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71화 (271/357)

271. <누군가의 악의(2)>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성모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戊) 평가를 받은 그녀는 지금 실기평가에서 탈락하면 위험해진다.

“청군 백군은 그렇다 쳐도 홍군은 대체 왜…….”

홍산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던 학관생들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길목을 열어주고 있는 상황.

그 황당한 광경에 모두들 말을 잃었다.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웃음도 안 나올 정도군요.”

은호가 차가운 조소를 날렸다.

“그나마 전부 다 같이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안도를 해야 할까요?”

은호의 말대로 아직 청산과 백산엔 절반의 인원들이 남아있었다.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꼴이네.”

초반에 다른 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깃발을 빼앗을 수도 없고, 자대의 인원을 늘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전략과 전술을 평가하는 시험에서 시험의 의도를 명백하게 무시하는 행동이 자신들의 평가에도 좋지 않으리란 점은 저들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움직이다니.

악의적인 의도가 확실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렇게 음습하고 질척거리는 악의는 오랜만이네.’

목숨이 걸린 전장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의 악의는 느껴본 바가 없었다.

어쨌든 악의에 그냥 삼켜질 수는 없는 법.

나는 소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대로 기다렸다간 포위당하고 말 겁니다.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죠.”

“어떻게요?”

“저쪽의 의도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럼 철저하게 그 의도를 박살 내줘야지요.”

나는 흑룡검을 고쳐 쥐었다.

내가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태을문의 사제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백호검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정시를 함께 치른 성모란과 남궁선화는 백호검진의 좌익과 우익을 각각 맡았으며, 모용재화는 촉 대신 추가 달린 화살을 시위에 끼며 나무 위로 올라갔다.

우리 소대의 뒤로 장우재가 이끄는 인원들이 따라붙었다.

“안 싸울 거면 비켜!”

내 외침에 주춤거리며 길을 비켜서는 몇몇 소대들도 있었다.

우리가 지나간 뒤에 후미를 노리던 이들은, 곧장 돌아선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검신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특히나 철검을 사용하는 성모란이 검면으로 그들의 안면을 가격할 때마다 이빨들이 몇 개씩 튀어 나가 허공을 활강했다.

“정정당당히 붙을 거 아니면 다 꺼져! 자비란 없으니까!”

카랑카랑한 성모란의 목소리에 달려들던 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성모란과 남궁선화가 가공할 만한 신위를 선보이자 후미를 공격하는 이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막아서는 홍군은 많았다.

퍼벅!

흑룡검을 몽둥이처럼 휘둘러 턱을 때린다.

전투가 시작되자 은호가 검진 중앙에 들어서며 ‘발진’을 외쳤고, 달리던 우리들은 순식간에 백호검진을 유지하며 백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검날이 서로 맞부딪치지만 내공이 없는 공격은 날카로움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렇기에 검날의 반발력도 평소보다 더 크고 빈틈이 확연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나는 턱을 드러낸 상대의 얼굴에 흑룡검을 휘두른다.

검날로 턱을 때리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목을 베어버릴 위험성도 있지만, 정확히 때리면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퍽! 퍽!

“크억!”

“꽥!”

순식간에 두 명이 눈깔을 뒤집고 쓰러진다.

동료를 잃었다는 놀람과 분노의 감정을 담은 검들이 벼락처럼 내게 쏟아진다.

충분히 피할 여유가 있었지만 굳이 피하진 않았다.

타타타타탕!

내겐 다섯 자루의 검을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가 있으니까.

“시바! 방패 쓰는 거 반칙 아냐!”

“무인의 명예도 모르냐!”

군자산 때문에 평소보다 기량이 나오지 않는 학관생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금표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방패를 더욱 꽉 쥐며.

“그럼 니들도 쓰든가아아아아!”

악다구니 받친 기합과 함께 금강패에 막힌 검들을 통째로 밀어낸 금표.

그 틈을 타고 동룡이 파고든다.

태을문의 소천검법은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가로지르는 쾌검이다.

일직선으로 찔러내는 검법은 이런 환경에서 불리하기 그지없지만, 동룡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퍼퍼퍼퍽!

턱을 때리고 명치를 때리고 관자놀이에 검병을 꽂는다.

내공이 없어도 천살성은 천살성.

동룡은 절제된 살의에 대한 욕구를 충실하게 펼쳐 순식간에 적을 제압한다.

부지불식간에 급소를 맞고 기절하거나 속이 뒤집어졌는지 구역질을 내뱉는 백군 소대들.

“홍탄!”

은호의 외침과 함께 검진이 화살촉 모양으로 바뀐다.

동룡이 소대를 헤집는 동안 사련이 튀어 나가며 다른 소대원들을 제압한다.

쐐액-

퍼퍽!

사련의 손에 두 사람이 맥없이 쓰러진다.

폐관수련의 효과가 있었던 건지 급하게 움직였음에도 사련의 호흡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동강!”

이윽고 검진이 화살촉 모양으로 펴지며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좌익과 우익을 이끌고 앞으로 나선다.

우리 소대는 백군 소대를 감싸 안듯 둘러싼 후, 단박에 적들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군 소대 하나가 전투 불능이 되자, 홍군의 소대들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우리 소대 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

“이런 병신 같은 놈들!”

그런 소대의 뒤를 치는 이가 있었다.

“결국 홍군이 이기는 게 우리의 최종승리라는 걸 모르냐! 이 자라 대가리 같은 놈들아!”

분명 군자산을 먹은 것이 분명한데도 사자후를 발산하듯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이는…….

“오, 간자!”

“그놈의 간자, 간자 이젠 그만 좀……!”

다름 아닌 남화성이었다.

그는 우리 편에 합류하여 다른 홍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저 멍청한 놈들 대가리를 모두 깨줘라!”

“넵!!!”

어느새 중대의 규모를 이룬 남화성은 허튼짓을 하는 홍군의 뒤를 치기 시작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권각술을 사용하는 남화성은 마치 화차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퍼퍼퍼퍼퍼퍽!

순식간에 여섯 명의 학관생을 기절시킨 그는 적의 최우선 표적이 되었고, 결국 다른 홍군 소대에 포위당했다.

나는 남화성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며 우리에게 대적한 홍군 소대의 깃발을 하나하나 빼앗았다.

“헉! 어, 언제!”

“너희들, 무슨 작당을 했는지는 나중에 듣겠다.”

“자, 작당이라니……!”

“씁, 거 닥치고 진지나 지키고 있어. 만약 거길 백군과 청군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는 날엔…….”

나는 깃발을 빼앗긴 홍군 녀석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남은 학관 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해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학관생들을 뒤로하고, 나는 포위된 남화성을 도와 잔당을 처리했다.

“헉헉! 진소운! 고, 고맙…….”

“왜 이리 숨을 헐떡대. 평소에 내공 없이 수련도 안 했냐?”

잠시 감동받은 얼굴을 하던 녀석이 이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시, 시부럴. 도와주러 왔건만 그딴 소릴 들어야 하냐!”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주든가. 됐고, 깃발 내놔.”

“……시부럴.”

남화성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하는 눈치였다.

근데 뭐, 꼬우면 뭐 어쩔 건데.

“왜? 여기서 한판 뜰래?”

“…….”

“너 어차피 중대까지 만들었으니 이미 충분히 점수는 챙겼을 거 아냐.”

“……아, 알았다.”

남화성은 자기 허리춤에 꽂혀있던 열 개의 홍기를 내게 건넸다.

나는 깃발을 받아 챙기며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뭐 좀 아는 거 있냐?”

“뭘 말이냐?”

“저 새끼들이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 뭐 아는 거 없어?”

지금 상황은 절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분명 악의적인 권모술수가 있는 게…….

“그냥 다들 널 싫어해서 그런 거 아니냐?”

응?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누가? 왜? 나 같은 호인이 어디 있다고?”

“……미친 거냐?”

남화성은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마냥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탄식하듯 내뱉는다.

“나는 네가 더럽게 싫다.”

“어쨌든 내 쪽에 붙기로 했잖아?”

“그거야 네가 약속을 했으니까……!”

“그래그래. 약속은 지킨다. 아무튼 아는 게 없다는 거지?”

“그래.”

나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진짜 도움 안 되는 간자네.”

“시벌, 깃발까지 넘겼는데 간자 소리를 또 들어야 하냐!”

“됐고! 너희 중대 인원들 다 이쪽으로 돌려.”

“그럼 진지가…….”

“지금 진지가 문제냐. 다 탈락할 판이구만. 일단 백군부터 밀어낸다.”

“알았다!”

내가 싫다면서도 내 말에 토씨 하나 달지 않는 녀석.

남화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윽고 남화성의 중대가 우리 소대를 보호하듯 양옆으로 전열했다.

“돌격!”

애당초 남화성은 본인과 비슷한 성향의 인물들만 모았는지, 녀석의 명령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아니, 거부감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남화성보다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사이로.

“응?”

분명 방금까지 검진 안에 있던 야율극도 끼어 있었다.

쟨 또 언제 튀어 나간 거야.

“이 개 같은 새끼들!”

마치 불구대천 원수를 만난 듯 자비 없이 손속을 날리는 야율극.

뚜둑- 콱-

“으아악!”

내공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꼽자면, 이화접목과 사량발천근의 수법도 빼놓을 수 없다.

권각술을 사용하는 남화성의 소대 못지않게 야율극 또한 상대방의 진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뭐, 저 녀석도 쓸만한 전력인 건 확실하네.

남화성과 야율극을 필두로 우리 인원이 백군을 섬멸하는 동안.

“대체 누굴까…….”

나는 적을 상대하는 틈틈이 진영 전체를 살폈다.

아직 각 군의 서열 정리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삼군 전투가 벌어졌다.

이런 비상식적인 방향으로의 전개는 누군가의 의도 없이는 일어나기 불가능하다.

이번 평가에는 적군 본인들의 낙오도 걸려 있기 때문.

우리 소대가 조기 탈락한다 한들, 우리 중에 학관에서 퇴출될 인원은 성모란과 금표 두 사람뿐이다.

잘못된 작전으로 자신들이 조기 탈락할 경우, 시험 성적에 따라 자신들이 학관에서 퇴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평가 의도를 거슬러 우리 소대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하, 이거 열 받네?’

이런 악의적인 판을 벌인 놈을 족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때.

“헉! 헉! 대표님!”

격한 움직임에 지친 듯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장우재가 다가왔다.

“헉, 헉, 급한 상황이지만 왠지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뭐지?”

“후, 시험 시작 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나는 장우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문?”

“네. 대표님이 자신의 이익 때문에 대표단을 제대로 꾸리지 않았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대표단 운영에 관한 소문이라…….

며칠 전 집무실을 나가던 철순직의 굳은 얼굴이 떠오른다.

장우재가 전방을 경계하며 이어 보고했다.

“저희야 늘상 있었던 일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장우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다.

애당초 ‘의원회’라는 말 같지도 않은 방책을 들고 대표단에 왔던 것부터.

그리고 현재 전략 전술 평가에서 펼쳐지고 있는 비상식적인 일까지.

애당초 철순직 입장에선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자신은 손해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내민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의원회를 통해 대표단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고.

거부한다면 그걸 명분 삼아 전략 전술 평가에서 이런 악의적인 작전을 펼친다.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자신의 이익을 걸어놓는 것.

“하……!”

전생의 정마대전에서 했던 행동과 똑같은 짓을, 그는 지금 학관 내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야, 이 빌어먹을 영악한 새끼.”

“네?”

“아, 철순직 말이야.”

나는 장우재를 향해 태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애당초 놈이 짠 계략에 빠진 겁니다.”

“그럼 그자가 정말 그 말 같지 않은 소문을 이용한 겁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기에, 장우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상대는 철순직.

놈이라면 내 몇 마디 말을 자신의 입으로 옮기며 그 뱀 같은 혓바닥으로 날조와 선동을 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백산을 훑었다.

역시나.

백군의 진지 근처에 철순직과 그의 일행이 중대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략을 펼쳐 타인을 이용해 우리 소대의 힘을 빼놓는 사이.

자신은 여유롭게 부대 크기를 키워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하, 하하하!”

헛웃음이 나온다.

놈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당해버린 것이다.

상대를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당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전생처럼 무기력함과 좌절감에 휩싸이진 않는다.

대신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분노를 한순간에 폭발시킨다.

“은호!”

내 외침에 검진을 운용하던 은호가 즉각 고개를 돌렸다.

“네!”

“백산으로 가자.”

“지금 말입니까?”

나는 고요한 분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일을 꾸민 놈이 저기 있다.”

내 가리킴에 은호가 백산의 진지를 바라보고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철순직에게 한 방 먹여 주실 겁니까?”

나는 은호를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그래.”

전생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무기력하게 끌려갔지만,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전생처럼 끌려가 줄 생각 따윈 없다.

오히려 가슴속에서 흥분이 끓어오른다.

“놈은 언제든 이런 수작을 부릴 거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각인시켜 주자.”

“존명!”

이번엔 진짜 머리를 한번 깨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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