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판돈을 챙기는 흑염룡(6)>
환골탈태(換骨奪胎).
흔히 강호에서 말하는 기연 중의 기연.
모두가 얻기를 바라마지 않는 기연 중에서도, 절벽 기연 다음으로 손꼽히는 기연이다.
적에게 공격받고 떨어진 절벽 틈바구니에서, 마침 실전된 절대고수의 비전과 영약을 발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그야말로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반면 환골탈태는 엄연히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수준의 기연이다.
과거 미타성수 등의 도움으로 탈태를 겪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무신지체를 이뤘다.
그런데.
환골탈태라니……!!
환골탈태라니……!!!
“저, 정말입니까?”
혈투는 동료가 바닥에서 금전을 주운 모습을 본 사람마냥 배 아픈 표정으로 술병을 기울였다.
나는 양 주먹을 가벼이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어쩐지 힘이 범상치 않다 했어……!
“그, 그럼 제가 신화경(神化境)에 올랐다는 말입니까!”
“푸웃!”
혈투가 내뿜은 분무 때문에 허공에 무지개가 잠깐 어린다.
아! 나의 꽃길을 예견하는 무지개인가?
“…….”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제가 절대고수가 되었다 한들 혈투 어르신을 핍박하겠습니까?”
혈투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이런 덜떨어진 놈을 봤나.”
그러곤 쯧 하고 혀를 찬다.
“환골탈태랑 신화경이랑 무슨 상관이더냐!”
응? 아니야?
탁-
그가 술병에 바닥에 내려놓았다.
“환골탈태는 그저 겉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정.기.신 이 세 가지의 조화가 끝나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우쳐 법칙을 바꿔야 하는 신화경을, 어디 환골탈태 하나로 먹으려 들어? 이거 완전 흑도 뺨치는 도둑놈이 따로 없구만! 떼잉!”
와, 이젠 하다 하다 흑도 거물한테 도둑놈 소릴 다 듣네.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도 퍽퍽 죽였던 양반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신 겁니까?”
“뭐, 내 표정이 왜!”
“돈벼락 맞은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 추궁에 혈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곤 작게 중얼거린다.
“돈벼락 이 지랄…….”
이윽고 고개를 쳐들어 술병 하나를 비운 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버린다.
“어쨌든 비슷한 걸 맞긴 했으니, 어찌 부럽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흐흐흐, 역시.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
“얼마짜리 돈벼락입니까?”
“허!”
혈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네놈 같은 녀석에게 이런 기연이…….”
나는 겸손한 표정으로 비법(?)을 알려주었다.
“다 착하고 성실하게 산 덕분 아니겠습니까? 행운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러니 어르신도 평소 행실을 조심히…….”
“닥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다.”
“마침 입이 아파 닥치려 했습니다. 흐흐.”
새로운 술병을 집어 든 혈투가 주둥이를 입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무인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
“그야, 협의를 실천하여 정의로운 강호를…….”
벌떡.
“네놈 알아서 해라.”
“아, 아닙니다!”
나는 혈투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도를 이루는 것 아닙니까?”
“끝까지 도인 흉내더냐.”
끌끌 혀를 차던 혈투가 이어 말했다.
“흑도와 백도를 초월하여 무인들은 네놈이 방금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화경을 바란다.”
강호 역사를 통틀어 그 수준에 오른 이가 손에 꼽힐 만큼 적다는 지고한 경지.
혈투가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럼 묻겠다. 무인들 중에 환골탈태를 목적으로 수련하는 이를 본 적이 있더냐?”
“…….”
생각해 보니 그렇다.
반선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반로환동을 겪은 사람들의 목표는 하나같이 신화경이었다.
반면, 어떤 무인도 자신의 목표를 환골탈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든 무인이 신화경에 닿는 동안 환골탈태를 겪는 것은 아니다. 정(精)이란 지극한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는 것을 표하며, 풍화에 바위가 깎이듯 정적으로 변하는 것이니까.”
혈투가 꼬름한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는다.
“허나, 간혹 재수가 좋은 놈들은 그 인고의 세월을 뛰어넘는 경우가 종종 있지.”
“그게 환골탈태입니까?”
혈투는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말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 어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유추하자면…… 성미 급한 기(氣)와 신(神)이, 따라오지 못하는 정(精)을 이끈다는 정도.”
정기신(精氣神)은 항시 조화를 이루려 노력한다.
일반인에게도 그렇지만 무인에게 이 조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기신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화입마에 빠지기 때문.
아니, 뭐야 이거. 좋아하기만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단 겁니까?”
“네놈 사문엔 당최 고수…… 아니다, 말을 말자.”
나는 혈투에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으며 그를 채근했다.
“그럼 전 위험한 거 아닙니까? 언제 또 이 조화가 깨질지 모르니까요.”
이윽고.
파스스-
내 손에 들린 술병이 또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혈투가 물어왔다.
“……조화가 깨지는 것이 꼭 나쁜 것이라 보느냐?”
“당연하지요.”
“쯧쯧. 어째 이런 반푼이 같은 놈에게 이런 행운이 왔을꼬.”
“정말 얘기 안 해 주실 겁니까?”
잠시 나를 바라보던 혈투가 술병을 옆으로 밀어냈다.
“어째서 흑도인들의 무공이, 입문 시기가 같은 백도인들의 무공보다 성취가 좋은지 아느냐.”
“그거야…… 역천의 능력을…….”
“쯧, 이러니 네놈들이 말코 도사란 소릴 듣는 거다. 정기신의 조화가 무슨 절대 진리라고들 생각하는 것이냐?”
“설마…….”
아까는 척추에서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면, 지금은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큰 충격이 느껴졌다.
“그래, 정기신 세 가지 중 하나의 힘을 뒤틀어 나머지 다른 힘들이 전체적인 조화를 맞추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흑도 무공의 본질이다.”
“그거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요.”
“그러니, 흑도 놈들이 고수가 될수록 반미치광이가 되어가는 거지.”
순간 ‘어르신처럼 말입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꾸욱 참았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 가서도 듣기 힘든 귀한 내용이니까.
“백도인들 사이에서 고수들이 많이 나와도 환골탈태를 겪는 이들이 손에 꼽힐 만큼 적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백도 무공은 지루하기 그지없으니까. 역동적인 변화 같은 건 겪기 힘들지.”
혈투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럼 정기신의 조화는 어디까지 뒤틀 수 있습니까?”
“네놈이 겪은 정도로까지는 못 한다. 그건 인과를 벗어난 수준이고, 흑도 무공으로 그 정도 인과를 벗어나 버리면, 결국 광인이 되어버리거나 죽어버릴 것이다.”
“…….”
혈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른 것이 바로 마교였다.
놈들도 흑도처럼 이 조화를 뒤틀어 강함을 얻어낸 것일까?
“그 기문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으나, 네놈이 생사의 위험을 겪은 것이 어쩌면 네놈에게 엄청난 기연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 군유현이란 놈 엄청나게 배가 아플 것이다.”
물론 놈에게 이지가 남아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놈의 백회를 부숴놨기에, 아마도 놈은 평생 내가 환골탈태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테다.
설명을 끝낸 혈투가 배가 아프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아무튼 네놈은 이걸로 다른 이들보다 몇 배 더 앞서 나가게 되었다. 단순한 돈벼락 따위와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느냐?”
그제야 여태껏 혈투가 지었던 표정들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한순간에 얻은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누구나 허탈하겠지.
하지만 뭐 어쩌겠나.
나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얻어낸 기연이란 말이지.
“하하, 이거 죄송스러워 어쩌지요?”
“…….”
혈투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이윽고.
퍼펑!
일순간 그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사방에 주기가 진동을 했다.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혈투.
뿜어내는 기파가 얼마나 강한지, 바닥에 나뒹구는 술병들이 저만치 굴러가 버린다.
쩝, 너무 놀렸나.
나는 서둘러 그를 진정시켰다.
“하핫! 어, 어르신 농담입니다. 농담! 흑도인들은 농담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검을 뽑아라.”
“아니, 어르신 농담이라니까요.”
그러나 들은 체도 않고 스산한 음성으로 읊조리는 혈투.
“환골탈태 겪은 걸 저승사자에게 자랑할 생각이냐?”
“……시부럴.”
챙.
나는 얼른 흑룡검을 뽑아 들었다.
돈벼락 맞은 걸 자랑하고 싶어서라도 이곳에서 죽을 순 없다.
#
스슥.
혈투는 한 발과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기수식을 취한다.
발만 썼던 이전과는 기세 자체가 달랐다.
거칠고 폭력적인 기파가 피부를 쿡쿡 찔러 들어온다.
난 아직 내 신체에 적응도 하지 못한 상태.
잘못하다간 자랑은 염라대왕 앞에서만 하게 생겼다.
‘시바, 그럴 순 없지.’
더러운 흑도인인 혈투는 삼 초 양보 같은 것도 없이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발자취에 붉은 기가 남아있는 걸 보니, 진심으로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퍼펑!
명치를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발차기.
검면을 들어 막아보지만, 기파의 폭발에 팔이 덜덜 떨린다.
순식간에 몸을 숙여 정강이를 공격하고, 마치 몸이 두 개라도 되는 듯 거의 동시에 뛰어올라 머리를 내려친다.
이 모든 동작이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이뤄졌다.
파팡!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막는 쪽은 내 쪽인 데다 내 움직임이 훨씬 적음에도, 내가 움직일 땐 이미 혈투의 손과 발이 지나간 뒤였다.
내 상태를 가늠해 보기 위한 것도, 시험해 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인간 이거…….
‘진심이네. 젠장!’
퍼퍼펑!
가슴에 삼 연타가 꽂히면서 가슴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보법을 밟으며 내 시야를 어지럽히던 혈투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언제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셈이냐? 정말 저승사자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냐?”
“빌어먹을 영감탱이…….”
“오호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파파팡!
어떻게 사람이 발끝과 머리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걸까?
혈투는 무투파의 장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채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제길……!”
최소한의 거리라도 벌리려는 지금, 혈투는 끈질기게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퍼퍽!
“커흑!”
어느새 뱃속 깊이 꽂힌 주먹에 장기가 울렁거린다.
“이런 걸 두고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라 하는 거겠지. 어찌 환골탈태까지 한 놈이 이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것이냐.”
시발, 쓰는 방법을 알려줘야 쓰든 말든 하지……!
내 속내를 간파했는지, 혈투가 비릿한 조소를 날린다.
“설마, 더러운 흑도인인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리라 기대한 거냐?”
낄낄거리며 웃는 혈투를 향해, 나는 사력을 다해 검기를 마구 날렸다.
퍼퍼퍼펑!
그러나 혈투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내가 쏘아낸 검기를 가벼이 해소하며 그 틈을 파고든다.
“설마, 내 평생에 네놈보다 내공이 더 많은 놈을 상대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으냐.”
뭐라 이죽거리며 대꾸하고 싶은데, 도통 입을 열 틈조차 없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놈이 입을 꾸욱 다문 거 보니 오늘이 네 제삿날인가 보구나.”
곧장 날라오는 날카로운 손날.
이야. 억지로 입을 열려 하는데, 목덜미를 때려버리네.
역시나 비겁한 흑도인.
그나마 다행이라면 혈투가 약하게 때리는 건지, 환골탈태로 맷집이 좋아진 건지 고통이 그리 심하진 않다는 점이다.
덕분에 약해 보이는 공격들은 일부러 맞아주며, 파괴력이 큰 것들 위주로 막아냈다.
퍼퍽, 퍼퍽.
“이놈아! 네놈이 외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몸으로 막아서 뭘 어쩌자는 거냐!”
시부럴, 누군 막고 싶어서 막나.
가뜩이나 속도가 빨라 대응하기 힘든데, 더불어 몸이 예전처럼 움직여 주지도 않는다.
예상했던 것보다 힘이 더 들어가거나, 기가 덜 들어간다.
신체와 기의 유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몸은 실 달린 인형마냥 어색하게 움직인다.
그때, 혈투의 호통이 들려온다.
“멍청한 놈아! 네놈의 정은 이미 바뀌었다. 왜 조화를 이루기 위해 환골탈태를 겪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놈의 기와 신이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
혈투의 일갈에 문득, 기절해 있는 동안 어둠 속에서 본 장면들이 떠올랐다.
군유현…… 그러니까 제금학과 싸워 이겼던 장면들.
나의 모습이지만, 내가 아닌 듯 움직였던 동작들.
깨어나고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탓에 따로 연습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이러다간 환골탈태하고 맞아 죽은 놈으로 강호 역사에 길이 남을지도 모르니까.
‘씨바, 그래!’
언제 뭐, 내 인생이 순탄하고 안전하게 흐른 적이 있었던가.
그냥 가는 거다.
쐐액-
쌍천검결을 버리고, 소천검법을 휘두른다.
운용되는 기의 양은 이전보다 훨씬 적고, 동작도 크지 않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느껴졌다.
혈투의 급소를 제대로 찔러 들어갔음을.
그 순간.
“그렇지!”
당황하여 몸을 흔들던 혈투의 입에서 터져나온 감탄사.
나는 소천검법을 이어 가며 혈투의 공격을 하나씩 무력화시켰다.
“그래! 그래! 이거다!”
혈투의 얼굴에 흡족함이 짙어질수록, 어쩐지 그의 손과 발에 어린 붉은 기의 연무가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아무리 속도가 빠르고 아무리 파괴적이라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날카로운 기파가 볼을 스치며 작은 상처를 내도, 가슴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탕! 타타타탕!
가볍게 휘두른 소천검법으로 혈투의 권기와 각기를 막아내며, 어느새 코앞에 당도한 혈투를 연화로 던져버린다.
서로 다른 무공임에도 마치 연환격인 듯 어색함이 없는 동작들.
이어 쏘아지는 검기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려는 혈투의 진로를 방해한다.
“옳지, 이제야 해볼 만하구나!”
하지만 뿌연 먼지 속을 헤쳐 나온 혈투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흑룡검이 맞닿아 있었으니까.
“허……. 정말 이 정도로 수준이 뛰어올랐다고?”
혈투는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며 포권을 쥐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치열한 접전 중에 깨달았다.
‘이 과격한 비무는 날 위해서였구나.’
변화된 신체에 적응되도록 기다리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자신의 방법으로 시간을 단축시켜 준 것.
왠지 신이 난 듯한 혈투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아직 멀었다! 적응을 하려면 더 겪어봐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다!”
다시금 투기를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몸을 푸는 혈투.
그런 혈투를 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화는 저 스스로 맞추겠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눈앞에 저승사자 얼굴이 왔다 갔다 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쯧. 그놈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는데.”
“놈들이라니……. 누굴 말 하시는 겁니까?”
혈투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짐짓 아닌 척하였다.
“네가 알 바가 아니다.”
“혹시 친우분들이십니까?”
마침 혈투가 말을 꺼내준 덕분에 나 또한 혈투에게 물으려던 바를 질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
혈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의적인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감한 눈빛만이 남아 날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알 바가 아니라 했다.”
평범한 사람, 아니, 고수라도 지금 혈투의 기세를 보면 두려워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하겠지.
하지만 내가 그와 나눠야 할 ‘두 번째’ 이야기가 이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혹시 ‘흑림’에 계신 분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혈투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이내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스산하게 목을 감싸더니…….
언제라도 멱을 따겠다는 듯, 묵직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