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포의환향(3)>
천동굴을 나선 뒤로 태을문의 제자들은 동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일이 터진 직후, 종남의 제자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천동굴에서 일을 벌이고 도망치듯 달려 나가는 다섯 사람.
종남의 인원 대다수는 그들이 세 번째 입구를 만든 이들이며, 최악의 경우 오령선화유를 가졌을 거라 예상했다.
놈들이 어떻게 오령선화유를 획득했는지, 왜 종남의 일을 방해했는지 추궁하며 고문할 생각에 설레었던 종남파의 인원들.
하지만 은하유영비라는 강호 절학을 익히고 있었음에도 용의자들과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았다.
‘뭔 놈의…… 신법이…….’
‘허, 저런 신법이 다 있다니?’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자꾸만 벌어진다.
더구나 산에서 펼치는 신법은 나무와 거친 암석 지대로 인해 속도가 주는 게 정상이건만, 놈들은 마치 평지 위를 달리는 것처럼 속도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은하유영비가 어디 가서 속도로는 뒤처질 일이 없었건만, 숲속을 가로지르고 절벽을 오를 때마다 거리가 점점 벌어지자, 결국 종남은 산 두 개를 넘을 때쯤 범인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종남이 결국 범인을 놓쳤다는 이야기는 곧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개방에게 전해졌다.
“크크, 멍청한 놈들…….”
“당연히 범인이 순순히 잡혀주리라 생각했던 건가?”
“이래서 아둔한 놈들은 안 되는 법이지.”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던 개방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당초 종남이 가지지 못한 오령선화유는 더 이상 종남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는 곧, 종남의 것이 아니라면 개방의 것이 되어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놈들이 은하유영비를 제쳤다. 긴장 풀지 말도록!”
쾌속당 당주의 말에 개방도들이 코웃음을 쳤다.
“경공의 기본도 안된 놈들이 제아무리 좋은 신법을 익힌다 한들 제 실력이나 내겠소.”
“이번에 놈들을 잡으면 우리가 은하유영비를 제끼는 건가?”
속칭 개방의 뇌전이라 불리는 쾌속당은 위급한 정보를 가장 빠르게 천하 곳곳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서구나 전서응으로 전달 시 소실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조직은 천하의 그 어떤 문파나 표사들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다.
“경공을 모르는 놈들은 그저 빠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면서 동시에 오래 달릴 수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진짜 경공이 뭔지 놈들에게 알려줄 기회다. 가자!”
종남에 비해 반나절 늦게 시작된 추격전.
그런데도 개방도들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범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후후, 놈들도 우리를 느끼기 시작했군.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데?”
“어차피 금방 지칠 것이다. 거리를 조절하면서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놈들도 점점 초조해지면서 금방 지칠 테니.”
하지만 모든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왜, 자꾸 거리가 벌어지지?”
“헉헉……, 놈, 놈들이…… 꽤 무리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동료 개방도의 말에, 질문을 던졌던 거지는 ‘무리는 네가 하고 있는 거 아니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삼켰다.
지금 싸웠다간 추격이고 뭐고 다 엉망이 돼버릴 테니.
“벌써 반나절이다! 놈들도 슬슬 쉴 시간이 되어 간다. 우리도 거리를 조절해서 따라가다가 놈들의 휴식 시간에 맞춰 쉰다.”
하지만.
“헉, 헉…… 쉬, 쉰다며…….”
“나도 몰라, 씨바…….”
범인들은 중간에 쉬지 않았다.
하루를 꼬박 날을 새고 이틀 차가 되었음에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문제는 개방 측에서 먼저 나왔다.
“다, 당주…… 거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뭔 소리야! 아직 유지하고 있는데!”
“아뇨, 저들이 아니라…… 우리요.”
개방에서 제일 빠르고 오래 달리는 이들을 모아놓긴 했지만, 각기 기량과 무공의 수준차는 있기 마련.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점점 뒤처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내공이 대체 얼마나 많길래…….”
신법을 쓴다는 건 결국 장시간에 걸친 내공 소모를 야기한다.
달리는 와중에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서야 한정된 내공으로 연속적인 신법 사용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미친 범인 새끼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떻게 할까요? 당주.”
“……당원을 절반으로 나눠라. 운기조식을 한 후에 교대하라고 하고.”
“잠도 좀 자고 오라고 할까요?”
“이런 미친……! 왜, 가서 목욕도 하고 오라고 하지?!”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부에 연락해. 놈들이 동쪽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미리 거지들을 깔아 놓으라고.”
“누굴 보낼까요?”
“씨발! 진짜! 전서구는 뒀다가 나중에 술 안주로 먹을래!?!”
“죄, 죄송합니다!”
개방도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빠지자 당주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내공의 차이로 쾌속당이 뒤처진다는 건 분하기 그지없지만 반대로 그로 인해 알아낸 점도 있었다.
‘내공의 양을 보건대 절대 삼류문파는 아니야. 가는 방향을 유추하면 어떤 문파인지 알 수 있겠지.’
……물론 그게 맞지는 않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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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 되는 날.
당주는 머리가 핑핑 돌고 눈이 뒤집어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내공이 한계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부족한 수면을 상쇄할 방안이 없었으니까.
“하아…… 하아…… 하아…….”
당주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다른 개방도들도 서서히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다, 당주, 괜찮으십니까?”
바싹 메마른 입술로 수하를 바라보는 당주의 눈은 이미 반쯤 썩은 동태 눈깔과도 같았다.
“지, 지부…… 지부에서 연락은……?”
“아, 아직 없습니다…….”
교대로 범인을 쫓겠다는 작전은 범인들이 점점 속도를 올리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뒤처진 인원들은 다시금 본 대에 합류하지 못했고, 범인을 쫓는 이들은 쉼 없이 계속 발을 놀려야 했다.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은 건가?”
첫 번째 전서구를 보낸 뒤로 세 번째 전서구까지 보냈었다.
전서구가 잘 도착했다면 진즉에 앞을 막는 이가 나타났거나, 교대할 인원이 찾아왔을 것이다.
허나 아무런 대응이 없는 걸 보면 결국 전서구가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전서구 세 마리 모두가 전달되지 않은 게 과연 우연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당주는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지금은 작은 의심을 키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다, 당주.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너무 무리를…….”
수하의 만류에도 당주의 입에서 쇠 긁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당원…… 당원을 보내…… 당원을 보내서 연락을…….”
우당탕.
그 말을 끝으로 당주의 발이 엉키며 그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다, 당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쾌속당원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 다시…… 가라…….”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낸 당주는 결국 기절해 버렸다.
“…….”
“…….”
“…….”
하지만 당주의 마지막 당부를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눈치만을 살필 뿐.
“당주가 마지막에 뭐라 말했지? 소리가 작아서 잘 못 들었는데.”
“……못 잡을 거 같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한 것 같은데.”
“그래! 저놈이 제일 가까이에서 들었으니 물어보자.”
당주에게 보고를 하던 개방도는 갑작스레 날 선 시선이 제게로 모이자 히끅 거리더니 버럭 소리를 쳤다.
“다, 당주! 저희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 말 없이 기절해 버리시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주!”
개방도의 외침에 쾌속당원들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어차피 자신들은 입에도 대지 못할 오령선화유.
그걸 찾자고 개고생하는 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오문 서안지부 흑점 점주 호계악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허, 공자께선 진짜 미래를 내다보시는 건가. 정확히 이곳에서 거지들이 포기할 걸 아시다니.”
본래 거지인 놈들이 멀쩡한 척 옷을 깨끗하게 입고 다니는 꼴이 영 눈꼴 시렸는데. 지난 나흘간의 추격전으로 진짜 거지꼴이 된 걸 보니 눈이 편안했다.
‘지도 팔아먹는다고 자랑하더니 꼴좋구나.’
서안에서 자신을 놀리던 어린 거지들이 아닌 게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어쨌든 개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나.
그때.
“점주님, 이만 돌아갈까요?”
“으잉? 돌아간다고?!”
“왜, 왜 그러십니까?”
“자네는 저런 귀한 풍경을 보고도 발걸음이 떼어지는가?”
점주가 품속에서 작은 호리병 하나를 꺼내었다.
“자고로 훌륭한 시인은 훌륭한 풍경에서 나온다 하지 않았나. 혹시 아나? 자네에게 시인의 재능이 있을지?”
점주의 말에 철응의 부리를 쓰다듬어 주던 문도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럼 안주는 제가 준비할까요? 어제오늘 철응이 사냥해 온 날고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허허! 개방의 놈들 덕분에 눈도 입도 다 즐겁군.”
호계악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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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산을 시작으로 쉬지 않고 달린 지 오일 차.
하오문으로부터 더 이상의 추격은 없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내 말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제들은 더 묻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 곯아떨어져 버렸다.
“으아아아! 죽을 뻔…….”
“소피…… 소피를 봐야…….”
행공을 계속 사용했다곤 해도, 몸에 축적되는 피곤은 해소되지 않는 법이니까.
거칠게 몰아 쉬던 숨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주변에 뭐가 있든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분명 한계에 다다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매번 왔을 것이 분명한데도 사제들은 대견하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견한 모습들이 못내 안타까워 쓴소리가 나온다.
“쯧, 피곤이 풀리게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잘 것이지.”
아마도…… 이 아이들의 남은 생은 계속 이리 미친 듯이 달리는 삶의 연속일 것이다.
없이 태어난 이들의 삶이란 결국 물살을 거슬러 올라야 겨우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으니.
그럼에도 물살을 거스르지 마라, 쉬어 가라 이야기할 수가 없다.
발을 멈추는 순간, 전생과 똑같은 삶이 반복될 테니까.
눈앞에 살아있는 사제들을 보며 괜히 먹먹해지던 그때.
“으음…….”
사련이 엉킨 머리카락이 간지러운 듯 제 얼굴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잠버릇도 참 고약하네.
나는 피식 웃고는 녀석의 머리를 정리해 주려 손을 뻗다가.
“…….”
이내 멈칫 굳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
삼형제의 몰골은 더욱 심각했다.
개방의 거지들 저리 가라 할 만큼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사제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벌써부터 이렇게 더러운 바닥에 구르게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씻겨서 가야겠군. 사문의 어른들이 보면 기함하실 테니.”
그렇게 태을문으로 돌아갈 길에 들를 만한 객잔과 주루들을 떠올렸다.
고생한 만큼 녀석들에게 그 대가를 주기 위해.
하지만.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한참 잠을 자고 일어나 여전히 거지꼴인 사련이 눈을 표독스럽게 뜬 채로 노려본다.
“지금 천하가 오령선화유로 인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객잔엘 들르자고요?”
침 자국에 눈곱까지.
도저히 사람 몰골로 볼 수 없는 상태인 사련의 말에, 같은 거지꼴인 금·은·동 형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반대입니다. 사형. 혹시라도 사람들과 마주쳤다가 또 이런 추격전을 벌이기라도 하면…… 으…….”
“저도요! 그냥 차라리 사람들 눈길을 피해서 산속에서 노숙하는 게 낫습니다.”
아니, 그…… 너희 말도 맞긴 한데…….
나는 조금 간절해져서 덧붙였다.
“니네들 꼴을 봐라…… 이게 어디 사람 꼴이냐…….”
“이게 뭐 어때서요? 되려 사람들 눈길을 안 끌고 얼마나 좋아요.”
얘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더 눈길을 끌 거 같은데.”
“아무튼 전 무조건 반대예요. 기왕이면 태을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오령선화유를 꼬옥 끌어안고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짓는 사련.
마치 동냥한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지 같…… 크흠.
‘쩝…… 나도 모르겠다.’
하긴 금의환향이 다 무슨 소용이랴. 진짜 금보다 더 귀한 걸 가져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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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노사님! 장 노사님!”
왕소소의 부름에 장도원이 담뱃잎을 채우려다 우뚝 멈췄다.
“뭐냐. 또 철전이 다 떨어진 게야?”
암기술을 익히겠다며 금전을 던지는 꼬라지를 보고 열이 뻗쳐 직접 무게와 크기가 똑같은 철전을 만들어 준 것이 첫 인연이 된 뒤로, 왕소소는 허구한 날 장도원의 대장간에 찾아와 철전을 가져갔다.
“에이, 노사님도. 저도 이제 제 철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정도는 알아요.”
“그러냐…… 장하다.”
“그나저나 그 얘기 들으셨어요?”
“뭐?”
심드렁하니 담뱃불을 붙이던 장도원은 곧이어 들려오는 이야기에 손을 멈췄다.
“진 오라버니가 돌아오신대요!”
“진 오라비라면…… 진소운이?”
“네! 이번 휴식기에도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번엔 오신대요!”
“……흥. 그러거나 말거나.”
퉁명스런 말과 달리 담배를 만지작거리는 장동원의 모습에, 왕소소가 눈을 흘겼다.
“장 노사님도 참! 매일 오라버니를 기다리셨으면서.”
“나야 그놈이 말도 안 되는 재료를 자꾸 보내오니까 열이 뻗쳐서 그런 거고!”
“아무튼 오늘 저녁에 대천상단으로 오신대요. 태을문의 사람들도 모두 환영회를 준비하는 중이고요. 노사님도 오실 거죠?”
“흥! 뭐 이쁜 놈 온다고 마중까지 나가. 제 놈이 필요하면 알아서 오겠지.”
하여간 사내들은 진솔하지 못해서 탈이라니까.
왕소소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호! 오실 거면서. 새 옷 보내드릴게요! 그거 입고 오세요.”
“옷?”
“오라버니와 사형, 사저 모두 금의환향하시는 자리잖아요. 저희도 분위기를 맞춰야지요.”
“귀찮게 시리…….”
“이따 뵈어요!”
해맑게 웃으며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왕소소의 모습에 장도원이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왕가장의 무남독녀라 하기에 다른 아이들처럼 새초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는 행동이 여간 잔망스럽다.
“본래 성격이 그런 건가, 태을문에 들어오면 다들 그리 변하는 건가…….”
태을문에 자리 잡은 지 이제 겨우 반년.
자신이 외부인이라는 게 불쑥불쑥 잊힐 만큼 태을문의 사람들 모두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위로 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놈이 사문을 아끼는 이유가 다 있었구만.”
담뱃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뿜어낸 장도원이 이내 대장간 한쪽 벽면을 바라봤다.
창문에 비친 햇살에 슬쩍 보이는 검붉은 검신.
진소운이 보낸 기이한 재료와 말도 안 되는 주문으로 오랜 기간 작업 끝에 만들어 낸 작품.
아니, 작품이라기보단 가히 신기(神器)라 불러야 할 물건.
“적광(寂光). 네놈도 드디어 주인을 만나겠구나.”
장도원은 아쉬움 반, 반가운 반의 마음을 담아 끌끌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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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기는 입은 옷이 답답한지 딱딱한 자세를 쉬이 풀지 못했다.
그 모습에 왕금산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홍 문주, 옷이 불편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합비에서 제일가는 포목점에서 맞춰주신 옷이 아닙니까.”
비단으로 옷 하나 맞추는 게 얼마라더라.
싸게 들어도 잘 나가는 표사들 두 달 치 월봉은 든다던 제봉사의 말을 상기한 홍문기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우리 애가 워낙에 잔망스러워서. 소운이에게 태을문의 사람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나…….”
하기사 자신들은 금의를 입고 있는데, 사문 사람들이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면 그 모습 자체로 마음이 무거워지겠지.
왕금산의 말을 듣고 나니 불편하게 느껴졌던 비단옷이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진다.
“소소는 어려도 속이 깊군요. 역시 장주님을 닮은 걸까요?”
“껄껄껄! 역시나 홍 문주가 보기에도 그렇습니까? 애가 용모만 뛰어나도 삶이 고달플 텐데 머리까지 좋아서 참으로 걱정입니다, 껄껄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왕금산의 옆으로 진태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문주님은 왜 괜한 이야기는 하셔 가지고……. 장주님 딸 자랑 한번 시작되면 반나절은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어허! 이 싸람! 내가 언제 반나절이나 자랑을 했다고.”
헛기침을 하던 왕금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소운이는 이 밤에 온다는 건가? 시간대가 안 맞는다면 자고 내일 와도 될 것을.”
“……그러게 말입니다. 또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진태산은 제 아들이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사용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상단주님…… 그…… 저 누군가 오셨습니다.”
“응? 이 시간에?”
“네. 본인을 진소운이라 이야기하던데…….”
사용인은 이미 진소운이 진태산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애당초 여기에 모인 이들 전부가 진소운과 사형제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사용인의 반응이 왠지 뜨뜻미지근했다.
진태산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시 일렀다.
“뭐가 문제인가, 들어오라 하면 될 것을…….”
“저, 그게…….”
그때, 홍문기가 나섰다.
“아니지. 금의환향하는 제자를 우리가 여기서 맞이하는 것도 좀 그렇지. 옳지! 우리가 나가세.”
“오! 좋은 생각입니다!”
홍문기를 중심으로 왕금산이 동의하고 나서자,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도 기대에 찬 발걸음으로 하나둘 대문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제자이자, 누군가의 사형제인 그를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드디어 소운이가 오는구나!”
“그러게 말일세!”
오랜 세월 잊혔던 사문의 무공을 되찾아 오고, 사문을 위해 불가능에 도전하여 결국 성공해 낸 사문의 자랑.
너무나 보고 싶고 기다렸던 그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아아아니이이! 나 대천상단주 아들 맞다니까아아아! 태을문의 대제자이고!!”
왠지 불량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진땀을 빼고 있는 사용인들의 등짝이 보였다.
“그, 그러니까.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라니까요. 안에 확인을 해보고…….”
“아니!!! 뭘 확인해요! 미리 연통도 넣었고, 여기 다 태을문 제자라니까!”
사용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청년.
그리고 그 옆에서 똑같이 자신이 태을문의 제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네 명의 남녀까지.
하지만 꼬라지가 영 이상하다.
“…….”
“…….”
“…….”
태을문의 사람들 전부가 말문이 막혀 굳어 있을 때, 처음 입을 뗀 것은 왕금산이었다.
“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태을문이 개방의 속가인가?”
그 질문에 진태산이 침음을 흘리며 대답한다.
“……태을문은 도가계열입니다.”
그렇지? 우리 도가지?
그런데…….
“……그럼 저 꼴은 대체 뭔가?”
그 어렵다는 학관에 입학하여 금의환향할 거라 생각했던 태을문의 제자들은.
“뭔……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요?”
“설마! 도적질을 당한 건가? 학관생들이?”
……개방의 거지들도 진저리칠 만큼 꾀죄죄한 꼴로 대천상단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 아버지! 접니다, 저요! 진태산의 자랑스런 아들 진소운이요!”
땟국물로 뒤덮여 시커먼 얼굴에서 유일하게 번뜩이는 안광.
진태산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맑은 눈의 광인, 아니 자기 아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