌 셋이서 움직인 겁니다.”

“…….”

먹이를 바라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인원들.

“아마 구계악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억측 아닙니까? 분명 두 사람의 상흔은 악가의 무공과 황사문의 검이 남긴 흔적이 확실했는데요.”

황사문의 검은 그렇다 치자.

본래 톱날 모양의 도는 흑도 무림에서 흔히 쓰이는 무기니까.

하지만 악가 열화창법의 흔적은 고유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지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화창법의 흔적은 따라 한다고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누구나 구계악의 시체를 봤다면 그 상흔을 보고 악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전생에서 ‘진짜’ 악가의 열화창법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어떤 흔적이 남는지 보았다.

나는 염귀비를 향해 물었다.

“염 선배님. 듣기로는 화기를 이용한 수공(手功)을 쓰신…….”

그런데.

“염 소저!”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후벼판다.

“…….”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 바라보자, 양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염귀비.

그러곤 다시 외친다.

“염 소저!”

뭐지?

지금 진지한 분위기인 거 안 보이나? 아무리 흑도 무림의 거두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한…….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염 소저…….”

마지못해 부르자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눈을 껌뻑거리는 염귀비.

“네!”

뭐야 저 태세전환은.

……아무튼 중요한 건 아니니 나는 빠르게 넘어갔다.

“……수공을 사용하여 열기를 전달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뭡니까?”

“그야, 내장을 태우고, 안에 열기를 남겨 독처럼 좀먹게 하는 거죠.”

이어 염귀비는 손날을 세워 무언갈 찌르는 듯한 시늉을 했다.

“내부에 붙은 불은, 살과 혈액을 태우고 종국에는 신경까지 태우죠, 결국 대상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게 되고요.”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내뱉는 염귀비의 모습에 우리 일행은 잠시 입을 꾸욱 다물었다.

나는 염귀비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열화창의 열기는 창극에 모입니다. 처음 입문했을 때는 창날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지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극점에 열기가 더 모이지요.”

단순한 이야기다.

검기에 입문한 이들은 거칠고 큰 검기를 자랑스레 선보이지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검기의 두께는 얇아지는 대신 밀도가 높아진다.

검강은 말할 것도 없고.

“단장의 성취를 생각해 보았을 때, 최소 극점, 혹은 극점 인근에만 기운이 모였어야 합니다.”

나는 살이 살짝 들어가도록, 내 목 언저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렇다면 상흔에 남은 열기는 상흔 주변이 아니라. 상흔 안쪽을 익히는 형태로 나타나겠지요.”

정마대전 당시 악가의 무사들은 상처를 깊게 찌르지 않았다.

애당초 뜨거운 열기로 장기를 태워 버리고 내부에 열기를 남겨 죽음에 이르게 하기에, 관통상을 입힐 필요도 없었던 것.

일명이 두피를 일그러뜨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상흔이 남은 걸까요?”

“그것이 산동악가의 열화창법이니까요.”

대외적으로 악가가 열화창법을 시연할 땐, 단단한 석판을 뚫는 시범을 선보인다.

돌이 부서지지도 않고 그저 중앙에 동그란 구멍만 생기며, 그 주위로 검댕이가 남는 것이, 열화창법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구계악의 몸통에 관통상을 입힌 의도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악가 창법의 모양새를 사람들이 확실히 알아차리도록 손을 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암살자 새끼가 누구보다 친절하게 범인이 악병비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이 말이지.’

주전파라는 구계악의 절묘한 위치.

구계악이 죽어 마땅한 사연.

구계악의 몸에 남은 선명한 상흔.

모든 것이 이 전체 이야기를 한쪽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범인의 손가락은, 의도적으로 악병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선을 그렸다.

“그리고 우리를 비롯한 사흑련의 모두가, 그의 의도에 따라 시선을 돌리고 있지요.”

어떤 음모가 있는지, 암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한 세력을 일구는 데 수만 가지의 암중 전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암계에 우리를 이용한 건 용서가 안 된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그 끝에 흉수가 있겠지요.”

그러니 나는, 놈이 목표한 바를 이루는 꼴을 순순히 두고 볼 생각이 없다.

최소한 다 지어진 밥에 잿가루라도 뿌려야 마음이 편하겠다, 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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