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기회를 가질 자격(6)>
내 예상에 사제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종남의 제자를 죽이지 않고 소란 없이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건 이대제자까지였다.
그랬기에 일대제자들 이상은 만나지 않길 바랐던 건데.
‘시발 실화냐?’
……당주급이라니.
두 중년인의 묵직한 검이 흔들림 없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겨눠진다.
“나와라.”
단지 검을 겨누고만 있을 뿐인데도 마치 단단한 벽을 만난 듯 답답함이 느껴진다.
“이들이 죽은 후에야 나올 생각인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결국 동굴 뒤편에서 대기하던 금표와 은호, 사련이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이런 곳에서 목숨을 버리기엔 너무 젊은 것 같군.”
복면으로 가렸음에도 키와 동작으로 얼추 나이가 판단되는 것일까?
사람 보는 눈에서 연륜이 느껴진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이윽고 그가 나와 사제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자가 너희를 협박하여 이곳으로 끌고 온 거라면 지금 이야기하거라.”
중년인의 손가락이 내게로 향한다.
“…….”
“…….”
이어 사제들의 시선도 내게로 향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종남의 사람이다. 노괴 따위에겐 지지 않는다.”
어떤 개 같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다.
아무리 몸이 좋다고 해도 약관을 지난 청년한테 노괴는 너무한 거 아니야.
은호가 잠시 움찔거리긴 했지만, 결국 검을 거두지 않는 사제들을 보며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한패인 건가?”
“저 아이들이 이곳에 종남이 있음을 모르고 들어오진 않았겠지.”
“그렇담 우습군. 종남의 존재를 알면서도 들어왔다는 건가.”
어쩐지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중년인의 얼굴에 갑자기 냉소가 어린다.
“이번 일에 피를 볼 거라 생각하지 못했거늘.”
“천지. 조심해라. 방금 전 한 수가 범상치 않았으니.”
“당주님이나 조심하시오.”
‘천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미간을 잔뜩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필 만나도…….’
지금 종남의 사람 중 천지란 이름을 쓰는 이는 장차 종남비호라 불리는 군천지밖에 없으니까.
우리 뒤를 쫓아오던 정체불명의 고수가 이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
하지만.
-대사형.
정신을 놓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하필 들어온 호랑이 굴이 새끼 호랑이 굴이건 성체 호랑이 굴이건, 정신 못 차리면 물리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너희는 오른쪽 중년인을 맡아라.
지시는 단순했다.
내가 군천지를 맡고 사제들이 나머지 하나를 맡는다.
그리고 내가 가기 전까지 사제들이 온전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군천지를 얼마나 빨리 제압할 수 있는가.
촤촤촤촤촤-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나에게 짓쳐 드는 중년인을 피해 군천지에게 달려들었다.
챙-
일 검을 나누자 군천지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호오…… 노인장, 그대가 내 상대인가?”
그의 검이 사방을 점하며 흑룡검을 막아냈다.
단순 명쾌하지만 그렇기에 되려 틈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누구더러 노인장이래!”
회귀한 이후로 내가 나이 먹었다는 자각을 잊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젊은 몸으로 노인 취급받는 건 억울하다!
내가 섬전처럼 쇄도하자.
“응?!”
소천검법을 막아내는 군천지의 두 눈이 뜨악하며 떠졌다.
방금 전 기습을 막아냈을 때보다 더욱 놀란 모습.
뭘 그리 놀…….
“나, 나보다 어리다고?”
젠장.
진심으로 놀라는 모습에 더 열이 뻗친다.
상대를 흥분하게 만들 작전이었다면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
채채채채챙-
어쨌거나 그가 당황한 틈에 요혈을 찔러 보았지만, 군천지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흑룡검을 모두 막아내었다.
군천지는 자신의 검을 한번 바라본 뒤, 여전히 못 믿겠다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너, 몇 살이지?”
얼굴을 가리고 검은 무복을 입은 상대가 그런 걸 쉬이 밝혀 주리라 생각한 건가.
나는 대답 대신 흑룡검에 검기를 모아 쏘아내었다.
쐐액!
날카롭게 쏘아낸 검기는 군천지의 목과 심장 단전을 노리며 날아들었고, 넋 놓고 있던 군천지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펑- 퍼펑!
보통 어지간한 검기는 흘리는 것이 검수로서 마땅하건만, 군천지는 내가 쏘아낸 검기를 향해 새로운 검기를 쏘아내며 그것들을 해소했다.
막아서 충격을 해소하지 않고 외력으로 외력을 해소한다.
그가 벌써 얼마나 높은 무리를 가졌는지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다 자란 호랑이인가?’
특무조의 종남비호라면 마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꺼려지는 상대 중 하나였다.
우리가 전방에서 칼침을 맞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 마교를 기습하는 특무조의 활약은 우리의 피해를 능히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효과적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금 군천지의 실력이 내가 전생에 알던 군천지의 수준과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
그의 실력이 이미 종남비호 군천지의 실력에 도달했다면 제시간에 제압할 방도 따윈 없을 테니까.
부디 당주라 불리던 사람이 실력 대신 친목질과 정치질로 당주 자리에 올랐길 바랄 뿐이다.
나는 서른 개의 환검을 만들어 낸 후, 그 사이로 여덟 개의 진검을 숨겨 찔러 넣었다.
“환검?!”
군천지는 미간을 잠시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양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중단세를 취한다.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무겁고 거대한 검술은 종남의 무공 중 가장 유명한 천하삼십육검.
변과 환의 명가인 화산을 상대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검법이기도 했다.
따다당- 따다당- 따다당-
마치 거대한 방패가 막아선 듯, 환검과 진검의 전부를 막아낸 군천지는 호흡이 조금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역시나 화산 때문에 환검이 눈에 익은 건가?’
섬서에 적을 둔 종남과 화산은 오랜 지기이자 경쟁자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형성된 구도는 아니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며 문파의 세를 키웠기에, 두 문파는 그 무공까지도 서로의 약점을 틀어쥐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화산이 교교하고 요사스럽다 할 정도로 공격적인 검술이라면, 반대로 종남은 단단하고 묵직한 방어적인 검술.
특히나 천하삼십육검은 종남의 수많은 무학중에서도 종남의 색깔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검법.
태을문과 같이 변과 환을 쓰는 이들에겐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검이 꽤나 묵직하군. 변과 환을 쓰는 이들은 좀 더 가볍게 휘두르는 법인데.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건가?”
이 위급한 와중에 무공을 분석할 여유까지 있다 이건가?
뭐, 나 역시 그렇지만.
그래도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이것도 분석해 보시지!”
흑룡검으로 소천검법을 쏘아내는 한편, 왼손을 뻗어 만화무적권을 펼친다.
쐐애액-
공기를 찢을 듯 날아드는 검기를 먼저 해소하려는지 군천지가 첫 번째 검기를 맞부딪쳐 온다.
그 순간.
퍼퍼펑-
군천지의 얼굴이 뒤틀렸다.
“이게 무슨……!”
그의 얼굴 위로 낭패의 기색이 떠오른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 검기에 내가 내공을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떠어엉- 떠어엉-
이전과 같이 검기를 해소하려던 군천지의 손이 뒤로 튕기듯 날아간다.
그리고 그 사이를 화살처럼 쏘아지는 주먹의 권기가 파고든다.
퍼버버버벅 퍼버버버벅-
그는 벽운천강수를 미친 듯이 뻗어내며 만화무적권을 해소하려 했지만, 결국 몇 개는 피하지 못하여 유효한 타격을 입었다.
“크윽…….”
두 걸음 뒤로 물러선 군천지에게 다시금 소천검법을 꽂아 넣는다.
쐐애액──
섬전처럼 쏘아져 나간 흑룡검이 뱀처럼 군천지의 검을 휘감으며 그 힘을 흘려냈다.
그의 천하삼십육검을 뚫고 다시금 유효한 타격을 꽂아 넣으려는 찰나.
찌지직-
“……!”
극한으로 몸을 숙인 그의 등 뒤로 무복이 찢기며 검날이 흘렀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동작이었다.
수그린 상태에서 뒤로 발을 뻗어 사각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수법.
‘회전퇴!’
군천지의 일절 중 하나인 회전퇴임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들자마자 벌써 한 치 앞에 그의 발바닥이 보인다.
급하게 왼손을 들어 막았다.
퍽!
비룡조가 감싼 부분으로 충격을 해소했음에도 팔이 부러질 듯 아파왔다.
예정대로 머리를 맞았다면 분명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게 분명했다.
내 손을 차내는 반동으로 몸을 일으킨 그의 얼굴엔 놀람이 어렸다.
“허! 회전퇴를? 너, 정녕 정체가 무엇이냐?”
몸을 일으켜 찢어진 무복을 나풀거리던 그의 시선엔 복잡함이 담겨 있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이립조차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떤 문파가 널 키워낸 거지?”
그나마 태을문이 좁밥 문파인 것에 감사해야 하나?
긍정회로를 돌려보아도, 그다지 유쾌해지지 않는 기분.
검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복면을 착용한 의미를 모르나!”
쐐애액──
부지불식간에 소천검법을 쏟아냈지만, 벌써 눈에 익었는지 군천지는 큰 동작 없이도 수월하게 흑룡검을 막아버린다.
이어 그의 어처구니없다는 음성이 들려온다.
“아직도 우릴 뚫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군천지를, 그리고 종남을 뚫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대신 대천검법을 흩뿌리며 동시에 소천검법을 꽂아넣었다.
그러나 아직까진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뚫고 갈 수 있다 생각하나 보군.”
군천지의 목소리에 냉기가 감돈다.
이제껏 내뱉었던 음성과는 사뭇 다른 무게가 느껴진다.
“종남이 그리 우습더냐?”
마치 작은 토끼에게 생채기를 허락한 호랑이와도 같은 모습.
상처로 인한 아픔보다 자존심이 구겨진 데에 더욱 분개하는, 특권을 가진 자들의 전형적인 분노.
“어린 너희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있을 정도로?”
글쎄. 나도 모르겠다.
회귀를 하고 이전 생보다 더 높은 위치에 더 강한 무력을 가졌지만, 여전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담장은 높아 보이니까.
다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된 건 그 높은 담장이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이겠지.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전생과 같이 호랑이 앞에서 벌벌 떠는 토끼가 아니니까.
내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그렇다면 똑똑하게 교육해 주어야겠구나.”
그의 검에 막대한 기운이 어린다.
검기보다 더 크고 강한 기운이 검을 둘러싼다.
“종남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존재인지를.”
이제껏 멋모르는 아이를 달래는 동네 어른 같은 말투를 쓰던 이가 갑작스레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투로 내뱉는다.
거참, 쓸데없이 무게 잡네.
“너희 같은 이들에겐 종남에 도전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작은 동굴 안에 그의 살기가 가득 찼다.
그사이.
“크으윽!”
사제들 쪽에서도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후욱……!”
“하아, 하아.”
어깨 부근에 상처를 입은 은호가 바닥에 쓰러져 있고, 다른 사제들이 은호를 보호하며 싸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종남은 친목과 정치질로 당주를 뽑는 문파가 아니었나?
왜 쓸데없이 공정하고 난리야.
“……지금 다른 이를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잠시 시선을 돌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군천지는 바득바득 이까지 갈아대고 있었다.
그의 검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거력이 잔뜩 어려 있었다.
‘대천강검’
진짜 지랄 났네.
중검 중의 중검이라는 대천강검은 천중(天重)검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무겁기 그지없다.
평범한 이들은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부서지고, 흘려낸다 해도 충격을 모두 해소할 수 없다는 최악의 중검.
그런데 그걸 이 좁은 동굴 안에서 쓴다?
내 목적이 제압이라는 걸 아는 듯 그는 과감하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골랐다.
‘단박에 제압한다!’
의도가 들켰다면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나는 이제껏 아껴왔던 파쇄식을 준비했다.
군천지와 같이 강호의 경험이 대단하고 본신의 능력이 뛰어난 이 앞에선 파쇄식을 쓰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을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다.
어느 누가 자파의 주력 무공의 약점을 알고 있는 이를 살려두고 싶을까.
그렇기에 그간 사제들에게도 절대 제갈삼식을 전달하지 않았고 나 또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잘 쓰지 않았다.
이건 정말 미묘한 심리적 기술이 필요한 일이니까.
사나운 기세로 내게 쇄도하는 군천지.
“이것도 받아봐라!”
푸른 궤적을 그리며 내리 떨어지는 중검을 바라보며, 나는 공멸권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단전이 텅 비는 느낌과 함께 군천지의 좌측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헉!”
검을 휘두르다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공멸권의 기척에 화들짝 놀란 군천지가 가까스로 대청강검을 회수한다.
그리고 나는 뻗어내던 공멸권을 회수한 후 곧장 군천지를 향해 소천검법을 마구 흩뿌렸다.
쐐애액──
십수 개의 검기가 요혈을 노리고 날아든다.
“무슨 잔재주를!”
군천지는 공멸권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천하삼십육검으로 방비를 해왔다.
그리고 난.
그간 그토록 기다렸던 천하삼십육검의 파쇄식을 펼쳤다.
하늘 아래 삼십육방을 점하여 절대 방어를 완성 시키는 천하삼십육검.
그 절대 방어의 유일한 약점인 삼(三) 초식의 이십칠(二十七) 방을 부수고 들어가 소천검법을 찔러 넣었다.
가장 날카롭지도, 가장 빠르지도 않지만, 정확하게 검을 내뻗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때론 적당한 힘이 가장 정확한 힘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푹!
살덩이를 뚫고 들어가는 검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부지불식간에 천하삼십육검이 파쇄 당한 군천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커흑! ……어떻게?”
어깨를 깊숙하게 찔러 들어간 흑룡검을 봤음에도, 그는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나와 검을 번갈아 보았다.
뭘 놀라고 그래.
촤악-
나는 박혀 있는 흑룡검을 뽑으면서 씨익 웃었다.
“도전할 자격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