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97화 (297/357)

297. <자신을 보이는 흑염룡>

제갈천기.

시대를 초월한 천재.

하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에 쓰러진 존재.

초년기엔 가문의 욕심에 날개가 꺾였고, 결국 무림학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무림학관 졸업장이 없는 오대세가의 적자라는 신분은 결국 가문과 무림맹 입장에선 계륵과 같은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가문과 무림맹에서 모두 배척받은 제갈천기가 갈 곳은 하급무사들의 틈바구니밖에 없었다.

낭중지추라 했던가.

질척거리는 진흙 속에서도 영롱히 빛나는 진주처럼 제갈천기는 매번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냈지만, 한계가 지어진 위치에서 드러난 천재성은 결국 무능한 권력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의 기지 넘치는 창의력과 신묘한 지략은 소정대에서 소모되기엔 너무 과분한 여의주.

그렇게 하늘을 훨훨 날 것 같았던 창공의 용은 뿔과 발톱이 빠진 채 바닥을 뒹굴다 죽었다.

‘이 정도였던가?’

난 전생에 그리 허무하게 죽은 천재성의 빛깔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소천검법을 보고 대천검법을 바꿨다?”

과거 남궁산이 태을문에 방문했을 때.

내가 펼쳤던 소천검법 상승식에 아이들이 매우 큰 관심을 가졌었다.

마침 태을문의 무공이 소천검법 외엔 모두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태을검제의 무공을 찾기 전까지 아이들이 매진할 수 있도록 소천검법 상승식을 가르쳤는데.

그게 전해지고 전해져 결국 제갈천기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미친 천재 녀석이…….’

소천검법 상승식의 본질을 꿰뚫고 대천검법의 상승식을 만들어 냈다는 것.

상승식 이전에 거치는 과정이 자연스레 파쇄식인 걸 생각하면, 방금 전 내가 대천검법을 펼칠 때마다 어처구니없이 검이 날아간 것도 이해가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의 무림맹은 대체 얼마나 병신이었던 거지?’

당시 등신들투성이였던 소정대원들도 제갈천기가 천재라는 건 하나같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각 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 거기에 간부 학교인 무림학관을 졸업한 놈들 눈에 제갈천기가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싫었던 거겠지. 녀석이 뛰어남이…….’

최소 만통부의 시험이라도 통과했다면 맹의 학사로서 의견을 존중받고 자신의 천재성으로 무림맹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무림맹 예하의 백팔봉의 발전에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때쯤엔 이미 제갈소명이 암살로 죽고 만통부의 지휘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간 상태였으니까.

제갈천기는 또다시 자신이 가져야 할 기회를 놓쳤다.

여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이젠 소름이 돋았다.

결국 하늘이 내린 천재를 하찮은 인간들의 욕심이 죽인 거니까.

하나같이 제갈천기와 비교할 수 없는 미천한 존재들이 온 힘을 다해 제갈천기를 부숴버린 것이다.

제 욕망을 위해.

나는 눈을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호, 혹시…… 뭔가 잘못한 걸까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제갈천기.

병신들 생각을 떠올리느라 표정이 굳어 있었나 보다.

나는 얼른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러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내 손길에 천기가 올망졸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호, 혹시나 전 태을문의 무공을 제 마음대로 바꾼 것 때문에 화나셨을까 봐…….”

그 모습에 괜히 울컥했다.

녀석이 눈치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통 천재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닫고 우민들을 무시하는 성격으로 자라나기 마련인데.

‘용소아 그 씹새끼처럼 말이지.’

제갈천기는 자신이 하는 말 한마디조차도 상대가 곡해할까 봐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쓴다.

그간 자신의 ‘다름’을 ‘틀렸다’라고 주입받은 탓이겠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줘야 하지 않겠나.

“천기야.”

“네. 형님.”

이 반짝거리는 천재성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네가 검법을 새로이 해석한 것은 그것이 더 나은 방향이기 때문이 아니었니?”

“……사실 저희집에선 이것 때문에 결국 무공을 익히지 못했어서요.”

녀석이 갇혀있던 새장의 빗장을 활짝 열어낸다.

“여긴 제갈세가가 아니다.”

제갈천기가 처음 자신의 무대인 하늘을 본 것처럼 놀란 눈을 뜬다.

“그리고 넌 지금 태을문의 제자이고.”

“태을문의 제자…….”

“수(守)는 가르침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본래의 공부를 철저하게 연마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 그다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제갈천기는 이미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파(破)요. 자신의 개성에 따라 독창적인 응용 기술을 창조하는 단계입니다.”

어찌 이 아이는 이리도 영특한가.

“그래,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리(離)가 있다.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신기의 세계로 입문하는 것. 네가 어떤 길을 걷던 결국 이 길을 걷게 될 거다. 그러니 네가 이 단계를 충실히 거친다면.”

마음껏 날갯짓하며 원하는 곳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으리라.

“네가 어디서 어떤 길을 걷든 누구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단다. 알겠니?”

제갈천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정말로 살아있는 듯한 눈빛.

하여간 대단하고 귀여운 녀…….

“형님! 저 결심했습니다!”

“응? 뭘?”

갑자기 무슨 소릴…….

“평생 형님 옆에서 떠나지 않기로요! 그래도 될까요?”

마음껏 날아보라고 빗장을 풀어주었더니, 내 곁에 있겠단다.

그래도 되냐고?

당연하지.

제갈세가가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남고 싶다는데 뭐 어쩌겠어. 애당초 내놓은 자식이기도 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와아아!”

제갈천기는 마치 평생에 걸쳐 염원하던 것을 얻은 사람처럼 환호를 내질렀다.

근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

“아무튼 다시 검 들어라.”

“네?”

“아직 너에게 가르쳐 줄 게 남아 있거든.”

제갈삼식의 세 번째.

제마식(制魔式)

다시 되찾은 태을문의 무공에 제갈삼식을 어떻게 대입해야 할까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되면 땅 짚고 헤엄치기인가.

우리 천기가 다 해줄 테니까 말이야.

#

제마식을 익히느라 뻗어버린 제갈천기를 영영이에게 넘긴 후, 곧장 태을문의 사랑채로 향했다.

그곳엔 과거 흑도절대고수 중 하나였던 검마, 아니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닌 백수 중의 백수.

“왔느냐.”

백해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자가 좋아 보이시는군요.”

“……끄응. 식객이란 거 생각보다 더 불편한 것 같구나.”

“뭐가요? 세끼 밥이 제대로 안 나옵니까?”

“너무 잘 나와서 불편하다는 소리다.”

하여간 받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니깐.

“잘 나오는 게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천상단에선 문파를 세워주고 태을문에선 거처를 내주니,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거야 사부가 먹고 놀기만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누가 네 사부야?”

“아무튼 식객도 놀고먹는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미간을 찌푸리던 백해광이 슬쩍 눈치를 본다.

“그럼…… 식객이라면 뭘 해야 하냐?”

크으, 역시 밥값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상식이 있는 분이시라니까.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였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죠. 본래는 태을문에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을 밟아주거나 해결사 노릇을 하는 건데…… 뭐, 봉문 중이니 딱히 그럴 필요는 없고. 수련이나 좀 봐주십시오.”

“애들 수련에 참견하라고?”

……이 사람은 이런 조심스런 성격으로 어떻게 흑도인이 된 거지?

“애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요. 무공을 되찾은 지 워낙 얼마 되지 않아서 다들 힘겹게 올라가고 있거든요.”

“그래도 되는 거냐?”

“안 될 건 뭐가 있습니다. 원래도 사부님 하고 싶은 대로 하시다가 검마가 되신 거 아닙니까?”

“빌어먹을 놈이 또 검마라고…….”

“아무튼 그냥 하십쇼. 다들 그리 불만을 가지진 않을 겁니다.”

거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생사결을 펼치다 흑도 거두가 된 사람이다.

감히 백해광의 가르침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백해광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한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백월제천삼식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극쾌를 모두 익혔습니다.”

“벌써?”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겨우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네놈이 용소아도 아니고 그걸 어찌 익혔다는 거냐?”

“…….”

거참, 왜 갑자기 용소아를 꺼내 비교하신대.

나는 극쾌를 익힌 방식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이런 미친 새끼…….”

“그래도 제자한테 미친 새끼는 좀…….”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누가 너 같은 미친놈을 제자로 받는대!”

“거참 듣는 제자 서운하게…….”

“허어…… 육신을 기억에 짜 맞추다니. 네놈은 무슨 목숨이 두 개라도 되더냐? 그게 어찌 될 줄 알고!”

“제가 또 기억력 하나는 좋지 않습니까?”

다행히 이후에 제금학을 상대하며 쌓은 경험도 있고.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사부는 한숨을 쉬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급한 건 태을문이 아니라 네놈이구나.”

“네?”

“네놈 휴식기가 며칠이나 된다고 했지?”

“한…….”

“아니, 며칠이든 상관없다. 네놈이 내 검법을 익히다 미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집중훈련을 시켜주마.”

“그게 무슨…….”

“걱정 마라. 네놈이 한 미친 짓보단 이게 훨씬 나을 테니.”

아니, 갑자기 무섭게 왜 이러신대…….

#

“……라보니?”

뭐지?

“오라버니! 왜 여기서 주무세요?”

와 나 또 기절한 거야?

이 양반은 또 나 버리고 간 거고?

“으윽…… 반년 동안 조금은 발전한 줄 알았는데…….”

왕소소가 고개를 갸웃한다.

“네? 뭐가요?”

“아니야. 그런 게 있어. 근데 그건 뭐냐?”

왕소소는 품에 여러 개의 책자를 안고 있었다.

“아, 이거요? 서류예요. 대천상단 회계 장부요.”

“그걸 네가 하니?”

“네. 아무래도 왕가장과 대천상단이 함께하는 일이 많다 보니 양쪽의 회계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거든요.”

양쪽 회계를 분석해서 하나로 맞추는 작업이라면 어지간한 학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머리가 복잡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혼자 한다니.

……대체 난 누굴 구한 거지?

“저 지금 대천상단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장도원 노사가 대장간에 들르라고 했는데……. 뭐, 내일 가도 상관없겠지.

“그럴까?”

“와! 신나라! 어서 가요, 오라버니!”

순간 왕소소의 발걸음에 신묘한 현기가 묻어나며 녀석이 내 옆에 바짝 붙어왔다.

난 뭔가 대응할 사이도 없이 팔짱이 껴진 채 왕소소에게 끌려가고 있었고.

“가요! 오라버니!”

……와, 진짜 뭐지?

대체 태을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람?

#

대천상단으로 향하는 길.

서산에 걸렸던 해가 결국 져 버렸고 사위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문득 거리에 나와 왕소소만 있는 걸 깨닫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매일 이 시간에 상단에 가는 거니?”

“매일은 아니지만, 보통 그렇죠. 수련을 하고 일을 하고 상단으로 향하자면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혼자?”

“오늘은 오라버니와 함께 가고 있는데요?”

“아니, 평소에 말이야.”

분명 납치 사건 이후로 왕 장주가 태을문에 보낼 때도 호위를 동행시켰었는데.

“아, 그게 제가 혼자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왜?”

“태을문에 있으면 저만 왠지 붕 뜬 거 같아서요.”

태을문의 아이들 대부분 집안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왕가장의 독녀인 왕소소는 당연히 이질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을 터.

예전에 계철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계철영이처럼 후원금을 명분으로 갑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겼는데.

왕소소는 기특하게도 태을문에 스며들기 위해 스스로 가진 겉치레들을 벗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쉬이 장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 같은데.”

“네! 그래서 호위무사 님을 이겼어요.”

“응?”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내가 당황하여 쳐다보자, 녀석이 배시시 웃는다.

“호위무사를 이기면 더 이상 호위와 함께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하셔서요.”

……그게 가능한 건가? 왕소소에게 붙인 호위면 실력이 어지간할 텐데.

“아, 물론 도망치는 실력이요. 제가 알고 봤더니 달리기에 재능이 있더라고요!”

본격적인 경공도 아닌 태을팔만신보로 호위를 떼어 내다니.

……얜 또 뭐지.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대천상단에 도착했다.

“아버지! 저희 왔어…….”

마당에 들어선 왕소소는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듯 달려나가다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온몸으로 냉기를 발산했다.

“……그쪽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방금 전까지 소녀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적대감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대체 누구길래 그러지?

왕소소의 시선 끝엔 붉은 궁장에 금장식을 한 여인이 고혹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 거절하겠다고 이야기했을 텐데요. 더구나 그쪽은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찍지 않았고요.”

왕소소가 적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여인은 왕소소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여인의 시선 끝엔.

“혹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서요. 물어는 보셨나요?”

내가 있었다.

여인의 질문에 왕소소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여인이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역시 묻지 않으셨군요.”

여인 옆에 있던 사용인이 등불을 비춰 여인의 발치를 밝혔다.

그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그를 따라 달콤한 향이 확 퍼졌다.

“태을문의 진소운 공자님 맞으시죠?”

처음 보는 여인이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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