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83화 (283/357)

283. <탐욕자들의 밤(4)>

개방 서안지부 삼(三)분타.

청명교 아래에 지어진 소굴 내부를 둘러보던 진소운이 작게 감탄했다.

“거지 새끼들이 왜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잘사는 거야?”

삼철은 부르르 떨며 분노를 꾸욱 참아냈다.

애당초 명분만 있었어도 이리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저 옆에 무릎 꿇고 앉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오삼 새끼만 아니었어도 진소운을 당장에 곤죽 내 버렸을 것이다.

“어이, 손님이 왔는데 뭐 없나?”

……참자, 참아.

개방에 정보를 사러 오는 이들 중에 맨손으로 오는 이들은 없다.

그들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고객이지만, 정보상인 개방은 거지.

대부분 손님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과 거지들에게 대접할 거리를 미리 준비해 왔기에, 개방도 입장에선 따로 손님 맞이용 차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깔이 너무도 매서웠기에 뭐라도 내놔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크흠, 물이라도 드리오?”

삼철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님맞이를 해보지만, 진소운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효, 내가 거지들에게 뭘 바라냐. 얼른 물건이나 가져와.”

아니, 거지인 거 알면서 애당초 왜 물어본 건데……!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던 삼철은 다른 거지에게 신호를 주었고, 이어 거지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삼철은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진소운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것이오.”

진소운이 상자에 손을 대려는 순간.

삼철이 탁하고 상자의 문을 닫았다.

“……뭐야?”

진소운의 눈초리가 금세 날카로워진다.

삼철도 지지 않고 진소운을 쏘아보는 와중에.

‘……지리겠네.’

옆에 무릎 꿇고 앉은 오삼만 두 사람의 격기에 죽을 맛이었다.

“진 소협, 잘 생각하시오. 이걸 가져가면 더 이상 개방과의 협력은 물 건너가는 것이오.”

“……뭔 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물론 우리가 잘못한 부분이 있소. 하지만 서로 간의 오해에서 비롯한 바. 배려가 없다면 앞으로의 협력 또한 힘들 것이란 말이오.”

“거지새끼가 어려운 말 쓰고 있어. 쉽게 말해.”

진소운의 비아냥에 삼철의 이마 위로 잠시 핏대가 섰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일이 이렇게 끝난다 한들, 개방엔 보는 눈이 많기에 이번 일을 꼭 기억할 것이라는 말이외다.”

잘못은 이쪽이 저질렀어도, 아니 오히려 잘못을 저질렀기에 더욱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매번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대가를 치를 순 없는 노릇이니까.

기세에서 밀려선 안 되는 것.

그러나 진소운은 코웃음을 칠 뿐이다.

“협박하는 건가?”

“다시금 생각해 보라는 것이오. 서로에게 좋은 방향을.”

저놈이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여기서 밀려선 안 된다.

아니, 미친놈이기에 나중에 뭘 요구할지 모르니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져선 절대 안 된다……!

삼철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소운이 툴툴거렸다.

“하여간에 뻔뻔한 새끼들이네. 잘못은 지들이 저질러 놓고 상대를 협박하다니.”

“강호의 법칙이란 게 원래 그러하지 않소.”

강자는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다.

언제나 손해를 감수하는 쪽은 약자.

그렇기에 모든 문파들이 사활을 걸고 강자가 되길 선망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삼철은 태을문과 개방 중에 강자를 손꼽자면 개방이란 점을 짚어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그래도 조금은 상식이 통하는가 보군.

삼철은 내심 안도했다.

“어떻게 하시겠소? 정말 받으시겠소?”

지금의 진소운에겐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만, 향후에라도 태을문이 개방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여기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터.

구파와 오대세가도 항시 개방을 앞에 두고 한 걸음 물러나 준다.

그러는 편이 향후 자신들의 사문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하지만.

“잘 알겠으니까…….”

“……?”

진소운의 얼굴 위로 띠껍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손 치워, 이제 이건 내꺼니까.”

“…….”

삼철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장보도 한 장에 사문의 미래를 건다고?’

물론 대단한 장보도라면 그럴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방이 만든 지도에 지나지 않는다.

영약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없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것인데.

‘무엇보다 애당초 천동굴에 들어갈 수조차 없을 텐데.’

겨우 그런 종이 쪼가리에 사문의 미래를 걸다니.

흑염룡이 미친놈이란 소문을 많이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앞뒤 없는 미친놈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삼철이 경악한 사이, 진소운이 상자를 툭툭 쳤다.

“정보단체란 건 말이야.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먼 미래와 가능성을 보고 상대의 세가 작을 때 투자를 할 수 있는 능력. 자존심보다 실리를 추구하고 이미 완성된 권력보다 새로이 탄생할 권력에 집중을 하는 게 정보단체의 본질이지.”

그의 손안에서 작은 상자가 끼익거렸다.

“이미 고일 대로 고여서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한 놈들은 정보단체로서의 본질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

이내 진소운은 지도를 움켜쥐어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따위 본질을 잃은 정보단체. 내 쪽에서 되려 필요 없고.”

“…….”

텅 비어버린 상자.

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삼철은 진소운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작금 개방의 잘못된 점들을 낱낱이 꿰뚫고 있었으니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 앞뒤 없는 미친놈?

‘잘못 생각했다!’

흑염룡은 지 꼴리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이가 아니다.

그가 툭툭 내뱉는 말들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어려있다.

시비를 붙인 건 오삼이었지만 싸움을 키운 건 진소운이다.

자신과 본격적으로 대립을 하려 했던 것에도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놈이…….’

진소운은 삼철에겐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삼을 발로 툭툭 찼다.

“어이 너…….”

“네.”

그러곤 뚫어지게 오삼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얼이 빠져있던 삼철은 저도 모르게 진소운의 말에 집중했다.

도대체 무슨 심도 깊은 질문을 하…….

“이름이 오삼이면, 다섯 번째로 태어난 거냐, 세 번째로 태어난 거냐?”

응?

갑자기 무슨 소리…….

“안 들리냐?”

“……네?”

“다섯 번째냐고 세 번째냐고.”

“세, 세 번째입니다. 오자는 밝을 오자를 씁니다.”

“쯧, 왜 이름을 헷갈리게 지어서는.”

뻑.

오삼의 대가리를 한 대 때리고는 소굴을 나가는 진소운.

이게 뭔…….

삼철은 황당함에 쌜쭉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잘못 봤나?

그냥 미친놈이 맞았던 건가……?

본래도 진소운을 잘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삼철이었다.

#

“사형, 괜찮은 거예요?”

소굴에서 내내 입을 꾸욱 다물고 있던 사련의 염려에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개방이요. 이렇게 쉬이 적대해도 되는 곳이 아니잖아요.”

개방의 힘은 수많은 눈과 귀, 입에 있다.

그들의 입을 타면 협객도 살인귀가 되고, 그들의 눈과 귀 없인 강호의 복잡한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다.

구파와 오대세가 모두와 척을 지더라도 개방과는 척을 지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개방의 고압적인 권위 앞에 태을문의 이름이 굴복하지 않은 것은 내심 기분이 좋았으나, 뒷일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더구나 태을문은 대천상단을 키우면서 주변 성으로 확장을 이어나가고 있다.

차후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대사형은…….

사련은 입이 바짝바짝 말라들어갔다.

“강호의 일을 도모할 때 개방은 필수라고 들었어요. 큰 문제부터 사소한 문제까지 그들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태을문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아니, 태을문뿐만 아니라 진소운 또한 올라야 할 산이 높다.

진소운이 높이 날아오르는 데 태을문의 도움보다는 개방의 도움이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진소운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다.

“걱정하지 마. 그깟 거지들 없어도 태을문이 나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사련이 은호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영민한 은호라면 개방의 중요성을 잘 알지 않겠는가?

“은호야.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걱정 마세요.”

“응?”

은호는 어느새 거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진소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사형이 미친 사람이긴 한데, 준비도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거든요.”

태을문에서 가장 영민하다는 은호마저도 느긋한 태도를 보이자, 사련은 의문이 점점 커지지만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오, 나 저것도 먹어보고 싶은데!”

“…….”

……대사형을 걱정해 주면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고.

“일단 숙소부터 구해봐요, 대사형.”

서안의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객잔에 들어갔다가 자리가 없어 그냥 나오는 사람들에 더해, 당장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그 동네 거지들의 정보다.

거지들은 실시간으로 자리가 가득 찬 객잔과 여곽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걸로 돈을 버니까.

하지만 소굴에서의 일이 벌써 소문이 났는지, 호객행위를 하던 거지들도 진소운 일행의 주변으론 다가오지 않은 채 그들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사련은 다시금 걱정이 차올랐다.

“후…… 이런 걸 걱정한 건데.”

하지만 진소운은 물론이고 금·은·동 형제들 모두 느긋하기 그지없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나오려는 그때.

“사저.”

은호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두들겼다.

“한번 보세요.”

“뭘?”

이윽고 은호가 눈짓으로 진소운을 가리킨다.

진소운은 그사이 품안에서 손가락 두 개만 한 흑패를 꺼내어 검봉에 달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례합니다.”

웬 점소이가 진소운 일행에게 다가왔다.

“진소운 대협 맞으시지요?”

“그래.”

“숙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별말씀을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사련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안은 본래 자주 왕래하던 곳도 아닌데, 기다렸다는 듯이 점소이가 나타나 안내를 하다니.

게다가 점소이가 안내한 곳은 객잔 중에서도 꽤나 커다란 크기의 객잔이었다.

인기가 있는 곳인지 객잔 내부엔 이미 인파가 가득 차서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상태.

“이쪽입니다.”

하지만 점소이는 객잔을 지나쳐 일행을 뒤쪽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엔 작은 연못이 딸린 별채가 있었다.

“식사를 먼저 준비해 드릴까요? 목욕물을 먼저 준비해 드릴까요?”

“다들 시장한 것 같으니 밥을 먼저 준비해 주련?”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허리가 구부러질 듯 인사를 하고 나간다.

현 상황에 사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안이 벙벙한 그녀와 달리, 은호가 흐뭇하게 웃었다.

“대사형은 하오문이랑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거든요.”

“밀접한 관계?”

“네. ‘식객’으로요.”

사련이 입이 쩍 벌어졌다.

하오문의 ‘식객’이라니.

아니, 애초에 그게 실제하는 거였나…….

그리고 그 자격을 대사형이 가지고 있다고?

‘대체 뭐 하는 인간이람?’

사련이 정체불명의 대사형에 대해 곱씹고 있는 동안 신이 난 은호가 진소운에게 다가갔다.

“대사형, 작은 숙소를 얻어도 되는데 굳이 별채를 얻은 건 그래도 휴가 기분을 만끽하라는 깊은 뜻이겠지요?”

“응?”

진소운이 봇짐에서 짐을 꺼내다 말고 은호를 바라봤다.

“뭔 소리 하는 거냐?”

“네? 그럼 굳이 별채는 왜 오신 건…….”

“읏챠!”

진소운이 대답하기에 앞서 봇짐에서 철환을 꺼내 들었다.

아니, 그걸 여기서 또 왜 꺼내……?

“객방에서 수련을 하면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니까.”

“…….”

“별채라면 무슨 소리가 나도 별 문제가 없지.”

분명 서안까지 가는 동안만 수련을 할 거라면서!

또 속인 거냐!

불만이 활화산처럼 치솟아 올랐지만, 혹여나 철환이 더 많이 추가될까 입을 꾸욱 다무는 네 사람이었다.

#

더 이상 꼼짝도 못 하겠다며 발라당 뒤로 누워버린 못난 사제들을 뒤로하고 서안 거리로 나오니 해가 진 시각임에도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이 모여있군.’

전생에 무림맹 서안 지부의 보고서에 쓰여있던 것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인 듯했다.

하기사 애당초 보고서에 쓸모없는 기록은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

육십 년 주기로 서안에서 네 번째 나타난 오령선화유의 냄새를 맡고 모여든 이들.

네 번째 나타날 오령선화유를 차지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로 인해 서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지만.

‘유달리 많군.’

특히나 겨울에 보이지 말아야 할 종남파의 제자들의 숫자가 많았다.

종남파의 제자들은 각기 속가무문으로 보이는 이들을 이끌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마치 섬서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려는 듯.

그때.

“뭐라고?! 지금 뭐라 했느냐?”

갑자기 거리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던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고, 더러는 싸움이 났나? 하는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리 밤새 제자들을 순찰시키는 것은 무의미한 체력 소모라 생각됩니다. 차라리 조금 쉬었다가 천동굴 인근에서…….”

짝-

매서운 소리와 함께 이의를 제기하던 이의 고개가 돌아간다.

“건방진 놈.”

분명 때린 이와 맞은 이가 서로 다른 무복을 입고 있건만, 맞은 이는 당연히 해야 할 저항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견적이 딱 나온다.

“어디 속가 따위가 건방지게 입을 놀리느냐!”

“…….”

“너희는 그저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다! 같잖은 머리 굴리지 말고!”

쯧, 그럼 그렇지. 하여간 급 나누는 데 도가 텄네 텄어.

뺨을 날린 노인은 훽 하니 몸을 돌려 걸었고, 일행들은 잠시 맞은 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노인을 따라갔다.

그런데.

‘왜 낯이 익지?’

맞은 이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마주쳤다.

“음?”

그는 다름 아닌 철순직이었다.

“쩝.”

나는 아는 척을 하려다 서둘러 손을 내렸다.

죽현방에 대한 종남의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던 나로선 놀랍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최소 내가 아는 철순직은 그런 대우를 온전히 받아들일 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하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제 사문을 그 무엇보다 아끼는 철순직이기에 그런 처지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나는 최대한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다시금 거리를 걸었다.

천동굴 내부에서 조심해야 하는 이들을 눈에 익히고 면면을 머릿속에 기록하고 있을 때쯤.

“응?”

아까 지나쳤던 철순직이 어느새 다시 내 눈앞에 서 있었다.

“…….”

종전의 일도 그렇고 그닥 서로 푸닥거리 할 기분이 아니기에 그냥 지나치려는 찰나.

철순직이 나직히 물었다.

“진 대표.”

“이제 다시 ‘진 대표’라 부르기로 했나?”

짐짓 아무 일 없는 듯 처음 본 척해 보았지만.

“……방금 보았지요?”

쩝. 그걸 물어보자고 여기까지 온 건가?

나는 최대한 담담히 답했다.

“못 봤어.”

“……무얼 봤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하씨, 괜히 그런 장면을 봐서는.

“봤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나?”

철순직의 현재는 내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 불편함이 아까의 자리를 피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지금 철순직의 모습은 내 과거를 불러 일으킨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그의 주먹 쥔 양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비단 찬바람 때문만은 아니겠지.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아니면 우스워 보입니까?”

시린 겨울 날씨에 그가 말을 할 때마다 허연 김이 뿜어져 나오고.

그보다 더욱 시린 철순직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어 보였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

“…….”

그가 어떤 마음으로 버텨낸 것인지 알기에, 그가 어떤 마음가짐일지 잘 알기에.

나는 그 심경을 이해하며 말했다.

“그냥 돌부리에 잠깐 걸려 넘어질 뻔한 사람처럼 보이네.”

철순직의 눈빛이 한순간 크게 흔들린다.

“진 대표, 당신은 진정…….”

한참 주저하던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령선화유를 찾으러 왔습니까?”

합비의 사는 내가 다른 이유로 서안에 왔다 이야기 하는 것도 웃겼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면 서안에 왜 왔겠어.”

“그렇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

철순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령선화유는 이미 주인이 정해진 물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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