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21화 (321/357)

321. <검은 숲>

모두가 빠져나간 회의장 안에서 북원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교관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어디 한번 칼을 찔러 보라고 이야기하는 자를 뭐라 표현하겠는가.

‘……진짜 흑도 공동 전인?’

말 같지도 않은 소문들에 어째 점점 더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북원평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내가 그놈 때문에 팍팍 늙지 팍팍 늙어.”

삼청무상검의 전인을 찾을 수 있는 기연을 얻게 해준 은인이지만, 놈 때문에 문파를 열기도 전에 늙어 죽을 것 같으니 이게 원수인지 은인인지 가늠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의외란 말이지…… 교관들이 물러서다니.”

무림맹의 기득권들은 쉬이 물러서는 법이 없다.

아니,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과 권력, 거기에 뛰어난 무력까지 가진 집단이 무엇 하러 물러난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거대한 성채에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그저 그 성채를 올라오려는 자들을 걷어차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일 뿐.

성채에 오르려는 자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슷하다.

오르다 보면 언젠가 떨어져야 한다. 그저 누가 더 많이 올라갔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

북원평은 진소운이 최소 자신보단 많이 올라가길 바랐다.

속가제자나 이권 등을 떠나서.

그저 그 녀석이 잘된다면 어떨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하지만 진소운은 성채에 오르기도 전에 제 손으로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하십쇼. 마음대로 하십쇼. 아니. 부디 제발 그렇게 해주십쇼. 그래야 저도 교관님들께 손을 쓸 때 죄책감이 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곤 성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 윽박을 내질렀다.

“허어…… 미친놈…….”

당연히 아찔한 순간이었다.

기득권들, 특히 구파일방을 위시한 정도회는 진소운 같은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니까.

기득권이 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한다면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고 싹을 짓밟아 버리니까.

그래서 결국 이 자리가 진소운이 오를 수 있는 끝이자, 추락의 시작이 될 거라 의심치 않았다.

헌데.

[……빠드득. 그만하지.]

교관들이 먼저 물러섰다.

‘왜지?’

진소운이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의문감이 먼저 들었다.

교관들은 절대 쉬이 물러날 자들이 아니니까.

여기서 물러나면 남은 학기 내내 진소운의 활약과 교관의 굴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것이다.

무림맹으로 복귀한 뒤에도 소문이 돌 테고, 청성파는 이 이야기에 분개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교관들이 먼저 물러났다.

“정말 모르겠군.”

그러다 문득 자신이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진소운에게 이야기했듯, 대담 자리에서 적당히 관계를 조율했을 것이다.

왜냐면 교관들이 진소운에게 제안했을 때, 자신은 분명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을 했으니까.

“…….”

그것만이 방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성채를 오를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했을 테니까.

하지만 진소운은 개의치 않았다.

성채에 올라가는 건 상관없다는 듯, 그들이 내려준 동아줄마저 스스로 불태워 버린 채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다음 일에 대해선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얼마든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듯.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그것이 다른 건가?”

그러다 문득.

어쩌면 진소운의 결정이 옳은 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물러난 건 교관들이었으니까.

다시금 머리가 아파온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이제 막 약관을 지난 놈의 심계가 통한 건지.

그놈 인생의 두 배에 달하는 삶을 살아놓고도 자신이 세상을 몰랐던 건지.

북원평은 대담이 끝났음에도 한동안이나 회의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

“빌어먹을!”

노진하가 애먼 돌멩이를 뻥 차서 날려버렸다.

그럼에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며 여기저기 사방에 울분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정신 수양이 도사의 기본 품행임에도 불구하고, 욕지거리까지 내뱉는 행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말리진 않았다.

강순탁 그 또한 노진하와 기분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그래도 혹여 보는 눈이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만 진정하게. 이미 끝난 일 아닌가.”

씩씩거리며 울분을 내뿜던 노진하가 찌릿 강순탁을 노려본다.

“청룡각주와 적룡각주가 왜 놈을 감싸는지에 대해선 알아냈나?”

“……알아보고 있네.”

“아직도?”

강순탁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래도 이 정도로 머저리 같은 인간은 아니었는데.

“정신 차리게. 이건 각주에 대한 사찰로도 번질 수 있는 문제야. 조심스레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 자네도 알지 않나?”

“너무 말 같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니까 그런 거 아닌가!!!”

노진하의 말에 강순탁이 끌끌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청룡각주와 적룡각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진소운을 뭉개버릴 예정이었으니까.

“그자들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 않은가.”

청룡각주나 적룡각주나 진소운과 접점이 없음은 분명한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행동을 예견이라도 한 듯 백호각주를 통해 외압을 행사했다.

아무리 자신들이라도 당장 일 년 뒤에 봐야 할 각주를 무시할 수 없는 법.

그래서 결국 대담 자리를 만든 것인데.

그마저도 결국 신통치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내가, 내가 억울해서 잠이 안 오네. 잠이 안 와!”

“…….”

노진하는 불구대천 원수를 눈앞에서 놓친 사람처럼 제 가슴을 쿵쿵 때렸다.

하긴 자신이 똑같은 일을 당했으면, 각주고 뭐고 일단은 진소운을 반 죽여놨을 테니까.

강순탁은 노진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찌 보면 되려 잘된 일 아닌가.”

“뭐가?”

“학관 대표와 교관들 간에 척을 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로선 되려 그 핑계를 댈 수 있지 않겠나.”

“…….”

“어차피 남은 학기 동안은 우리의 평가가 절대적이지 않은가. 그거라면 충분히 놈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일세.”

“……그렇겠군.”

아마 오늘 밤 진소운은 자신의 승리를 만끽하며 편안하게 잠이 들 것이다.

반대로 노진하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겠지.

허나 그건 잠시일 뿐.

“아직 끝난 건 아니네. 아니, 되려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지금부터 진소운은 매일 밤을 후회하며 잠들 것이다.

자신들의 힘은 당장 눈앞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

“가세. 오늘은 내가 사지.”

그러니 지금은 쓰린 속을 조금만 달래고 있으면 된다.

곧 편안해질 시기가 올 테니까.

#

교관과 진소운의 대립이 있은 후.

다시금 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관생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지만, 진소운도 교관들도 결국 입을 열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갔다.

당연히 무료한 학관 생활에서 이런 맛 좋은 이야기를 놓칠 리 없는 학관생들은 여러 가지 말들을 만들어 냈다.

“진 대표가 결국 교관들 앞에 무릎 꿇고 한 번만 살려달라며 엉엉 울었다던데?”

“진소운이 흑도 고수들을 이끌고 교관들 처소에 하나하나 쳐들어갔다더군.”

“난 진소운이 교관들에게 백지 전표를 건넸다 들었는데?”

술자리는 물론이고 식사 자리에서도 걸핏하면 이 화제가 나왔지만, 어디서도 진위 여부는 확인이 불가했다.

소문이란 게 늘 그렇듯 들불처럼 끓어올랐던 이야기들은 어느새 스르륵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을 남겼다.

“아니…… 어째서 내 성적이 병(丙)인 거야? 분명 비무 대결에서 사(四)강에까지 올랐는데…….”

“쯧, 교관들이 보기에 초식 이해도가 낮다고 하지 않나.”

“미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 문파 초식을 몇 번이나 봤다고!”

“절대 평가로 바뀐 다음에 이런 일이 계속되니…… 쯔쯧. 어쩌면 진 대표가 말한 게 사실이었는지도 모르겠군.”

정도회 소속이 아닌 자들이 성적에서 박한 평가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전체적인 수준이 낮다 얘기했던 교관들의 말대로 평가 기준이 높아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정도회 소속. 혹은 그와 관련된 이들의 점수가 본래보다 높아지기 시작했다.

“……쫌 이상하군. 저 친구는 매일 술이나 마시러 다니고 결석 일수도 많은데, 을(乙) 평가라니.”

“음…… 우리가 모르는 한 수가 있는 건가?”

“한 수가 있기는 빌어먹을! 당연히 편애하는 놈이니까 좋은 점수를 준 거겠지!”

처음엔 은근슬쩍 자행되던 차별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학기가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나고 학기말 평가가 나올 때쯤 되니 이제 차별은 뚜렷해졌다.

정도회 소속 인원들은 대다수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백도회 소속 인원들은 절반 정도가 좋은 점수를 받았다.

12봉성의 인원들과 그 외 인원들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아 바닥을 깔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차별이 시작되자 학관 내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정도회가 아닌 자들은 자신들이 받는 부당함에 정도회를 적대하기 시작했고.

정도회는 자신들이 받는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며, 다른 이들의 적대를 질시로 치부했다.

“12봉성의 놈들이 어제 또 교무부를 찾아갔다더군. 평가가 공정하지 않다면서.”

“멍청한 놈들, 실력 함양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앓는 소리나 내는 꼴이라니.”

“그러게나 말이야. 그동안 진소운 그 빌어먹을 놈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생각은 안 한다니까.”

“언제 한번 진소운 그놈도 손을 봐줘야 하는데 말이지……. 어? 뭐야 넌!”

진소운을 욕하며 걸어가던 이가 자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조막만 한 놈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어딜 사과도 없이 그냥……! 어엇…… 광유(狂鼬)?”

그리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안색을 바꾸었다.

“광유?”

어제 막 홍안이 가신 듯한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사내가 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야율극.”

한번 물면 놓지 않고 밤도 낮도 없이 덤벼든다고 해서 ‘미친 족제비’라 불리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진소운이 주머니 속 송곳이라면 이놈은 길바닥에 떨어진 거대한 소똥이다.

밟는 순간 손해가 나는 건 오직 밟은 사람뿐이니까.

정도회 소속의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뒤로 돌아서려 했다.

“그, 그럼 이만…….”

“잠깐…….”

“으, 응?”

“근데 진소운을 손봐주겠다고?”

“응?”

“방금 그런 말을 했잖아? 아니야?”

“…….”

우드득.

갑자기 손가락을 푸는 야율극.

사내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뭐야? 왜 그래? 내가 뭘 했다고…….”

미친 족제…… 아니, 야율극의 눈이 번득인다.

“진소운…… 그 새낀 내 거야. 내가 박살 낼 거다.”

“…….”

“근데 네가 먼저 손봐주면 안 되잖아?”

이 미친 꼬맹이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사내가 뭐라 변명을 하려는 순간.

퍼억.

이미 그의 신형은 바닥으로 꼬꾸라지고 있었다.

사내는 여전히 속으로 아우성쳤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 소리냐고!’

#

여름 휴식기가 끝났음에도 학관생들의 얼굴엔 아쉬움이나 우울함 따윈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번 휴식기를 진짜 휴식으로 보낸 사람들도 얼마 없었다.

여름 휴식기가 끝나면 무려 두 달짜리 대여정(大旅程)이 시작되니까.

학사 평가 중 지대한 부분을 시험받는 과정임과 동시에 학관생으로서 강호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다들 대여정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없어?”

성모란이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언니, 왜 이렇게 초조해 보여요?”

“난 더운 것도 싫지만…… 벌레는 정말 너무너무 싫거든요.”

대여정이 펼쳐질 장소로 꼽힌 후보는 총 세 곳.

화막(火漠)

빙해(氷海)

묵림(墨林)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학관생들 사이에서 유불리가 나뉘기 때문에 대여정의 장소는 학관생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전 빙해로 갔으면 좋겠어요.”

은설란의 말에 성모란이 두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래! 설란이 너 북해 출신이지? 거긴 벌레 없지?”

“……어.”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은설란.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북해에는 애당초 ‘살아있는’ 게 얼마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

“진 공자, 진짜 들은 거 없어요?”

들은 건 없지만,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다.

애당초 학사 계획이란 게 이 년 치가 한 번에 세워지니까.

전생에선 사천혈사로 인해 결국 대여정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들은 건 없지만,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습니다.”

“네?! 정말요? 어딘데요?”

“묵림이요.”

“…………에에?”

성모란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야……. 그죠? 농담하는 거죠? 나 놀리려고? 하하…… 네? 아니라고 얘기해 줘요! 아니라고!!!”

나는 성모란의 손에 낭창낭창 휘둘리면서 꿋꿋하게 말했다.

“지난 기수에서 용소아가 화막의 타쿤 부족을 홀로 토벌해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습니까.”

“……그, 그게 꼭 묵림에 간다는 근거가 될 순 없잖아요.”

“그 지난 기수에선 빙해에 갔던 학관생들 절반이 동상으로 고생했던 일이 있었죠.”

“…….”

성모란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시꺼멓게 변해갔다.

“마, 말도 안 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성모란이 비명을 지르며 대표실을 나가버렸다.

왜 저렇게 싫어한대.

습하고 독충이 많은 거 빼곤 사실상 이점이 더 많은데.

더구나 묵림은 거대한 영맥이 흐르는 곳 아닌가.

역대 학관생들은 대여정의 장소로 묵림에 가길 그렇게 기대했었다.

묵림은 평소엔 금역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때 남궁선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응? 진 공자님, 못 보던 목걸이네요?”

“아…… 이거 말입니까? 예전에 우재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겁니다. 지난 휴식기에 가공을 좀 부탁했죠.”

“오, 너무 이뻐요.”

“그렇습니까?”

나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성모란이 뛰쳐나간 자리를 쳐다보았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다.

묵림이 얼마나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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