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분열(3)>
콰쾅!
바위가 바스러지고
퍼퍼펑!
나무가 폭발하여 가루가 된다.
채채챙!
날카로운 칼날과 범람하는 검기.
끄아악!
그 검기에 맞아 고혼이 된 시체.
“강 형!”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서 불만을 토로하던 이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하지만 시체를 부여잡고 슬픔을 받아들일 시간조차 부여되지 않는다.
“정신 차려!”
슬픔에 잠식되어 있다간 곧 자신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전쟁터의 참상이란, 과거와 현재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 같이 죽을 생각이냐!”
“진소운…….”
좌절하던 학관생을 일으켰지만, 제 실력의 반도 펼치지 못한다.
갑작스런 기습, 예상치 못한 친구의 죽음, 열악한 기후와 환경.
이 모든 것들이 혼재되며 이곳은 학관생들에게 지옥이 되었다.
“은호, 우리 조원들은?”
“검진을 맞춰 대응하고 있어요. 하지만 다른 곳이 무너지면 결국 위험해질 겁니다.”
“…….”
내 조원들에게 당장 달려가려 했지만 어느 정도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달려간다 해도 모두 죽은 다음이겠지.
‘기억해 내. 기억해 내.’
당장 내가 해야 할 것.
여기서 살아나가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나 혼자가 아니다.
내 사람들과 함께.
‘그래, 내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정리한 후에 은호에게 말했다.
“넌 조원들에게 돌아가.”
“대사형……!”
“그리고 우리 조원들이 절대 죽지 않게 챙겨.”
백호검진은 운용에 따라 묘리가 달라진다.
지금 은호가 있어야 할 곳은 조원들 사이.
“알겠습니다.”
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 뜻이 전해졌는지 녀석의 눈에서 결의가 느껴진다.
“대사형도 죽지 마세요.”
달려 나가는 은호의 뒷모습을 보며 태을진경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죽지 말라, 죽지 말라…….
옥청천상력이 발화하며 어둠이 물러간다.
나는 어느새 멀리 사라진 은호 녀석에게서 시선을 뗐다.
“당연하지.”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흑의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흡!”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려는 흑의인.
감회가 새롭다.
전생에서 물러나는 쪽은 언제나 우리였으니까.
그러니 그때 받은 것을 돌려줘야겠다.
“네놈들을 다 쳐죽일 때까지 난 죽을 생각 같은 건 없거든!”
서걱.
흑의인은 마지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잘린 목에선 피분수가 신호탄처럼 치솟아 올랐다.
#
촤르르르르.
옥청천상력을 두른 대천검법을 사방으로 흩트렸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옥청천상력의 빛에 짧은 순간 드러나는 모습을 눈에 담아 전생의 기억과 대조한다.
‘가벼운 은신술, 효율이 지나친 도법,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마기.’
전생에 무림맹 내에선 은밀늑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마교의 무력단체.
적음마랑단.
뚜렷하게 마기를 드러내지 않는 만큼 암행이나 암습에도 특기를 가진 놈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무력 단체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이곳저곳에 효과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분명 마기의 흔적도 있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지기 전에 생각을 멈췄다.
지금 당장은 이 빌어먹을 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
문제는 은신술을 생활화하는 놈들이 복장까지 검게 입어 더더욱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기감을 펼쳐 보아도, 학관생들과 뚜렷한 차이가 없는 만큼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크아악!”
“커헉!”
그 잘난 학관생놈들이 제대로 실력을 행사하지도 못한 채로 쓰러져 죽는다.
“……망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화려하게 불빛을 빛내는 것.
하지만 그럴수록 마랑단 놈들은 내 빛에 뒤따르는 그림자에 몸을 숨길 뿐이었다.
“진소운!!!!!”
그때, 웬 곰 같은 놈이 두 팔로 머리를 겨우 감싼 채 미친 듯이 내게로 뛰어왔다.
퍼퍽!
내 그림자에 숨어들던 마랑단 둘이 튀어 나가고, 나는 곧장 놈들을 향해 검을 쏟아냈다.
서걱, 서걱.
한 놈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다른 한 놈은 팔이 잘린 채로 다시금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둘 다 치명상을 입었음이 분명한데도, 신음 하나 내뱉지 않는다.
곰은 그 모습을 보며 질린다는 듯이 혀를 찼다.
“빌어먹을……! 어디서 온 놈들인지.”
곰 같은 사내는 다름 아닌 남화성.
“남화성. 왜 여기로 온 거냐?”
지금쯤 12봉성이랑 같이 있어야 할 놈이 여기까지 와 있다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진소운.”
나라면 모든 걸 알고 있으리라 단단이 믿고 있는 듯한 그 물음에, 싸우고 있는 와중임을 잊고 고개가 돌아갔다.
“……그걸 묻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냐?”
녀석의 두 눈에 어린 단단한 신뢰.
“이런 개판은 네가 전문 아니냐.”
……이거 칭찬인가?
아무튼 왔으니 써먹어야지.
“잘됐다. 지금부터 불을 질러라.”
“불?”
나는 고갯짓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뭐가 보여야 싸우든 말든 할 거 아니냐.”
그러자 남화성이 미간을 일그러뜨린다.
“묵림이 얼마나 습한지 모르냐! 장작을 떼도 연기만 나고 끝…….”
“누가 숲을 태우래?”
“……그럼?”
나는 바닥에 떨어진 횃불 하나를 발로 차 막사로 던졌다.
화르륵.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며 일대를 환하게 밝힌다.
방수를 위해 기름 먹인 천으로 만든 막사는 불길에 취약한 만큼, 횃불과 거리를 두어 설치해 놓는다.
그러니까 더없이 좋은 땔깜이라는 것.
불길에 휩싸인 막사에서 뿜어지는 연기에 남화성이 콜록거린다.
“자, 잠은 어디서 자냐! 콜록콜록.”
이 상황에서 잠타령이라니. 너무도 녀석다워서 오히려 힘이 나는 것만 같다.
나는 녀석의 뒷통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지옥에서 자는 게 낫냐? 이슬 맞으며 자는 게 낫냐?”
“……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지옥에 안 간다.”
“지랄.”
순간적으로 발화하는 빛 덕에, 어둠 속의 존재들과 싸우느라 애를 먹던 학관생들이 몸을 기민하게 놀려 마랑단의 검을 피했다.
이어 남화성이 나와 마찬가지로 막사로 횃불을 던지자 사위는 더 밝아졌다.
우리의 행동을 보고 드디어 머리가 차가워진 놈들이 있었나 보다.
“불! 불을 켜!”
“막사를 태워!!”
“빨리! 놈들이 은신술을 쓴다!”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주둔지 곳곳에서 환한 불길이 피어오른다.
한순간이지만 대낮처럼 밝아진 덕분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들……! 정체가 뭐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무당의 삼대검이다!”
“네놈들의 사문을 반드시 알아내서 복수할 테다!”
곳곳에서 반격을 시도하고 더러는 마랑단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세는 불리한 상황.
“남화성. 철순직은 어디 있지?”
“철 형? 철 형은 왜?”
“이대로 밤새 싸울 수는 없잖아! 찾아서 주둔지 중앙으로 와라.”
“……이 상황에서?”
“안전한 상황에서 일 하고 싶으면 글을 배워야지 왜 무공을 배운거냐!”
어쩐지 남화성의 어깨가 축 늘어진 듯했으나, 지금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일다경 안에 와라.”
“아, 알았다.”
태을팔만신보를 펼쳐 다섯 개의 환영을 만들며 소천검법과 대천검법을 연달아 펼쳤다.
촤르르륵.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전생에선 느낄 수 없었던 묘한 감각이 손끝에 어린다.
‘살인이 이런 거였나?’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는 유능감.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상대의 생사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전능감.
살인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묘한 양의 감각이 머리를 뜨겁게 만든다.
전장을 종횡하던 마인들은 이런 감각을 가졌었던 건가?
그래서 마인들이 전장터에서 그렇게도 웃었었나, 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푹.
급소를 찌른 적광검.
이대로 검을 뽑아내어도 놈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검을 반 바퀴 비틀었다.
퍼거거걱.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꺼져가는 불꽃이 신경을 태우듯 마랑단원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래, 끝까지 입을 열지 마라.”
뽑아낸 검으로 다시금 놈의 허벅지를 찌른 후 검을 비틀었다.
“크윽…….”
죽어가던 놈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마 멈춰가는 심장 탓에 머리도 더 이상의 자제력을 강제하지 못한 것이겠지.
옥청천상력의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던 놈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총 여덟.
허벅지에 박혀있던 적광검을 뽑으며 곧바로 만해천지검결을 펼쳤다.
촤르르르르륵
여섯 자루로 분화된 만검이 쌍천검결을 펼친다.
촤르르르르르르르륵!
수십 수백 자루로 펼쳐지는 환검과 진검의 검기가 마치 폭풍처럼 일대 공간을 잠식한다.
이윽고.
검기의 폭풍 속에서 검은 마기가 격렬한 대응을 해온다.
콰콰콰콰쾅
대기가 떠엉─ 떠엉─ 울리고, 충격으로 타오르던 막사의 불꽃이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놓칠 줄 알고……!”
나는 더욱 강하게 적광검을 휘어잡으며 놈들에게 검을 내리쳤다.
서걱, 서걱, 서걱.
핏물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세 구의 시체.
퍼퍼퍼퍼펑
이어 나머지 마랑단원들도 검기의 폭발에 견디지 못하고 신체 일부가 터져 나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둔지의 막사들 대부분이 불에 타오르며 더 이상 시야를 밝힐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옥청천상력을 회수하고 살기를 끌어올렸다.
끄아아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장내를 휩쓸고, 적광검은 평소보다 더욱 예리한 칼날로 변하여 마랑단을 조각 내기 시작했다.
“끄으윽!”
적광검에서 뿜어내는 살기 때문일까.
급소를 꿰뚫린 마랑단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다른, 몹시도 나약한 모습.
“……왜 웃지 않지? 네놈들은 싸울 때 웃지 않나?”
나는 적광검을 그대로 비틀어 또다시 뼈와 신경을 조각조각 내버렸다.
“끄아아악……!”
놈은 웃음 대신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죽어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마랑단원의 참혹한 모습에, 한 학관생이 질린다는 듯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 하고 있나. 죽고 싶은 거냐?”
“…….”
“살고 싶으면 검을 들고 주둔지 중앙으로 와라.”
“지금……?”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냐! 위험한 게 싫으면 검을 들지 말았어야지!”
“아, 알았다!”
어쩐지 겁에 잔뜩 질린 듯한 녀석을 뒤로하고 다시금 달려 나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머리가 빛나서 눈에 잘 띌 거라 생각했는데.
“일각!!!!”
대체 이 대머리는 어디 있는거람.
마랑단 놈들을 제거하는 틈틈이 정도회 인원들에게 일각의 위치를 물어봤지만, 제대로 아는 놈이 없었다.
더 어이없었던 건, 어떤 놈은 두렵다는 표정으로 이런 말까지 했다는 것.
“설마…… 일각을 제, 제거하려고?”
이 정신 나간 놈은 또 무슨 헛소리야?
“이대로 흩어져 있으면 죽는다. 학관에서 못 배웠냐! 일각 어딨어!”
“아아…… 그, 그런 거라면 저쪽…….”
시벌 멀리도 자리 잡았네.
주둔지 가장 외곽을 가리키는 학관생의 손가락질에 나는 마랑단 하나의 목을 베어낸 후 바닥을 박찼다.
“일각!!! 어디 있나!”
그렇게 일곱의 마랑단을 제거한 후에야 망할 대머리가 보였다.
그런데.
내가 빠르게 그에게로 짓쳐드는 순간.
그가 손에 쥔 봉으로 나를 매섭게 찔러대는 것이 아닌가.
‘이런 미친…….’
공중에서 겨우 몸을 틀어 봉을 발로 차고 거칠게 바닥에 착지했다.
“적·아도 구분 못 하는 거냐! 대머리!”
“진 시주?”
그제야 나를 알아본 일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가 너무 강해…… 당연히 적이라 생각했습니다.”
“…….”
“그나저나 진 시주, 이들의 손속이 매우 잔혹합니다. 더구나 죽어가는 순간까지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있고요.”
나도 오면서 다 상대해 봐서 알고 있다. 아니,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었지.
“주둔지 중앙으로 가지.”
“중앙으로요?”
“설명은 가서!”
일각이 뒤로 빠지면서 외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난 얼른 다른 학관생들에게도 외쳤다.
“중앙으로 모여! 여기서 계속 있어봐야 끝도 없으니까!”
퍼퍼펑!
퍼퍼펑!
일단은 이동에 중점을 두었기에 도망치는 마랑단을 쫓아갈 여유 따윈 없었다.
대신 눈앞에 보이는 적들은 확실하게 죽였다.
“끄아아악!”
“…….”
어쩐지 일각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이들도, 진 시주 검에는 비명을 지르는군요.”
뭐가 문젠지 모르겠기에 대충 무시하며 달려 나갔다.
그리고 주둔지 중앙에 다다랐을 때. 철순직과 남화성, 그리고 남궁선화가 도착해 있었다.
남궁선화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말했다.
“세력별로 묶을 생각이신 거 같아서 왔어요.”
확실히 영민한 사람이다.
마령고원에 들어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잘 왔습니다.”
조원들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은호와 금표가 있으니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 시주. 이 와중에 분열을 조장하겠다는 말입니까?”
일각이 대경하며 말했다.
의외로 철순직은 별말 없이 순순이 듣고 있었다.
서로 반대 아니었나?
“이제 와서 서로 손발도 안 맞춰본 놈들끼리 뭘 할 수 있는데?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그러라고 다들 모은 거니까.”
“……그후엔 어쩔 생각입니까. 이대로 저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누가 막는데?”
“진 시주……!”
몰아세워 맞을 때 잘 맞는 방법 같은 건 없다.
팔로 막으면 팔이 아프고, 머리로 막으면 머리가 아플 뿐이니까.
몰매를 맞을 때 제일 좋은 방어는 상대의 배때기에 송곳을 쑤셔 넣는 거다.
“지금부터 반격한다.”
어디 물러나는지 안 물러나는지 보자고 개자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