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금의야행(6)>
동룡의 검이 날카롭게 요혈을 찔러 들어온다.
금표는 태을팔만신보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찌지직.
아슬아슬하게 옷이 잘려나갔지만, 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룡이 마지막에 슬쩍 손을 틀어낸 것을 봤으니까.
“하앗!”
태을진경을 끌어올려 쌍천검결을 펼친다.
촤르르르르르르.
수십 개의 환검과 진검이 동룡의 팔방을 지배하며 엄습한다.
칼날의 폭풍에 휩싸여 피를 흘리며 난자당하는 동생을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 정상이건만, 푸른색의 검기가 칼날의 폭풍을 가로지르며 솟구쳐 오른다.
퍼퍼펑!
검기에 산산이 부서진 쌍천검결 사이로 동룡이 공간을 접으며 달려들어 온다.
금표가 필사적으로 날리는 검기를 왼손에 들린 중도로 튕겨내며 최단거리로 간격을 좁힌다.
금표가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천살성!
『살기를 완벽하게 누그러뜨린 천살성의 재능은 평범한 인간이 범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만서고에 소장된 책에서 봤던 문구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동생에게 지기 싫은 형의 마음은 진리마저 부정하곤 하는 법.
“하아아압!”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태을진경에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허공에 만검이 형성되어 동룡의 사혈을 노린다.
촤르르르르르르.
두 자루의 만 검이 백여 개에 가까운 환검을 만들고 태을팔만신보는 십여 개의 환영으로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벼리고 벼린 칼날에 환과 진은 구분이 불가할 것이다.
극한에 상황에 몰린 천살성에게 진체를 구분할 이성 따윈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촤르르르륵!
천살성의 재능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본능적인 살욕.
다음 살인을 위한 효율.
살인에 대한 지독한 집착과 욕구가 뭍 평범한 것들을 압살한다.
끝없는 갈증에 물을 찾는 이처럼,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는 물속에서 숨을 쉬려는 절박한 이처럼.
살인에 대한 욕구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한다.
퍼퍼퍼퍼퍼펑!
환검과 진검을 구분하긴커녕 정면으로 받아내며 최단거리로 쏘아 들어오는 동룡의 중도가 금표의 목을 잘라내기 직전 우뚝 멈춰 선다.
“……하아, 하아, 하아.”
칼날의 차가움이 얇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다.
“……헤헷, 형 내가 이겼어!”
본래의 바보 같은 동생으로 돌아온 동룡은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기뻐한다.
멍청이, 이번뿐 아니라 최근에 계속 자신이 이겨왔다는 걸 잊은 건가.
“그래, 잘했다!”
동룡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녀석은 기분 좋다는 듯 더욱 큰형의 품을 파고든다.
금표는 잠시간 상대가 가진 엄청난 재능을 질투하다가 이내 웃음 짓는다.
그 상대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존재이니까.
그때.
“다들 여기 있었네.”
“은호 형!”
대표단의 간부가 되면서 근래에 보기 힘들어진 은호의 등장에 동룡이 오도도도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그러곤 고개를 휘휘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대사형은?”
“만통부에 받을 게 있다면서 가셨어.”
“만통부에?”
은호는 보통 학관생이 만통부에 갈 일이 없다는 것은 학관 생활이 반년 정도 지났을 때 깨달았다.
그리고 만통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학관생들 대부분이 학관 졸업 후에 만통부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때쯤 알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매번 만통부를 번질나게 들락거리는 대사형이 얼마나 대단한가 놀라다가도, 그간 워낙 특별한 일들이 많았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기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사형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을 제정신으로 못 살 거 같으니까.
잘린 옷자락을 털어내던 금표가 익숙하다는 듯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래?”
“몰라. 대사형이 언제 그런 거 일일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나.”
은호는 서운함에 툴툴거렸다.
한편으론 대사형의 마음이 이해 가기도 했다.
대사형은 항시 혼자서 짐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태을문 제자를 위해 주저없이 위험한 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끝이 안 보이는 수렁으로 빠질 위기를 겪으면서도 사제인 자신들에게 신경질 한번 부리지 않았다.
‘아직 우리가 못 미덥기 때문이겠지.’
기대가 없기에 화조차 내지 않는 것이리라.
“후우…….”
갈 길이 멀다.
태을문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걱정하기에 앞서, 당장 대사형을 쫓아가기에도 아직 갈 길이 한참이나 멀다.
그렇게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은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불쑥 전서를 내밀었다.
“뭐야?”
“이번 학기말 평가 결과지. 숙소에 있길래 가져왔어.”
중간중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삼형제 모두 필기시험 대비는 충실히 해왔다.
결과지를 받아 든 동룡의 얼굴이 밝아진다.
“우와! 형들 나 갑(甲) 평가가 두 개나 있어!”
“어디 봐, ……이거 다 실전 결투에 관한 시험이잖아. 전술이나 전략도 공부하라고 했지. 안 그럼 나중에 배정받을 때 불이익 받는다고.”
“히잉, 그치만 필기시험은 어렵단 말이야…….”
은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뭐가 어려워! 교관들이 집어준 것만 딱딱 외우면 되는데! 솔직히 무(戊) 평가 맞는 놈들은 머리에 돌이 들은 거나 마찬가지야, 다 알려줬는데도 어떻게 무(戊)를…… 그런 놈들은 그냥 집에 가는 게 나아. 그런 돌대가리들이 지휘를 맡으면 그 부대는 다 몰살당할 테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표를 이겼다며 득의양양했던 동룡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알았어. 더 열심히 할게.”
“명심해! 자라 대가리나 무(戊) 평가를 받는 거야.”
은호는 미간에 더욱 힘을 주며 덧붙였다.
“우리 이씨 집안에 무(戊) 평가를 받는 놈이 있으면 호적에서 파 버리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릴 테니까.”
“……히잉, 알겠어.”
이윽고 은호는 좀 전부터 아무 말이 없는 금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금표 형. 형도 뭐라고 얘기 좀 해.”
“으, 응?”
“동룡이한테 한마디 해주라고.”
은호의 채근에 금표가 제 손에 들린 결과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처들었다.
“아, 제가요? 제가 동룡 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은호 씨?”
“…….”
불길한 예감에 은호가 성큼성큼 다가가 결과지를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 그 결과지에는.
“……미친!”
……무(戊)라는 글자가 세 개나 적혀 있었다.
이은호를 바라보는 모(某) 금표는 그 후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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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물자 처리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일단은 사천 지부에 내년도 배급될 물자들을 미리 이관하는 것으로…….”
“그 새끼들 그거 잔류물로 처리하면서 또 새로 신청할 거야, 그거 못하도록 미리 기록 마감해 놔!”
“저, 부상자들…….”
“부상자들 수송은 기각시키라니까!”
“하지만, 부상자들이 맹에 돌아와서 치료받고 싶다고…….”
“돌아오고 싶으면 제 발로 걸어오라그래! 표국 마차가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부부장님, 지금 이동 중인 무사들에게서 불만이 쇄도하고…….”
만통부가 항시 바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흡사 전쟁통이라고나 할까?
하긴 전쟁을 치를 때보다 치른 이후에 더욱 바빠지는 곳이 지휘부인 걸 생각하면, 지금 이 분위기는 당연한 거다.
‘총군사는 이런 분위기를 이용할 셈이고.’
이야, 하여간 술수가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인생 두 번 살지 않았다면, 눈뜨고 코 베일 판이라니깐?
‘굳이 자신이 가장 바쁜 시간에 상대를 불러들인다.’
고액의 채무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바쁜 상대를 보고 미안함을 느낀 채권자들이 분위기에 말려 받을 돈도 제대로 못 받는다고 했던가?
잠시 뒤, 제갈소명이 씩씩거리면서 들어섰다.
“멍청한 놈들, 말이 안 통한다니까.”
“오셨습니까?”
부부장이라 불린 사람이 제갈소명에게 다가가자,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땅바닥에 내팽겨쳤다.
“이거 다시 작성해! 장로원 놈들이 입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을 갖춰오란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열이 가라앉지 않는지 주위를 둘러보던 제갈소명과 내 시선이 마주치려던 순간.
“그리고 왜 이리 공기가 탁하냐! 환기 좀 시켜라!”
저 노인네. 나 못 본 척한 거야, 지금?
“네넷!”
추상같은 제갈소명의 명령에 만통부원들은 벼락이라도 내려친 듯 화들짝 놀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갈소명은 이어 다른 일을 하려다가 나를 방금 발견한 척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네놈이 여긴…… 아, 오늘이었던가?”
저저 능구렁이 같은 양반.
하지만 나도 처세와 기싸움에서는 뒤지지 않는단 말이지.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바쁘시면 다음에 올까요?”
“되었다.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오늘 빨리 끝내는 게 나을 테지.”
제갈소명은 거칠게 문을 닫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 손에 들린 보고서를 빠르게 읽은 후, 도장을 찍고 한쪽으로 밀어 넣은 제갈소명이 입을 열었다.
“바쁘니 거두절미하고 간단하게 끝냈으면 좋겠군.”
“네, 저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무얼 원하느냐?”
내겐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서류를 읽으며 말을 하는 제갈소명.
여기까지는 사채꾼 출신이었던 소정대 황기영의 말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저렇게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채권자가 기세에 압도되어 돈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진다고 하더니.
진짜로 내가 생각해 왔던 사항들을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히. 사족 붙이지 마라.”
“아, 네.”
다행이라면 황기영은 채권추심에 일가견이 있었고, 나는 술자리에서 그의 과거를 수도 없이 들었다는 것.
이런 골치 아픈 채무자를 상대하는 첫 번째 단계는, 일단 채무자가 자신이 빚진 돈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채무금액을 인지시키는 제일 좋은 방법은…….
“강소성과 절강성, 강서성에 있는 무림맹 지부의 물자를 대천상단이 담당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금옥보고에 있는 물건 중에 청룡검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에게 받아야 할 금액 이상의 돈을 청구하는 것이다.
우뚝.
“…….”
안에 들어선 뒤로 단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던 제갈소명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네놈, 혹시 미친 것이냐?”
“뭐가 말입니까?”
“네놈이 무얼 달라고 한지 아는게야?”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원하는 걸 말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허! 차라리 무림맹주 자리를 달라 하지 그러냐.”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 같지 않은 소리!”
“저도 적당히 제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네가 한 일의 대가?”
자신이 빌린 돈 이상의 금액을 요구받게 되면 채무자는 스스로 협상 자리에 앉으려 한다.
까딱 잘못했다간 쓰지도 않은 돈을 물어내게 생겼으니까.
“네가 한 일은 훌륭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 개의 성을 모두 먹어 치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보고서를 한편으로 밀어두고 나를 노려보는 지금의 제갈소명처럼.
“그럼 어느 정도가 적당하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대천상단이 천목산 일대로 세를 확장했다지? 항주 지부의 물자를 담당할 수 있게 해주마.”
“그건 대가를 받는 게 아닙니다. 그냥 둬도 자력으로 항주 지부까지는 확장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무림맹의 일을 하는 건 맹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전 맹원은 아니죠. 만통부에서 일을 하는 대신 사흑련을 다녀온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금옥보고는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고 있겠지?”
상대는 내가 내민 정산서를 끝없이 부정할 것이다.
“왜 말이 안 됩니까. 솔직히 총군사님께서도 이번 사절단에게 주어진 업무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실패했지. 사흑련과의 동맹은 이뤄지지 않았으니.”
“사흑련에서 우정의 증표로 유물을 준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애당초 그들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계륵 같은 존재를 이 기회에 떠넘긴 거지.”
“하지만 그 계륵 같은 물건이 총군사님의 손에 들어온 이상,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일단 높은 선을 한번 긋고 나면, 협상가는 그 높은 선을 기준으로 잡힌다.
그리고 그때, 상대의 의도를 단숨에 찔러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계륵을 이용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움직일 생각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제갈소명이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놈이 그걸 대체 어찌 알았냐는 눈빛.
“당장 그 물건이 무림맹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지요.”
“협박하는 것이냐?”
상대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몰아넣되, 그렇다고 감정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
나는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제가 세운 공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바랄 뿐입니다.”
“그건 강호에 몸담은 무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더 나아가 상대가 입었을지도 모를 피해를 논리적으로 각인시킨다.
“보통의 일이라면 그렇습니다만, 이런 큰일은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경우가 다르다?”
“네. 보통 무인이 사흑련에 파견되었다면, 그곳에서 죽거나 도망쳐 나와 무림맹에 사고를 알리는 게 전부였겠지요. 그 이후에 사흑련과 무림맹 간 전쟁은 당연한 일이고, 혈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은 필시 무림맹에 심각하고 중대한 타격을 입혔을 겁니다.”
높은 선이 그어졌으면 최대한 방어를 지속한다.
상대의 뇌리에 그 큰 금액이 ‘어쩌면 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로새겨질 때까지.
“그렇게 되면 무림맹의 무사들도 수없이 많이 죽었을 것이고, 결국 무림맹은 와르르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무림맹의 오백 년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을까?”
“물론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튼 그런 큰 공을 세운 제가 합당한 대가를 받지 않는다면…….”
여기에 명분까지 부여하면, 판세는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게 된다.
“다른 맹원들이 무림맹을 위해 분골쇄신하려 하겠습니까?”
제갈소명이 잠시 주춤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너희의 이번 일정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모든 맹원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좇게 될 겁니다.”
“…….”
그리고 상대의 머릿속에 ‘그 높은 선이 그리 부당한 금액은 아니라는 인상’이 새겨진 듯 보이면.
“…….”
더 이상 상대를 채근하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려야 한다.
상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은옥보고에 있는 비룡포를 주마, 더불어 절강성 지부들의 유통권도 주지.”
거의 다 넘어왔군.
나는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겼다.
비룡포는 공격과 방어에 모두 용이한 훌륭한 기물이다.
하지만 당장 그걸 가진다고 해서 쓸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를 곧이곧대로 드러내선 안 된다. 어떻게든 상대에게서 우위를 점할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법.
나는 한발 물러나며 제갈소명이 ‘양보받았다’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절강성으론 어차피 왕가장과 협력 중인 저희 대천상단이 알아서 진출할 겁니다. 그에 더해 강소성의 유통권도 주십시오. 대신 물건은 무림보고에 있는 걸 받도록 하겠습니다.”
“무림보고?”
“네. 그곳에 있는 물건 중에 금강패를 받겠습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무인들은 방패의 효용성을 모른다.
방패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기도 하고.
그렇기에 금강패라는 대단한 기물이 은옥보고보다 한 단계 아래인 무림보고에 처박혀 있는 것이겠지.
갑자기 낮아진 내 요구 수준에, 제갈소명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난다.
“방패를 말이냐?”
“네.”
처음엔 금옥보고 운운했으니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방패를 어디에 쓰려고?”
지금이야 쓸모없는 물건에 가깝지만, 전쟁통에 이 금강패를 지닌 무인의 생존 기간이 가장 길었다.
나는 일부러 별것 아닌 듯 말했다.
“통짜로 된 현철덩어리 아닙니까. 녹여서 검을 만들면 몇 자루나 나오지 않겠습니까?”
“…….”
제갈소명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머리를 굴리는 게 느껴진다.
저 작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이익과 나의 이익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겠지.
자신이 이익을 얻었다 생각하면 받아들일 테고, 손해를 입는다 생각하면 다른 이유를 들며 거절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한 차례 더 쐐기를 박아줘 볼까.
“그게 싫으시면 처음 말씀드렸던 대로 ‘금옥보고’의 청룡검을 원합니다.”
상대의 결심을 돕기 위해 어깃장을 놓는 것도 훌륭한 채권자의 협상 기술이라 했다.
“…….”
아니나 다를까, 황기영의 말대로 자신이 이익을 얻었다 생각한 채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호갱님.”
아, 신나서 나도 모르게…….
“호갱? 그게 무슨 말이지?”
“아! 배포가 크고 심지가 굳은 훌륭한 분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더군요.”
“그런가?”
제갈소명은 그 명칭이 짐짓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뒷골목 사채꾼들이 쓰는 단어를 알 리가 없지.
십년감수했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