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22화 (322/357)

322. <검은 숲(2)>

“이거…… 이걸로 주세요.”

성모란이 집은 얇은 무복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렇게 얇은 천은 독충의 이빨에 금방 꿰뚫립니다.”

“…….”

성모란의 벌벌 떨리는 손이 이내 그 옆에 있는 빳빳하고 두꺼운 무복을 집었다.

솜이 들어 있지 않아 추운 날씨에는 별 효용성이 없겠지만, 곤충이나 독물의 이빨을 막는 데 효과가 있을 터였다.

“이, 이걸로 열 벌…… 아니 스무 벌 주세요.”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단체복 맞춥니까?”

“아니…… 그래도 한 달이나 버텨야 하잖아요. 하루에 하나는…….”

“애당초 묵림에 들어갈 땐 간편한 봇짐 하나가 한계입니다. 그러기 위한 훈련이고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던 성모란의 눈초리가 사납게 바뀐다.

“근데 그거 진짜 확실해요?! 묵림으로 가는 거 진짜 확실하냐고요!”

“보면 모르겠습니까?”

내가 포목점에 있는 학관생들을 가리켰다.

구파일방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성모란이 집은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고르고 있었다.

“……아아.”

성모란이 어지러운 듯 잠시 비틀거렸다.

“말도 안 돼…… 왜…… 왜…….”

눈앞에 닥친 냉철한 현실을 실컷 도피해 보지만 정해진 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 바,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예요?”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지만 별반 가능성이 없기는 건 매한가지다.

‘아마 다른 곳을 갈 예정이었어도 결국 묵림으로 선택을 했겠지.’

그냥 한 달간 버티기만 하는 화막이나 빙해와는 달리 묵림은 추가 점수 획득이 가능하니까.

지난 한 학기 동안 교관들은 용을 쓰며 난리를 쳤지만 결국 중위권의 순위만 변경되었을 뿐, 최상위권과 최하위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례로 내가 그렇다, 본래 수석 점수를 유지하던 나는 1학기 평가에서 간발의 차로 종합 이(二) 등이 되었다.

나 대신 일 등이 된 것은.

“진 시주, 신발도 이런 두꺼운 것이 좋겠습니까?”

……저 더러운 대머리.

“왜 그걸 저에게 묻습니까? 일각 스님을 총애하는 교관들에게 가서 물어보시지요.”

“……지, 진 시주. 그건 어디까지나 제 의중이 아니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유일하게 평가 막판 뒤집기를 할 수 있는 대여정의 장소로 묵림보다 나은 곳이 없는 것.

게다가 교관들이 몰래 학관생들을 도와주기에도 딱 좋고.

‘근데 이상하단 말이지, 교관까지 교체해 놓은 것치곤 그리 노골적으로 나오진 않았단 말이야.’

교육각에 힘을 써서 교관과 교두들을 싸그리 교체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내가 협박한 것이 있긴 하지만 천하의 구파일방이 그런 일로 고개를 숙인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나도 가만히는 안 있었겠지만.’

정말 너무 노골적으로 나온다면 본보기를 한번 보이려 각오도 했었다.

그들 전체로 보았을 때야 내가 손을 쓴다고 해도 큰 위협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교관 개개인이 나서서 나와 태을문을 손보겠다고 설칠 일은 줄어들 테니까.

아무튼 덕분에 대표단 인원들의 성적도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을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아마 특훈의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애들 상태가 하루하루 바뀌고 있으니까.

‘근데 은호 이 자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지난 학기부터 가장 많이 바뀐 점을 꼽자면, 동룡이의 키가 부쩍 컸다는 것과 은호가 완전 집돌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기숙사에서 거의 나오질 않는다.

학관 수업과 내가 정한 특훈 시간엔 꼬박꼬박 나오지만 그 외의 시간은 기숙사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중.

들리는 말로는 매번 만서고에서 책을 잔뜩 빌려다가 온종일 읽고 있다는데…….

회시나 향시를 치를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흐음…….

‘빌어먹을 놈이 예전부터 그랬음 얼마나 좋아? 그럼 외당 일을 돕는 건 녀석이 했을 텐데.’

아무튼 이대로라면 마지막 대여정에서 점수가 아무리 뒤바뀐다 해도 태을문의 제자들이 지부까지 떨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

그뿐일까. 되려 좋은 점이 많다.

우선은 묵림에 가면 자연 독 내성을 올릴 수가 있다.

‘천연 독 창고나 마찬가지니까.’

독과 암기는 강호 생활을 하며 가장 주의해야 할 두 가지다.

암기에 대한 방비야 훈련으로 할 수 있다지만 독에 대한 훈련은 딱히 할 방도가 없다.

모든 해독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이상 내성을 키울 수밖에 없는데, 내성을 키우기 위해선 약한 독부터 천천히 중화시키는 연습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듣기만 해도 돈이 많이 나갈 듯한 연습 아닌가.

그러니 이는 사천당가나 만독문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일반 무인이 접할 수 있는 연습은 아니다.

그런데.

묵림에 가면 이게 공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온다.

‘뭐, 목숨이 담보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당 가능한 수준이니까.’

옆에서 성모란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서둘러 표정 관리를 했다.

두 번째론 영단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사시사철 더운 기운과 거대한 영맥의 흐름으로 묵림에선 평범한 생명체도 영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교관들이 이곳을 막판 뒤집기 하기 위한 곳으로 선정한 데에도 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다.

버티기만 하는 화막이나 빙해와 달리 묵림에서 마물이나 영물을 잡으면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이런 다양한 장점에 비하면 고온다습의 기후나 벌레가 수없이 많이 나온다는 단점은 별로 중요치 않은 게 된다.

마침, 장우재가 심각한 얼굴로 신발을 고르고 있기에 다가갔다.

“오른쪽에 있는 게 좀 더 좋을 거야. 빳빳하긴 하지만 미리 길들여 놓으면 발목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거든.”

“응? 대표님.”

“그리고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말씀하십시오.”

난 품에서 풍령을 꺼내어 장우재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거, 벌레도 막아주는 거 맞지?”

“……모든 건 아니지만, 작은 것들은 막아주는 편입니다.”

“그래? 그것참 잘됐군!”

내가 장우재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자 그는 어쩐지 슬픈 눈으로 내 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주일 뒤, 교무부에서 대여정의 장소를 공개했다.

묵림(墨林)

예상대로 큰 변화는 없었고.

“으아아아악! 말도 안 돼!!!!”

성모란은 눈물까지 쏟으며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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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림(墨林)

운남성 끝자락에 위치한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밀림.

어지간한 도시에 스무 배는 달하는 거대한 크기의 분지에 형성된 밀림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곤충과 동물들이 서식하며, 그 숫자만큼이나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독충과 독물들이 즐비하다.

사시사철 더운 날씨 덕분에 묵림에 사는 생명체들은 추위라는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균 수명을 훨씬 상회하는 삶을 살고, 그 과정에서 영맥의 영향을 받아 영물로 변화하기도 한다.

영물이라고 하면 소똥도 구워 먹을 무인들이지만 여기 묵림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일단 거대한 영맥은 밀림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지형과 지물, 더 나아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방위를 측정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무효화되고 지형지물들은 천연진을 일궈, 들어온 이들로 하여금 같은 장소를 계속 맴돌게 만든다.

더구나 분지를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 또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한번 방향을 잃은 이들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극히 낮아진다.

거기에 영물의 출현이 잦다곤 하나, 방만한 환경 속에서 자라 마물이 된 것들이 훨씬 많기에 실제 영단이 발견되는 일은 드물다.

어지간한 산꾼이나 약초꾼들도 함부로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고.

강해지기 위해 들어갔던 무인들이 속세와 인연을 끊어버리는 일이 너무 허다해 무림맹은 이곳을 금지(禁地)로 선정해 세상과 분리시켰다.

“하아…… 벌써 더워 죽을 거 같아.”

운남성 곤명을 거쳐 경홍에 도착한 학관생들은 다들 변화하는 기온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를 태울 듯 뜨겁게 쬐는 태양 빛에 더해 숨이 막힐 듯한 습한 공기는 숨 쉬는 데 영향을 주고 있었으니까.

“성 소저, 걷은 옷은 다시금 내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 근방에도 독충들이 많습니다.”

웃통을 깐 거한의 말에 성모란이 얼굴을 찡그렸다.

“양 대협께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요?”

성모란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이는 남권문의 양자평.

“저희 남권문은 평소 외공 수련을 병행합니다. 밀림을 오가기 위해선, 아무리 엄청나다고 해도 내공만으론 안 되니까요.”

“헤에, 남권문의 사람들은 묵림에 자주 오가나요?”

성모란이 신기한 듯 묻자 양자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적으로 파악을 해두지 않으면 언제 묵림에서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남권문은 무림맹에게서 묵림을 관리하는 권한을 대행 받은 문파다.

백팔봉의 한 축을 맡고 있으며 운남성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을 가지고 있는 문파.

그 남권문이 이번 대여정의 안내를 맡았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되려 쉬이 볼 수 없는 경치에 한번 오신 분들은 다시금 이곳을 방문하는 게 소원이라고 하니까요.”

“으…… 아무리 멋져도 다시 오고 싶지 않을 거 같은데.”

“하하 저를 믿어 보십시오. 다시 오고 싶어 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여 소협들이었으니까요.”

“……그래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성모란.

그런 성모란에게서 시선을 뗀 양자평은 신기하다는 듯 우리 일행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학관생들이 이리 선두에 서는 경우는 잘 없는데. 교관님들의 총애를 많이 받으시나 보군요.”

양자평의 말에 우리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반대의 위치였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거지만.

“산에 오르면 조금 더위가 가실 겁니다. 조금만 더 힘내시지요.”

“산까지 올라야 해요?”

“묵림이 워낙 거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엄연히 분지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만독문의 사람들은 이게 자연이 만든 거대한 고독(蠱毒) 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벌레와 독 이야기가 나오자 성모란의 안색이 다시금 하얗게 변했다.

그렇다 해서 발걸음이 멈추진 않았다.

전원 무인인 우리 행렬은 평범한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그렇게 정상을 찍고 조금 내려가기 시작하자 양자평이 한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와…… 무슨 이런 경치가…….”

끝도 없이 늘어진 거대한 밀림 위로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구름 사이로 비추는 빛이 묵림을 비춘 탓에 경치는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다.

양자평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아름다움은 저 아래 있지요.”

선두조인 우리는 가장 먼저 산을 내려와 묵림에 들어섰다.

일단은 본대가 오기 전까지 노숙할 만한 위치를 찾고 주변을 정리해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

“과거 학관의 기수들이 사용한 장소가 있을 겁니다. 잡풀이나 나무를 좀 제거하면 하룻밤 머무는 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양자평의 말대로 묵림 초입에 이르자 어느 정도 평탄화가 된 곳이 나타났다.

“여기를 썼던 거예요?”

다른 밀림에 비해 확연히 수풀의 밀도가 낮은 지역.

“전전전 기수였으니까 한 십이 년 정도 되었겠군요.”

“……그런 것치고는 나무가 너무 크게 자랐는데요?”

성모란의 말대로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의 두께가 심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

“묵림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리 무리도 아닙니다. 여긴 겨울도 없고, 사람의 손도 닿지 않으니까요.”

양자평이 정색하며 덧붙였다.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분명 그만큼 위험합니다. 절대로 강호에서 통하던 상식으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 그래요?”

양자평의 말에 성모란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렸다.

“대부분의 뱀들은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몸을 숨기는 데 아주 능숙하기 때문에 주위를 항시 잘 살피셔야 합니다.”

성모란이 고개를 몇 번이나 크게 끄덕이자 양자평이 흐뭇하게 웃음을 내보였다.

그때.

스륵

양자평이 짚은 나무 위에서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내려오다가 번개같이 양자평의 목을 깨물려 했고.

휘익.

나는 비룡조를 쏘아냈다.

“허억!”

“꺄아아아악!”

기겁하며 바닥에 쓰러진 성모란과 양자평.

양자평은 급하게 자신의 목을 확인했지만, 뱀이 물지 않았다는 사실에 작게 안도했다.

나는 비룡조에 묶여 내 발치에 제압되어 있는 뱀을 쳐다보며 양자평에게 질문했다.

“이거 독 있는 겁니까?”

“……!”

고개를 돌린 양자평이 내 발치에 잡혀 있는 뱀을 보곤 멍한 눈으로 되물었다.

“바, 방금 그걸 잡은 겁니까?”

뭐야, 얘 표정 왜 이래?

“네.”

“대체 어, 어떻게 구분한 겁니까?”

어떻게 구분했냐니.

“그냥 보이던데요?”

“…….”

“그래서 이거 독이 있습니까?”

나는 뱀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곤 다시 양자평에게 물었다.

“혹시 영약도 있을까요?”

거참, 답답하게. 빨리 답해달라고.

내가 뭐 때문에 선두조를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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