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늦겨울의 칼바람(5)>
간만에 느끼는 칠색화의 향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추운 겨울 창문으로 내리쬐는 약한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평온하고 평화로운 한가로운 이 시간…….
쾅!
감히 어떤 새끼가 학관 대표실의 문을 이리 거칠게 여는 거야!
라는 생각에 당장 발차기를 날리려 했지만.
“어…… 음, 련매 왔어?”
“…….”
방금 마신 칠색화가 벌써 소화라도 됐는지, 괜히 뒷간에 가고 싶어졌다.
“진소…… 아니, 대사형.”
부릅뜬 눈매의 사련이 끼릭끼릭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이형환위의 수법을 쓰듯 내 앞에 당도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우선 귀한 칠색화 잔을 뒤로 물려 보호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정신으로 한 행동이에요?”
“사실 그때는…….”
“요 며칠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거 같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이런 짓을 해요?”
“아니, 이건 다 사정이…….”
“왜 한 달을 멀쩡하게 지내지 못하는 거예요! 대체 왜!!”
아니, 나도 얘기할 기회를 주면 안 되나?
어이없다는 듯 칠색화 잔을 한번 노려본 사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어디 한번 얘기해 봐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
나는 말없이 눈짓으로 사련을 바라봤다.
이제 내 얘기를 들을 기분이 되었냐는 의문을 담아.
그러나.
“……설마, 할 말도 없는 거예요? 너! 아니, 대사형! 이 정도로 대책 없는 사람이었어요?”
“…….”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사련.
그 모습을 보는 내 가슴도 답답해졌다.
나도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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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교관이 의도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다 이거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차분하게 내 얘기를 들은 사련이 조금은 납득한 듯 수그러진 목소리로 눈치를 줬다.
“아무리 그래도 폐인을 만든 건 너무했어요.”
“폐인이라니?”
“단전을 박살 내서 폐인을 만들었다면서요?”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정도로 막 나갈 수는 없지.
상대는 당주급의 인원이고 구파인 청성의 소속인데.
그랬다간 청성의 모든 인원들이 내 목을 따겠다고 달려들 테니까.
나도 생각이란 걸 한다고.
암, 그렇고말고.
“크흠,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그냥 겁만 좀 준 거지 단전을 박살 내진 않았다.”
“……진짜예요?”
“당연하지.”
“……진짜 맞아요? 맹세하고?”
“…….”
아니, 얘는 왜 태을문의 대제자이자 평생을 함께해 온 사형을 못 믿는 거지?
내가 불만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자 사련이 변명하듯 손을 내저었다.
“요, 요즘 들어 워낙 기행을 많이 했어야지요.”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매를 용서하고 칠색화를 마시고 있자니 사련이 뭔가 떠올랐단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이야기를 듣자 하니, 개학 후 첫 수업에서 작년에 낸 보고서에 대한 평가를 두고 교관이 한바탕 훈계를 했다고.
내용은 나가 겪은 바와 비슷했다.
최고 점수를 받은 사련의 보고서를 예로 들며, 기수의 수준이 낮아 이런 보고서가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둥 전체적인 수준을 평가절하했다는 것.
“쯧.”
애당초 각을 잡고 학관에 부임한 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서 칠색화의 맛마저 쓰게 느껴졌다.
이거 비싼 건데.
내가 찻잔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리자, 사련이 콧김을 내뿜으며 살짝 타박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손속이 너무 과했어요. 교관에 대한 공격 행위는 퇴관 사유에 해당한다고요.”
내가 애써 외면하려던 부분을 콕 찝는 사련.
“더구나 시비 걸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명분까지 줬으니…… 이제 어쩌실 거예요.”
쩝.
어쨌든 이번 일에 대해선 나도 좀 과하게 반응한 부분이 없지 않다 여기긴 했다.
‘대체 왜 그런 거지?’
흑도 행세를 하다가 진짜 흑도처럼 변하기라도 한 건가?
내가 진짜 흑룡채 채주도 아닌데…….
마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처럼 저돌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었다.
“그럴 만했으니까 그랬다.”
“…….”
물론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그렇지 않았지만.
여기서 진짜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사련이 더 불안해할 것 같았거든.
나는 일부러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만약 놈들이 우리의 퇴관을 바라는 거라면 아마 이번 시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남은 학기 내내 명분을 쌓고 쌓다가 마지막에 가서 확실한 순간에 터트렸겠지.”
“…….”
“그랬다면 우린 학관 수업을 제대로 이수하고도 결국 졸업하지 못한 도태자들이 됐을 거고.”
말을 하다 보니 내 말에 내가 설득되었다.
본래 사람 관계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은 내가 아무리 그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해도, 결국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되려 잘 보이려 노력한 일이 나중엔 나를 싫어할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비합리적인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다면 저쪽에서 준비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먼저 치는 게 낫다. 그럼 오히려 우리가 최소한 대응할 시간을 얻을 수는 있으니까.”
이름하여 ‘이유 만들어 주기’.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이에게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법은.
바로, 싫어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명확한 이유를 심어준다면 오히려.
나중에 그 이유가 사라졌을 때 관계개선이 이뤄지기도 하니까.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게 진리다.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좋은 관계란 건 이뤄질 수가 없는 법이니까.
“후우……. 진짜.”
사련도 내 말에 납득이 된 듯 한숨을 쉬면서도 달리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질문했다.
“근데 왜 ‘우리’예요?”
“응?”
“사고 친 건 대사형이잖아요. 근데 왜 ‘우리’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거죠?”
“…….”
“설마 대사형이 퇴관당하면 우리도 같이 나가야 하는 거예요?”
어…… 그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는데.
음…….
“태을문의 제자는 죽어도 살아도 언제나 함께다.”
“…….”
사련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기 때문에 저 표정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사련은 보통 ‘진짜 진짜 싫다!’ 할 때 저 표정을…….
아, 좀 서운하네.
진짜 서운하다.
#
사련이가 왔다 간 이후로도.
쾅!
“진 공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쾅!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예요!?”
쾅!
“대표님!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저라다 문 박살 나겠네.
“거 좀 살살…….”
쾅-!!
……매번 대표실 문을 작살 낼 듯 열고 들어오는 이들로 인해 문은 결국 아작 나 버렸다.
저거 교체하는 비용은 학관에서 내주려나?
내 돈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보니 절로 걱정이 들었다.
그렇다고 대표실을 복도 마냥 활짝 열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흠…… 확실히 이 사건이 큰일로 번질 수도 있겠군요.”
문이 아작 나기 직전 들어왔던 장우재가 말했다.
그는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오지도 않았고, 어쩐지 초탈한 듯한 얼굴로 조용히 대표실에 들어왔다.
덕분에 그는 문이 부서진 데 책임이 없었다.
역시 교양이 있는 녀석이다.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어.
그는 진중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숙여왔다.
“문제는 교관 폭행 사건이 조용히 넘어간다 한들 교관들의 의도에 따라 앞으로의 향방이 달라질 거라는 겁니다.”
그는 내가 걱정하는 부분과 같은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표님의 말씀대로…… 아니, 철순직 그 친구의 말대로 그들이 점수 몰아주기를 위해서 왔다고 하면, 앞으로 더 노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요.”
나는 장우재 옆에 앉은 대표실 문 살해범을 보며 물었다.
“문을 박살 내신 분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끄응, 문은 이미 박살 나있던 거 아니었…….”
일각이 땀으로 반짝이는 머리를 한번 닦고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무튼, 구파일방에서도 새로 온 교관들에 대한 여론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자신들을 무시한 행위니까요.”
반응은 대략 반반 정도.
교관을 공격한 행위에 대해 분개하는 인원들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교관이 그 꼴이 된 게 시원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고 한다.
음, 근데 나를 지지하는 세력은 왜 없는 거지? 대표가 잘했다는 의견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일각이 나직이 말했다.
“가장 걱정되는 건…… 태을문의 사람들입니다.”
“응?”
“그들이 알아버리지 않았습니까. 진 대표는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란 걸.”
“…….”
아.
그럼 나 대신에 내 사제들이 피해를 입는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건가?
어쩌지.
차라리 교관들과 크게 한 따까리를…….
“……혹시라도 쓸데없이 일 키우지 마요.”
스산한 사련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들려왔다.
“단지 흠을 잡히는 것과 적대 세력이 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예요. 저희뿐만 아니라 차후에 의무복무하게 될 사제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요.”
하긴 대가리 숫자로 비교해 봐도 당장 구파 전체와 싸울 순 없는 노릇이니까.
사련이 핵심을 짚었다.
적대적인 사이가 되는 건 문제가 아닌데, 나중에 의무복무군으로 배치될 사제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악심을 품고 병과 교체 같은 걸 해주지 않으면 사제들이 그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무림맹은 절대적인 상명하복 체계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론 그렇진 않지만, 대외적으론 문파와 세가를 초월하여 무림맹 내의 직위를 따르도록 되어있는 것.
언뜻 느끼기에 굉장히 공평하고 공정한 체계처럼 보이지만, 기득권들에겐 이게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령, 무당파의 정예가 삼류문파 태을문의 진소운 밑에서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자존심 상하고 열 받겠지.’
소림사의 일각이 철검문의 무사에게 의도적인 괴롭힘을 받는다면?
과연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것이 기존 세력들이 공정해야 할 학관의 성적 평가 앞에서 불순한 의도를 보이는 이유임과 동시에.
내가 내 꼴리는 대로 행동을 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의 차별은 애당초 각오하고 있었어요. 지금과 같은 수준이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고요.”
사련의 자세를 꼿꼿하게 고쳐 앉았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거예요.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애당초 무림학관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사련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 괜히 우리 때문에 더 큰 소란이나 사고를 일으킬 생각 따윈 하지 마세요!”
“…….”
“우리 때문에 희생하는 건 그만하시라고요!”
사련의 단호한 일갈에 성모란이 말을 보탰다.
“와, 대사형보다 사매가 더 철이 들었네.”
뭐라는 거야.
대답을 바라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련의 살벌한 눈빛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대로 대답을 안 하면 저 녀석이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하지만 사련이 저런 말을 했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당장 오늘 수업을 들었을 금·은·동 형제들이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 모를 일이니까.
더구나 앞으로 녀석들의 학관 생활이 얼마나 험난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부디 금·은·동 형제들의 기가 꺾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빡세게 굴렸…….
아니아니, 크흠.
이제 막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할 아이들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멈춰버리면 너무 미안할 것 같단 말이지.
그때.
타타타타타타.
복도 밖으로 열심히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렸다.
보지 않아도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금은동 형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라? 왜 문이 떨어진 거지?”
“일단 대사형부터 만나고!”
“으, 응 그래!”
대표실로 들어서던 금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은호의 말에 관심을 돌리곤 안으로 들어왔다.
세 형제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나는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딱 봐도 뭔가 일이 있었던 듯한 표정들.
“너희도 오늘 혹시 무슨 일이…….”
“대사형!”
은호가 바로 내 말을 끊었다.
이 예의 바른 아이가 내 말을 끊어 먹을 정도로 큰일이 있었던 건가?
나는 걱정스런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교관을 내공으로 압살해 버렸다고요? 이거 사실입니까? 대체 어떻게……?”
사실을 믿지 못하는 금표의 의문을 시작으로.
“대사형, 솔직히 말하십쇼. 저희 몰래 대체 뭘 처먹…… 아니, 드신 겁니까? 영약 먹었죠? 그렇죠!?”
불경하기 그지없는 은호의 불만 가득한 표정.
“대사형, 저, 저도 그거 알려 주세요. 내공으로 단전을 박살 내는 방법…….”
그리고 살벌한 소리를 하는 동룡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까지.
“날 급히 찾아온 게 그 때문이었냐?”
“궁금하잖아요. 어떻게 한 건지.”
“대사형, 솔직히 부십쇼. 그럼 이해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저는 지금 배울 수 있나요? 아님 내공을 더 모아야 하나요?”
어…… 예상보다 씩씩하네.
이거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