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오늘의 운세(3)>
암수의 존재로 언제 자신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흑도의 거두들은 백방으로 돈을 구하려 다녔다.
각자 본문에 있는 자산 가치로 따져보면 금전 천 냥이 큰 금액은 아니었다.
이곳이 본문과 천 리 길 떨어진 사흑련이란 점이 문제였을 뿐.
더구나 흑도 소속으로 신용이라곤 없는 그들에게 돈을 빌려줄 전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수중에 가진 보물이나 보검을 팔지 않는 이상, 돈을 구하기는 불가능한 상태.
결국 그들이 찾아갈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셨소……?”
“……돈은 본문으로 가는 즉시 갚겠소이다.”
사흑련주 차석두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주전파에 속했던 문주들을 내려다보았다.
“빌려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소만…… 우리가 돈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소?”
“련주…… 어차피 연맹까지 만든 이상, 우린 함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하구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무림맹과 내통한다며 나를 내치고 싶어 하지 않으셨소?”
문주들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다.
“……암수까지 나온 마당에 과거는 잊고 새 출발을 하시는 게 어떻소.”
본래 뜻이 맞았던 흑사방이나 구룡방 혈호문과 달리, 암중에 차석두를 제거하려던 네 개 문파의 문주들은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
그럼에도 차석두는 아량을 베풀어 그들에게 돈을 내주었다.
“련주님 어찌 돈을 주신 겁니까? 이 기회에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선뜻 돈을 내주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 황부식.
그런 황부식에게 차석두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놈들은 어차피 연맹에 함께해야 할 놈들이다.”
“하지만 봉주…… 아니, 련주님께서 아량을 베푼 것에 감사하지 않을 겁니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요.”
차석두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있다. 하지만 빚을 지워놓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그게 바로 정치다.”
“…….”
연맹을 만들고 차석두와 함께 사흑련으로 온 후, 황부식이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바로 정치를 배워야 한다는 말.
“이해 못 했지?”
“죄송합니다.”
차석두는 황부식의 어깨를 툭툭 두르렸다.
“되었다. 차차 배우면 될 일이니. 어차피 이제 시간은 많을 테니까.”
다른 문파뿐만 아니라 사황봉도 진소운에게 금전 오백 냥이나 뜯겼다.
그럼에도 차석두는 마치 큰 선물을 받은 양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부식은, 진소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련주님이 기분 좋으신 이유도 정치인 겁니까?”
“정치라…… 그래. 바로 정치 때문이다.”
호탕하게 웃는 차석두를 보며, 황부식은 여전히 정치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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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금을 모두 받은 진소운은 돈을 전달하러 온 사람들을 앞에 세워두고 빠진 금액이 없나 재차 확인했다.
“음…… 다 맞군요.”
“……그럼 우리가 속이기라도 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에이, 그럼요. 흑도 놈들을 어떻게 믿고.”
“…….”
사흑련 최중심부에서 함부로 입을 터는 진소운을 보며, 마도문의 무사들은 당장이라도 녀석의 옥수수를 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크흠, 그럼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냐?”
“지금 말이오? 금방이라도 해가 질 것 같은데?”
“우리는 기한을 지켰다. 이젠 네가 기한을 지킬 차례다.”
각 문파의 대표로 온 무사들이 최대한 근엄하게 진소운을 채근했지만.
“누가 성질 더러운 흑도인들 아니랄까 봐. 쯧.”
진소운은 귀를 한번 후비적후비적하곤 혀를 찼다.
“…….”
되었다는 사람들 앞에서 목을 잘라 가지고 와 보여준 사람이, 대체 누구더러 성질이 더럽다고 하는지.
흑도인들은 속으로 저마다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언제 또 그 빌어먹을 관심법(?)을 꺼낼지 몰랐으니까.
입을 다문 흑도 무사들을 훑어본 진소운이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가보실까요.”
그러곤 곧장 전각의 뒤편으로 향했다.
“출구는 이쪽이다.”
한 무사가 말했지만, 진소운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 이렇게 채근할 줄 알고 미리 잡아 뒀거든요.”
“……미리 잡아 뒀다고?”
그가 향한 곳은 별채 한쪽에 있는 곡식 창고.
내부로 들어가 구석에 있는 문을 열자, 재갈이 물린 이가 눈을 부릅뜨며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진소운이 사내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이놈은 감히 맹랑하게도 사흑련 조직 안에 숨어들려던 놈입니다. 정식으로 절차를 밝고 들어왔다지요. 아마 그냥 두었으면 사흑련의 최상부 자리까지 승진했을 겁니다.”
“……읍읍! 읍읍!”
진소운이 재갈이 물린 사내의 볼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사내는 진소운의 손을 따라 얼굴을 움직여 고통을 줄여보려 했지만, 손과 발이 묶인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덴 한계가 있었다.
찌지직-
피부가 뜯겨 나가고, 핏물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
뜯겨 나간 피부 안으로 또 다른 피부가 보일 뿐.
“아무리 흑도라 해도 기본적인 신원 확인은 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놈들이 또 들어와 당신들의 목을 노릴 테니.”
스겅.
서걱-
검을 뽑아 단숨에 암수의 목을 잘라낸 진소운.
툭 떨어져 구르는 머리를 보며 흑도인들도 혀를 내둘렀다.
그때, 한 무사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물었다.
“그럼, 다른 암수들은 또 언제 잡을 거지?”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암수? 이게 마지막인데?”
“뭐?”
“이놈이 마지막이라고요. 못 들었어요?”
“…….”
진소운이 몸을 일으키고는 제 어깨를 주무르며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튼 암수는 이 협객이 다 처리했으니, 각자 숙소로 돌아가서 안심하라고 전해주십시오.”
흑도인들의 얼굴이 일제히 야차로 변했다.
‘시벌…… 그럼 돈은 왜 받아간 거야?’
‘애당초 우리 문파랑 상관도 없는 놈이었다는 거잖아!’
‘……흑염룡, 이 지독한 새끼!’
흑도인들의 표정이 괴랄하게 변해가자, 진소운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명이 걱정스레 속삭였다.
“진 시주……. 굳이 이렇게 분노를 자아낼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냥 암수를 처리했다고 전해주기만 했어도 됐을 텐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일명과 달리, 진소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들이 열 받으면 어쩔 건데요?”
“응?”
“지들이 뭐 어쩔 거냐고요.”
걱정 한 점 보이지 않는 호언장담에 일명의 근심이 더 커졌지만, 실제로 하루가 지나도록 진소운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터트린 이는 없었다.
마치 이 폭풍 같은 일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듯, 모두가 숨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
진소운이 볼록한 제 앞섬을 팡팡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흑도 놈들도 이 기회에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 교훈을 얻었겠지요. 캬캬캬캬.”
대체 누가 누구더러 나쁜 놈이라 하는지, 당최 납득이 되지 않는 일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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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야기를 듣던 군유현이 작게 감탄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백도인의 정도란 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전하던 담악 또한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자 머릿속에 당최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더군요. ……진짜 백도인인지도 모르겠고요.”
“하하, 백도인이나 흑도인이나 결국 다 같은 강호인 아닙니까?”
“네?”
군유현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담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군유현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침 전각을 지키던 호위가 자신을 막아섰기에.
“잠시 소지품 검사가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담악의 말에 호위가 고개를 숙였다.
“련주께서 앞으로 전각에 드나드는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라 명하셨습니다.”
“뭐라고?”
진소운이 말한 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담악은 차분한 어조로 명령했다.
“이분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러서게.”
“그럴 순 없습니다.”
“이자가 진정……!”
담악이 호위에게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군유현이 얼른 나섰다.
“괜찮습니다. 담 군사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하지만…….”
군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곤 호위를 바라보았다.
“소지품을 모두 꺼내놓으면 되는 겁니까?”
그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소매에서 작은 전낭 하나와 마패, 붓과 먹통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사이 다른 호위가 군유현의 옷을 천천히 더듬어 다른 무기가 없는지를 살폈다.
“다 끝났습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미안합니다. 유현 공.”
“별말씀을요. 담 군사께서 워낙 중요한 인물이시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담악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호위들을 쏘아보며 명령했다.
“되었으니 다들 물러가게.”
“……그럴 순 없습니다.”
“내 말 하지 않았나? 유현 공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런 것이니, 자네들뿐 아니라 이후 들어오는 이들 모두 물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호위들이 전각을 떠나고, 담악과 군유현이 내부로 들어섰다.
시비가 두 사람을 위한 차를 내오고, 군유현이 찻잔을 채울 때까지도, 담악의 표정은 쉽사리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유현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담악을 달랬다.
“전 괜찮으니 그만 기분 푸시지요. 담 군사님의 마음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당금 유현 공 때문만은 아닙니다.”
담악이 잠시 숨을 고르곤 말을 이었다.
“……진소운 그자가 사흑련을 너무 휘젓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슬리는 자다.
자신의 할 일이 끝났으면 잠자코 무림맹으로 돌아갈 것이지.
끝까지 사흑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닌다.
군유현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그게 다 사흑련을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백도인이 사흑련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 안에 어떤 음모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이지요.”
차향을 음미하던 군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확실히 강호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
담악은 어쩐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군유현과의 대화가 평소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그락-
“근데…… 어찌 따로 보시자 하셨습니까?”
군유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자, 그제야 담악은 정신을 차렸다.
“사흑련이 점차 안정이 되어가면서 서원을 암습한 흉수를 찾는 일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호오…… 정말입니까?”
“네. 더불어 드디어 제가 천관문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날이 왔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군유현의 그린 듯한 미소가 걷혔다.
“……?”
“사흑련의 지원을 받아 천관문이 사흑련의 남해 지부 중 한 곳을 맡는 겁니다.”
담악은 그간 켜켜이 쌓여왔던 빚을 조금은 청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아마, 연간 지원되는 금액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유현 공에 대한 추천서를 련주님께 올렸습니다.”
“……제 추천서를요?”
“네. 어쩌면 군사부에서 함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흐음, 그러셨습니까?”
신나게 이야기하던 담악은 계속 표정 변화가 없는 군유현의 반응에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제가 너무 눈치 없이 나선 것일까 염려됩니다.”
“아!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네?”
군유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빙긋 웃었다.
“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
담악은 어쩐지 평소와 다른 군유현의 모습에, 이상함을 강하게 느꼈다.
그때, 군유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그다음엔 죽은 동료들의 가족들을 찾는 데 더 힘을 쏟아주길 바란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실 작정이셨지요?”
“…….”
담악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그러나 군유현은 얼어버린 담악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어찌해야 할까요.”
그러곤 담악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미 그들은 모두 죽어버렸는걸요.”
“……!”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새도 없이, 폭탄처럼 던져진 군유현의 말.
“그, 그게 무슨!”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몸을 겨우 붙든 담악의 머리 위로, 서늘하게 꽂히는 군유현의 목소리.
“말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찾지 못할 겁니다. 이미 예전에 모두 죽어 깊숙한 곳에 묻혔으니까요.”
“뭐?”
그리고.
푸욱.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배에 엄습했다.
담악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군유현의 손이 자신의 배를 뚫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커흑!”
참을 수 없는 기침과 함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담악은 내버려 둔 채, 군유현은 피가 묻은 제 손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째서 이게 제대로 박히지 않은 것이지? 혹, 기물을 착용하고 있는 겁니까?”
“크흑…….”
담악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째서…… 어째서…….
그 무엇보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군유현이 부드럽지만 어딘가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유를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시군요. 달리 이유는 없었습니다. 음…… 굳이 해줄 말이 있다면, 처음부터 전 담 군사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
‘혹여 인피면구를 쓴 암수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담악은 그건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본래는 두 강호인 세력들에 싸움을 붙여 힘을 빼놓을 역할로 쓰려했는데……. 아쉽습니다. 기량을 펼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버리니.”
군유현은 평소와 같은 표정, 평소와 같은 미소로 손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푸욱-
“부디 진소운 그자를 원망하십시오.”
마치 그게 본래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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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놈. 내 너에게 복수를 바랄 것 같더냐?]
어쩐지 스승님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천학 선생께서라면 분명 복수심 따위는 집어치우고 내 할 일이나 하라 하셨겠지.
그럼에도 굳이 부득불 강호에 뛰어 들어온 것은, 자신이었다.
무력만이 전부라 생각하는 놈들에게 반드시 이 세상의 쓴맛을 알려주겠다 다짐하고 강호에 몸을 던졌던 것.
허나, 결과가 어떠한가.
결국 그자들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났을 뿐.
‘언제부터였던 거지?’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모든 그림이 다 짜 맞춰져 버렸으니까.
서원을 공격한 것도, 스승과 동무들을 죽인 것도, 그리고 자신을 구한 것도 모두 다 저자의 계획이었다.
실의에 빠진 자신을 위로한 이도, 다시금 세상에 나갈 용기를 준 이도 모두 저자였건만.
그 모든 것이…… 이 웃기지도 않는 인형 놀이를 하기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게 있군.’
저자가 누구든, 저자가 어디에 속해있든.
그가 벌인 짓이 진소운에 의해 막혔다는 점 하나와.
흔적 없이 사라져야 했을 텐데도, 부득불 자신을 죽이고 가야 할 정도로 자신이 그자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
‘이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차석두가 건네준 철린보를 입고 있던 덕에 일격에 목숨을 잃진 않았지만, 그 때문에 배신의 쓰라림과 고통을 더 많이 겪어야 했다.
“크흐흐…….”
몸이 조금 진정되었는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강호인들이 말하던 회광반조가 바로 이것인가?
그때.
“웃으시다니. 참으로 대장부 같은 분이시오. 담 군사.”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온다.
“넌 누구…… 냐?”
“누구냐는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그 목소리는, 몹시도 차갑고 건조했다.
“……그럼?”
“어디서 왔는지가 중요합니다.”
담악은 겨우 힘을 짜내어 물었다.
“……어디서 왔지?”
“세상 끝 지옥에서 왔습니다.”
“지옥이라…….”
눈앞에 있는 이와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사는 이가 아니고서야, 한 사람에게 이리 악심을 품게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정말, 서원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죽였는가?”
사내의 얼굴에 익숙하지만 낯선 미소가 그려진다.
“덕분에 담 군사께서 무림맹에 원한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가…….”
헛웃음을 뱉은 담악은 문득 궁금해졌다.
“……두렵지 않은가? 사흑련의 복수가?”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일이니까요.”
소리라도 질러볼까 문간을 바라보지만, 주변은 어느새 시뻘건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언젠가 사황봉에서 경험했던 기문진이라는 것과 비슷했다.
이래서야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겠지.
“그래도 함께했던 기간들은 즐거웠습니다. 아마 잊지 못하겠지요.”
“……역겨운 소리를 하는군.”
이런 자인 줄도 모르고 하나뿐인 지기(知己)라 여겼던 것인가.
그가 지금 자신의 배를 찔렀다는 사실보다, 그가 청와 서원을 습격했다는 것보다, 그가 지금껏 자신을 기만(欺瞞)하였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분했다.
‘이런 자에게…… 내 동무의 가족을 부탁했다니…….’
힘이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를 힘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한 몸을 불살라서라도 저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무공 한 자락 안 익혀본 놈이 무슨…….’
결국 강호는 그가 지낼 곳이 아니었나 보다.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가.
스승님과 동무들의 환영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직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담악의 눈이 천천히 감기려는 찰나.
쩌적-
시뻘건 벽 사이로 황금색의 금이 생겨났다.
그러곤 그 실금을 중심으로 벽이 조금씩 부서지더니…….
촤악-
그 안으로 한 줄기 황금색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눈이 감기려던 담악도,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용?’
황금색 빛줄기는 군유현의 손을 휘휘 감아 잡아채기 시작했다.
“대체 이 무슨……!”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군유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담악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황금빛 광채가 둘린 검을 어깨에 메고 껄렁하게 들어서는 사내가 있었다.
‘진소운?’
“흑염룡……!”
진소운은 지체 없이 흑룡검을 휘둘렀고.
펑! 퍼퍼퍼펑!
검에서 뿜어진 황금빛 검기가 군유현의 몸을 양단할 것처럼 쏟아졌다.
“입 벌려. 정의구현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