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80화 (280/357)

280. <탐욕자들의 밤>

다음 날부터 사련 또한 지옥 같은 행군에 합류했다.

양손과 양발에 철환을 착용하고, 배자의 맨 밑줄에 강판을 넣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한겨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땀들이 흘러내리고, 밥을 먹고 돌아서자마자 허기가 진다.

그렇게 해가 뜬 동안 수련 겸 미친 행군을 하고 나면 노숙을 준비하는 동안엔 또다시 차례로 진소운과 비무를 벌인다.

“금표 이놈아! 허리! 허리가 빈다! 방패를 쓰려면 기둥이 단단하게 받쳐줘야 한다. 넌 하체 수련부터 다시 해라!”

“쌍천검결?? 은호 이놈이 언제부터 고수 행세를 하기 시작한 거람? 그저 숫자가 많다고 다인 줄 아느냐?”

“동룡!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방비는 해야 할 거 아니냐! 아니면 차라리 공격의 틈 자체를 없애 버리든가!”

“련매! 대체 학관에 반년이나 일찍 와서 뭘 한 거냐! 똑바로 검 안 들어?”

그렇게 한 비무로 한 바퀴 돌고 나면 허기진 배가 무색하게 입맛이 뚝 떨어진다.

그런 자신들과 다르게.

“왜 안 먹냐? 육포를 잔뜩 넣어서 이렇게나 맛있는데?”

어찌나 뜨거운지 후후 입김까지 불어서 죽을 먹고 있는 대사형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체 혼자 뭘 처먹었길래 저리 강한 거람?’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이 정도까지 기량 차이가 나진 않았는데.’

‘더구나 이곳저곳 쏘다닌다고 수련할 시간도 없었잖아.’

‘힘들어…….’

살려면 먹어야지 하고 억지로 몇 술을 떠봐도 놀란 위가 들어왔던 음식들을 다시 밖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게 토악질을 하고 나면 다시는 음식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먹는 게 좋을걸? 내일을 버티려면 싫어도 쑤셔 넣는 게 좋을 거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거리며 고기 죽을 먹고 있는 대사형.

그의 말대로 전날 끼니를 채우지 못했던 후유증은 다음 날 그대로 나타났다.

“허억, 허억, 주, 죽여줘!”

“진짜로 죽여줄까?”

“……시부럴…….”

더 이상 못하겠다며 쓰러질 때면 매타작과 함께 소름 끼치는 살기가 쏟아져 나온다.

살기 때문에 놀란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면 아무리 싫어도 몸은 저절로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태을문의 제자들은 진짜 도망이라도 쳐서 산골짜기에 은거해야 하나 싶은 심정이었다.

“대사형이랑 있을 바엔 차라리 사천당가 독을 마실래…….”

“사저…… 정신줄을 놓으시면 안 됩…… 우웩.”

“어? 말을 하네? 아직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구만. 증량 실시!”

“…….”

수련도 좋고 강해지는 것도 다 좋은데, 그래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거 아닌가.

더구나 수련의 강도가 날이 갈수록 점점 세지고 있고.

참다못한 은호가 분개했다.

“대사형, 근데 왜 자꾸 산길로 가는 겁니까?”

가뜩이나 천하독행신의 삼백육십오 개에 달하는 족적을 외우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빌어 처먹을 대사형은 일행을 자꾸만 산길로 이끌고 있었다.

“신법을 관로에서만 쓸 생각이더냐? 그러려면 말을 타지 뭐 하러 신법을 익히냐?”

답변을 들은 은호는 어이가 터져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건 일단 제대로 익히고 나서 생각해야 할 문제 아닌가?

이건 숫제 이제 막 자리에서 서기 시작한 아이더러 보법을 익히라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진짜 저 인간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이어지는 대사형의 말은 더 어이가 없었다.

“뭐 하러 따로 연습해. 처음부터 산길에서 연습하면 관로에서 연습할 필요가 없는데.”

“…….”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면 말문이 막힌다던가?

극한의 효율충인 대사형의 말에 대꾸할 의지조차 상실해 버린 은호가 헛웃음을 짓는 그때.

“응?”

진소운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호가 불안하게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싸움! 싸움이 일어났나 보다!”

“네?”

놀잇감이라도 발견한 아이마냥 볼이 발그레해진 대사형.

“병장기 소리가 들려!”

……진짜 뭐지, 이 인간?

“어…… 음, 그렇습니까.”

산중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린다는 건 화적떼를 토벌하려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문파 간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일행과는 관련이 없…….

“일어나라! 가자!”

“어, 어딜요?”

“이런 산속에서의 싸움은 화적떼와의 싸움일 가능성이 클 터. 가봐야지.”

그러니까 화적떼와 싸움을 하는데 거길 왜 가는데.

“가자! 가자!!”

하지만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대사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

“내 팔자야…….”

“진짜 도망칠까?”

“차라리 독을 먹는 게 더 낫다고, 흑.”

네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진소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빨리 안 와!”

“……눼에.”

고향 가는 길은 정말 지독할 만큼 다채로웠다.

#

가을 추수가 끝나고 곡식과 재산을 축적한 농민들이 한해 농사로 겨울을 나기 시작하면 화적떼가 들끓어 그들의 주머니를 노린다.

흑도 중엔 겨울에만 한시적으로 화적떼로 분하는 이들도 즐비하고, 관청에선 이들을 막기 위해 따로 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녹림도들과 달리 수탈을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들은 무조건적인 토벌 대상이었다.

관군들이 매해 토벌하려 애쓰지만 한계가 있고, 개중에는 부패한 관리와 결착해 존속하는 화적떼들도 즐비하기에 선행(善行)을 실행하는 무문들이 종종 화적떼를 토벌하기도 한다.

“아미타불…….”

작금 백여 명에 달하는 화적떼에 대항하고 있는 다섯 명의 승려처럼.

황포 자락을 걸치고 반장을 행하고 있던 일각이 부드럽게 손을 내뻗는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진 황금빛 광채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이십에 달하는 화적떼를 일거에 감싼다.

“어엇?”

“이게 무슨!”

“끄억! 나갈 수가, 나갈 수가 없어……!”

동아줄에 묶이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하지 못하던 화적떼들의 몸이 동시에 떠오르며 이 장 가까이 날아간다.

쿵.

갑자기 바닥으로 나뒹굴며 병장기를 놓친 이들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분명 무지막지하고 대단한 기운이 그들을 감쌌건만, 정작 그 기운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자의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었기에 무기를 놓쳤을 뿐.

이는 상대가 공격에 살기를 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꿀꺽.

달리 말하면 만약 살기를 담았다면 이 자리에 멀쩡하게 서 있을 사람은 없다는 뜻.

“무의미한 살생은 원치 않습니다. 그만 무기를 버리시지요.”

일각의 말에 그의 한 초식을 받아내었던 화적떼들은 마혈이라도 짚힌 듯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료의 모습을 보고, 그걸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을 줄 아는 자였다면 화적으로 분할 일도 없었을 터.

일각의 한 수에 담긴 진의를 알지 못한 다른 화적떼들이 겁도 없이 소림의 승려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빌어먹을 땡중들아!”

“극락왕생시켜 주마!”

“멍청아, 상대는 겨우 다섯이다! 뭘 쫄고 있어!”

수적 우세를 믿었던 화적들이 동시에 달려든다.

일각은 반개한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말했다.

“과한 손은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국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넷!”

일각의 뒤에 섰던 네 명의 인원들이 동시에 움직인다.

어떤 이는 권각을, 어떤 이는 장법을, 또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주워 봉법을 쓰고, 남은 한 사람은 조법으로 화적떼를 상대한다.

물 흐르듯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화적떼들이 자연스레 툭툭 쓰러진다.

그 광경이 마치 소림의 승려들은 무학 시범을 보이고, 화적떼들은 그에 맞춰 연기를 하듯 쓰러져 주는 것 같다.

물론 봉우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태을문의 제자들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수준이 다르다는 걸 이걸 이야기 하는 건가.”

이는 어디까지나 소림의 저력.

실전에서 쓰는 무공이 훈련 시 발하는 무공과 다르지 않은 수준에까지 올랐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초식을 수련함에 있어 그 원리가 실전에 적용하기엔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는 모든 무인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문파의 무공은 실전을 지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문파는 아예 실전 무학을 따로 만들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보면 소림의 무학은 실전에 그대로 활용하기엔 굉장한 괴리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소림의 제자들이 그 괴리를 충분히 메꾸어 낼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각…….”

그중 단연 뛰어난 존재를 꼽자면 일각이다.

그는 가장 단순한 동작들로만 화적떼를 제압한다.

그가 손과 발을 떨어낼 때마다 화적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데, 그가 당초 얘기한 것처럼 과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자신들이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태을문 제자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질문.

정답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불가능하다.’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상처 없이 제압하는 쪽이 몇 배는 더 힘들다.

더구나 상대는 필살(必殺)의 의지로 공격해 오는 상황.

갓난아기와 어른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

헌데 일각은 너무도 태평하게 그를 행하고 있었다.

평소 진소운에게 구박만 당하고 놀림을 당하느라 그의 진가에 대해서 잠시 잊고 있었건만, 새삼 그의 신위를 보자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태을문의 제자들이 넋을 놓고 있는 그때.

“빌어먹을…….”

짓씹듯 으르렁거리는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은호가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선 진소운이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사형도 질투심을 느끼는가?’

간만에 느껴보는 대사형의 인간적인 면모.

그는 한 차례 일각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다.

그때의 충격은 대단했다.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고, 일대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때의 승부는 벌써 잊어버린 듯 일각과의 수준 차이에 아득함을 느끼고 있는 대사형을 보고 있자니 괜히 콧등이 시큰…….

“저 땡중놈 선수를 치다니! 아니, 하남으로 가야 할 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응? 내가 뭘 잘못 들었…….

“아이 씨, 저 빌어먹을 땡중들은 화적놈들을 다 관군에 넘길 텐데…… 그럼 재물은…… 으아악! 아까워 뒈지겠네, 씨바.”

아, 상대의 수준에 분함을 느끼는 게 아니었어?

은호의 얼굴이 어쩐지 무채색으로 변했다.

한참을 욕지거리를 내뱉던 진소운이 고개를 돌린다.

“응? 왜 그런 눈으로 보냐?”

“뭐가 말입니까?”

“영혼이 없는 듯한 눈빛인데?”

“그럴 리가요…….”

애초에 자신의 눈에 영혼이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대사형은 다시 몸을 홱 돌린다.

“아이고, 배야.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저 재물들이 전부…….”

그래…… 이런 인간이었지…….

“근데…….”

“응?”

문득 든 의문을 내뱉으려던 은호는 다시금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닙니다.”

“싱겁긴. 그나저나 저게 다 얼마야…….”

은호는 방금 든 의문을 속으로 대신 삼켰다.

‘대사형이 화적떼를 털면 그건 그거대로 동종업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어쨌거나 그도 엄연히 흑룡채라는 건실한 산채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 학관 대표보다 흑룡채 채주 자리가 더 잘 어울리기도 하…….

“으아악! 저 땡중놈 내가 학기만 시작되면 두피에 구멍 열두 개는 더 내줄 거다, 두고 봐라.”

“…….”

물론 본인은 소름 끼치게 그 사실을 싫어하지만.

#

일각을 비롯한 소림사의 승려들이 화적떼를 제압하고, 태을문의 제자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그 와중에 진소운이 재물을 관청에 보낼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게 어떻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일각이 가볍게 묵살했고.

이 때문에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이내 잘 마무리되었다.

“그럼 다음 학기 때 뵙지요, 진 시주. 나무아미타…….”

“하여간 지들만 깨끗해요 아주.”

“대사형…….”

계도행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소림사의 제자들과 어찌저찌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밤이 늦도록 잠드는 태을문의 제자들은 없었다.

“…….”

“…….”

“…….”

이들은 본디 무인.

한낮에 본 소림사의 잔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제들이 고뇌에 쌓인 이런 때면 의례 조언을 해주어야 할 이는…….

“쩝쩝! 왜들 시원찮게 먹냐?”

화적떼의 창고에서 재물 대신 가져온 고기로 그 어느 때보다 맛있는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사련이었다.

“사형은 놀랍지 않으세요?”

“뭐가?”

“소림의 저력이.”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쪽쪽 빨아 먹던 진소운이 피식 웃음을 내비친다.

“난 또 뭐라고. 그게 왜 놀랍냐.”

“……그냥, 소림은 소림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뭐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기품이 그들의 세월이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단지 수련의 정도에서 오는 차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무공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

수백 년간 대를 이어 내려오며 발전시키고 변화시켜 궁극에 이르른 무공.

적이 아닌 줄은 알면서도 무인이기에 본능적으로 가늠해 본다.

소림이 적이라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사련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다.

“태을문의 무공으로 소림을 이길 수 있을까요?”

“쩝쩝. 이미 이기는 걸 보여주지 않았냐?”

입 안에 있는 음식은 다 삼키고 대답하…….

“엥? 못 봤어? 나 되게 대단했는데.”

“…….”

하여튼 지난 실기 시험 때 일각을 꺾은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근데 그건 태을문의 무공이 아니었잖아요…….”

“뭔 소리야.”

“저희도 알아요. 삼청문 북원평 대협께 따로 사사했다는 걸…….”

시무룩한 사련을 쳐다보던 진소운은 나뭇조각 하나를 꺾어 이쑤시개를 만들어 이빨을 쑤셨다.

“얘네들이 대체 뭔 소릴 하는지. 애당초 형(形)과 식(式)만 배운 거지. 기운 자체는 내 꺼였어, 이것들아.”

“네?!”

“그게 무슨!”

사제들의 반응에 진소운이 코웃음을 쳤다.

“설마 여태껏 그 걱정을 하느라 밥도 안 먹었던 거냐?”

“그것도 그건데…….”

사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새삼 한계를 느껴요. 소림엔 칠십이종절예를 비롯해 수백 가지의 무공이 있다죠? 화산과 무당에도 최소 백 개가 넘는 무공이 있고요. 그런 반면에 태을문은…….”

태을진경과 함께 대천검법과 소천·대천 무공을 합친 쌍천검결. 거기에 만화무적권과 상승 무공인 만해천지검결이 돌아왔지만, 종류로 따지면 한참 부족하다.

일례로 방패를 든 금표는 더 이상 만해천지검결을 자유롭게 펼칠 수 없었고, 동룡은 적을 상대할 때 주로 소천검법만 사용해 왔다.

무공의 절대적인 수가 무문의 절대적인 무력과 비례하진 않지만, 무공의 한계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날개를 펼치는 데 제한을 두게 만든다.

“…….”

금표도 은호도 동룡도, 사련의 말에 동의하는지 침울한 기색.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비하면야 복에 겨운 소리지만, 남들 못지않게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아이들의 마음엔 역시나 갈증이 가득했다.

그런데…….

“니들 뭔 소리 하냐?”

황당하다는 반응의 대사형.

-복에 겨워 감사할 줄 모른다.

-옛날 생각을 해봐라.

등의 뻔한 소릴 할 줄 알았건만…….

“제 손에 든 금전을 몰라보고 은전만 찾는다더니…… 네놈들이 딱 그 짝이구나.”

“……네?”

네 사람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분명 금전이라 함은 태을문의 무공을 말하고 은전이라 함은 소림의 무공을 말하는 것일 텐데…….

아무리 자파 무공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해도 소림과의 비교는 너무 한 거 아닌가?

사제들의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쯧쯧 멍청한지고, 어쩜 이리 멍청한지고…… 아이고 태을검제님! 사조님의 후손들이 이리 멍청합니다…… 아, 물론 저는 빼고.”

진소운이 통탄스럽다는 건지 목이 막힌다는 건지 제 가슴을 퉁퉁 두들기고 있을 때.

은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대사형…… 혹시 조금만 설명을 더…….”

거 같이 좀 압시다.

아니, 저렇게 답답해하는 거 보면 진짜 뭐 있는 거 같잖아.

“쯔쯧. 태을진경이 왜 태을진경이냐?”

“그거야…… 이름이…….”

“그러니까. 사조께서 왜 태을신공이 아니라 어찌하여 태을진경이라 명명하신 거냔 말이다.”

“…….”

“아이고, 태을검제님.”

다시 곡소리를 내던 진소운의 눈빛이 일변한다.

“태을이란 천지 만물이 나고 이루어진 그 근원을 이야기한다. 태을진경이란 애당초 삼라만상에 대한 공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네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꿈뻑거리자 진소운이 덧붙인다.

“이상하지 않더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태을검제님의 신위에 비해 태을진경의 파괴력은 터무니없이 약한 것이 말이다.”

이상하긴 하다.

분명 정순하고 안정적인 기운이긴 하지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비하면 내공이 모이는 속도도 느리고 내공의 특색이 강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소문이 구전되면서 허가 끼었다기엔 또 너무 차이가 나니까.

그때, 진소운이 실마리를 툭 던져주었다.

“태을진경은 애당초 심법이 아니다. 태을에 관한 공부일 뿐이지.”

“그럼…… 저희가 익힌 건.”

진지했던 진소운의 목소리가 다시금 곡소리로 바뀐다.

“아이고오, 수박의 겉만 열심히 핥으며 맛을 모르겠다고 하는 바보들이 내 사제라니.”

아니, 그러니까 좀 명확히 알려 달라니까.

“태을진경의 공부엔 애당초 형(形)과 식(式)이 없다. 태을검제께서 남기신 무공들은 그저 태을진경의 공부와 가장 비슷한 것들뿐.”

“……세상에 형과 식이 없는 무공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문파의 무공엔 그에 기반한 내공심법이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졌을 때, 막강한 힘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하더냐. 형과 식이 없이도 이 정도의 도(道)를 쌓을 수 있다니. 애당초 형과 식이 없는 것은 너희들에게 축복이다.”

진소운이 열변을 토했지만, 네 사람은 도통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잘 봐라. 최근에 내가 쌓은 공부다.”

그렇게 말한 진소운이 잠시 눈을 감았다.

얘기하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인가 하고 진소운을 깨우려는 찰나.

“……!”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예기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허헉!”

“헙!”

“이게 무슨!”

네 사람의 눈앞엔 진소운의 검과 똑같이 생긴 흑룡검이 네 사람의 명줄을 노리고 있었다.

분명 대사형은 검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검을 뽑은 것이고, 이 검은 어찌 주인도 없이 홀로 허공에 떠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어?”

흑룡검이 파스스하며 먼지로 사라졌다.

이어 진소운에게서 앓는 소리가 난다.

“끄응…… 역시나 아직 멀었군.”

번개처럼 고개를 돌린 네 사람은 당장 대사형의 옆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흑룡검부터 살폈다.

분명 흑룡검은 검집에 가만히 꽂혀 있었다.

경악한 은호가 급히 외쳤다.

“방금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듣도 보도 못한 공부.

진소운이 심검이나 이기어검의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니건만,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내 나름의 태을진경의 공부인 것이지.”

“나름의 공부요?”

진소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내가 생각하는 ‘나’의 형태이다.”

“…….”

“검문의 제자인 내가 직접 금표에게 방패를 쥐여주고, 동룡이 중도를 씀에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러곤 사제들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저마다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네 사람은 단 한 순간도 대사형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 모습이 기꺼운 듯, 진소운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태을문의 도의가 무엇이냐. 변화(變化)다. 그리고 태을진경은 그런 ‘너희’를 변화시켜 줄 공부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變化)할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 맞추어 똑같이 사제들을 키운다면 어느 정도 고수의 반열에 들 것이다.

그리고 많은 준비를 통해 마교의 손에서 살아남도록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결국 태을검제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태을문이라는 이름을 연명하는 데 그칠 뿐.

그러니 저마다의 ‘태을’을 구축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런 혹한기 수련도 하는 것이고.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사제들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저희가 스스로 말입니까?”

“그래. 내가 너희를 억지로 이끌고 수련시키는 것은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가 나아가고자 한다면 스스로 변화(變化)해야 한다. 그리고 태을진경은 너희의 변화에 충분히 발맞춰 줄 공부다. 이는 내가 도울 수도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기에 사조의 뜻대로 이어간다.

조금 더 오래 걸려도, 조금 더 지지부진하여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옳은 길이라 믿으며.

“……그러니까 저희가 원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면 그 길이 나타날 거란 말입니까?”

“그래.”

“하아…….”

은호는 새삼 태을진경이 대단한 공부라 느껴짐과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대사형은 언제부터 그 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까?”

진소운은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정시 때를 제외하곤 대사형은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하라.’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앞서가며 가끔씩 뒤를 돌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쫓아가는 것이 버거워 자신들이 자책만 하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나날에도, 대사형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들이 쫓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답답함을 이겨내며 기다린 것이다.

“사형…….”

“대사형…….”

네 사람의 눈동자에 그렁그렁하니 물기가 어린다.

“죄송해요. 깊은 뜻도 모르고.”

“다시는 수련이 힘들다며 불평불만 하지 않겠습니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을게요.”

“강판 한 줄 더 추가하겠습니다. 더 굴려주세요.”

진소운은 피식 웃으며 다 익은 고기를 내밀었다.

“알았으니, 얼른 먹기나 해라. 먹어야 내일의 수련을 또 하지.”

“네.”

“넵!”

“먹기 싫어도 먹을게요!”

네 사제는 꿈에도 모를 터다.

이 화려한 언변(?)은 전생에서 소정대 놈들에게 배워왔단 것을.

‘후후……. 역시 어린놈들은 다루기가 쉽군 쉬워.’

대사형의 시커먼(?) 속내를 알 리 없는 네 사람이 다시금 게걸스레 고기를 먹기 시작할 때쯤.

진소운이 은근하게 말했다.

“……그런데 도망갈 생각을 했다고?”

“…….”

“…….”

“…….”

“…….”

네 사람이 동작이 우뚝 멈췄다.

입안에 음식이 잔뜩 들었지만, 군침 넘어가는 느낌이 커다랗게 느껴진다.

순간 잊고 있었다. 자신의 대사형이 얼마나 지독한지.

“대사형인 내가 이리 고생하는 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그리고 얼마나 쪼잔한 인간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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