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탐욕자들의 밤(5)>
아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일 갑자 만에 나타나는 오령선화유에 주인이 정해져 있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또 무슨 시비를 거는 건가 싶어 철순직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은 평소 득의양양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습.
왠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철순직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내게 되물었다.
“혹시 천동굴의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
나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지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걸 사다니.”
마치 약장수에게 속아 불로초를 산 사람을 보는 듯한 불쾌한 눈초리.
“진 대표가 이리 순진한 사람인 줄은 몰랐군요.”
하, 새끼 말 돌리는 것 좀 보소?
“지도가 금전 이십 냥이나 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산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잠자코 듣던 철순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여튼 그건 됐고.
“계속 말 돌릴 건가?”
내 서슬 퍼런 눈빛에 철순직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종남이 화산과 합의를 했습니다. 오령선화유를 종남이 가지는 걸로.”
이게 무슨 소리래.
누구 맘대로?
“벌써 오령선화유를 찾은 건가?”
“아직은 아닙니다. 천동굴 어디에서 오령선화유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대신 화산의 허락을 득한 종남은 다른 이들을 배제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
오령선화유는 대지의 기운이 일정량 모이면 한순간 뿜어져 나오는 영약이다.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있어도 어디서 나올지는 모른다.
천동굴 내에서 오령선화유를 찾는 행위 자체가 경쟁을 초래한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다른 이들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은…….
“종남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뜻인가?”
결국 애초부터 다른 이들을 경쟁에 뛰어들 수 없게 막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 예측이 맞았는지 철순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은 본산의 제자와 속가들을 동원해 다른 이들이 천동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개방은 지도를 팔고 있는데?”
“그 또한 개방과 종남이 합의한 일입니다. 개방은 종남에게 천동굴의 상세 지도를 넘겼고, 그 대신 미완의 지도를 사람들에게 팔아먹고 이득을 취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
애초부터 짜고치는 판이었다는 거지?
그럼…….
“진 대표가 개방과 시비가 붙은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개방은 만약의 경우 종남이 오령선화유를 확보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낯선 이들의 인명록을 작성 중이지요. 그로 인해 시비가 붙은 겁니다.”
이제야 아귀가 맞아들어간다.
서안지부의 보고서와 강호영약서에는 그저 종남이 오령선화유를 확보했다는 이야기만 나와있다.
전생에서 자료들을 처음 봤을 때엔 화산을 비롯한 경쟁자들이 많았음에도 종남이 오령선화유를 확보한 것에 대해, 그저 ‘역시나 구파의 저력인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애당초 경쟁을 막고 저들끼리 담합을 한 것이었단 말인가?’
더구나 개방은 사람들의 욕망을 가지고 장난질까지 치고 있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금전 이십 냥이면 평범한 사람이 평생 모아야 할 만큼 큰돈이다.
이건 엄연히 사기였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가지고 논다고……?”
내 읇조림에 철순직의 얼굴에도 씁쓸함이 감돌았다.
“죽현방 또한 이미 천동굴 일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진 대표 역시 천동굴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만약 억지로 들어가려 했다간…….”
“종남과 그의 속가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철순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종남에선 북두검수들도 동원했습니다.”
“미친…….”
북두검수는 종남의 최후 공격대다.
종남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한 절대 나서지 않고, 한번 나서면 적을 격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런 북두검수까지 동원하다니.
종남이 얼마나 오령선화유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
“속가들 사이에서 들리는 말로는 현청단이 거의 소진되어 이번에 반드시 오령선화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종남은 욕을 먹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정의를 표방하던 이들도 자신의 발등에 불이 붙으면 안면몰수하는 법이다.
평범한 이들도 그러할진대 종남과 같은 거대 문파가 위기를 느꼈다면 정말이지 물불 가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번 일은 마령고원 때와는 다릅니다. 종남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오령선화유를 확보하려 할 겁니다.”
“……살인도 불사한다는 말인가?”
철순직이 순간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무르다 다시 내게로 향한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막는 것이겠지요.”
언뜻 듣기론 그다지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지만.
“물론 천동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철순직의 말은 불온하기 짝이 없다.
그의 말대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될 터.
“진 대표,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휴식기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번 만큼은 그의 눈에도 진심이 담겨있다.
“불가능한 일에 힘을 뺄 필요는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 분명 그래 보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다면 물러나려야 물러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죽현방은 천동굴 내부로 들어가나?”
철순직은 내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만 이야기해.”
그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속가는 천동굴 내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저 종남을 지킬 뿐이지요.”
“그거 잘됐군.”
“대체 무엇이…… 후, 됐습니다.”
이유를 물으려던 철순직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간 나한테 몇 번 당하더니 눈치가 더욱 늘어난 모양이다.
“진정 들어갈 생각입니까?”
애당초 그의 질문은 잘못됐다.
들어갈 거냐고? 당연한 소리.
그건 논할 거리조차 못된다.
이쪽도 오령선화유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은데?”
“…….”
되려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그들과 달리 정정당당히 맞서느냐, 또는 정당하게(?) 그들처럼 반칙으로 맞서느냐일 뿐.
종남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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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날이 밝자마자 난 문방사우를 사 들고 사제들과 주당산에 올랐다.
철순직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정확히 종남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배제할지 알아야 했기에.
산 초입부터 이미 무기를 든 수많은 이들이 가득했으며, 곳곳에서 말 없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 올랐을 때쯤.
인파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대사형,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는데요?”
사람들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신법이 출중한 몇몇 이들은 나무를 타거나 절벽을 기어올라 인파를 벗어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인원들은 등산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꾸역꾸역 사람들 틈을 파고들어 위로 올라가자 정체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들어갈 수 없다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인명 피해가 날 수 있음에 부득이하게 조치한 것이니 이해하시오.”
“무슨 개소리야! 그럼 종남이 영약을 독점하겠다는 거야?!”
“개소리?”
항의하는 이의 말꼬투리를 잡은 종남파의 무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으윽!”
종남의 무사를 위시하여 종남의 제자와 속가의 무사들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항의하던 이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다들 불만이 쌓였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검날에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상황.
“종남이 일방적으로 입구를 막고 사람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기에 입구 쪽이 정체된 것이 아니오! 이는 온당치 않다 생각하오! 더군다나 종남이 이런 치졸한 수를 쓰다니……!”
누군가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사람들의 얼굴에도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대저 백도는 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무림맹에서도 영약의 권리는 습득한 이가 가질 수 있도록 정해놓았소. 종남이 이리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문제라 생각하오.”
무림맹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다들 종남의 무사를 바라봤다.
아무리 이곳에서 절대자가 종남이라 한들 무림맹까지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
사람들 사이로 일던 소란이 잠시 멎은 사이.
항의한 자를 바라보던 무사의 입이 열렸다.
“지난 마령고원 사태 때, 수많은 인파들이 마령고원에 들어갔다 변고를 당한 일을 다들 기억하시오?”
“…….”
“그때, 모든 이가 입을 모아 그 책임을 무당에 묻지 않았었소?”
종남파의 무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항의했던 이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곳에 들어간 이들은 등 떠밀려 들어간 것이 아니었소. 각자의 이익을 위해 제 발로 들어갔건만, 그 안에 무당파가 함께 있었단 이유만으로 모두가 합심하여 책임론을 꺼내 들었소. 아니오?”
“……그, 그건 조금 다른…….”
“천동굴은 종남파와 거리가 멀지 않소. 천동굴에서 변고가 발생하다면 분명 종남파의 책임을 묻는 이들이 나올 것이오.”
어느새 좌중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종남파 무사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목청껏 외쳤다.
“종남은 이에 대한 예방을 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이외다! 화산도 이미 이 일에 대해 이해를 하고 종남의 행사를 허락했소. 그러니 여기 모인 분들도 부디 이해를 부탁하오.”
화산파의 이야기가 나오고, 종남의 무사가 포권까지 쥐자 항의를 하던 이들은 일제히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명분을 가지고 일을 밀어붙인다는 건, 결국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들 불만이 가득했지만, 쉬이 나서는 이들은 없었다.
종남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들과 함께한 속가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기에.
더구나 천동굴에 들어가려 모여든 이들은 각기 다른 소속이었기에, 괜히 먼저 항의했다간 좋은 본보기로 전락할 수 있었던 탓이다.
한편에선.
“다른 입구로 가보자.”
“그래, 천동굴에 들어갈 입구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비켜봐, 내가 먼저 갈 테니까.”
몇몇 인원들은 천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다른 입구를 찾았지만, 그곳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괜히 지도를 사서는!”
“개방 놈들 설마 이걸 모르고 있었나?”
“그럴 리가 있겠어?! 개방 놈들이 사기 친 게 분명해!”
분을 참지 못해 지도를 찢어발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악을 쓰는 사람도, 종남을 원망스레 쳐다보는 사람들도 넘쳐 났지만, 종남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뻔뻔함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도 독선적이었던가?’
전생에 내가 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대단한 존재들이었다.
경쟁이 과열되어 치열하기 그지없는 강호에서, 끝까지 권력을 잃지 않고 지존의 자리를 지킨 자들이었으니까.
한때는 그들을 선망하고 그들을 좇았다.
태을문의 제자로선 평생 애써도 오를 수 없는 곳에 오른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압제에 분노하면서도 그들을 선망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보이는 모습은 그저 먼저 올라간 후 사다리를 걷어차는 조악한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권력을 유지해 왔던 것인가?’
다른 이들의 기회를 아무렇지 않게 빼앗고.
올라갈 기회조차, 경쟁할 권리조차 박탈해 버렸다.
그렇게 비겁하게 득한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다시 자신의 무력을 이용한다.
‘빌어먹을 것들…….’
그들이 진정 강자였다면 아무리 비겁한 술수를 썼더라도 상관이 없다.
강자로서 다른 이를 지킬 보호막이 충분히 되어줄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정마대전에서 그들의 모습은 어땠는가.
영약을 독점했던 이들이 가장 뒤에 서고, 기회를 박탈당했던 이들이 가장 앞에 섰다.
권력자들이 떨어뜨린 찌꺼기만 주워 먹던 우리가, 강호의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가장 앞서 고기방패가 되지 않았던가.
‘정의를 지킬 기회조차 우리는 강제로 부여당한 것이었다.’
태을문 같이 약소한 문파들은.
우리의 의지대로 가장 앞에 선 적이 있었던가.
우리 뒤에 숨어서, 적이 아닌 우리의 등을 향해 칼을 겨눈 이들에 의해.
가장 앞으로 내몰렸을 뿐.
그렇게 우리는 목숨을 빼앗겼다.
“대사형, 도저히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데요?”
“종남이 저렇게 막고 있다면 뚫어낼 방법 따윈 없을 거예요.”
“더구나 여기 계속 있다가 종남의 탄압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염려의 빛이 가득한 사제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 이들은 아직 살아있다.
나는 종남파 무리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고정했다.
저들이 독점한 기회는 사제들이 가질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가졌다면, 이 녀석들이 전생에 그리 어처구니없이 죽는 일도 없었겠지.
그렇기에 이번 생에선 절대 그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지금부터 주당산을 오른다.”
내 말에 사제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여기가 주당산인데요?”
나는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문방사우는 다 가지고 있지?”
“네.”
“지금부터 천동굴 일대를 샅샅이 그려라. 지형의 모양을 그대로 하나도 빼먹지 말고.”
“네? 그게 무슨……?”
“대사형,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데요?”
전생에 기회를 가졌던 종남은 결국 마교를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는.
“태을문의 힘을, 보여줄 때다.”
우리가 가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