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열매가 맺히는 시간(6)>
처음엔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멍청한 놈이 제 명을 재촉한다 생각했을 뿐.
이상함을 느낀 건 가장 앞선 자들이었다.
투두둑─
옷고름이 잘려나가며 앞섬이 드러나고 찬 바람이 가슴을 시리게 하자 다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헛!”
오(五) 장에 가까운 거리.
아직 백해광에게 닿기 위해선 몇 발자국이 더 필요했건만, 이미 가슴이 훤하게 드러났다.
“…….”
단지 그것뿐이라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옆에서 달리던 자들도, 뒤에서 달리던 자들도 모두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기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앞사람에 가려진 뒷사람의 옷고름이 잘려 나갔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과연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이런 검법이 가능한 것일까?
놀람에 앞서 무도(武道)의 길을 걷는 이들은 그 현상 자체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선 찰나의 방심도 목숨을 위협하는 법.
백해광이 다시금 발검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수라문도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어엇?!”
다가가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사이 백해광이 검을 휘둘렀다.
핑-
다시 한번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일대에 울려퍼진다.
수라문의 문도들은 귓가에 울리는 파공음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오른팔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터터턱─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백 개의 손목 갑.
착.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백해광이 이전과 같은 평온한 말투로 물었다.
“계속하시겠소?”
담담한 백해광의 물음.
수라문도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멀건 시선으로 주영산을 바라봤다.
“…….”
그 시선들은 겁먹고 주인을 찾는 강아지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
“허…….”
왕금산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심경은 방금 전 백해광의 검을 받아낸 수라문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 무슨…….”
단지 검을 두 번 휘둘렀을 뿐이건만, 옷고름이 잘려 나가고 단단한 손목갑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자연의…… 이치가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
그라고 무공 고수라는 양반들을 본 적이 없겠는가?
대륙 사(四)대 상인의 금력으로는 일반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름난 무공 고수를 초빙해 무공 시연을 보기도 했고, 자신과 친분을 쌓기 위해 먼저 찾아와 평생의 성취를 선보인 자도 있었다.
허나, 그런 이름난 이들 중에도 백해광 같은 조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태산이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고개를 돌려 진태산을 바라보니, 그 역시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리고 얼이 빠져 있었다.
“모, 몰랐는가?”
“저, 저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 나서게 했다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을 동원할 생각이었지요.”
진태산이 한쪽을 가리키자, 대천상단 안쪽의 낭인들도 자신들과 똑같이 얼이 빠진 얼굴로 백해광의 신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의 숨은 은거기인의 숫자가 강호의 무사들보다 많다더니.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군.”
허탈한 왕금산의 말에 진태산이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도 저 수준은 상식을 벗어난 것 아닙니까?”
“내 무공에 대해 잘 모르지만, 분명 인력의 수준은 아닌 것 같구만.”
“전 무공에 대해 좀 알지만 제가 보기에도 인세의 것은 아닙니다.”
진태산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왕금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나인데…….”
백해광을 앞에 두고 일이 커졌네 마네 하는 소릴 했던 것이 후회되는 왕금산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새로 새운다는 문파에 후원금이라도 왕창 가져다줘야겠다는 계산까지 마쳤다.
반면에 진태산은 백해광에게 신의를 보였다.
주위의 압박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자신의 가산을 다 털어서라도 문파를 세워주겠다 약속하지 않았나.
“그래도, 너,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고작 태을문이 감당하기엔…….”
“이 사람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릴…….”
문파 하나 세워주는 비용으로 절대 고수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커다란 이득인지, 상인인 왕금산은 금방 계산할 수 있었다.
“강호에 기반을 둔 자네와 자네 문파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모르나? 저런 이와 교분을 쌓을 수 있다면 황금마차를 몇 대라도 갖다 바칠 사람이 천하에 널렸네.”
“그, 그렇겠지요. 근데 저 나이대에 저런 고수가 어디서 똑 떨어진 걸까요?”
왕금산 역시 의아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좀 찾아봤는데, 도통 어디에 있던 사람인지 알 수가 없더군.”
물론 조사 과정에서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을 몇 찾긴 했지만, 그들 중 백해광과 동일 인물이 있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검마까지 있었으니…….’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피에 굶주려 거대 문파에서 마구 살육을 저지르고 다니는 검마로 의심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백해광이 불쾌해했을 거란 점은 차치하고, 흑도와 친분이 있다는 오해를 벗고자 발악하는 진태산에게 찝찝함을 남겨줄 수 없으니까.
잠시 후, 상황을 정리한 백해광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단주님.”
왕금산과 진태산의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네, 넵!”
“부, 부르셨는가?”
때아닌 존댓말에 백해광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아무튼 이 새끼…… 아니, 요노…… 하, 참. 쉽지가 않군요.”
잠시 미간을 찡그린 백해광이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하여튼 요분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는군요.”
백해광이 슬쩍 물러난 곳에는, 주영산이 파리한 안색을 한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가 삐걱대며 허리를 숙였다.
“미, 미안, 미안합니…… 컥!”
백해광이 검집으로 주영산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제대로 안 하냐?”
“히끅!”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던 주영산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 사죄, 사죄드립니다. 그간의 일 모두 사죄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주영산은 진태산과 왕금산 이상으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백팔봉을 차지한 제법 입지 있는 문파의 문주이며, 그 자신도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고수.
그런 그가 이리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윽-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들어 백해광의 눈치를 보는 주영산.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해광이 턱짓하자, 주영산이 다시 넙죽 엎드렸다.
“저, 저희 수라문에선 상단 진출을 와, 완전하게 포기하겠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도리어 진태산이 당황하였지만, 주영산은 처박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하, 합비에 수라문이 진출하는 일은 저, 절대! 결코……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주영산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백해광을 바라본다.
공포로 뒤범벅되어 무해하기 짝이 없는 눈빛.
그를 바라보던 백해광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됐으니 그만 가봐.”
“네, 넷!”
그러나.
“아 참! 잠깐!”
도망치듯 달려가는 주영산의 뒷덜미를 다시 잡아채는 백해광.
“네넷?!”
더욱더 겁에 질린 주영산의 눈을 내려다보며 백해광이 조용히 물었다.
“너, 소림사랑 친하다며?”
“그, 그것이.”
눈알을 뒹구르르 굴리는 모양새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백해광이 고개를 옆으로 꺾자, 두둑거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가서 이를 거냐?”
“네?”
“가서 이를 거냐고.”
“…….”
이윽고, 검병으로 주영산의 볼을 꾸욱꾸욱 누르는 백해광.
흡사 뒷골목 왈패가 어린애들 돈을 빼앗는 장면처럼 보였다.
한참을 농락하던 그가, 일순 분위기를 잡으며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가서 이르는 건 상관없는데…….”
“네, 넵! 히끅! 그, 그런데요?”
“뒷일은 책임 못 진다.”
“……뒷일이라 함은?”
토끼 새끼마냥 몸을 떨어대는 수라문주를 보며, 백해광이 씨익 웃었다.
“그건 네 상상에 맡길게.”
담백한 백해광의 말에, 주영산만이 뭔갈 상상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가봐.”
“……네.”
주영산이 혼비백산하듯 달려나갔다.
지체 없이 제자들을 채근하며 도망가는 주영산.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던 백해광이 이윽고 고개를 돌리며 포권을 쥐었다.
“대화로 잘 설득했으니. 더 이상 큰일은 없을 겁니다.”
“……?”
“……??”
정중한 백해광의 태도.
그러나 진태산과 왕금산의 눈빛은 더없이 복잡하게 얽혔다.
……어쨌든 피가 흐르지 않았으니 이것도 설득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진태산은 백해광의 얼굴 위로 아들 녀석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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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문주님! 소림사에 알릴까요?”
숲이 날아가라 미친 듯이 달려가는 수라문도들.
가장 앞서 도망치던 주영산이 호권단주의 질문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소림사뿐만이 아니다. 합비와 안휘성 일대의 모든 문파들에게 전서를 날려라!”
“아, 알겠습니다! 곧장 증원 요청을…….”
“이 멍청한 놈아!!”
말총에 불붙은 듯 달리던 주영산이 급하게 멈춰 섰다.
그를 따르던 호권단주와 제자들도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왜, 왜 그러십니까. 문주님?”
“네놈이 정녕 수라문의 기둥뿌리가 뽑히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냐?”
“네? 그게 무슨…….”
주영산은 아까의 광경이 떠오른 듯,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격이 다른 고수다. 그런 존재가 대천상단…… 아니, 태을문과 왕가장의 식객으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 그럼 전서를 날리라 하심은……?”
“그자의 존재를 알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
“만약 그자가 태을문에 아예 자리를 잡아버린다면…….”
꿀꺽.
이야기를 듣던 호권단주가 굵은 침을 삼켰다.
“합비 일대…… 아니, 안휘성 전체의 세력 구도가 완전히 뒤바뀔 거다.”
“그, 그 정도입니까?”
주영산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평생 수많은 고수들을 상대해 왔다. 아니, 강호를 질주하며 본 것까지 따지자면…… 절대 식견이 좁다 할 수 없지.”
수라문도의 시선이 모두 주영산의 입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내 평생에 그와 같은 실력자를 본 적이 없었다.”
“…….”
“단지 사문을 발전시키고 성세를 넓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라문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문파들의 존폐가 달려있다.”
주영산의 진지한 이야기에 수라문도들은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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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 백 대협! 내 평생에 그렇게나 통쾌한 장면은 처음이외다!”
“과찬이십니다.”
“혹시나 그간 내 언변의 실수가 있어 대협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용서해 주시오. 이게 다 의형제이자 사돈 될 사람의 안위를 걱정한 탓이니.”
유달리 ‘의형제’나 ‘사돈’이라는 단어에 힘을 빡 넣은 왕금산의 말에, 백해광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누구나 소중한 사람에게 이상한 자가 다가간다면 경계가 되겠지요. 심려치 않습니다.”
백해광의 사려 깊은 말에 왕금산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이리 호탕하고 대범하다니. 실력만큼이나 그릇 또한 대단하시오! 으하하하하!”
왕금산이 백해광에게 착 달라붙어서 왕가장의 귀한 술을 주고받는 동안, 진태산은 섭소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혹여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히 편안하고 과분해요.”
“세 분이 사시기엔 별채의 크기가 너무 작지요. 하루라도 빨리 문파의 터전을 알아보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그건 너무 큰 부담을 드리는 일 같아서…….”
섭소정이 당황해하자 따스하게 웃으며 진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부군께선 제 아들의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들이 스승처럼 모시고자 제게 부탁한다는 편지까지 보내왔으니, 이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백해광과 술잔을 부딪치며 호탕하게 웃던 왕금산도 끼어들었다.
“암! 그럼! 우리 사위가 아주 스승님을 모른 척하고 그런 막돼먹은 놈이 아닙니다!”
“왕 장주님…….”
탕-
급기야 왕금산은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저도 후원을 하지요! 제 의형제의 아들이면 제 조카이기도 하고, 또 미래 사위이기도 한 소운이 녀석의 스승께서 차리는 문파 아닙니까? 저도 당연히 한자리 도와야 하고 말고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백해광마저 당황스러워하자 왕금산이 한발 더 다가섰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거처부터 옮기시는 게 어떠십니까? 왕가장에 빈집이 아주 많습니다.”
“이미 충분히 배려받고 있습니다. 이 이상은 부담스럽습니다.”
정중한 거절에 왕금산이 작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상인으로서 눈치가 백단인 그였기에,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백 대협께선 대체 어찌 그리 대단한 무공을 익히신 겁니까?”
“…….”
“아, 혹시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일지요……?”
백해광이 서둘러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했던 일입니다.”
“혹여 심산유곡에서 은거 생활을 하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었고…….”
섭소정의 눈치를 보던 백해광은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결심한 듯 말했다.
“사실, 전 과거가 있습니다.”
“과거요?”
“네. 원치는 않았지만…… 한때 흑도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었지요.”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흑도면 흑도고 백도면 백도지, 원치 않게 흑도에 몸담았다는 건 또 뭘까?
과거를 떠올린 듯, 백해광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 제멋대로 군 탓에 그랬던 것이지요.”
“아하! 고리타분한 무림맹의 강압에 저항하셨던 거였구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왕금산이 더욱 즐거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흠이겠습니까. 무림맹이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저 역시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걸요. 수라문만 보아도, 제 놈들이 본인들의 실력으로만 상대를 압박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금산이 그리 이야기하자, 수심이 어렸던 백해광의 얼굴이 조금씩 피어났다.
“걱정 마십시오. 과거는 과거, 중요한 건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지요.”
“자자, 과거는 이 술잔에 다 털어버리시고, 한잔 받으시지요.”
왕금산이 새로이 술잔을 채우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럼 어찌 되었든 강호 생활을 하셨다는 건데…… 별호는 있으셨습니까?”
“그게 참, 자랑할 만한 건 아니라서…….”
어느새 술이 얼큰하게 취한 왕금산이, 백해광의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하하하. 사내대장부가 과거 치부를 꺼내는 게 뭐가 부끄럽습니까! 저 또한 한때 금화공자라고 이름을 날리곤 했는걸요, 으하하하하!”
“그, 그렇습니까? 하긴 장주님에 비하면 제 별호는 비루하기 그지없는 거군요.”
처음으로 백해광의 입에서 ‘장주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왕금산은 더욱 즐거워졌다.
아득히 수준 높은 고수와 점차 격이 없어지는 듯해, 오늘 술이란 술은 모두 꺼내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뭘로 활동하셨습니까? 실력을 보아하니, 그래도 아무 별호나 가지진 않았을 것 같은데…….”
백해광이 민망하단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별것 아닙니다.”
그러곤 단숨에 술잔을 들이켠 후, 술 방울이 맺힌 입술을 닦으며 툭 내뱉었다.
“검마.”
“응?”
쪼르르르르륵.
다시금 백해광의 잔을 채우던 귀한 술이, 술잔을 차고 넘쳐흘렀다.
“엇?”
퍼뜩 정신을 차린 왕금산이 황급히 술병을 내려놓으며 부산을 떨었다.
“아,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방금 헛것을 들은 거 같아서…… 저, 그러니까 그, 별호가…….”
“아, 예. 검마로 불렸었습니다. 부끄러운 과거지요.”
“…….”
왕금산의 목이 인형처럼 어색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끼릭끼릭 돌아간 그의 시선이 진태산을 보았을 때.
“…….”
진태산의 두 눈동자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