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숨은 흉수 잡기(3)>
갈문정 죽음에 대한 보고를 받은 차석두가 힘없이 말했다.
“폭약에 불이 붙어 버렸군.”
폭발할 것은 이미 정해졌다.
폭발 시기가 더 빨리 당겨질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을 뿐.
“여기까지인가.”
흑도 연맹.
오랜 바람이었다.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 세력을 일구고, 이익을 위해 정진한다.
무림맹은 지난 오백 년간 자신들의 뿌리를 내려 단단히 자리 잡았고, 흑도를 밀어냈다.
흑도에는 자유분방한 성향의 인물들이 많다 보니, 범죄자들과 함께 악으로 호도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잘나신 무림맹의 ‘정의’로 비추어 볼 때, 흑도는 사라져 마땅한 존재들.
원치 않았지만 강제로 맡겨진 ‘악당’이라는 역할에, 흑도인들도 질려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지겨운 역할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건만.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겠군.’
백도의 특이한 놈을 만난 덕분에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인가 보다.
사흑련 결성 전부터 암약했던 놈들은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절묘하게 약점을 찔러냈고, 지금 사흑련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상태.
“……감찰을 벌여 내부를 단속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련주님의 명령이 내려졌으니 함부로 움직이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차석두는 자신을 위로하는 담악을 멀거니 바라봤다.
“…….”
영특한 그라면 이미 붙은 불이 꺼질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위안을 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의 계산 속에서도 자신과 사흑련은 가망이 없다는 결론이 이미 도출됐을 텐데 말이다.
“……미안하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차석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네.”
갑작스런 차석두의 말에 담악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석두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흉수를 찾아주겠다 했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구만.”
흉수.
차석두는 물론이고 담악 또한, 지금 말하는 흉수가 사흑련에서 암약하며 사절단을 궁지로 몰고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담악.
차석두는 그런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 들어가 높은 관직을 차지할 예정이었던 서원 최고의 수재.
애당초 담악은 사흑련은 물론이고, 강호에서도 활동할 일이 없는 존재였다.
담악이 회시를 보러 수도에 가 있는 사이 청와 서원에 불어닥친 혈사가 아니었다면, 담악이 강호로, 그것도 야만인들이 가득한 사흑련에 들어올 일이 있었을까?
서원을 보호해 주지 못한 무림맹의 방만과 차석두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담악은 차석두 옆자리가 아닌 황제의 옆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내 스승과 동무를 죽인 자를 찾아주시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이뤄주겠소.]
피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담악을 차석두는 말렸다.
이미 향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출셋길이 보장되었으니 스스로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담악은 제 손으로 합격 교지를 찢어발겼다.
[내가 권력을 얻을 때까지 그놈들은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텐데, 나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소.]
그의 눈에 깃든 깊은 원한과 각오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차석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
사흑련이 자리를 잡는 즉시, 사흑련의 힘을 이용해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청와 서원을 태운 범인을 잡아주겠다고.
분명 그랬는데…….
결국 이리되어 버렸다.
“……나를 몰아낼 녀석들의 제일 앞에, 자네가 서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차석두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담악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려 결심했다.
“그대는 그간 주전파로서의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 그대의 능력을 아는 이들이라면 담 군사를 쉽게 내치지 않을 거야. 더구나 나를 직접 쳐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
여전히 묵묵부답인 담악.
차석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담악의 모습이 교지를 찢어발기던 그날의 모습과 비슷하다 느꼈다.
차석두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네. 하지만 자네의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련주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한들 난 사황봉의 봉주 차석두이니까 말일세.”
이어 그가 약속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난 나가서 서원을 습격한 흉수를 찾겠네.”
“…….”
“그러니 스러져 버린 나의 꿈은 자네가 계속 이어 가주게나.”
차석두가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네.”
적막이 내려앉은 련주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차석두.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담악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스승을 잃을 수 없습니다.”
그제야 차석두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스승……. 스승이라……. 내가 자네의 스승인가?”
담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석두가 피식 웃었다.
“천자문만 겨우 뗀 내가 어찌 자네의 스승일 수 있겠는가.”
“제게 말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담악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살아있는 한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차석두는 오만했던 과거의 자신이 수치스러워졌다.
“일은 반드시 해결될 겁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아직 흉수의 정체도, 협조하는 세력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궁금하기 그지없었지만, 차석두는 끝내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그나마 남은 작은 희망마저도 부서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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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의 치열한 접전이 끝나고 나면, 지겨운 차륜전이 시작된다.
무림맹은 적을 압도할 정도의 병력을 보내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후퇴해야 될 정도로 부대를 방치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되면 하루는 적을 밀고, 하루는 적에게 밀리는 나날들이 연신 이어진다.
동료의 죽음을 목도해 분노를 품고 전장에 나가던 시기도 지나가고, 파견 온 성격 좋아 보이는 하급 무사가 일주일 만에 죽어 나가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본래 인간으로서 느껴 마땅한 감정마저 서서히 깎여 나가며, 머릿속은 모래밭처럼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막화된 머리로 습관처럼 싸우고 먹고 자고 하는 일상이 지속될 때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전장에 투입된다.
쌍영흉마여단.
제갈소명은 이렇게 평가했다.
[마뇌 그 교활한 놈이 제 성미를 그대로 그려낸 듯 만든 부대지.]
무림맹은 소속문파들에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졌지만, 마교처럼 단일 세력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연합 단체이고, 이는 곧 이익과 손해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간의 간격이 벌어졌다 좁혀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쌍영흉마여단은 이 틈바구니를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파고들어 온다.
단지 암살 작전을 벌이는 데 그치지 않고, 백도로 위장해 그 틈바구니에 섞여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백도 문파들의 무공을 흉내 내어 똑같은 흔적을 남기고, 그것으로 의심을 더욱 돋운다.
전쟁에 내몰려 가뜩이나 이성이 깎여 나가고 머리마저 사막화된 상태.
쌍영흉마여단의 계략으로, 문파 간 크고 작은 갈등이 빚어지는 와중에, 암살당한 동료의 몸에서 타 문파의 무공 흔적까지 발견된다면…….
더 이상 마교가 주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실제로 쌍영흉마여단의 손에 죽은 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들이 놓은 덫에 걸려 서로 반목하다 칼부림을 부려 사라진 부대는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이놈들이 증오스런 이유는.
상급 무사들뿐만 아니라, 우리 소정대와 같이 보잘것없는 하급 무사들 틈바구니에도 끼어들어 서로 칼부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
이번 생에서는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혈검문 처소로 향하는 길.
나는 나란히 걷고 있는 군유현에게 물었다.
“혈검문주 도봉수와 그 의형제들은 어떤 관계입니까?”
역시나 정보에 일통한 군유현답게 즉각 대답이 나온다.
“도봉수 문주는 본래 서평오견이라 불리던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사십 대에 전대 문주와 친분을 쌓아 혈검문에 들어갔지요.”
애당초 혈검문도도 아니었던 놈이 어떻게 혈검문주가 된 걸까?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그 의형제들끼리 문파를 뒤집어엎은 겁니까?”
백도 무림이었다면 지탄받을 일이었건만, 군유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평오견은 이십 대부터 함께 동고동락을 하며 손발을 맞춰오던 이들이었습니다. 전대 혈검문주의 무공 수위가 대단하다곤 하지만, 그들의 합공을 견딜 수는 없었지요.”
이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몰려다다니며 별호를 유지했다면, 무공이 대단하거나 눈치가 빠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님 둘 다 적당한 경우도 있고.
“어쨌든 서로 알 거 모를 거 다 아는 사이라는 거겠군요.”
“……그렇지요.”
사방에서 적대적인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지만, 군유현은 두려움보다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보로 범인을 찾을 수 있는 겁니까?”
“유현 공께선 누가 범인이라 보십니까?”
“……지금 상황에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까요?”
순간 ‘사절…….’이란 단어가 나왔다가 들어간 거 같은데…… 나만의 착각이겠지?
나는 재차 물었다.
“굳이 특정한다면 말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군유현이 대답했다.
“……저라면 의형제들부터 조사해 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지금이 참으로 좋은 기회이니까요.”
군유현의 말대로다.
지금은 차도살인지계를 벌이기 참으로 좋은 시기다.
쌍영흉마여단이 만들어 놓은 이 분위기 덕분에, 누가 죽어도 작은 흔적만 남겨 놓는다면 모두 백도의 짓으로 몰아갈 수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증만으론 그들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더구나 조사는 할 수 있어도 심문은 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나는 군유현과 같이, 심증만으로 그들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어쨌든 쌍영흉마여단은 단순 조사와 심문으론 찾아낼 수가 없다.
애당초 이놈들이 스며드는 시기는, 그 스며드는 집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취합한 이후이니까.
더구나 마공을 익혔음에도 마기를 뿜어내지 않는다.
축골공과 인피면구로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변장을 해버리니 찾아내려야 찾아낼 수가 없다.
‘근데 그 힘든 일을 소정대 새끼들이 해냈지.’
우리 소정대는 무림맹 부대 중에서 최초로, 쌍영흉마여단을 가려내는 방법을 찾았다.
물론 방법이 다소 천박하긴 했지만…….
상급 부대와 다른 부대들에게 그 방법을 전파해 주었다.
하지만 다들 우리처럼 쉽게 쌍영흉마여단을 찾지 못했다.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한 지체 높은 양반들이, 우리가 썼던 방법을 똑같이 쓸 턱이 없었으니까.
뭐,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해서 그렇게 뒈졌으니 자신들도 그리 억울하진 않았겠지.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혈검문의 처소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에서 험악한 소리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흑염룡?”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혈투 어르신이 있다고 언제까지 네놈 목숨이 붙어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들려오는 소리가 여태껏 들어왔던 것과 썩 다르지는 않았다.
이들은 백도 무림의 정예인 내가 저런 욕지거리를 들으면 상처받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근데 이걸 어쩌나.
전생엔 네놈들보다 더 저열한 소정대 놈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나인데 말이야.
게다가 그 소정대 놈들 중에서도.
“아가리들 여물고 가서 대가리나 불러와. 다들 입이 귀까지 쭉 찢어지기 싫으면.”
내가 제일 입이 걸었단 이 말씀.
타올랐던 분위기가 척 가라앉았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하는 표정들.
역시 이런 놈들한텐 그 수준에 맞는 행동을 해주는 게 답이다.
“미친놈…….”
옆에 서있던 혈투가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바라본다.
군유현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긴, 내가 보통 백도인 같진 않지.
스르릉.
챙.
척.
곳곳에서 무기를 꺼내 드는 놈들이 나타났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성가셔 죽겠네.
나는 태을진경을 끌어올려 살기를 뿜어냈다.
겨우 네놈들 따위와 드잡이질하려고 온 게 아니란 말이다.
“큭!”
“뭔 놈의 살기가.”
“흡!”
이윽고 눈을 부릅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놈들이 보였다.
개중엔 지지 않으려는 듯 애써 살기를 끌어올리는 놈들도 있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바뀌어 갔다.
그때.
“그만!!!”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네 명의 중년 사내가 이 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내를 둘러보는 이들은…….
도봉수의 의형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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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가장 큰형으로 보이는 사내가 대표로 혈투에게 고개를 꾸벅이자, 뒤이어 그의 형제들이 고개를 까딱인다.
아무리 흑도라도 선후배 간 예의가 있건만, 그들은 그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대표격인 사내가 나를 노려본 후 혈투에게 말했다.
“예의를 갖추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역시나 나를 의식한 듯한 행동.
혈투도 별반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손을 털었다.
사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이 친구가…… 어르신과 어떤 사이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혈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거참, 서운하네.
그래도 사흑련까지 동행도 하고 며칠간 동고동락도 했건만.
간결한 대답에 사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친구를 대함에 있어 어르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요?”
역시나 혈투는 즉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단 합의된 비무가 아니라면 죽이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의 동생들도 하나같이 이빨을 드러내며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찾았다고?”
“맞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지?”
“그쪽 문파의 수장이자, 큰형님을 죽인 범인을 찾았으니까요.”
“…….”
사내는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우리 또한 범인을 알고 있다.”
“당가의 여식이라고 하지 않겠지요?”
사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흉수에 놀아나는 겁니다. 진짜 범인도 아닌 이를 잡고선 복수를 했다고 만족해할 생각입니까?”
“형님……! 이딴 개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
“조용.”
반발하는 아우들을 진정시킨 사내가 내게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범인은 누구지?”
나는 산뜻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당연히 댁들 중에 있지요.”
“…….”
고요한 기파가 서서히 요혈을 노리기 시작한다.
언제든 출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사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시답잖은 시비를 걸러 온 것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우리는 지금 문주와 형제를 동시에 잃어 장난을 받아줄 여유 따윈 없으니.”
“장난이 아니라면요?”
“각오가…… 되어 있나?”
“물론이죠.”
“목숨까지도?”
목숨이라…….
현생을 살아오면서 목숨을 걸지 않았던 순간이 손에 꼽을 정도다.
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내가 한발 물러섰다.
“좋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비무를 신청하겠다. 넌 우리 형제들의 분노를 동시에 받아야 할 것이다.”
종전에 혈투가 한 이야기를 의식한 듯, 졸렬하게도 합공하겠다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사내.
“좋습니다.”
내가 선뜻 대답하자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확인하듯 혈투에게 물었다.
“어르신, 이는 합의된 상황입니다.”
혈투는 제 일이 아니라는 듯 퉁명스레 답했다.
“알아서들 해라.”
자, 이제 판은 준비됐고.
나는 박수를 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충 정리되었으면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해라.”
나는 서평오견 주욱 둘러보았다.
“자, 지금부터 질문을 던질 테니, 바로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
분위기 좀 풀어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영 웃질 않네.
하여간 팍팍한 사람들이란 말이야.
“자, 첫 번째 질문. 다섯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장소는 어디입니까?”
“새파천이다.”
“서평의 새파천.”
“서평 새파천.”
“새파천이었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여기 계신 둘째분의 탄생일은 언제입니까?”
지목받은 사내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동시에 답했다.
“기유월 경오일.”
“기유월 경오일.”
“기유월 경오일. 자시다.”
역시나 한 삼십 년쯤 함께 다니다 보면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는가 보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셋째분께서 쓰는 최후의 비기는 무엇입니까?”
“…….”
무공에 관한 질문이라 그런지 다들 쉬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해 주시지요. 최후의 비기가 무엇입니까?”
“그건 대답할 수 없다.”
“문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겁니까?”
사내와 눈싸움을 하는 사이, 셋째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형제님들 그냥 말하쇼. 이 일이 끝난 후에 내가 이놈 대가리를 반으로 쪼개 놓을 테니까.”
셋째의 살벌한 말에 주저하던 이들이 결국 입을 열었다.
“……노달발류다.”
“노달발류.”
“노달발류.”
주저함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질문에서 멈칫거리는 이는 없었다.
“그럼, 네 번째 질문…….”
“언제까지 이 바보 같은 짓을 해야 하는 거지?!”
여태껏 나와 대화를 하던 사내가 내 말을 끊었지만, 난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제 소정대에서 놈들을 가려낼 때 쓰던 질문을 할 차례.
“네 번째 질문입니다. 죽은 문주는 어떤 모습의 여성을 보면 환장을 했습니까.”
내 천박한 질문에 사내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다.
“네놈……!”
“대답하십시오. 마지막 질문이니까.”
분에 가득 찬 둘째가 제 도병을 꾸욱 쥐며 말한다.
“살이 뒤룩뒤룩 쪘다 할 만큼 풍만한 여자를 좋아했다.”
“뚱보를 좋아했지.”
“뚱보를 좋아해서 같이 유곽 다니기 힘들었다.”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 동일한 답변을 내뱉는 사람들.
하지만.
“……뚜, 뚱보를 좋아했다.”
딱 한 사람.
대답이 늦은 이가 있었다.
“…….”
“…….”
“…….”
서평오견 세 사람이 넷째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넷째는 당황한 듯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형님들! 나, 난!”
정말 결백한 듯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넷째.
놈을 보는 내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절로 어렸다.
“잡았다!”
까꿍이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