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43화 (343/357)

343. 사활(4)

종추악은 자신도 모르게 옷가지를 풀어 헤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품행을 방정히 하라는 사문과 사부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당장에 숨 쉬기 조차 힘든 고통 앞에선 손쉽게 증발해 버린다.

숨이 턱턱 차오른다.

체력적 한계도 한계이고, 내공이 바닥난 것도 영향이 있을 터.

하지만 이건 뭔가 다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치, 독무가 뿌옇게 퍼진 공간 안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분.

한 호흡을 삼킬 때마다 혈도가 갈갈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고.

한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기경팔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바닥에 나앉을 수도, 쉴 수도 없다.

절대 멈추지 말라는 단주의 명령.

물론 명령도 명령이지만, 멈출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마물.

정체불명인 적들의 습격.

채채채채챙!

당장에 쓰러져 기절해 버리고 싶은 종추악은 다시금 또 검을 휘두르고 휘둘렀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뒤에서 오는 이들에게 나머지 적들을 맡기며.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괜찮나?!”

위립군이 어깨를 두들기며 안위를 묻는다.

본인은 애당초 부상자였으면서.

“괘, 괜찮…….”

“잠깐 뒤로 물러나게. 내가 앞에 설 테니.”

“아니…….”

“지금은 같은 대원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면 오(五) 대 전부가 말살당할 수도 있어.”

“…….”

정도회 백도회 12봉성과 그 외 인원들까지 마구잡이로 섞어놓은 부대는 처음의 어수선함과 어색함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잘 융화되었다.

열악한 상황이 사문을 초월한 소속감을 갖게 만들었다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이 정도의 연대를 이륐다고 보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보단 오(五) 대의 역할과 그 구성원들의 면면이 융화를 더욱 용이하게 만든 것이라 봐야겠지.

이건 종추악만의 생각이 아닌 듯 다들 작게 감탄을 자아냈다.

“이게 이렇게 손발이 잘 맞을 일인가?”

“그러게 말이야. 나도 종남의 무공은 알지만, 우리 사문과는 궤가 다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게 말이야. 보자마자 오(五) 대에 집어넣길래 그냥 지 꼴리는 대로 넣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단주님 저 새끼는 대체 정체가 뭐지……?”

사람들의 시선이 행렬의 가장 앞으로 향한다.

태산처럼 든든해 보이는 단장의 모습.

가장 격렬한 전장의 선두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일각이나 남화성도 순번에 따라 자리를 바꾸고 있지만, 진소운만은 계속 앞서 달리고 있었다.

분명 지치는 것도 상처 입는 것도 자신들과 똑같았지만, 진소운은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불태우는 횃불처럼 어두운 길을 밝히고, 가장 앞에서 학관생들을 이끌었다.

그때.

“제길─ 제길─ 제길─.”

장시간의 전투로 근육에 힘이 빠져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점창의 군다성이 제 팔을 때리기 시작한다.

퍽! 퍽! 퍽!

종추악이 기겁하여 그를 말렸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놔! 나 점창의 군다성이야……! 내가 삼류문파인 태을문의 그늘에서 안도의 한숨이나 쉬어야겠어?!”

말은 거칠었지만 종추악은 그 속에 숨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분한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이.

경멸스러운 것이다. 진소운을 욕했던 자신의 과거가.

“…….”

종추악도 느끼는 감정이었기에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무식하게 제 팔을 때리던 군다성은 제 팔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는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좋아. 움직이는 군 교대해!”

군다성이 나아가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외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외곽을 맡던 부대원들이 단숨에 그를 밀쳐냈다.

“뭔 소리야. 차례 지켜! 아직 네 차례 올려면 멀었으니까.”

“그게 무슨…….”

“우리라고 마음이 편할 것 같아?!”

“…….”

묘한 일이었다.

서로 앙숙인 사문과 사문이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를 위하고 있었다.

제 사문의 사형제들을 위한 희생이 아닌, 부대원을 위한 희생.

이전에 한 번도 함께한 적 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다들 그게 당연하단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

‘대체 왜……?’

퍼퍼퍼퍼펑!

의문을 품던 종추악의 귓가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온다.

전방에서 들려온 폭발음에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쏠린다.

그곳엔.

“후욱…….”

마물과 혼재된 적들을 밀어내고 다시금 한 발 내딛는 진소운의 등이 보였다.

‘진소운…….’

어찌 제각기 사문도, 출신도 다른 이들이.

아니, 더 나아가 앙숙이기도 했던 이들이.

마치 한 몸처럼 서로를 위하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납득은 되었다.

저 작게 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터질 듯 뭔가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으니까.

종추악은 조금이나마 회복된 힘을 갈무리하며 다른 이와 교대를 했다.

이번에도 청성파 사람도, 정도회의 소속도 아닌 사람이었다.

#

전생에 나는 항시 뒤에 서 있었다.

태을문의 문도들이 계철영의 채근으로 전쟁터에 나갔을 때도.

나는 만통부에 처박혀 반복적으로 서류만 외우고 있었고.

소정대의 소속으로 고기방패가 되었을 때도.

소정대 가장 뒤쪽에서 빌어먹을 녀석들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태을문과 같은 삼류방파의 실전성 떨어지는 무공과 빈약한 내공은, 하급 무사들이 낭인판을 떠돌며 조악하게 만든 무공보다도 도움이 안 되었으니까.

[뒤로 빠져 있어 학사 새끼야!]

[정확히는 학사는 아니지. 공부는 못했으니까!]

[진 공자, 당신은 내 뒤에 서세요.]

평생을 잡초처럼 살아온 소정대원들과 가문을 잃은 모용설마저 항시 내 앞에 섰었다.

나는 가장 먼저 지쳤기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거였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음에도.

그렇게 죄책감을 품게 만든 원흉인 사문을 원망했다.

약함이 이렇게 죄악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랬기에…….

다시 생을 살게 된 후로 미친 듯이 영약을 찾아다녔었다.

다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지워지지 않는 악몽에 똑같은 악몽을 덧씌우고 싶지 않아서.

이번 생만큼은, 내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그렇게 애를 쓰고 또 발버둥 쳤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선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채채채챙!

검붉은 의복의 무인이 소천검법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다.

‘힘이 빠졌나.’

본래라면 단박에 베어내야 했을 놈인데.

놈이 옆으로 밀려났다면 다른 대원들에게 맡겼겠지만, 그놈은 나를 노리는 건지 뒤로 물러났다 다시금 달려든다.

“빌어먹을 새끼들!”

적광검을 찔러넣음과 동시에 녀석의 검이 마주 찔러 들어온다.

나를 죽일 수 있다면 자신들의 목숨 따윈 별거 아니라는 듯.

근데 계산이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

거 내 목숨이랑 니놈들 목숨이랑 가치가 같겠냐고.

“뜻대로 될 성싶으냐!”

적광검의 검로를 뒤틀며 놈의 품속에 파고든다.

아슬아슬하게 놈의 검이 목덜미를 스친다.

대체 몇 번째 상처인지 셀 수도 없다.

상처를 받은 대신 놈의 몸을 잡아 연화를 펼친다.

휙!

붕떠오른 놈의 몸이 학관생들 머리 위에 떨어지려는 순간.

퍼억.

뒤에 섰던 남화성이 녀석의 머리를 단박에 부순다.

“단주님, 속도가 느려졌어!”

이어 뒤따르던 이들이 병장기로 마인의 요혈을 마구 찔러댄다.

“개소리. 니들이 무리하는 거겠지.”

“슬슬 뒤로 물러나는 게 어떻습니까? 진 단주.”

‘단주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반말을 찍찍 싸갈기고.

존댓말을 하는 놈들은 ‘단주’라 부른다. 썩을 새끼들.

이런 오합지졸 등신 같은 부대가 과연 묵림을 탈출할 수 있을까?

엄숙한 군기는 곧 그 집단의 무력을 말해주는 건데 말이야.

“하긴 태을문의 제자치곤 그간 많이 무리했지.”

이번엔 유월문의 왕조은이 내 앞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언젠가 한번 환검(幻劍)이 뭔지제대로 가르쳐 주려 했지.”

화산파의 조개룡도 나를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단주 명령이 절대적이란 말 잊었나?”

“우리 사부가 태을문 제자 뒤에 숨었다는 걸 알게 되면 날 죽이려 할걸.”

저 새끼는 말을 참 싸가지 없게 잘하네.

“너무 그러지 마쇼. 세상 천지 가장 선두에 서는 지휘관이 어디 있다고.”

또 한 명 나를 앞서가며 그렇게 말을 남긴다.

마경이 다가올수록 적들의 공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대체 뭐야, 죽고 싶은 건가?

“이 새끼들아, 적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거 몰라?”

내 예상대로 마물들은 마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마물들이 있을 때는 마인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마인들과 싸우고 있을 때 나타난 마물들은 곧장 마인에게 먼저 달려들었으니까.

마경이 다가올수록 공격의 간격 역시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알고 있소. 알아서 이러는 거고.”

“……그게 무슨 소리……!”

그때 뒤에서 달리던 일각이 내 어깨를 짚었다.

“진 시주. 마경은 더 위험한 곳이라 들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정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정양은 무슨…….”

“그리고 뒤에 선다고 싸우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꼴에 정예들이라 이건가.

나는 어느새 전생과 마찬가지로 또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생처럼 무력함이 느껴지거나 우울감이 들진 않았다.

되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양의 감정이 들었다.

나는 바깥으로 삐져나오려는 그 감정을 목 너머로 삼켰다.

“단주라고 부르라고, 이 땡중아!”

“크크크…… 일각 스님 더러 땡중이라니. 소림사가 알면 기절을 하겠군!”

일(一) 대 대원놈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나.

한바탕 터진 웃음이 멎고.

“단주, 비밀을 지켜줄 테니. 나가면 술 사시오.”

“술?”

“비정식이긴 하지만 어쨌든 부대장이 된 거 아니오. 작전이 끝난 다음에 부대원들에게 술 사는 건 무림맹의 전통이고.”

하긴 이것 때문에 소정대 놈들도 대주 맡기를 싫어했지.

뭐, 지금은 넘치는 게 돈이니 술 정도야 사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나.

얼굴 마주 보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돌아가면 사주마. 먹다 뒈질 만큼 사줄 테니 제대로 싸우기나 해라.”

“어? 그것도 소속에 상관없이 사는 거요?”

화산파 조개룡이 휙하니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저, 저 명색이 도가 제자란 놈이…….

“앞에 적! 적!”

“어이쿠야! 이거나 처먹어라!”

살벌한 매화가 나풀나풀 날아가더니 마인의 가슴을 쪼갠다.

마인을 겨우 처리한 조개룡이 다시금 내게로 고개를 돌린다.

“후욱…… 진짜 사는 거 맞소?”

“그래. 대신 부대별로 사줄 테니, 실컷 마셔라.”

“흐흐. 우리 화산파가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지 보여줄 수 있겠군.”

그의 간드러지는 눈꼬리에 다른 대원들도 눈끝을 꿈틀거린다.

거 언제부터 친했다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썩은 미소를 나눈다.

심히 꼴보기 싫어 뒤쪽을 살피며 은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쪽은 어떠냐?

굳은 표정으로 달리던 은호가 움찔 놀라는 기색을 보이다가 눈을 마주쳐 왔다.

-피해가 있지만 괜찮습니다.

피해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피해?

-측면에서도 공격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태을문과 조원들은?

-괜찮습니다.

괜찮다. 괜찮다라…….

두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잘하고 있다.

-대사형…….

이어지던 전음이 뚝 끊긴다.

다시금 고개를 돌리니 은호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무슨 일 있는 거냐?

-……아닙니다. 조심하시라고요.

-네 걱정이나 해라.

-…….

콰콰콰콰콰쾅

폭발음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끊이지 않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죽음의 위기가 더더욱 커져가지만 발걸음은 멈출 수 없다.

멈추는 순간, 모두 끝장이니까.

#

이틀을 꼬박 달려 마경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흉폭한 마물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지만, 반대로 마인들의 습격은 점점 줄어들었다.

‘애당초 마경을 통과할 거라 예상치 못했겠지.’

그런 건 미친놈들이나 하는 선택이니까.

뭐, 내가 미친놈인 게 변수라면 변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경로로 움직이는 걸 알아차렸다면 부대 배치를 바꿨을 것이고 죽어라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테니까.

‘단 한 번……. 마지막을 노리겠군.’

내가 마교라면 어차피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못하는 학관생들의 발을 최대한 묶고, 마지막 한 방을 노릴 것이다.

마경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단 한 방을.

뒤쪽에서 어느 정도 체력을 비축했기에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어엇, 단주 왜 앞으로 나오셨습니까? 거참, 뒤에 박혀 계시라니까.”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저런 농담이라니.

익살적인 감각이라곤 일절 없는 놈이네.

“준비해라.”

“응?”

“놈들이 올 거다.”

“아무것도 느끼지…….”

말을 하던 왕조은이 이내 입을 다문다.

그리고 침묵은 금세 일(一) 대부터 시작해 전 부대로 퍼진다.

“하긴, 갑자기 놈들 공격이 줄어들긴 했지.”

“시부럴, 살 떨리네.”

“대체 얼마나 이 숲에 숨어 있었던 거지……?”

공기가 무거워진다.

방금 전까지 사지(死地)를 넘어왔던 놈들이 다시금 죽음을 느낀다.

행렬은 조악한 농담마저도 내뱉지 않고 침묵에 잠겼고.

숲속에는 학관생들의 발소리만 울려퍼진다.

나는 위로가 되지 않을 위안의 말을 내뱉었다.

“다들 보았지. 마물은 우리보다 적을 먼저 공격한다. 마경 안으로 들어가면 최소한 마물만 상대할 수 있어.”

“…….”

역시나 무거운 공기는 가시지 않는다.

그때.

“그래! 차라리 마물을 상대하는 게 낫지!”

옆에 서있던 남화성이 어색하게 말을 받아쳤다.

이어 장광보가 말을 잇는다.

“맞는 말일세! 마물들은 최소한 울음소리는 터트리잖아!”

“그렇소……! 차라리 그놈들이 낫지!”

“다 죽여버리자고!!!”

여기저기서 어색하고도 엉성한 엄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이것으로 되었다.

어차피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면 또 정신없이 싸울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싸우다 보면 또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일(一) 대와 이(二) 대 구분 없이 멀쩡히 싸울 수 있는 놈들이 앞으로 나온다.

“허억, 허억, 허억.”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놈이 그나마 멀쩡히 싸울 수 있는 놈이란 사실이.

우리 부대가 그만큼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한테 환검이 뭔지 알려주겠다는 놈은 어디 갔나? 화산파의 제자가 벌써 지쳤나?”

“…….”

“……죽은 거냐?”

“……좀 쉬었다 오겠다는군.”

“그런가…….”

나중에 술자리에는 못 오겠군.

화산파의 주량을 보여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더니…….

빌어먹을.

“으아아악!”

소리를 내지르고 나니 터질 것 같은 가슴속 분노가 조금은 내앉는다.

너무 정신없이 싸워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이래서 지휘관은 뒤에 서 있으라 했던 건가?

나도 이제 모르겠다.

내 사람들을 위해선.

어떻게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놈들도 전생에 똑같은 짓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놈들처럼 일방적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그러니까 부대에 속한 이들이, 이제는 내 부대원이 되어버린 탓일까?

아니면, 직접 죽는 꼴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걸까.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던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두근.

왜 이럴까.

정도회건, 백도회건, 12봉성이건.

과거엔 그 누구도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았는데.

두근-

태을진경을 아무리 되뇌고 되뇌어 봐도 심장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다.

마치 친우의 죽음을 목격한 기분이다.

친구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근--!

어쩌면 마기에 중독되어 버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놈들의 마기는 머리를 이상하게 만드니까.

그래,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

적봉환도 해독하지 못하는 마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든.

“으아아아아아아악!”

더 이상의 죽음은 지긋지긋하다.

내 사람들도.

나와 경쟁하던 이들도.

나를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 누구가 되었든.

두근---!

더 이상 시체로 변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 나는 더 이상 이런 꼴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단주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짚으며 턱을 까딱한다.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이윽고 단단한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침을 삼키며 자신들의 병장기를 꽉 틀어쥔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전방에서 난 이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결전.’

여태껏 습격해 온 이들의 목적이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함이라면, 방해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진영을 재정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천라지망을 위해 산개했던 부대를 한곳에 모으기 위한 재정비.

쿵. 쿵. 쿵. 쿵.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지며, 천연진이 해진 된다.

이어.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어두운 숲속에서 횃불들이 일제히 켜지기 시작했다.

수없이 일렁이는 불꽃을 볼 때마다 생명력을 꺼트려 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꾸욱 눌러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저놈들을 지옥에 처박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가 그 지옥불이 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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