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99화 (299/357)

299. <자신을 보이는 흑염룡(3)>

적광검(赤光劍).

붉은빛으로 모든 어둠을 잘라낸다는 뜻의 이 검은 무림맹의 십오(十五)신기 중 하나이자 신매화검 화정산의 신물이기도 했다.

그가 적광검으로 흩뿌리던 붉은 매화는 마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꽃이었고, 적광검은 십오신기 중 가장 많은 마인의 피를 머금어 적혈검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너무 날카로웠을까.

종국엔 화정산을 미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적광검이었다.

장도원의 원한과 혈해옥의 혈기를 담은 적광검은 화정산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듯했다.

스릉─

금강무괴철 특유의 거무튀튀한 색상이 보인다.

하지만 어찌한 것인지, 적광검은 본래 쓰고 있었던 흑룡검에 비하면 훨씬 밝은 색깔이다. 흑색보단 회색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어라?’

더구나 본래 적광검이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예사롭지 않았던 예기 또한 사라졌다.

검날을 모두 뽑았지만 적광검에선 미미한 살기만이 드러날 뿐, 보기만 해도 피부를 찌릿하게 찔러 드는 살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장도원을 바라봤다.

“뭘 봐?”

뭔가…… 달라졌다.

내가 알던 살기등등한 적광검이 아니다.

모든 것을 죽이고 끝내 본인마저 죽이는, 그 무섭도록 날카로운 무기가 아니었다.

왜 달라진 걸까?

무기는 직접 드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더 많이 깃든다 하던데.

전생과 달리 장도원의 마음속에 마교에 대한 원한이 가득 담기지 않아서일까?

“왜? 생각하던 물건이 아닌 것이냐?”

“…….”

적광검이 본래 품고 있던 검신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도 사라졌다.

미미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제외하면 일반적인 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혼란스런 사태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장도원의 말이 들려왔다.

“눈빛을 보아하니 원하던 물건이 있었던 게로구나.”

“…….”

“……진짜 마물을 원했던 것이냐.”

“알고…… 계셨던 겁니까?”

장도원이 담뱃불을 붙였다.

숨을 한 차례 길게 빨아들인 뒤 다시 길게 내뱉는다.

묘한 담배 향기가 내 주변을 맴돌다 적광검을 한번 훑고 지났다.

“얼마인지도 모를 사람의 원한이 잔뜩 깃든 물건을 가지고 무기를 만들어 달라 하기에 설마 했건만…….”

장도원은 허탈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응시했다.

“무엇을 그리 죽이고 싶었던 것이냐?”

장도원을 처음 만나고 십오(十五)신기를 탈취할 계획을 짜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신기는 바로 적광검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적입니다.”

적광검이 아니라면 절대 그들을 죽일 수 없을 테니까.

“……너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말이냐?”

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 소중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 테니까.

“때론 너무 강한 적들을 처치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희생이 스스로 자처한 것이라면 무척이나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미친놈…….”

내 눈앞에 있는 그는 내 의도를 명확히 알았음에도 결국 적광(赤光)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전생의 장도원 또한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그런 물건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다.

똑같은 재료로 무기를 만들었으니 결국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

장도원은 말을 잇지 않았다.

나 또한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입을 열지 않았고.

그리고 담뱃불이 모두 타버릴 때쯤.

“……네놈은.”

장도원이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복잡한 얼굴로.

“악귀가 되고 싶은 것이냐?”

악귀, 악귀라.

“……필요하다면 언제든지요.”

“제 몸을 태우는 불론 누구도 따뜻하게 만들 수 없음이다.”

“최소한 어둠에 잠식되지는 않겠지요.”

쯧.

장도원이 불만이라는 듯 혀를 차며 담뱃불을 털어낸 뒤 다시금 담뱃잎을 움켜쥐었다.

“검이나 살펴 보거라.”

“…….”

뜬금없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의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그렇게 불량한 눈깔로 꼬나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장도원의 호통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언제 불량한 눈을 떴다고. 그냥 좀 걱정스러웠던 거지.

이제 재료도 없고 과거의 적광검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염려를 눌러 삼키며 검에 내기를 천천히 불어넣었다.

“……?”

그러자 기이하게도 회색의 검신은 은은한 금광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드드드드드─

마치 작은 공간을 뛰쳐나오고 싶어 하는 흉포한 짐승처럼.

이 작은 검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는 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살기가 당장 자신을 내보내 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대체 뭐지?

“그것만 해 볼 생각이냐?”

마치 열쇠는 내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듯 말하는 장도원.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본바 장도원은 분명 혈해옥을 이 검에 녹여 내었다.

그렇다면 혈해옥이 가진 살기와 원한은 어디로 향했을까.

그것이 결국 이 안에 있다면,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걸 꺼내는 열쇠는 뭐가 될까?

기억을 떠올렸다.

가장 처절했던 순간을.

장난처럼 휘둘러진 마인의 손에 소정대의 인원이 죽고, 통곡하는 우리 앞에 서서 비릿한 웃음을 짓던 마인의 얼굴을.

불같은 분노가 가슴속에 치솟아 올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순간을 떠올렸다.

의념을 따라 머리털이 바싹 선다.

방금 전까지의 평화로웠던 일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난 또 지옥의 한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죽어버린 동료의 시체와 그 시체가 흘린 핏물들.

이미 생기가 끊겨버린 동료의 시선이 끝없이 내게 속삭인다.

죽여!

죽어!

죽여!!

죽어!!

죽여!!!

죽어!!!

원한과 살기가 끝없이 피어오르는 그 전장의 한가운데서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금광으로 빛나던 검신엔 금강이 서서히 사라지고.

사아아-

과거 적광검(赤光劍)이 그랬듯 검신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의도했던 살기보다 더한 살기가 뿜어진다.

정말 살인에 미친 사람처럼, 오직 살인이 목표인 천살성처럼.

혼란한 전장 속에서도 사위는 조용해지고 정신은 오직 하나의 목표물만을 바라고 있다.

마음이 일으키는 감정을 따라 발과 손을 움직인다.

순식간에 마인에게 다가가 그 더러운 목을 꿰뚫으려는 찰나.

문득 태을진경의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태초의 모든 것이 무(無)에서 시작했으니, 한(恨)과 살(殺) 속삭임은 모두 부질없도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들며 기억이 사라지고 손안에 잡혀 있어야 할 마인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위에 산적한 시체도, 핏물로 이루어진 시냇물도 사라진 채 나는 본래 있던 대장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곧바로 시선이 적광검으로 향했다.

적광검은 선명한 본래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느냐?”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투구와 방패를 든 장도원이 보인다.

그는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언제 또 거기까지 가신 겁니까?”

적광검이 개화하는 순간 내가 정신을 잃을 걸 예상했던 걸까?

장도원은 대장간 구석에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정신 차렸으면 이 빌어먹을 살기나 좀 치우거라!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

어이쿠야, 그럼 안 되지. 아직 만들어 주셔야 할 신기가 열네 개나 남았는데.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살기를 거둬들이자, 방금 전까지 사방에 넘실거렸던 기운들이 마치 무언가에 잡아끌려가듯 검 안으로 쏙 하고 사라진다.

검신을 가로지르며 선명하게 그어졌던 붉은 색의 선도 사라졌다.

전생에 본 적광검에는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광인이 될 줄 알았건만 그래도 제법 수련이 되었구나.”

진땀을 닦아낸 장도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곧장 물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현생의 장도원이 만든 적광검.

평범한 상태일 땐 살기는커녕 은은하게 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속에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전생에 보았던 적광검보다 더 강한 살기를 내뿜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물음에 장도원이 침음을 내뱉는다.

“굳이 알고 싶은 것이냐?”

“큰 비밀이 있는 겁니까?”

“그 재료를 찾는다고 암시장을 꽤나 많이 다녔지. 네 아비가 꼬치꼬치 캐물었다면 결국 만들지 못했을 물건이다. 본래의 것으론 살기가 너무 강하니까.”

장도원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지 말을 돌렸다.

“재료를 받는 순간 네놈이 무슨 의도를 가진지 바로 깨달았지. 그렇지만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은인(恩人)사지로 몰아넣을 순 없는 노릇 아니더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걱정이 되었음에도 만든 것일까.

“단지…… 네놈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진소운이란 네 녀석을.”

그의 말이 어쩐지 무겁게 들린다.

“네놈에게 무슨 사연이 있고, 무슨 목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장도원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디 내가 만든 검으로 목표하는 바만 이루어라. 스스로를 태우지 말고.”

막내 손자에게 대장간 망치를 쥐여주는 할아버지처럼 장도원의 시선엔 걱정스러움과 대견함이 함께 혼재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며, 검을 쓸어보았다.

“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궁금했다.

전생과 달라진 적광검.

과연 이름 또한 달라졌을까?

“검신 아래에 써있다.”

회색의 검신에 음각으로 새겨진 두 개의 글자가 보인다.

적광(寂光).

참된 지혜의 빛이라는 불가의 용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뜻은 다르지만 전생과 같은 이름에 나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도가의 제자인 건 아십니까?”

“알고말고. 그래도…….”

잠시 주저하던 장도원이 말을 이었다.

“불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름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

불가의 은혜? 설마…….

순간 난 장도원이 암시장에서 산 물건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안했다.

“어르신 혹시…….”

“그만! 모르는 게 약이다.”

“…….”

장도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대장간 안으로 쏙 하니 들어가 버렸다.

……이 영감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

은하상단에서 다시금 초대장이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대장을 가장한 계약 이행이라고 할까.

“최종 결정은…… 네가 오라는구나.”

은하상단은 이미 대천상단에서 사치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실 당사자가 와서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말로 초대장을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오지 않으면 계약도 없을 거라는 엄포를 놓은 거군요.”

“큼, 그렇지.”

처음엔 요청, 두 번째엔 유혹, 세 번째엔 협박.

정말이지 능수능란함이 느껴지는 협상 방식이네.

초대장을 다시금 찬찬히 읽고 있자니 아버지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온다.

“진짜…… 갈 생각이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

“각 당마다 연못을 하나씩 만들 거라고요.”

#

은하상단으로 가는 인원은 간소하게 꾸려졌다.

나와 왕소소.

단 두 사람이 끝.

어차피 은하상단에서 바라는 사람도 나 하나였기에 굳이 왕소소가 갈 필욘 없었지만, 녀석은 굳이 자신이 따라가겠다며 자처해서 나섰다.

뭐, 내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덕분에 왕가장의 최고급 마차를 타고 편안하게 은하상단까지 갈 수 있었으니까.

작게나마 침실까지 놓여 있는 마차 안에서 이동 간에 계속 잠을 자고,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때면 사용인들이 만들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생애 다시 없을 호화로운 여행을 즐겼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은하상단 입구가 보였다. 입구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초대장을 받은 분들은 저쪽으로 들어가는 듯합니다. 아가씨.”

마부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에선 우리처럼 마차에서 내린 이들이 줄을 기다리지 않고 초대장을 내밀며 들어가고 있었다.

“호사스럽네.”

들어가는 이들이 걸친 옷가지나 장신구들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저 사람들이 걸친 옷가지와 장신구만 해도 어지간한 집 일 년 생활비가 나올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왕소소가 도착하기 직전 휴식 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장신구를 패용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나 보다.

“왜요? 오라버니?”

내가 빤히 본 탓에 왕소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어울려서 본 것이다.”

“헤헷! 꾸민 보람이 있네요. 여기서 얕보이기 싫어서 갈아입은 건데.”

“얕보인다고?”

왕소소라면 천하사대거상인 왕금산의 금지옥엽 외동딸이다.

본인 또한 상재가 훌륭하여 언젠가 왕가장을 물려받게 될 것이고.

그런 왕소소가 얕보인다니.

녀석이 콧김을 뿜으며 어깨를 쫙 폈다.

“은하상단은 주로 고관대작들과 교류가 많아요. 때문에 북경에서 초대받아 직접 온 귀족들도 많을 거예요. 귀족들은 무인이나 상인이나 다 우습게 생각하거든요.”

하기사 어떤 세계에서든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는 이들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게 당연한 습성이니까.

더구나 귀족들은 물론이고 고관대작이라면 더 하겠지.

“어서 들어가요. 여행 때문에 힘드셨잖아요.”

나야 워낙 노숙이나 야영이 몸에 배었기에 여기까지 오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지만 왕소소가 좀 피곤해 보여 말없이 따랐다.

입구로 다가가자 호위로 보이는 이가 손을 내밀며 초대장을 요구했다.

“……!”

초대장을 펼쳐 본 호위는 순간적으로 요상하게 눈을 흘겼다.

왠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듯한 건 내 기분 탓일까?

“어서 오십시오. 왕소소님 들어가시면 됩니다.”

호위의 안내에 왕소소가 먼저 발을 옮기고 내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호위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사용인은 다른 길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한쪽을 가리키는 호위.

그곳엔 고개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 있었다.

“…….”

이 새끼 인중이 잠깐 길어진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태을문의 진소운입니다. 은하상단의 초대로 왔습니다.”

“진소운? 그런 이름은 없는데?”

호위가 명단을 훑어보는 척 대충 뒤척이다가 이내 말했다.

“지금은 확인하기 힘드니 저쪽으로 가시오.”

“…….”

이 씹새끼 보소.

방금 명단을 훑는 와중에 내 이름을 분명 봤건만 모른 척하네.

한 대 치고 싶은 건, 역시나 내 기분 탓일까?

그 와중에 나 때문에 기다리기 시작한 이들에게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야? 빨리 비키지 않고!”

“어허! 어디 천한 것이 함부로 어르신들 다니는 길로 가려는 것이냐?”

“썩 나와라!”

하나같이 화려한 옷차림과 장신구를 한 이들의 성토가 계속되자, 먼저 들어간 왕소소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 오라…….”

“빨리 나오라는 소리 못 들었소?”

호위 새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인다.

여기까지 세 번.

‘아예, 초장부터 기를 꺾어놓겠다. 이건가?’

내가 본 게 우연이 아니었던 듯 호위와 그 옆에 선 무사들과 학사들까지 저마다 웃음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하기사 세 번이나 초청장을 보낼 정도로 집요했는데. 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더구나 어딜 가나 비아냥거리듯 부르던 별호도 부르지 않고.

나를 막았던 호위는 종국에 험악한 인상까지 쓰기 시작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하긴 이런 실수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일단 이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준 후, 나중에 실수를 다잡는 것이 옳은 방법이겠지.

하지만.

“썩 꺼지…… 컥! 컥!”

내가 그리 인성이 대단하진 않아서 말이야.

목덜미를 잡힌 채 바닥에서 붕 떠오른 호위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감히…… 은하상단…….”

“무슨 무뢰배 같은 짓이요!”

“역시 흑도와 연관이 깊어 흑염룡이라 불린 이유가 있었군…….”

뭔 말을 하는지 알겠다.

백도면 백도답게 체면을 차리라는 거겠지.

근데 내가 꼭 니들 장단에 맞춰 어울려 줄 필요는 없잖아?

“아, 몰랐나? 나 백도보다 흑도에 친구가 더 많은데. 흑염룡이란 별호도 흑도 거물이 지어준 거거든.”

“역시…… 소문대로.”

“다, 당장 놓아 주시오!”

어쩐지 내가 한 말에 다들 쉬이 납득을 한다.

그러면서 짐짓 잘못 걸렸다는 표정들을 짓는다.

뭔가 저지르긴 했는데.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을 몰랐다는 얼굴.

방금 전까지 내가 명분 없이 행동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득의양양하던 놈들이 이제는 내가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몰랐는데 흑도인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흑도로 사는 이유가 있었네.

걔들도 다 계획이 있는 거였어.

‘이거 엄청 편하잖아?’

내게 목이 잡혀 두 발이 뜬 호위가 어떻게든 내 손아귀를 벗어나려 버둥대고 있었다.

그런데 쥐똥만 한 내공으로 되겠냐고.

서서히 숨이 차오른 탓인지 벌겋던 얼굴이 보랏빛으로 바뀐다.

그리고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 나는 놈을 간이 탁자가 깔린 곳에 던져 버렸다.

꽈당.

명부를 기록하던 문방사우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탁자가 반으로 부서졌다.

챙! 챙! 챙! 챙! 챙!

그리고 은하상단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처음으로 별호가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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