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포의환향>
“유, 유언이라면서…….”
응, 유언이라고 한 적 없어.
“사형의 말대로 내세의 인간들은 다 사기꾼 아니면 거짓말쟁이라더니…….”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같잖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은 죄로 사람을 죽이려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도의도 모르는 무뢰한 같으…….”
근데 너 크게 상처 입은 거 아니냐? 언제 기절하냐?
칭얼거리는 걸 들어주는 것도 지겨워서 지풍을 날려 잠재웠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상처를 살필 겸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처가 얕다.
‘뭐지? 분명 제대로 들어간 느낌은 들었는데.’
옷가지를 들춰 보니 무복 안쪽으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는데.
한철……, 한철이네.
현철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 가볍고 절삭력이 높아 무인들에게 무기로 선호되는 금속인 한철.
평생 한철이 함유된 무기를 가져보는 게 소원인 무인들이 강가의 모래처럼 많건만.
종남은 이걸로 보구를 만들어 입었다.
‘씨발, 이래 놓고 종남이 위기라고?’
난 또 내가 종남의 마지막 남은 유일한 희망을 가져가는 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뻔했네.
더 이상 마음을 무겁게 느낄 필요 없다 생각한 나는 다시금 수혈을 깊게 짚어 사내가 깨어나지 못하게 한 후 사제들에게 돌아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우뚝─
이상하다. 왜 몸이 안 움직이지?
억지로 몸을 비틀어 봐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금 고개를 돌리니 사내의 상처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한철보의가 눈에 들어왔다.
‘너를 데려가라 이거냐?’
한철보의는 지금 간절하게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넌 이미 주인이 있지 않으냐. 난 도둑이 아니다.”
그러자 한철보의도 격하게 고개를 젓는다.
자신은 종남에서 단 한 번도 소속감을 느껴본 적 없노라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종남이 아니라 태을문이라고.
“후우…… 아무리 그래도 도둑질은 할 수 없다. 크흠, 난 어디까지나 도사니까.”
냉정하게 돌아서려 하자 한철보의가 처연하게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종남의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
“그래…… 어쩌면 이건 인연인지도 모르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내에게 다가가 한철보의를 벗겼다.
그래,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다. 제아무리 사물이라도 제 도의를 찾겠다는데……. 정말 어쩔 수 없는 거…….
작은 사슬로 촘촘히 연결된 금속들이 몸통 전체를 빙 둘러 감싸고 있다.
금속의 색깔들이 모두 균일한 것으로 봐선 이 보의 전체가 통째로 한철로 만든 듯 보였다.
‘씨바, 이거 하나면 대체 저택이 몇 채야.’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사내의 품도 뒤졌다. 또 다른 인연이 있을까 하여.
하지만 반짝거리며 값진 인연이나 영단과 같은 인연은 없었다.
‘응?’
다만 거무튀튀한 나무 인연은 있을 뿐.
나는 그것을 대충 집어 들었다.
‘담중호.’
아마 사내의 이름인 것 같다.
명패는 울지 않기에 다시금 사내의 품속에 넣어두고 몸을 돌렸다.
이제 사제들에게 돌아갈 시간.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부스럭.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거렸다.
수혈을 깊게 집었는데 벌써 깨어났다고?
나는 얼른 한철보의를 품 안에 억지로 구겨넣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부스럭부스럭.
그곳에선 웬 새로운 사내가 담중호의 품을 뒤지고 있었다.
“…….”
순간 소름이 바짝 돋으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야, 이 새끼…… 언제 온 거지?’
기감이 펼쳐진 이 일대론 분명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놈은 뭔가?
이는 곧 놈이 내 기감을 무시하고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아씨, 여기도 없나?”
담중호의 품을 뒤지며 중얼거리던 의문의 사내.
그는 명패를 손에 쥐곤 던졌다 받았다를 하다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혹시 여기서 반지 같은 거 안 나왔지?”
“…….”
너무도 태연하게 물어오는 놈.
내가 말이 없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잣말을 지껄였다.
“하긴, 가지고 있었으면 내가 느꼈겠지. ……후우, 또 허탕인가. 씁.”
온몸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순간 여기가 놈의 안방인가 착각할 정도.
뚝, 뚜두둑
이내 놈이 날카롭게 손톱을 세운다.
섬섬옥수와 같던 손가락이 길게 늘어나며 검은 손톱이 자라난다.
그러더니 이내 담중호의 목을 찌르려 한다.
씨바, 쟤가 여기서 죽으면 성가셔지는데.
나는 급하게 흑룡검을 뽑아 검기를 날렸다.
챙.
검기와 손톱이 부딪쳤건만 어째서 쇠끼리 부딪친 소리가 나는 걸까.
이 의문은 금세 어떤 존재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금방 납득하게 했다.
‘마교…….’
빌어먹을 씹새끼가 나타났다.
#
“응?”
부지불식간에 검기에 맞은 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씨발롬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놈의 앞에 대고 검 끝을 휘저었다.
“그자에게서 떨어져.”
놈은 나와 담중호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이자는 네 적 아니었어? 그래서 물건도 훔친 거고. 아냐?”
안 훔쳤어 새끼야!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인연이 닿은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깊은 사정이 있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마인 새끼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나는 다시금 경고했다.
“떨어지라 했다.”
그러자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던 놈의 얼굴이 순간 악귀처럼 변한다.
표정이 험악해진 게 아니라 진짜 괴물처럼 순식간에 변했…….
“나한테 명령하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깜짝이야.
끔찍한 몰골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건 전생에서도 못 봤는데.
마교 새끼 아니랄까 봐. 또 무슨 괴랄한 무공을 익힌 거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놈이 손을 들어 보인다.
“아! 미안 좀 흥분했네. 첫 만남인데 방금 건 잊어.”
잊혀지겠냐? 꿈에 나올까 무섭고만.
이윽고 놈의 얼굴이 본래의 순진무구한 형태로 변한다.
“제금학 그놈을 병신 만든 게 너라면서? 그래서 한번 봐주는 거야. 그 새끼 영 밥맛이었거든.”
자신도 밥맛이란 건 정녕 모르는 걸까.
나는 옥청천상력을 끌어올려 흑룡검에 휘감았다.
“떨어지라 했다. 마지막이다.”
내 적대적인 행동에 녀석은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령선화유도 가졌으니,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낸 거 아니야? 더구나 넌 종남이랑 같은 편도 아니잖아?”
순간 놈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새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이놈 말고 다른 놈도 이 안에 들어왔나?
사제들에 대한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보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계속 그거 켜고 있을 거야? 나 속이 영 안 좋은데?”
놈이 황금빛으로 물든 내 흑룡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님,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건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진 않는다.
“떨어져.”
“하아…… 나 참, 이래서 강호 놈들은 이해가 안 간다니까. 좋아.”
순순이 뒤로 물러나는 놈.
이윽고 영문 모를 말을 내뱉는다.
“‘소마’ 님은 왜 너 같은 놈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별것도 없는 것 같은데.”
놈이 말을 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가늠을 시작했다.
제금학을 적대하는 걸로 봐선 제금학과 비슷한 수준에서 경쟁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적대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고로 이자가 제금학을 견제한다는 건 제금학과 무위 또한 비슷한 수준이라는 이야기.
‘재수가 없으려니.’
이런 상황에서 놈을 만난 것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이자를 전생에서 본 적이 없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금학 그놈을 잡는다고 그 개고생을 했는데.
‘어쩌면…… 사제들이 먼저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네.’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놈이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설마, 지금 나랑 싸울 생각이야? 하하! 제금학 그놈이 어지간히 만만해 보였나 보네.”
무엇이 그리 웃긴지, 눈물까지 참는 시늉을 하며 놈이 유심히 내 모습을 살핀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냐! 아냐! 이번엔 사고 안 치기로 약속했어!”
한참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 빙그레 웃는다.
진짜 뭐냐, 이 미친 새끼는.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
“아니.”
“왜?”
씨발,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제금학 그 새끼 대가리가 찌그러진 채 돌아왔거든. 선생님이 고치곤 있는데. 망가져서 복구가 힘들다고 하셨고.”
제 두 손을 머리 쪽에 빙글빙글 돌리며 제금학의 부상 정도를 알려오는 놈.
무척이나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근데 비마대 애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손도 대지 않고 머리를 부쉈다면서? 중원 무학중에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말이야.”
이윽고 놈이 눈이 일순 날카롭게 반짝거린다.
“어떻게 한 거야?”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 그래서 더욱 위험한 눈빛.
“볼일 없으면 꺼져라.”
“대답 안 할 거야?”
놈이 내 뒤편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곳에 뭔가 있다는 듯.
“사제들이 다 죽으면 대답할래?”
“……죽고 싶은 거냐?”
살기를 잔뜩 일으켜 놈에게 쏘았다. 하지만 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빤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빵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재밌네. 역시 ‘소마’ 님이 관심을 가질 만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씹새끼.
“뭐, 어떻게 대가리를 부쉈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 결과가 중요한 거지.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또 보자. 꼭.”
놈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씨벌롬이. 다시 만나기는 뭘 다시 만나.
평소 소금을 챙겨 다니지 않은 게 한이다. 앞으로는 소금을 꼭 챙겨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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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씹새끼가 사라지고, 난 어쩐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짜 눈깔이 미친놈이었어.’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놈이 어떻게 기감을 뚫고 들어온지부터 시작해서, 놈이 찾던 게 뭐였는지.
대체 이 중원에 얼마나 많은 마교 놈들이 퍼져 있는지까지.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놈이 한 말에 있었다.
[‘소마’ 님은 왜 너 같은 놈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별것도 없는 것 같은데.]
‘소마’라는 게 누굴 지칭하는지 대략 감이 오는 나로서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지난번 제금학 때의 일로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건만, 이번에 아주 확신이 되었다.
‘씹새끼 중의 씹새끼가 지금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첫사랑에 빠진 앳된 소녀처럼 자신의 관심을 주변에 널리 전파하고 있네.
그렇지 않고서야 최근에 만난 마인 새끼들이 하나같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을 수가 있나.
‘소녀감성 마인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듣기로는 원치 않는 이성의 관심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다고 하던데,
증오스런 동성의 관심엔 비할 바는 아니다.
더구나 그 씹새끼는 전생에 나를 죽이면서 마신의 저주까지 내리지 않았나.
“……근데, 이번 생엔 언제 만난 거지?”
내 기억들을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그와의 접점은 전생에서의 몇몇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정마대전 때 무림맹의 부대를 폭풍처럼 쓸어 넘겼던 기억.
백도의 고수들을 손가락 하나로 툭툭 쳐서 칠공(七空)에서 피를 쏟게 만들었던 기억.
산책하듯 걸으면서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을 만들었던 기억.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죽였던 기억.
‘다시 보니 진짜 끔찍한 씹새끼네.’
사람 새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들을 모두 뒤져봤지만, 이번 생에선 확실히 놈을 만난 기억이 없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람.”
일단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은 생각을 이어가기에 좋은 시간이 아니니까.
우선 담중호를 살폈다.
혹여나 그사이 하독 같은 걸 하지 않았을까 걱정하여.
“으…….”
시간이 좀 흐른 탓인지 놈이 깨어나려 했기에 다시금 수혈을 짚어 깊게 재웠다.
왠지 이자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하니, 한철보의도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종남을 떠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간 사이에 아까 그 미친놈이 담중호를 다시 죽이러 오진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어쩌랴. 부디 그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지.
다시금 오령선화유가 나온 동굴로 돌아갔다.
내가 무너뜨렸던 입구의 돌들과 흙들을 치우고 입구로 들어갔을 때.
눈앞에 검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죽어라……! 대사형!”
“하아 하아! 깜짝이야.”
침입자인 줄 알고 곧장 공격하려던 사제들이 저마다 간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령선화유는 다 받았냐?”
“……아, 네. 방금 다 받았습니다.”
“사형은 괜찮아요? 위험한 사람 만나고 온 거 아니에요?”
“…….”
방금 만난 마교 놈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야 할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곽궁 놈도?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해 준들 쉬이 믿지 않을뿐더러, 믿는다면 또 그것 대로 문제다.
범접할 수 없는 커다란 적을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성취에 너무도 초라함을 느낄 테니까.
무공 수련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건 ‘조바심’이다.
“별일 없었다. 북두 검수를 재우고 오는 길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제들은 더 강해질 테니까.
차근차근 자신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된다.
“…….”
“…….”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
오령선화유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애들 눈까리가 조금 불량스럽게 변해 있었다.
이 녀석들 또 왜 이래?
“……에이, 대사형 진짜…… 하아 ……하핫!”
금표 녀석을 시작으로 은호도 크게 웃기 시작한다.
사련도 딱딱한 표정을 풀고 피식 웃음을 내비친다.
뭐지? 이 분위기?
“사형도 참, 북두 검수요?!”
“북두 검수란다 북두 검수. 하하하.”
이걸…… 안 믿는다고?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비아냥거리는 은호와 사련을 금표가 나서서 엄혹하게 말린다.
“은호야, 그만해라.”
그래, 그나마 믿을 건 금표 너밖…….
“대사형이 북두 검수라고 하지 않느냐. 그럼 북두 검수인 거다.”
“하하핫! 그렇죠. 북두 검수라면 북두 검수인 거죠. 그런데…… 부우욱두 검수? 부우욱두 검수?”
그때 동룡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옷자락을 당긴다.
“대사형, 전 믿어요. 분명 북두 검수가 맞을 거라고.”
허허, 녀석들…… 수련이 많이 고픈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