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12화 (312/357)

312. <악의 불씨(5)>

사련과 내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두 사람, 그저 담담히 일상의 이야기 나누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정겹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지랄하기 시작했다.

“허업!”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사람처럼 왜 자꾸…….]

꿈인가? 꿈이겠지?

사련이 앞에서 해괴망측한 행동을 하다니.

암, 그럴 리 없겠…….

“씨바…….”

하지만 선명한 기억은 어제의 일이 결코 꿈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백해광과 비무를 하다 기절했다는 것도.

기절한 사이에 꿈을 꾼 건가?

‘하아.’

이 매정한 인간은 또 나만 두고 사라졌겠…….

“응? 오늘은 안 가셨습니까?”

백해광은 평소와 달리 내 앞에서 조각칼로 무언갈 깎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나무를 깎고 있을 뿐인데 묘하게 빠져든다.

나무의 결 하나하나, 단도의 칼질 하나하나에 묘리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뭘…… 만드시는 겁니까?”

“인형을 가지고 싶다더구나.”

“……시장에 가면 동전 몇 개로 살 수 있습니다.”

백해광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으냐? 너무 조잡해 보이니까. 내가 만들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만드는 거지.”

……나무 인형을 만드는데 그런 칼질을 한다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완성품으로 뭐가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그의 칼질을 보고 있자니 그가 툭 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못 본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냐?”

“뭐가 말입니까?”

“그전에는 거지발싸개처럼 검을 휘두르던 놈이 지금은 거지처럼 검을 휘두르지 않느냐.”

시바 말을 해도 꼭…….

“어차피 기절하는 건 똑같은데요. 더구나 백월제천삼식 이 초식도 못 쓰고 있는 마당이고요.”

백해광이 문득 칼질을 멈추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미친놈아, 애당초 지금 일 초식을 쓰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다. 너 그딴 식으로 이 초식과 삼 초식 익히기만 해봐라! 그땐 내가 달려가서 네놈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테니까.”

살기를 흩뿌리는 것도 아닌데, 진짜 손목이 잘려나갈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소름이 돋았다.

“알겠습니다.”

“명심해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검마라는 별호가 생긴 거겠고.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어제 일이 떠올라서 물었다.

“혹시…… 양가기공과 음공을 동시에 쓰는 사람하고도 붙어 보셨습니까?”

무한 비무를 하고 다녔던 백해광이라면 뭔가 흡성대법이나 사술을 익혔던 이와 만나지 않았을까 해서 물어보았다.

그들의 말년이 어땠는지 들을 수도 있을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내뱉었다.

“음……. 한 번 있었다.”

“정말입니까? 누구였습니까?”

“명하라는 늙은이.”

“명하요?”

보통 흑도나 사술을 익힌 자들은 자신의 이름부터 해괴망칙하게 짓곤 하는…….

“아, 그렇게 이야기하면 모르려나? 명하 도장 말이다.”

“…….”

미친.

명하 도장은 무당파의 전전대 문주 아닌가.

은퇴 후에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비무를 했다는 거지?

“찾아가서 부탁했지.”

“……진짜 부탁한 것 맞습니까?”

“오늘 하루 종일 자고 싶은 거냐?”

“아닙니다.”

“뭐, 재미있는 비무였다. 양의태극신공이란 신기한 무공도 경험했고.”

내가 알고 싶은 건 흡성대법을 익힌 자의 최후이지, 절세 신공을 익힌 자의 안락한 노년 생활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백해광이 검기를 날렸고, 나는 검기를 피하기 위해 다시금 바닥에 굴렀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그렇게 부탁한다면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망할 노인네! 내가 언제…….

“음과 양의 형질을 같이 쓰는 무공이라기에 처음부터 호기심이 많이 갔었지.”

“…….”

“웃기지 않느냐? 흡성대법은 수많은 형질의 내공을 가지지만 언제 사용자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른다. 반면에 양의태극신공은 두 가지의 다른 기운을 쓰면서 더욱 강한 힘을 가진다니.”

음…… 왠지 갑자기 들을 만해지네.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풀어냈다.

“그 뭐냐, 불균형 같은 건 없었습니까?”

“무슨 불균형?”

“어쨌든 두 가지의 기운이 한곳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불균형이 발생하겠지요.”

백해광이 혀를 차며 나를 쏘아보았다.

“쯔쯧. 이러니 무공을 익히는 놈들도 학문을 배워야 한다니까.”

“……전 동네 서점은 물론이고 학관의 만서고 책도 다 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 한들 세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

“…….”

백해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다시금 조각을 이어갔다.

“삼라만상의 조화란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이 함께 어울릴 수 있고, 함께 어울릴 수 있어 보이는 것이 때론 상극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신기한 일이다.

혈투도 그렇고, 지금 검마 역시 기존의 당연한 상식을 너무나 쉽게 파괴해 버리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양의태극신공이 무당의 최고 신공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단지 두 가지 형질을 쓰기 때문이 아니다. 그 상극인 두 가지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일으켜 더 큰 힘을 불러오기에 최고의 신공으로 꼽히는 것이지.”

“어떻게 조화를 일으킨다는 겁니까? 불을 내뿜다 얼음을 만들어서 조화를 이룬다는 겁니까?”

나는 제금학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보십니까?”

백해광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우리 딸도 그런 애새끼 같은 질문은 안 한다.”

“…….”

“뭐? 불을 뿜고 얼음을 만들어? 무슨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냐?”

……아니, 마교 애들이 그렇게 해서 본 대로 얘기한 것뿐인데 왜 나한테 난리지?

“허, 참, 기가 막혀서. 사술을 익히는 사도 놈들도 그따위 허황된 소리는 안 할 거다.”

아, 억울해.

나는 당장 백해광 앞에 제금학을 데려다 놓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속에서 끓어올랐지만, 꾹 참고 그의 설명을 마저 들었다.

“형질이란 건 자연의 기를 따라 하는 것이다. 양의태극신공이란 두 가지 상극의 기운을 이용해 서로를 자극시키는 것이지.”

“음…….”

“이를 이용하면 십 년의 내공을 가지고서 이십 년의 힘을 쓸 수 있다. 멍청하게 불을 내뿜고 얼음을 만드는 게 아니라!”

거참 말 한마디 했다고 엄청 핀잔을 주네.

욕을 한 바가지 먹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나도 형질이 나타나는 수준인 거니까, 양의태극신공처럼 안정적이라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다 문득 그의 말에 한 가지 의문이 더 떠올랐다.

“그럼 말입니다…… 혹 백도와 마도도 융화가 되겠습니까?”

백해광이 중대한 할 말이 있다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다.

“……뭐 이런 븅신 같은 게 다 있지? 세상에 마도가 어디…….”

“아니, 있다 치고 말입니다. 그 옛날 천마가 아직 존재한다 치면, 어떻습니까?”

“…….”

“그들의 기운과 백도의 기운이 서로 융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백도의 가장 정순한 무공 중 하나로 손꼽히는 태을진경에서 마도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그 두 가지가 섞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얀 종이에 먹물이 스며들 듯 검게 변해버릴까?

아니면 강물 위에 떨군 먹물처럼 금방 흩어져 사라져 버릴까.

“흠…….”

왠지 백해광은 조각하던 칼질도 멈춘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는 말없이 한참이나 그의 사색을 기다렸다.

“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만약에 말이다.”

그는 그는 들고 있던 칼도 내려둔 채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다면…….”

“있다면?”

“그건 강호의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조금 전까지 조화 어쩌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삼라의 형질과 선악의 구분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더냐?”

“…….”

“결국 인간은 선과 악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선하면서 동시에 악할 수는 없는 법 아니더냐. 그렇다면 그 두 가지 기운이 조화되었을 때 결국 한쪽으로 힘이 기울 텐데…….”

백해광이 다시 칼을 집어 들곤 칼끝으로 나를 겨누었다.

평범한 단도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느껴졌다.

“인간이 무한히 선해지는 것과 무한히 악해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쉬울 것 같으냐?”

“…….”

이 질문의 답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럼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대답을 못 하는 거냐?”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던 자는 어느새 그 살인에 중독되어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한다.

타인의 아픔에 눈물짓던 자는 어느 순간 아파하는 타인을 보며 웃음 짓는다.

일상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을 비상식적인 일들.

하지만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 인간은 너무도 쉽게 악에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 과정을 너무도 생생하게 봐왔기에 나는.

“…….”

단언하듯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 답할 수 없었다.

백해광이 단도를 내리며 얕게 웃음을 뱉는다.

“내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것이냐? 아니면 네놈 대가리에 워낙에 든 게 없어서…….”

“그렇다면.”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마 선배님은 아무리 백도인 행세를 하려 해도 결국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퍽!

“이 새끼가 허구헌 날 검마 검마! 오냐! 내 오늘 네놈의 그 잘난 기억력이 감퇴 되게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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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 백해광은 내 기억력을 감퇴시키겠다 말했지만, 결국 내 기억력이 이겼다.

“거 보십시오. 제 기억력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백해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코피나 닦고 말해라.”

어라? 코피가 언제?

요즘 너무 과로를 했나?

“근데 너 할 일 없냐?”

“……너무 할 일이 없어 인형을 깎으시는 분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백해광은 잠시 손안에 든 인형을 보더니 바로 바닥에 있는 모래를 내 쪽으로 찼다.

거 사람 유치하긴.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한테 무슨 용문데?”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나는 전광도 오일식의 무공서를 내밀었다.

백해광은 고개만 쏙 내민 채 무공서를 흘끔 쳐다봤다.

“뭐 하십니까?”

“나 바쁜 거 안 보이냐? 네놈이 펼쳐 봐라.”

“…….”

와, 이 정도면 자기 딸보다도 정신 연령 어린 거 아니…….

“꼬우면 그냥 가든가.”

“…….”

나는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오일식의 무공서를 펴 보여 주었다.

그렇게 몇 장을 보던 백해광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건 누가 만든 무공이냐? 네놈이 만든 거냐?”

“왜요?”

“네놈이 만든 거라면 아주 제대로 웃어주려고 했지. 간만에 재밌었으니까.”

“제대로 보신 거 맞습니까? 이름 없던 표사가 이걸로 한 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무사가 되었습니다.”

“뭐, 그렇기야 했겠지.”

백해광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끌끌 웃음을 흘렸다.

“제 목숨은 물론이고, 함께 있는 이들의 목숨까지 담보하는 무공이니까.”

“……네?”

분명 그들이 펼치는 검진에서 그런 성향이 보이긴 했었는데…….

그렇다고 검법에서까지 그런 게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백해광이 손목을 흔들며 앞장을 가리켰다.

“거기 봐라, 벽력추살 그 초식. 그게 뭘 뜻하는 것 같냐?”

“빠르게 쫓아가 끝까지 죽이라는 말 아닙니까.”

“쯧, 초식 명은 그런데 실제로 어떻냐고.”

“…….”

내가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자, 백해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단도를 휘둘러 오일식의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실로 대단했다.

‘와, 확실히 검마는 다르네. 완전 다른 무공인데…….’

오일식이 펼쳤던 무공과 같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날카롭고 정제된 초식들.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았음에도 하나의 완성된 깨달음을 보이는 것 같았다.

“자, 여기 벽력단애에 이어 펼쳐지는 벽력추살.”

그는 가볍게 단도를 내려찍더니 이어 검을 쭉 내밀었다.

“봤느냐?”

“뭐가요?”

“…….”

뭐야, 갑자기 그 눈빛 뭔데.

“……이 돌대가리가 어떻게 학관 수석이 된 거지?”

“……거듭 말씀드리지만…….”

“잘 봐라 이놈아, 끝까지 적을 쫓아 찔러야 할 도가 절반밖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손은 어떤 방향이냐.”

그는 옆으로 쫙 펴진 자신의 왼손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나는 그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일대일의 비무 상황이라면 전혀 어색할 게 없는 동작이다.

하지만 대단위 전투가 벌어진 상황이라면…….

‘미친…….’

저렇게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의 의미가 뭘 뜻하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설마…… 진짜 그겁니까?”

“그럼 뭐 한다고 이 초식을 넣었겠느냐.”

“그러니까…… 옆에 있는 동료를 제물로 삼아 상대를 찌른다고요?”

“그게 아니면 이 동작이 왜 필요한데?”

“…….”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다시금 자리를 깔고 앉은 백해광이 인형을 집어 들어 무심하게 칼질을 시작했다.

“실제 이런 무공을 만든 놈이라면 이놈의 실력이 어떻든 상대하고 싶지 않다.”

“…….”

“너라면 이런 생각을 가진 놈을…….”

이윽고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

백해광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선명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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