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금의야행>
맹주전의 부장은 맹주의 집무실로 향하는 도중 보고서를 다시금 살폈다.
사절단 무한 입성.
만통부를 거쳐 올라오는 보고서는 대부분 가장 중요하거나 시급한 것들만 올라온다.
일개 사절단이 무한에 도착했다든가 하는 자잘한 이야기들은, 만통부 이전에 천목각에서 걸러지는 게 관례.
그럼에도 이 보고서가 맹주전까지 전달된 이유는 현 무림맹주인 혁무강의 개인적인 지시 때문.
“맹주님, 사절단이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맹주의 집무실 밖에서 보고하자마자 곧장 집무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부장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실인가?”
왠지 상기되어 보이는 맹주의 표정에 흠칫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손자가 손자며느리를 데려왔다 하면 저런 표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던 부장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네. 천목각에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알겠네.”
그러면서 곧장 나갈 준비를 마치는 혁무강.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나가보실 생각이십니까?”
사절단이라면 만통부의 부장 선에서 맞이하는 정도만 해도 어마어마한 예를 갖춘 것이다.
그런데 맹주가 직접 나서다니.
혁무강이 콧김까지 뿜으며 단호히 말했다.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운 자들이네. 금의야행하게 할 수는 없는 법.”
“…….”
사뭇 이해하지 못하는 부장을 뒤로하고 혁무강은 쏜살같이 만통부로 달려갔다.
털컥.
갑작스레 열린 문으로 혁무강이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만통부의 맹원들이 바짝 긴장하며 도열하기 시작했다.
“에잉…….”
그 모습을 보며, 제갈소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어련히 모시러 간다 하지 않았습니까.”
기특하고 반가운 것은 알겠으나, 그래도 사람들 보는 눈이 있다.
맹주란 사람이 이리 쉽사리 움직여서야 권위가 서지 않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혁무강은 권위나 체면 따윈 필요 없다는 표정이다.
“대단한 일을 해낸 영웅들입니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그 누가 무림맹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까.”
이에 제갈소명도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사절단이 맹에 들어섰다는 말을 듣고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 하지만…….”
“어서요!”
총군사의 호통에 혁무강이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맹원 하나가 혁무강에게 차를 내왔고, 제갈소명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할 일이 그렇게 많습…….”
와락.
혁무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소명의 손에 들려있던 보고서에 주름이 잡히고 덩달아 그의 미간도 불량하게 구겨졌다.
“뭐라굽쇼……?”
“응?”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 아니 그게…….”
제갈소명이 구겨진 종이를 차례로 공중으로 들어 보였다.
<사천 혈교를 토벌하고 그들 잔당에 대한 추적 보고서.>
<혈교와의 일전 중에 나온 사상자에 대한 집계와 보상 계획.>
<퇴로 확보와 물자 보충에 관한 계획.>
끝없이 펼쳐지는 보고서의 향연.
그를 차례차례 보여주는 제갈소명의 눈에 깃든 광기에, 혁무강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 그렇습니까?”
말을 잘못 꺼냈다 판단한 그는 애써 제갈소명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입이 터진 제갈소명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혈교 새끼들이 설치한 수많은 절진과 함정 처리!”
“파견된 무사들의 복귀 지원과 보급문제!”
“사흑련의 개파로 인해 산서성에 새로이 설치해야 할 지부들의 규모!”
만통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업무를 토해낸 제갈소명.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장 시급한 문제들이 겨우 이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혁무강이 당황하는 사이, 제갈소명의 눈에 깃든 광기가 더욱 진해졌다.
“이게 끝나면 이것들의 열 배에 달하는 미뤄놓은 일들을 또 처리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할 일이 많냐구요???? 네에?? 할 일이 많냐구요????”
“미, 미안하오. 총군사…… 내, 내가 너무 큰 짐을…….”
“말만 하지 마시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십시오! 실제적인 도움을!”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바짝 다가온 제갈소명의 얼굴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혁무강.
그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었다.
“아, 알겠소. 내, 자, 장로전에 이야기해서 예산 편성을 더 늘리도록 하겠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인재! 아니, 인재도 필요 없습니다! 사람! 사람이 모자랍니다!”
“그, 그건 총군사가 최소 기준을 너무 높이 잡으니까…….”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
갑자기 냉정하게 변한 제갈소명의 모습에 혁무강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솔직히 바른말로 만통부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인재들이 한둘인가.
그들을 내친 건 다름 아닌 제갈소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을 꼬투리 잡았다간 뭐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질 터.
혁무강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내, 내가 신경 쓰겠소.”
“부.탁.드.립.니.다.”
눈두덩이 아래가 어느 때보다 어두워 보인다. 확실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지금이야 혈교라는 공통의 적으로 사흑련과 협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사흑련과의 갈등이 빚어질지 모른다.
더구나 강호를 위협하는 ‘그것들’.
흑도야 갈등을 겪긴 했어도 수백 년간 공존해 왔다면, ‘그것들’은 도저히 공존이 불가한 존재다.
그간 잠깐씩 강호에 고개를 드러냈던 모습만 보아도, 그들의 상식이 이미 강호의 것과 다르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해보면 정말 만통부뿐만 아니라 무림맹 전체에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다.
‘어디 서원 가서 납치라도 해와야 하는 건가?’
혁무강이 무림맹주로선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고 있을 때.
만통부원 하나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사절단이 무림맹 안으로 들어섰답니다.”
혁무강이 그리 바라던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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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는 귀를 파면서 다시금 물었다.
그런데 맹원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내 태도가 상당히 건방져 보였나 보다.
음, 그게 아니라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다시 물으며 귀를 판 것뿐인데. 쩝.
맹원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다시금 말했다.
“모두 오라 했네.”
“…….”
나는 악병비를 바라봤다.
우린 어쨌든 비공개로 선발된 사절단이다.
보통 이런 보고는 단장이 대표로 하고 나머지는 단장에게 전달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던가?
더구나 지금 우리는 좀 곤란한 상황이다.
“너무…… 졸린 것이야. 음냐음냐.”
내게 업힌 채 침으로 등을 축축하게 적시며 자고 있는 당서희.
……이런 꼴인데 만통부에서 보고를 해야 한다니.
나는 당서희를 내어보이며 다시 물었다.
“모두 참석해야 하는 겁니까?”
하지만 따뜻한 배려는 없었다.
“……깨우게. 뭐 하는 건가?”
쯧, 역시나 무림맹은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다.
나는 당서희를 업고 있는 팔을 들썩거렸다.
“선배, 일어나 봐요. 지금 만통부로 가야 한답니다.”
“음냐, 음냐, 쿨…… 난 피곤한 것이야. 너무 일을 많이 한 것이야.”
……너 한 일도 별로 없잖아! 먹고 자기만 했구만!
오면서 만난 마적 떼를 처리한 것도, 기근에 허덕이는 화전민을 구한 것도 나와 일명 선배가 다 했다.
“하…….”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악병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냥 가지. 총군사께서도 당서희에 대해 알고 계실 테니.”
그래, 불호령을 받는 건 내가 아닐 테니.
당서희도 이번 기회에 ‘사회’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이 침 좀 어떻게 안 되나.’
나는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악병비를 따랐다.
본래 여기서 헤어지기로 되어있던 표사들은 결국 짐들 때문에 함께 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왠지 한산하네요.”
평소라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야 할 무림맹이 어쩐지 휑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사천으로 파견을 나간 무사들 때문인 듯한데…….
맹원들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사천에서의 일이 잘 해결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또 전생과 바뀌었군.’
사천의 일이 일 년 이상 빠르게 종료되었다.
무림맹의 힘은 보존되었고, 사천에 기반을 둔 문파들 중에 피해가 큰 곳도 없었다.
학관생들의 피가 흐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 일을 정쟁의 도구로 쓰는 이들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잘 바뀌었다고 느끼고 있지만, 한편으론 새로이 자리 잡은 불안 요소도 있었다.
‘음양쌍마.’
흉군 음양쌍마가 벌써 강호 활동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본래 몰랐던 일을 알았기에 좋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변화된 사건들로 인해 본래 움직이지 않았던 존재들이 움직이게 됐다 볼 수도 있었다.
이런 변화들은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이다.
지금 마교가 득세한다면 또다시 무림맹은 멸망할 것이고 강호에는 지옥도가 펼쳐지겠지.
‘더 격한 변화가 필요해.’
과거를 완전히 뒤틀어 버릴 정도의 격한 변화.
다른 방식으로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큰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맹원은 전각 앞에 서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슬슬 깨우게. 무례를 범할 순 없는 건 아닌가.”
“…….”
아니, 내가 깨우고 싶지 않아서 안 깨우는 게 아니라니까.
맹원에게 찍히는 것과 당서희가 잠투정하며 던지는 독에 중독되는 것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맹원에게 찍히는 걸 고르겠다.
나는 그 말을 애써 무시하며 가만히 서 있었고, 인상을 찌푸리던 맹원은 결국 문을 열었다.
“사흑련에 갔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맹원의 보고과 함께 우리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대전엔 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양옆으로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음, 역시 총군사님은 있을 줄 알았고 그 옆은…….
‘혁무강!?’
사절단을 보낸 제갈소명이야 결과를 듣고 싶었을 테니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맹주인 혁무강까지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사절단장 악병비, 금일 복귀했음을 신고합니다.”
악병비가 포권을 쥠과 동시에 일명과 수신호위 표사들이 따라 포권을 쥐었고, 당서희를 업고 있는 나는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갈음했다.
“다들 고생 많았네. 편히 쉬게.”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사를 마친 표사들이 상자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두고 대전을 나섰다.
우릴 안내한 맹원까지 나간 후에 문이 닫히자 제갈소명이 입을 열었다.
“아직 맹 내부가 소란스러워 자네들의 임무를 일부러 공표하지 않았네. 커다란 환영회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걸 이해하게나.”
사흑련과 무림맹의 관계는 아직 규정되지 않았다.
장로전과 각 전각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것이고, 무림맹을 지탱하는 문파들의 의견도 종합해서 결정할 일이었다.
현재로선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무림맹의 체계였다.
악병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공과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소명이 우리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한다.
일명에게 향했던 시선이 수신호위들을 거쳐 내게로 고정되었을 때.
……나는 지금이라도 당서희를 깨워야 하는 건 아닌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많이 피곤했나 보군.”
제갈소명은 당서희를 보곤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진짜 이걸 넘어간다고?
당가 사람이라 그런가?
그럼 너무 슬플 거 같은데.
“자네들이 이번에 해낸 일은 무림맹을 큰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나 다름없네. 공개하지 못한다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감사합니다.”
“흠, 그래도 그간의 사정을 듣고 싶어 따로 자리를 마련했네.”
일순 제갈소명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다.
“……사흑련에 가 있는 동안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도 했었고 말이야.”
수신호위를 노려보다 이내 표정을 바로 한 제갈소명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천목각에서 보낸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사흑련 내부에선 이번 기회에 무림맹의 뒤를 치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들었네. 헌데 어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나?”
총군사의 질문에 악병비가 즉각 대답했다.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응?”
“설득은커녕 되려 누명을 쓰고 죽을 뻔했었지요.”
“누명이라니?”
산서성 일대에 정보가 모두 끊겼다더니 그때부터 이미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보다.
악병비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 그럼 어떻게?”
제갈소명은 사뭇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는 옆에서 듣고만 있던 혁무강도 마찬가지.
“이는 모두 진소운의 공입니다.”
“……진소운이?”
“…….”
제갈소명과 혁무강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아, 멋있게 별거 아니라는 듯 포권이라도 취하고 싶은데.
……뒤에서 자고 있는 당서희가 깨어날 생각을 안 하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냐, 음냐, 내가 대빵인 것이야.”
……당서희는 꿈속에서 대장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아, 좀 일어나라, 이상한 잠꼬대 그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