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그림자 추적>
“뭐 나왔어요?”
성모란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금 적봉환을 바라보자 어느새 진동이 멈춘 상태였다.
‘착각인가?’
팔에 고정되지 않은 채 달려 있는 팔찌 아닌가.
잘못 움직이다 보면 흔들릴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저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기는 개뿔.’
현실 도피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문제를 올바르게 직시할 때만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
우연일 수도 있겠지.
어쩌다 팔찌가 흔들렸을 수도 있겠고.
……그런데 빌어먹을 원숭이 입에서 ‘천마’라는 불경한 말이 나왔잖아.
이렇게 끔찍할 만큼 불길한 일이 두 번이나 연달아 일어났는데, 이마저도 긍정적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그건 머리가 이상한 거다.
그리고 난 머리가 이상한 놈이 아니고.
“본대는, 어디로 갔지?”
낙오자들을 채근해 봤지만, 쓸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방향 감각을 잃은 놈들을 데리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엽사의 멱살을 잡았다.
“……시, 신령의 저주야……, 시, 신령이 우릴 보고 있어…….”
사람이란 자고로 너무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 머리가 이상해진다.
전장에도 이런 인간들이 무척이나 많다. 평생 죽음과 함께 살아왔음에도 막상 예상치 못한 불행의 순간이 닥치면 정신을 놔버리는 놈들.
이런 놈들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아군에게 더 큰 문제가 생긴다.
“진 공자, 지금 뭐 하는…….”
“다행이지. 치료법을 배워놔서.”
“……시, 신령의 저주…….”
퍽!
놈의 고개가 반쯤 꺾이고 넋 놓고 있던 눈빛이 살짝 돌아온다.
“꺼어억…… 시, 신령님이…….”
“신령 사냥하겠다고 으스대던 놈이 왜 이제 와서 저주에 벌벌 떨고 난리야.”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하네.
퍽! 퍽! 퍽! 퍽!
가장 아픈 요혈만 두들기자 엽사 놈이 손을 버둥거렸다.
“그, 그만! 그만하시오! 지금 대체……!”
오, 드디어 머리가 고쳐졌나 보다.
나는 그를 향해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물었다.
“본대는 어디로 갔지?”
“…….”
아직 후유증이 남았나?
후유증엔 매가 약…….
“마, 말하겠소! 말할 테니…… 주먹은 내리시오.”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던 엽사가 파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저, 저쪽…… 저쪽으로 갔소.”
“앞장서.”
“쪼, 쫓아갈 생각이오? 미쳤소? 그리고 방향을 안다 한들 이미 반나절의 거리가 생겼는데 어떻게 쫓아간단 말이오……!”
어디서 약을 팔아.
“너희들은 서로 위치를 추적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 거 아냐. 내가 모를 거 같아?”
미궁 같은 이곳으로, 미아가 되지 않도록 대비조차 하지 않고 들어올 놈들이 아니다.
“…….”
대답이 없기에 피가 묻은 주먹을 다시금 들어 올리자 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알겠소. 안내하겠소. 대체 백도 대표라는 인간이…… 아, 아니오! 아무 말도 안 했소……! 저어, 그리고 난 절대 앞장은 서지 않을 것이오…….”
엽사 사내의 멱살을 놓아주자 그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대체 뭐예요?”
성모란이 못 볼 꼴이라도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교관들을 쫓아갈 생각이에요? 교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자기들을 방해했다고.”
“제 예상이라면 교관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문제 제기도 정말로 큰 문제가 없을 때나 하는 거니까.
#
낙오자들이 합류한 무리의 이동 속도는 느렸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이고 지며 천연진을 건너가야 했으니까.
더구나 그 와중에 마물도 만났다.
그간 찾으러 다닐 땐 잘 보이지도 않는 놈들이 한 번에 두 마리나 나타나 무리를 당황케 만들었다.
“조져!”
“넷!”
물론 마물 사냥에 숙달된 조원들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리는 엽사들이 서로를 추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천리향을 바탕으로 교관들을 쫓았다.
그리고 또 다른 낙오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건.”
“……문제가 크겠는데요?”
이번에 발견한 낙오자들 사이에선 사망자가 셋이나 나왔다.
낙오된 이들 대부분 또한 극심한 수준의 부상을 입은 상태.
성모란이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터트렸다.
“아무리 영단에 눈이 멀었더라도 이건 선 넘은 거 아니에요?”
나도 동의하는 바다.
아마 교관들도 동의하는 바겠지.
아무리 영단을 얻는다 한들, 학관생들이 이렇게나 죽어버리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 테니까.
“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소운?”
부상당한 이들 중 그나마 제일 멀쩡해 보이는 학관생을 깨워 내막을 들으려 했지만.
“신령…… 사냥은 해선 안…… 됐어. 우리가 잘못한 거야…….”
이 말만을 겨우 내뱉고는 혼절해 버렸다.
양자평이 침음을 흘리며 내게 물어왔다.
“어떻게 하죠?”
“일단 부상자들을 챙겨서 움직이도록 하죠.”
벌써 부상자의 수가 멀쩡한 이들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면 마물을 상대하기 버거울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놔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시체는…….”
“일단 두고 갑니다. 나중에 남권문의 도움을 받아 회수하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던 양자평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이동하기 위해 대형을 꾸리는 도중.
치르르.
크으으르릉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수풀 사이로 다섯 쌍의 누런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는 경계태세를 갖춘 후 주위를 향해 조용히 외쳤다.
“전투준비!”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섯 마리의 마물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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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속도는 점점 늦어졌다.
낙오된 인원들 대부분이 부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하거나 전력상 도움이 안 되는 이들인데, 그 와중에 마물은 계속해서 튀어 나왔으니까.
“대체 왜 점점 많아지는 건데……!”
성모란이 악을 써보지만, 그 말을 듣고 예를 갖춰 뒤로 물러나는 마물이 있을 리 없다.
되려 우리가 곤란한 상황임을 알고 있다는 듯, 더욱 거칠게 공격하거나 빈틈을 노려 부상자만 공격하는 마물도 있었다.
“후우……!”
벌써 처리한 마물만 열 마리에 다다른다.
쩌어억.
독단을 흡수할 여력 따윈 없었다.
워낙에 보는 눈도 많았고.
좁쌀만 한 영단도 나눠서 조원들들에게 복용시켰다. 지금 당장 운공을 할 여력 따윈 없으니까.
그때.
“그건 뭐지?”
팔이 부러져 부목을 대고 있던 학관생 하나가 우리 행동을 지적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마물의 내단.”
“……마물의 내단이라니. 그런 게 있는 줄은 몰랐는데.”
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여태껏 그것들을 너희만 먹어 온 건가?”
음, 역시 개소리를 하고 싶었던 게로구나.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뭐 어쩔 건데?”
특혜 의식이란 건 머릿속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있기에 어떤 순간에서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
“뭐?”
“네놈이 지금 흡수할 수는 있나? 내단이라 하지만 독성이 있을 텐데? 아, 설마 흡수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달라는 건 아니겠지?”
“…….”
반박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지우지도 않는다.
그러곤 고작 내뱉는다는 말이.
“흥! 역시 잡것들은 상종할 게 아니라더니.”
보다 못한 성모란이 벌떡 일어나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니가 그렇게 애정하는 정도회 다른 인원들은 어디 갔냐?”
“…….”
“너를 버리고 간 정도회 대신 너를 수습해 준 건 우리야. 아직도 모르겠어? 아니면 묵림에 혼자 남아 마물의 맛있는 밥이 되어볼래?”
“……!”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깨달은 듯한 녀석.
놈의 표정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성모란의 말대로 우리의 말 한마디만으로 놈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이니까.
성모란이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멱살 잡은 손을 툭툭 털어내며 나직이 읊조렸다.
“넌 묵림 나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마라. 그땐 내가 널 천연진에 던져버릴 테니까.”
“…….”
성모란의 그 한마디는 효과적이었다.
여태껏 알게 모르게 불만을 터트리던 놈들이 입을 꾸욱 다물게 되었으니까.
나는 전원을 훑어보며 명령했다.
“다시 움직인다.”
힘들다고 쉬자는 말을 내뱉던 놈들도 더 이상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제 놈들의 목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내단을 먹은 사람들은 틈틈이 쉴 때마다 집중적으로 운공을 해라. 최악의 경우엔 쉴 시간이 조금도 없을지 모르니까.”
“진 공자, 이대로 괜찮은 거예요?”
성모란의 말대로 이렇게 계속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다.
“차라리 몇 명을 빼서 주둔지로 먼저 보내는 게 어때요?”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게 어찌 보면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교관들이 주둔지를 나온 이상 주둔지에서 도움을 받을 순 없을 겁니다. 이들을 두고 간다면…… 아마 반나절도 버티지 못할 거고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물들이 더욱 흉포해졌다.
인간을 경계하고 은닉하던 마물들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마경은 지옥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낙오된 인원들을 최대한 수습해서 주둔지로 가는 게 최선입니다. 다른 조원들이 더 피해를 입기 전에.”
성모란 덕분에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그렇게 마물 두 마리를 추가로 사냥하고 도착한 곳에는.
“흐음.”
처음으로 삼십 명에 달하는 대규모 낙오 집단이 있었다.
한쪽엔 학관생으로 보이는 이의 시체와 마물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낙오된 와중에 저들끼리 마물을 사냥하다 이리된 듯 보였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지?”
삼십 명의 인원들 중에서 책임자를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적대시하는 시선으로 우리를 노려보기만 할 뿐.
“말할 줄 아는 놈이 없나?”
다시금 묻자 한쪽에서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승냥이 같은 놈이라니까.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대.”
도사들이 관을 쓰기 위해 머리를 뒤로 당기면 눈과 이마가 드러나면서 말머리 형상이 되어 종종 ‘말코 도사’라고 놀림을 받곤 한다.
근데 이놈은 코가 정말 말코처럼 생겼다.
“어이 말코. 네가 책임자인가?”
“…….”
“어떻게 된 거지?”
“하! 내가 말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나는 녀석의 코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코만 말코인 게 아니라 대가리도 말 대가리 수준인 건가?”
“뭐라?!”
“여기까지 오면서 총 다섯 구의 시체를 봤다. 모두 다 학관생들이었고.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나?”
“…….”
“설마, 교관의 명령대로 움직였으니 넌 잘못이 없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냐?”
순간, 말코 녀석의 코에 잔뜩 주름이 졌다.
와, 진짜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이거 완전 양심 없는 미친 새끼네.
“신령이고 나발이고 사람이 죽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계속 신령을 쫓고 있었던 거면, 교관 새끼가 흑도의 간자라고 봐야 해.”
내가 뼈를 때리자, 방금까지 의기양양하던 말코 녀석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절규한다.
“우, 우리 선배님이 그러실 리 없다!”
아, 이놈은 청성파 놈이었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놈의 시선이 우리가 데려온 낙오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러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더니.
“우, 우리도 따라가도 되냐?”
세상 불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어휴, 병신.
역시나 아직 미성숙한 애새끼들일 뿐이다.
교관이라는 노진하 새끼의 꼬임에 넘어가 영문도 모른 채 죽다 살아난.
나는 뒤돌아서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똑바로 따라온다면.”
“……신령을 쫓다 놓쳤는데. 쉬고 있는 사이 제 새끼인 듯한 놈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우리는 본대를 쫓질 못했고.”
나는 양자평을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야생동물들도 모성 본능이 있어 포식자들에게 쫓길 땐 제 새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는 게 본능일진대.
아무리 신령이라 하더라도 제 새끼를 데리고 다시 나타나다니, 말이 안 되지.
결국 애써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교관과 학관생들이 쫓고 있는 건 신령이 아니다.
“이 등신들은 대체 뭘 쫓고 있는 거야.”
머리 한편에서 어떤 ‘불길한’ 단어가 간질거리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정말 그렇다면…… 너무 비관적이잖아.
시벌, 아무리 내 두 번째 삶이 마신에게 저주받았다 한들. 그건 너무 심하지.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려 했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나. 중용이 최고라고.
나는 손뼉을 한 번 짝 치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동할 준비들 해라. 응급처치도 안 하고 여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낙오된 녀석들이 금창약을 받아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나는 마물에게 다가갔다.
말코 도사 놈이 치료하다 말고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 뭘 하려는 거냐?”
“뭐 하긴, 급해도 챙길 건 챙겨야지.”
물론 너희가 사냥한 거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