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79화 (279/357)

279. <벽을 부수는 자들(5)>

사마정은 곧장 사직서를 올렸다.

태을문의 담당 의원이라곤 하지만, 구휼을 하는 데 상관하지 않겠다 했고, 필요한 약초나 재화도 충분히 지원하겠다 약속받았다.

만초보록이라는 신기한 의학서를 제공받은 데다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던 연단도 만들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사직서가 올라간 날 이례적으로 단 하루 만에 신의각에서 사직서를 받아들였다.

한직으로 밀려나도 버티던 눈엣가시가 드디어 제 발로 나가니 신이 났다나 뭐라나.

들리는 풍문으론 그날 밤 신의각의 의원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마정은 애당초 얼마 없는 살림을 처분하고 진소운을 만났다.

“이게 뭔가?”

“한겨울에 합비에 가려면 힘들지 않습니까. 그에 관한 여비지요.”

“…….”

사마정은 진소운이 내민 전표를 뚫어지게 봤다.

이 정도 금액을 보통 ‘여비’라고 지급을 하나?

“자네는 ‘여비’에 관한 개념을 모르는 건가?”

“의원님이야말로 잘 모르시는군요. 태을문에서 의원님 오시기 전에 나름대로 필요한 것을 갖춰 놓는다 한들, 약초나 일을 도울 사람들이나 준비가 되어 있겠습니까? 당연히 대도시에서 충당할 수 있는 것들은 준비해서 가야지요.”

“……그래도, 만약 내가 이 돈을 들고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그럼 뭐 별수 있습니까. 현상 수배 때리고 없는 셈 쳐야죠.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거니까요.”

사마정은 도통 진소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막 약관에 든 이의 손에 금자 이천 냥이란 돈이 있는 것도 기이하기 그지없건만, 그 돈을 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마치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까지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진소운은 몇 수 앞을 이미 훤히 내다봤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인다.

“의원님이 그 돈을 가지고 도망쳐 봐야 구휼하는 데 쓰고, 도와주는 데 쓰고 하다가 모두 날려 먹겠죠. 그럼 그다음 구휼(救恤)은 어찌하실 겁니까?”

“차라리 태을문에 붙어 있는 게 낫다?”

“최소한 태을문이 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 의원님이 원하는 일을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

참으로 이상했다.

이 이상한 녀석의 허무맹랑한 말을, 이상하게도 믿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나도 태을문이 망하지 않도록 애를 써야겠군.”

“영단만 좋은 걸로 만들어 주시면 태을문이 쉬이 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생각 이상으로 뽑아 먹힐 것 같다는 예감도 들고.

사마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길한(?) 예감을 털어냈다.

“큼큼, 그 영단 말일세. 정심단으로 괜찮겠나? 차라리 같은 값이면 다른 영단이…….”

이미 정심단이 실패라는 걸 아는 상황에서 계속 만드는 건 시간 낭비, 돈 낭비에 불과하다.

하지만 투자자인 진소운은 단호했다.

“일단 정심단이 필요합니다. 문파의 사람들이 모두 섭취하고 나면 그다음 새로운 영단을 만들어 주십시오. 어차피 태을진경과 기운이 맞는 걸 만들려면 내공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진소운의 이야기를 듣던 사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지만 문제는 또 있네. 이전에 정심단을 만들 때 겪었던 문제인데…… 약재들을 도통 구하기가 쉽지 않아.”

너무 귀해서 가격이 비싸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찾는 사람이 많이 없는 데다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은 탓에, 약방에서 취급하지 않아 구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약을 조제할 땐 대체할 재료들이 많아 문제가 없지만, 영단을 만들자면 꼭 그 약재들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이런 건 고민도 아니라는 듯, 진소운이 가볍게 대답했다.

“합비로 가서 의원을 차리고 계시면 약재를 찾아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네.”

관록이 대단한 약초꾼들도 구하기 힘들어하는 약재를 어찌 구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마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자신 또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그럼, 우선 자네 말대로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준비를 시작하겠네.”

합비가 대도시이긴 하지만 무한에 미치진 못하는 만큼, 무한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도구들을 사서 합비의 대천상단으로 보냈다.

그렇게 합비로 갈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지금이 겨울 휴식기라는 것이었다.

표국에서 운영하는 정기 운행뿐 아니라, 겨울 휴식기에 특별 운영되는 단체여행상품까지도 모두 매진된 상태.

설마 초행길이나 다름없는데 합비에 홀로 말을 끌고 가야 하나 걱정하던 그때, 유한표국에서 연락이 왔다.

“운이 좋으시네. 마침 다섯 자리가 통째로 취소돼 버려서 말이오.”

“다섯 자리나요?”

한두 자리라면 모를까, 어떻게 다섯 자리가 통째로 빌 수 있는 걸까?

“글쎄, 뭐라더라? 자기네 대사형이 걸어서 가겠다고 했다던데……. 아무튼 되게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취소시키더이다.”

“합비까지 말입니까?”

“그렇소. 학관에 다니는 무사님들이 별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별날 필요가 있나? 싶더이다. 그것도 한겨울에 합비까지 걸어서 간다니…….”

사마정은 왠지 표사가 말하는 학관생들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마정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불길한 예감을 알 리 없는 표사가 선심 쓴다는 듯 덧붙였다.

“선생도 혹여나 그런 이들을 만나면 최대한 빨리 도망가시오. 그런 이들은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이니.”

“…….”

사마정은 품 안에 든 이천 냥짜리 전표를 겉옷 위로 만지며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찬다.

평소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 없던 걸음이 낯설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미친, 운기를 하면서 움직이라니…….’

홍사련은 평생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욕지거리를 내뱉은 적이 없었건만, 무한을 떠난 뒤론 단 하루도 빠짐없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그러기도 잠시.

“어허! 또 풀리는구나 또!”

욕할 틈도 없이, 엄혹한 호통과 함께 온몸을 옥죄는 살기가 전신의 솜털을 곤두서게 한다.

학관에서 비무를 할 때도 이런 살기를 받아보지 못했다.

아마 누군가의 부모님을 이유 없이 죽인다면 이런 살기를 받게 되지 않을까?

헌데 이상하기 그지없다.

자신은 진태산 당주께 불손하게 대한 적조차 없건만 어째서 저 미친 사형은 자신에게 이런 살기를 쏘아내는가.

“너 똑바로 안 하냐?”

“…….”

어렸을 땐, 분명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위로를 건네면 유약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억지웃음을 보여주던 사람이었는데…….

“어? 내 말 안 들려? 이것들이 빠져가지곤! 다시 실시!”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지옥에 야차가 있다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흉포해졌다.

‘하아…….’

올해 초 학관에서 만난 금·은·동 형제의 움직임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니어서,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처음으로 동공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하루 종일 조금씩이지만 내공을 모을 수 있는 운기조식이라니.

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 연습해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는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과 공포가 밀려 들어오고, 근육의 힘이 빠질 때처럼 온몸의 힘이 빠지기 십상.

이런 걸 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때.

한겨울에 비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은호가 물통을 건네온다.

“사저, 여기 물 좀 드세요.”

사련은 은호가 건넨 물통을 뚱하게 쳐다보았다.

얼마나 열심히 수련에 임했는지, 물통을 쥔 손에선 열기 때문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련은 진짜 더럽게 힘들었다. 당장 대사형의 멱살이라도 잡아 중단시키고 싶을 만큼.

하지만 차마 멈출 수가 없었다. 바로 얘네들 때문에.

“혀, 형……. 우웩.”

“후욱! 견뎌야 한다……!”

세 형제는 팔과 다리에 철로 만든 환을 차고, 가죽으로 만든 배자엔 강판을 무수히 많이 꽂아놨다.

그나마 아직은 절반이 비어 있는데, 저 염라 같은 사형은 그마저도 조만간 채울 생각인 듯했다.

“…….”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군말 없이 따르고 있는 사제들을 보고 있자니, 창피해서라도 못 하겠다는 소리가 절로 들어갔다.

사련은 뻐근한 고개를 겨우 내저었다.

“괜찮아. 지금은 물 마시는 것도 힘드니까.”

동공을 유지하면서 불필요한 움직임을 굳이 더하는 건 미친 짓이다.

지금은 최대한 움직임을 덜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래도 드세요. 그래야 버텨요.”

“응?”

은호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한다.

“어차피 수련의 강도가 줄어들 일은 없으니까요.”

저 세상 다 산 듯한 얼굴…….

문득 궁금해진다.

“사제들은 정시 때도 이 수련을 했었다고?”

“네.”

“미첬네, 미쳤어…….”

남들은 정시에 온 정신을 쏟아도 부족하다고 유난을 떠는 와중에 수련이랍시고 동공을 가르치다니.

언제부턴가 저 염라 같은 사형이 미친 게 분명한 듯하다.

아니, 확실하다. 사람이 기억력이 너무 좋으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게 틀림없다.

어렸을 때는 나쁜 기억력에 짓눌려 유약했던 거고, 지금은 그 나쁜 기억들이 저 사람을 미치게 만든 거고.

그게 아니고선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홍사련이 나름의 가설을 구축하고 있을 때 은호가 덧붙였다.

“그래도 덕분에 정시에서도 살아남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

“학관에 들어와서 알았는데. 애당초 태을문 같은…… 아, 사저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희 문파 같은 곳은 한 명의 인원을 합격시키기도 하늘의 별 따기더라고요.”

오죽하면 특별전형으로 학관에 들어오려, 별 볼 일 없는 문파에 의도적으로 입문하는 편법까지 불사하는 이들이 생겨났겠나. 계철영처럼.

“그런 문파에서 네 사람이나 정시로 들어왔으니, 힘들긴 했어도 대사형에겐 깊은 뜻이 있었다고 봐야겠죠.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

사련은 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은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본래 자신이 했어야 할 말이니까.

사련의 좌절과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사형의 고함이 사방으로 울려퍼진다.

“이은호! 다시 처음부터 갈래?”

“아! 예! 갑니다! 갑니다요! ……사저, 조금만 더 힘내세요.”

은호가 얼른 물통을 건네고 복잡한 방위를 찍으며 뛰기 시작한다.

사련이 입술을 악물었다.

은호는 천하독행신이라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신법을 익히는 와중에 자신에게 물통을 전달해 주러 왔던 것이다.

‘뒤처질 수 없어. 뒤처질 수 없는데…….’

자신이 특별전형으로 학관에 들어왔던 건 실력 때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배려.

자신이 문주의 딸이기 때문에 받은 버거운 양보.

만약 자신이 문주의 딸이 아니었더라도 이들과 똑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순간, 그 누구보다 가깝게 느껴졌던 진소운의 모습이 몹시도 희미해 보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

#

“드르렁…….”

“휘유…….”

“커컥── 컥! 커커컥───.”

“쟤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

진소운이 금표의 코골이를 보다가 모닥불에 작은 장작 하나를 던져 넣었다.

작은 불씨가 일며 잠시 불씨들이 허공을 유영하다 사라진다.

“넌 안 자냐?”

진소운이 고개를 돌린 곳에선 사련이 뚫어져라 불꽃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형.”

“그래.”

날아다니던 불씨가 사련의 소매로 툭 떨어져 그을음을 남긴다.

“왜 나한테 양보했어요?”

갑작스런 질문에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특별전형……. 왜 양보한 거예요.”

진소운의 입이 꾸욱 닫힌다.

그 침묵에 사련의 가슴이 쿵 하니 떨어진다.

이내 진실을 깨닫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내가 문주 딸이라서……. 안 그래도 되는데.”

잔인한 진실이 가슴을 난도질한다.

소매에 남은 그을음도 더더욱 짙어져만 간다.

“이렇게 뒤처질 줄 알았으면 유성이나 다른 제자를 보내는 건데. 그럼 사형제들 발목은 안 잡았을 텐데…….”

분명 학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의욕이 넘쳤다.

신검님께 벌모세수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뒤로 사형제들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흐른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여전히 자신은 사형제들의 배려를 받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제자한테 기회를 줬으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진소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련의 말을 잘라낸다.

“특별전형은 양보도 배려도 아니었다. 그 기회는 응당 얻어야 할 사람이 가져간 것이야.”

“……하지만 분명 마지막 비무 때.”

“넌 모른다!”

“……?”

진소운의 시선이 복잡한 빛으로 얽혀 들어간다. 그리움과 후회와 분노까지…….

뭔가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일을 기억하는 사람처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 복잡한 시선에 사련은 정신이 멍해진다.

“그건…… 너무도 당연히 너의 것이었다.”

“……사형?”

“후…….”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넌 수련이 시작되기 한 시진 전에 먼저 나와 수련을 하고, 수련이 끝난 뒤엔 저녁을 먹을 때까지 검을 휘둘렀지.”

“…….”

“태을문을 위해서 굳이 싫은 계철영과 혼인할 생각을 하기도 했고…….”

사련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만약…… 만약 일이 예정대로 되었다면 학관에 오는 건 계철영이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넌 훗날 하급무사로 사제들을 이끌고 무림맹에서 의무복무를 했을 것이다.”

“……사형?”

사련을 모를 것이다.

이건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점을.

이 모든 사실을 자신이 직접 겪었다는 것을.

“계철영은 제 잇속을 챙기느라 태을문의 사제들을 노예처럼 부렸을 것이고, 넌 그걸 막기 위해 계철영과 맞섰겠지.”

“…….”

“그러다 결국 파혼을 당하고, 모진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태을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겠지…….”

진소운의 입에선 연신 사련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이야기를 듣는 사련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진소운이 하는 이야기는 다 만약의 일이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모든 일을 겪어본 이처럼, 대사형의 얼굴이 분노와 슬픔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일그러졌기에.

사련은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못난 사형은.”

진소운이 피가 날 듯 입술을 짓씹는다.

“……계철영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기만 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네가 고생을 했겠지.”

“…….”

“본래 내가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탓에 종국에 넌…….”

뒷말을 삼킨 진소운이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본래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튼 특별전형은 본래 네 것이었다. 그건 양보도 배려도 아니었다.”

방금 전 그건 뭐였을까?

마치 그녀 자신은 모르는 본인의 삶을 들은 듯한 기이한 감각.

사련이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안 진소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태을진경을 되찾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태을진경이 없었다면 나는 정시를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넌 여전히 태을문의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겠지. 아니더냐?”

“…….”

“잠시 늦었다고 초조해하지 마라. 네가 얼마나 태을문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지나쳐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면, 그건 결국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게 된다.”

얼굴이 굳었던 진소운이 이내 억지 미소를 짓는다.

과거에 많이 보여주었던 선이 얇은 미소를.

“걱정하지 마라. 넌 어느 때나 훌륭하게 잘해왔다. 물론 앞으로도 잘할 것이고.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아버지께 늘상 들었던 ‘믿는다’라는 말이 어깨의 짐처럼 느껴졌던 것과는 달리, 사형의 ‘잘 알고 있다’는 말은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확인받고 싶었다.

“정말 잘할 수 있을까요?”

대사형이 그렇다고 하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니까.

“그럼! 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 자신이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진소운이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넌 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괜히 투정을 부렸지만, 사실은 안도감이 들었다.

어느새 태을문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둥이 된 대사형.

이 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정말 그런 것일…….

“일단 이것부터 차라.”

응?

쿠쿠쿵.

진소운이 별거 아니라는 듯, 사련의 앞으로 무언가를 툭 던졌다.

사련의 발치로 떨어진 것은…….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저놈들도 차고 있는 거.”

철로 만든 환과 강판이 달린 배자였다. 그것들은 제 무게를 못 이겨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잡념이 많은 걸 보니, 이제 동공에 익숙해졌나 보다. 일단 그것부터 차고 너도 슬슬 천하독행신을 익히도록 하자.”

사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방금 전까지 훈훈한 이야기를 해놓고선 갑자기 이런다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못 할래야 못 할 수가 없도록 내가 만들어 줄 터이니. 너는 그저 아무 생각 말고 수련만 해라. 아무 걱정 말고.”

“…….”

진소운의 얼굴에 어리어 있던 선이 얇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뭐 해? 안 차고?”

……어느새 그의 얼굴 위론 야차와도 같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살이 아릴 만큼 몹시도 추운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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