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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61화 (261/357)

261. <금의야행(2)>

내가 간절하게 당서희를 흔들어 깨우는 동안 악병비는 사흑련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지만, 매우 담백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제갈소명의 두 눈에는 의문감이 맴돌았다.

“그게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악병비가 담담하게 대답하고 넘어갔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제갈소명은 다시금 말문을 막았다.

“……그게 진짜였다고?”

“네. 맞습니다.”

“…….”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악병비.

그 얼굴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건만, 제갈소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명, 지금 단장의 말이 사실이냐?”

기어코, 보고자인 악병비를 건너뛰고 일명에게 되묻는다.

일명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거냐?”

제갈소명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흑련에서 사술에 당하기라도 한 것이냐? 아니면…….”

급기야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본다.

“진소운 저놈이 자네들에게 사술이라도 건 것이냐?”

에헤이, 사술이라니. 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오.

애초에 왜 갑자기 나한테 불똥이 튀…….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당서희의 잠꼬대.

“음냐, 음냐, 이게 다 업보인 것이야.”

저기요? 당신, 사실은 자는 거 아니지?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악병비가 재차 강조했다.

“보고드린 이야기에 한 치의 가감도 없음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는 악병비의 태도에도 불구, 제갈소명의 표정은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래도 감찰각의 삼당주라면 무림맹 내에서도 검증이 된 사람일 텐데 그렇게 믿음이 안 가나?

“그러니까, 사흑련에 미상의 존재들이 숨어들어 무림맹과 사흑련의 전쟁을 조장했고……. 사절단은 살인자라는 누명까지 썼는데, 도가무문의 제자인 진소운이 불심……을 끌어올려 관심법을 사용해 범인을 찾아냈다고?”

음…….

저렇게 정리한 걸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긴 하네.

왠지 술 취한 사람이 멋대로 내뱉은 말 같기도 하고…….

“정녕…… 이게 잘못된 보고가 아니었다고?”

뭔가 변명이라도 바라는 듯 갈증을 느끼는 제갈소명에게 악병비는 특유의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물론 진소운이 말한 ‘관심법’은 사흑련의 흑도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번 사흑련 사절단 파견에서 그가 보여준 활약상들이 빛바래진 않을 줄 아룁니다.”

“응?”

제갈소명의 놀란 표정처럼 나도 악병비의 말에 꽤나 놀랐다.

“사절단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단장인 저는 기습적인 공격에 무력해져 있었고, 사흑련 내에서 도움을 구할 수 있을 만한 존재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고저가 없다.

“저희로선 상정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저나 사흑련이나 사절단이 이번 사태의 희생양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불명예스럽게도 도망치라는 말을 전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굵은 목소리가 대전을 울림에도 조금의 주저함이 없다.

마치 진실을 차분하게 서술하듯 신뢰감이 느껴진다.

“모든 이들이 모든 것을 포기했었습니다. 단 한 사람.”

서서히 고개를 드는 악병비.

“진소운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무표정한 그의 표정과 달리, 그의 눈빛만은 번뜩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진소운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스스로를 희생하며 단 한 순간도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토해내겠다는 듯 끝없이 말을 이었다.

“냉철한 이성, 뜨거운 가슴, 동료와의 유대, 흔들리지 않는 신념. 사사롭고 작은 이득에 흔들리지 않는 청렴함.”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이 모두를 갖춘 존재이기에, 불굴의 의지로 그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악병비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가 말하는 존재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단어’를 문제 삼는 건, 맑은 호수에 한 줌의 진흙이 흩뿌려진 것을 문제 삼는 바와 다름없다 생각합니다. 진소운은 이번 사절단의 최고 단원이며, 사흑련과 무림맹 간에 벌어질 수도 있었던 대전쟁을 막은 최고의 공신입니다.”

물론 그게 내 얘기라는 걸 안 순간,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볼이 화끈거렸지만.

“흠…….”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혁무강이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 악가와 진소운 간에 작은 문제가 있었다 들었네.”

“……부끄럽게도 악가의 잘못이 큽니다.”

“아니,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그사이 뭔가 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걸세.”

하긴 그럴 수밖에.

이렇게 좋게 말해주려면 대체 뭘 얼마나 처먹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제삼자의 일이었다면 나도 분명 의심을 했었을 테니까.

그러나 악병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없었습니다.”

맹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한다고?”

“감찰각에 발령받자마자, 사실만을 최대한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배웠습니다.”

“…….”

혁무강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굳이 듣지 않아도, ‘정확’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쓰이는 게 옳은지 의문이 들었음이 뻔했다.

나도 지금 악병비 이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으니까.

“……크흠, 진소운.”

이번엔 제갈소명이 나를 불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은 내 등 뒤에 업힌 당서희에게 향해 있는 듯했다.

“네.”

“방금 삼당주…… 아니, 사절단장이 한 말이 사실이냐?”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신중하게 대답했다.

“네.”

“…….”

“단장의 말대로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보고인 것 같습니다.”

“…….”

왜? 뭐?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내가 당서희 보모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당서희 선배가 원해서다.

그리고 내가 보모 노릇이나 한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이 사라자거나 평가절하되는 건 아니잖아?

당연히 그래야 하고.

나는 팔을 한차례 들어 올려 당서희의 자세를 바로잡은 후, 악병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공명정대하기로 소문난 삼당주님답습니다.”

“…….”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갈소명.

그때.

“음냐, 음냐, 뻔뻔한 것이야.”

다시금 들려오는 당서희의 잠꼬대.

너 진작 깼지?

“쿨쿨…….”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혁무강이 입을 뗐다.

“어, 어찌 되었든 사절단들이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 것은 맞지 않소.”

“그렇지요.”

“그렇다면 추궁을 할 게 아니라 칭찬을 해야지요.”

“…….”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제갈소명이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지요. ……어찌 되었든 잘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훌륭하게 해냈어.”

맹주가 슬쩍 제갈소명의 어깨를 툭 친다.

“거참, 총군사. 솔직하게 말하시지요. 기대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크흠, 무림맹의 사절단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법이지요.”

“흐흐. 그렇게나 기쁘십니까.”

혁무강이 놀리듯 말하자 제갈소명이 정색했다.

“맹주께선 동맹을 맺지 못한 것에 대해선 아쉬워하지 않으셨습니까.”

혁무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크흠, 그, 그거야 그냥 개인적인 아쉬움이었지요. 그걸 왜 이 자리에서…….”

혁무강은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았었나 보다.

더불어 현실적인 제한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이 일로 제갈소명에게 한 소리 들은 듯 보였고.

어쨌든 말싸움에서 이긴 제갈소명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우리 앞인 상자의 정체를 물었다.

“헌데 저것들은 무엇이기에 이곳까지 가져온 것이냐?”

악병비가 나를 한번 쓱 보더니 보고했다.

“사흑련을 떠날 때, 담악의 편으로 사흑련주가 보낸 선물입니다.”

“응? 사흑련주가?”

이윽고 나와 일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 근처로 이동했다.

제갈소명과 혁무강의 시선이 자연스레 우리 쪽으로 향했다.

덜컥.

덜컥.

상자들이 열리며 물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거 백도 무림에서 사라지거나 탈취당했던 귀한 보물들.

금전적 가치를 떠나 그 어떤 것과도 치환할 수 없는 절대적 역사의 가치를 가진 물건들의 등장에, 그 대단한 혁무강마저 입을 쩍 하니 벌렸다.

“이, 이게 다 뭔가?”

물론 가장 놀란 이는 제갈소명이었다.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비록 지금은 함께할 수 없겠지만, 조금씩 거리를 좁혀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사절단원이 나간 후, 대전 안에는 긴 침묵이 맴돌았다.

한참의 시간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뗀 건 혁무강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지난 이십 년간 무림맹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일을 겪어보았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자신의 이상대로 일이 항상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었고, 인간의 한계를 알았기에 욕심을 내려놓았다.

이번 사절단행도 마찬가지.

제갈소명의 뜻대로 사절단을 파견하긴 했지만, 사절단이 뭔가 이뤄 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선 제갈소명도 별반 기대하지 않는다 했으니까.

“전 뭔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임무를 받고 떠난 사절단은 예상한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상자 안에 든 물건들을 바라보는 제갈소명의 눈에는 복잡함이 가득했다.

“이걸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절대 못 할 일을 이뤄낸 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허허. 정말이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지요.”

이윽고 총군사는 진소운과 사절단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더구나 놈은 그저 일개 학관생 아닙니까. 강호 초출이나 다름없는 놈이 어찌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단 말인지…….”

동감하며 하염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혁무강.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총군사도 아까 보셨지요?”

“……네.”

“당서희 그 아이가 업혀 있었습니다.”

“……잠꼬대까지 하더군요.”

“일명, 그 아이가 제 존재감를 드러내지 못한 것도 놀라운 일이건만…….”

소불 일명이라면 차후 강호를 이끌어갈 인재 중의 인재다.

그런 아이가 마치 존재감이 사라진 듯 아무 말 하지 못한 것도 놀라운 일이건만.

“서희…… 그 아이까지.”

아마 독왕이 이 사실을 들었다면, 그 무뚝뚝한 얼굴로 기함하는 꼴을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만치 놈이 특별하다고 봐야 할까요?”

제갈소명의 물음에 혁무강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 또한 모르겠습니다.”

무림학관의 전(前) 기수.

그러니까 사(四) 년 전 학관에 입학했던 아이들의 면면도 충분히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신매화검 화정산을 비롯해 중창진인 악북산과 개벽신검 남궁산.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하는 천재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것만 해도 놀랄 일이건만.

그 아이들마저 소불과 백수신녀, 그리고 용소아의 빛에 가려지는 걸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데 지금에 와선 그 아이들의 빛마저 바래는 느낌이었다.

진소운, 그 단 한 녀석으로 인해.

제갈소명이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사흑련주가 이런 부담스런 물건까지 보낸 걸 보면…… 분명 진소운 그놈이 요상한 꼬장을 부린 걸 겁니다.”

“흠, 그렇겠지요.”

“때문에 더 놀라운 겁니다. 세상 어떤 후기지수가…… 무림맹과 사흑련의 교두보 역할을 한단 말입니까.”

단지 무공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한 것만으론 부족하다.

세상을 읽고 인간을 이해하며, 수많은 경험들을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놓아도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을, 놈은 척척 해내고 있었다.

“전 사뭇 두렵기도 합니다.”

“네?”

혁무강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제갈소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찬가지로 다시금 상자를 살피던 맹주의 얼굴 위로 걱정과 안타까움이 혼재된 빛이 떠오른다.

“……때론, 너무 밝게 빛나는 별은 금방 사라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

“어쩌면 일부러라도 빛을 숨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란 얼마나 천박하고 하찮은가.

하지만.

거대한 영웅을 쓰러트리고 역사를 뒤트는 것은, 언제나 그 천박한 질투라는 감정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소명이 탄식을 내뱉었다.

“흐음…… 전 다른 것이 두렵습니다.”

“응?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총군사의 얼굴 위로, 공포와 두려움이 혼재된 빛이 떠오른다.

“놈이 내밀…… 영수증이 두렵습니다.”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격양된 제갈소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맹주께선 혹시 못 보셨습니까? 진소운 그 자식이 나갈 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분명, 이번 일로 엄청난 걸 뜯어갈 게 분명합니다…….”

“……쩝. 하긴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긴 하지요.”

제갈소명이 귀신이라도 본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 자신 없습니다. 그러니 맹주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총군사, 어찌 그리 무책임하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겠습니다. 그런데 놈이 세운 공은, 제가 포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지 않습니까?”

사절단이 받아온 선물은 무림맹 입장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보물의 본래 주인들은 무림맹을 움직이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들.

그들이 주인이라 하지만 그냥 보물을 돌려줄 수는 없는 법.

무림맹은 이 보물을 이용해 얼마든지 그들에게서 대가를 받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입장에서 엄청난 무기나 마찬가지.’

그런 물건을 찾아온 이에게 대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제갈소명은 그 뛰어난 머리로도 계산하기 힘들었다.

“하아…….”

하지만 그건 혁무강도 마찬가지.

“흐음…….”

오랜 고심을 하던 혁무강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은옥보고를 열까요?”

“…….”

평소라면 제정신이냐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을 제갈소명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입을 꾸욱 다물고 혁무강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치를 살피던 혁무강이 재차 물었다.

“……정말 은옥보고를 열어도 될까요?”

“…….”

그러나 제갈소명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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