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복수(3)>
“잘 좀 풀어봐!”
“…….”
“소림에선 미세 기운 조정 안 배워?”
“배, 배웠습니다. 물론 좋은 성적을 성취하기도 했고요.”
“그럼 왜 못 푸는데!”
일각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 이건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 만년토웅의 살점에 파묻혀서 잘 안 빠지기도 하고요.”
“그걸 해결하는 게 실력인 거지!”
“그, 그럼 진 시주…… 아니, 진 단주가 해 보십시오.”
“시발 넌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나는 만년토웅을 잡느라 걸레짝이 된 손을 보였다.
“……그렇게 심하게 다치진 않은…….”
“뭐라고?”
“아, 아닙니다. 이게 왜 안 풀리지? 끄응…….”
아이고, 내 팔자야.
일(一) 대주라고 앉혀 놨더니만 천잠사도 못 풀어가지고 낑낑대는 꼴이라니.
“솔직히 만년토웅에게 맨주먹으로 달려든 것치곤 꽤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언제 상처가 다 회복된 거지?
“……내가 하고 싶어서 달려든 거 같아?”
“그래도 다행입니다. 살아계셔서……. 단원들이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다 같이 오겠다는 걸 겨우 말렸고요.”
“…….”
도망가라 했으면 도망이나 열심히 칠 것이지 또 뭘 돌아온대.
나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그럼 이거나 빨리 풀어! 이러다 마물 만나면 또 나 두고 도망갈 생각이지?”
“두, 두고 도망간다니요……! 아니, 애당초 명령을 내린 건 진 단주 아닙니까!”
“가란다고 진짜 가? 의리 없는 새끼들.”
일각의 두피가, 피범벅이 되었을 때보다 더 새빨개졌다.
“아, 아니! 상명하복……. 와……. 진 단주…….”
“빨리 풀기나 해!”
내 윽박에 진땀을 뻘뻘 흘리던 일각은 결국 이각이나 지나서야 겨우 엉킨 비룡조의 천잠사를 풀어냈다.
나는 숨을 고르고 있는 일각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서 기운 조정할 줄 안다고 말하지 마라. 소림의 이름에 먹칠만 할 것 같으니까.”
“…….”
그러나 내 핀잔에도 말이 없는 일각.
뭐야, 삐진 거야?
음, 아무리 그래도 소림을 언급한 건 좀 선 넘었…….
“진 단주. 본인을 조금 더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갑자기 뭔 소리래.
“가끔 보면 너무 위태로울 때가 있습니다. 마치 제 몸을 불태워 어둠을 밝히려는 촛불처럼.”
일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안쓰러운 빛을 품고 있었다.
“불안합니다.”
불안하다니. 대체 뭐가…….
“그 불길이 너무 강해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난 녀석의 말에 잠시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는 괜히 피식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정도회 입장에선 그게 더 좋은 거 아냐?”
“누군가는 그걸 바랄지도 모릅니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짜 그런 걸 바라는 놈이 있다니 조금 상처인데.
“거 말이 좀 심하…….”
“하지만 전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부디 진 단주가 우리 옆에 오랜 기간 함께 있었으면 합니다.”
그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해진다.
이윽고 그가 올곧은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 왔다.
“보고 싶어졌으니까요. 진 단주가 앞으로 어떤 길을 열어가는지.”
갑작스런 낯간지러운 말에 닭살이 돋는다.
나는 괜히 고개를 돌리곤 툭 내뱉었다.
“그럼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하든가. 일각 당신이 만년토웅 잡았으면 내가 목숨 걸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아니, 애당초 그런 괴물을 잡는 진 단주가 이상한 겁…….”
“됐어.”
일각의 말을 끊고 다시금 전방을 살필 때.
“뭐 하냐?”
그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부축하려 했다.
“걷기 힘들지 않습니까. 제가 업도록 하지요.”
“아니, 업는 건 업는 건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잖아.”
“무얼…….”
난 만년토웅을 가리켰다.
“???”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일각.
소림에서 풍족하게 자라서 뭘 챙겨야 할지 모르나?
하여간 결핍 없이 자란 놈들은 안 된다니까.
“기껏 사냥했는데 내단 챙겨야지.”
“…….”
“뭐 해.”
“……승려에게 동물의 배를 가르라는 겁니까?”
아, 그건 좀 그런가?
근데 어쩌겠어. 난 도저히 움직일 힘이 없는걸.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지금은 정도회의 일각이 아니라, 사활단 일(一) 대 대주 일각 아니야?”
“…….”
“그럼 상명하복이 먼저지?”
“아깐 또…….”
“나 대신 손만 빌려준다 생각해. 어차피 내단은 내 꺼니까.”
일각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른 놈이 왔으면 분명 나눠달라 했겠지.
#
만년토웅의 배 안에선 내단이 나오지 않았다.
그 손톱만 한 내단도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믿기지 않기에 내장을 다 끄집어 내게 하고, 다시 처음부터 뒤졌지만 결국 내단은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혹여나 몰래 일각이 내단을 먹은 거 아닌가 의심해 봤지만.
“나무아미타불…….”
일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더구나 양팔에 잔뜩 피가 묻었는데, 몰래 먹었다면 흔적이 남았겠지.
“아미타불.”
“시끄러!”
“진 단주가 더 시끄럽습니다. 욕 좀 그만 하시지요. 사람의 습이란 그가 반복하여 내뱉는 말에 따라…….”
“너라면 안 억울하겠냐? 목숨을 걸고 만년토웅을 잡았는데 손톱만 한 내단 하나가 안 나오다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다 부처님의 깊은 뜻이…….”
“지금 부처님 얘기 하지 마! 진짜 부처님도 원망할 거 같으니까.”
“…….”
사실 밤을 새워서라도 살펴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 이상 일행과 멀어졌다간 사활단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진 단주, 업히시지요.”
사활단이 길을 열며 갔던 덕분에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당초, 길이 없었으면 일각이 혼자서 올 수도 없었겠지.
꽤나 빠른 속도로 걷고 있는데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위아래로 들썩일 법도 한데 마치 빙판 위를 미끌어져 가듯 부드럽다.
금강부동신법에 이런 효용이 있었을 줄이야.
역시나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가.
소림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속도가 슬쩍 느려진다.
“뭐야, 벌써 지친 거야?”
반짝이는 머리를 격해서 진중한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하필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가.
이래서 전쟁터에서는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되는 건데, 쯧.
“진 단주는, 그들이 누구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게 중요한가?”
“…….”
지금 업혀가는 게 꽤나 편해서 그의 부동심을 흔들리게 만들고 싶진 않단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살아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냐?”
역시나 일각의 신형이 조금씩 흔들린다.
덩달아 편안했던 내 몸도 조금씩 들썩거린다.
걸음에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다니, 이래서 소림의 무공은 까다롭다니까.
흔들리는 그의 마음만큼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 단주는…… 알고 있는 거지요?”
“알았으면 내가 진즉에 족을 쳐 놨지.”
“……진 단주는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습니다.”
눈치 없는 땡중인 줄 알았건만,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다.
일각의 말이 담담하게 전해져 온다.
“원인을 파악하고, 결과값을 비틀어 답을 만들어 내지요.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답을요.”
최고의 답이라…….
“그러니 원인이 뭔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움직이는 건, 진 단주답지 않습니다.”
언제 이렇게 나를 다 파악했대.
미련 곰탱이처럼 행동해도 머릿속은 빠릿빠릿 굴리고 있었구만.
나는 진동하는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런 게 필요할 때가 있고, 필요 없을 때도 있는 거야.”
일각이 내 힘을 받아내며 나직이 물어온다.
“……지금은 필요 없을 때란 말입니까?”
“굳이 안다고 상대가 봐주면서 덤빌 것도 아니잖아.”
대충 흘려 버리려 했건만, 일각의 신형이 더욱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참 배를 탄 것도 아닌데 멀미 나겠네.
“잡생각은 그만하지? 나 부상자거든?”
“…….”
진동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걸음걸이다.
뭐가 이렇게 고민이 많은 거야.
본래 이런 성격 아니지 않았나?
전생에선 그저 정도회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인형에 불과했으면서.
“혹…… 무림맹 때문입니까?”
이건 또 뭔 소리래.
“무림맹이 저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까 봐 그게 걱정인 겁니까?”
일명의 그림자에 가려지긴 했지만, 일각 역시 정도회에서 없어선 안 될 주요한 인물이었다.
또 그만큼 정도회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이기도 했고.
근데 최근 들어 그는 자신의 소속인 정도회에 대해 불경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내가 느낀 것을 진 단주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뭐 알아듣게 말…….”
“마기.”
“……!”
“저들이 쓴 건 마기가 맞지요?”
일각은 이전에 마인을 만나본 적이 없을 텐데.
서서히 느려지던 일각의 발걸음이 종국엔 멈춰 선다.
“마주할 때마다 거북한 기분이 멈추질 않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역근경을 어느샌가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고, 그자들을 바라볼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먹색으로 물든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옥청천상력을 수련한 진 단주가 이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진짜 얘도 곰인 척하는 여우라니까.
아니면, 여우로 변한 건가?
“저들은…… 마교인이 맞는 거겠지요?”
이렇게까지 눈치챈 상황에서 굳이 더 이상 숨길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나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일각이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눈은 토끼처럼 번쩍 뜬 채로.
예상했다면서 그렇게 놀랄 건 뭔데.
나는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에 천천히 그의 고개를 앞으로 돌려세웠다.
“근데 그래서 뭐? 저들의 정체를 안다고 달라질 게 있어?”
“하, 하지만…….”
“왜? 학관생들한테 오백 년간 숨어 지내왔던 마교가 우릴 제물로 생각하고 사냥을 나섰다라고 알려주면 애들이 용기백배하려나?”
“…….”
일각의 두피가 움찔거린다.
분명 고민하고 있을 터.
그래도 이제 그만 다시 출발해 주면 좋겠는데.
일행들 걱정도 되고.
하지만 그는 꽤나 집요한 인간이었다.
“진짜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일각의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내깔린다.
“……무림맹에 그리도 믿음이 가지 않으십니까?”
무림맹, 무림맹이라…….
하,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 정말 못 들어주겠네.
“왜 무림맹으로 뭉개버리는 거지?”
“…….”
“현실 직시를 하고 싶으면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척 인형으로 살든가, 둘 중 하나만 하지 그래?”
모순적이다.
당장 등을 빌리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이에게 모진 말을 해야 한다니.
그럼에도 나의 기억은 언제나 흐릿해지지 않기에.
현재의 그의 모습 위로 과거의 그가 겹쳐 보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정도회야. 또한 백도회이고, 12봉성도 마찬가지. 언제나 적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건 늘 그들이었으니까.”
“……모든 정도회가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정도회’ 대신 ‘무림맹’이란 단어는 쓰지 말았어야지.”
축 처진 어깨, 시무룩해진 고개를 보고도 말은 멈추지 않는다.
선택을 하지 않는 비겁한 자들은 결국 다수의 의견에 휩쓸려 갈 뿐이니까.
“악양에서 ‘마교’의 탈을 쓰고 못된 짓을 저지른 건 점창이었어. 물론 세간엔 일부 속가문파의 잘못으로 알려졌지만.”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에, 일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진짜’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그런 일이 다반사였는데…….”
그는 정도회에 의구심을 느끼지만, 여전히 정도회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나도, 그저 현실을 직시하게 해줄 수밖에.
“과연 ‘진짜’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전생과 똑같은 혼란.
그리고 그 혼란을 기회라고 생각할 위정자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무림맹과 희생되는 수많은 힘없는 이들.
똑같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제껏 그 무진 노력을 다 해온 것이다.
“그럼…… 숨길 생각입니까?”
“누가 숨긴대? 적어도. 내 입에서 혼란을 자초할 말이 나올 일은 없다는 거야. 더구나 이 혼란을 기회로 쓰려는 인간을 가만둘 생각도 없고.”
“…….”
여태껏 편하게 왔는데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는.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등을 계속 빌리는 건 좀 그렇겠지?
“내려줘. 이제 걸어갈 테니.”
“아, 아닙니다. 다시 걷도록 하지요.”
다시금 일각의 신형이 움직인다.
여전히 덜컥거린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하려 하는데 그게 또 어색하기 그지없다고나 할까.
계속 이렇게 가다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활단에 들어왔을 때처럼 하나만 생각해. 무엇이 사문에, 집단에 이익이 되는지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지.”
그게 결국 당신이 바라는 거 아냐?”
“…….”
대답은 없었지만, 어쩐지 잔 진동이 사라졌다.
하여간에 손이 많이 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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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 지체했던 건지 일행들이 부지런히 걸은 것인지, 사활단과 합류하는 데까진 한참이나 더 걸렸다.
“이제 내려줘.”
“아닙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단주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 전의가 계속 유지되겠어?”
“아…….”
나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준 일각은 내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더니 두 눈을 부릅뜬다.
“이게 무슨…….”
“왜? 어디 큰 상처 있어?”
난 혹시 내가 모르는 상처가 있나 싶어 몸을 둘러봤다.
“그게 아니라…… 상처가 회복이 되었군요.”
“회복이 되었다고?”
찢어진 무복 사이를 벌려 상처를 살폈다.
걸레짝에 가까웠던 팔 부근의 심각한 상처들이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행공을 통해 요상결을 계속 운공했지만, 회복할 정도의 시간은 없었다.
시간이 있었다 해도 사활단의 뒤를 따라온 정도뿐이었으니까.
기이할 정도의 회복력.
이건 마치…….
‘만년토웅…….’
그 괴물 같은 회복력이 떠올랐다.
청룡환을 사용하는 와중에 회복이 되었던 걸까?
일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
“혹시 몰라 웅담을 몰래 먹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나 보네.”
“우, 웅담 말입니까?”
“곰이잖아. 당연히 웅담은 챙겨야지.”
실제로 품 안에 웅담이 있기도 했고.
일각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생식…… 그것도 갓 죽은 동물의 생식이라니.’라며 계속 중얼거렸고.
다행히 내 상처의 회복에 대해선 그렇게 넘어갔다.
조금 더 달려가자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각과 내가 조심히 접근하자 가장 후위를 맡은 팔(八) 대의 대원들이 우릴 보고 반겼다.
“다, 단주! 단주가 돌아왔다!”
“진짜?”
“이걸 사네?!”
“어케 했냐!”
마치 죽기라도 바랐던 것처럼, 사방에서 격한 인사(?)가 돌아온다.
“대열 흐트리지 마라 멍청이들아.”
일갈을 내질렀지만, 학관생들은 나를 둘러싸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주님! 괜찮은 거요?”
“이번엔 진짜 죽은 줄 알았다고!”
“대체 지휘관이 왜 최전방에 서는 거야……!!”
한마디씩을 하고 나서야 다시금 대열로 돌아가는 이들.
그 모습들에 괜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럼 마저 수고해라.”
이윽고 앞으로 나가려 하는데, 한 대원이 내 어깨를 부여잡는다.
“또 앞으로 나갈 생각이오?”
“길을 열어야 하니까.”
내 담담한 대답에 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시오.”
그는 자신의 봇짐에서 장포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지금 입고 있는 건 걸레인지 옷인지 구분이 안 가니 말이오.”
하긴 이걸 계속 걸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잘 입지.”
이후 대열 사이로 몸을 비틀어 지나가려 하자, 학관생들이 일제히 한 발자국씩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고선 일각과 내가 앞으로 지나갈 때마다 한마디씩 건네왔다.
“이번엔 지휘만 하시오. 지휘관을 두 번이나 잃을 뻔하게 하지 말고.”
“지휘관이 없으면 우리가 맘 놓고 싸울 수가 있을 것 같소!”
“아까 듣기론 다 왔다고 하더이다. 이제 마경도 다 지났으니 그만 무리해도 되오. 당신은 당신이 약속한 만큼 충분히 했으니.”
분명 사문도, 소속도 다른.
그래서 서로를 경계하고 경계했던 이들.
그러나 지금은.
왜인지 그들 사이로 열기가 들어찬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을 감싸는 그 열기를 느끼며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자, 그저 눈빛을 보내오는 자들을 거쳐.
일행이 있는 오(五) 대까지 다다랐다.
“…….”
다들 날 봤지만 다른 학관생들처럼 인사를 건네오진 않았다.
하지만 보내오는 눈빛이 워낙에 복잡해 보여, 나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본래 내 자리는 전위이기도 했고.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대사형.”
사련이 나를 불렀다.
“부디 외당주님께 안 좋은 소식을 보내지 않게 해주세요.”
“…….”
“그러실 수…… 있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전달되어 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걱정 마라.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사련도, 다른 이들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시금 학관생들을 제치고 최전선에 도착하자.
나를 본 이들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최악의 지휘관이라니까.”
“이런 부대라면 두 번 다시 소속되고 싶지 않아.”
“왜, 나라면 또 하고 싶을 거 같은데.”
어쩐지 불만을 내뱉는 학관생들.
그리고 양자평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단장님께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좋은 소식이라니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도착이라면?”
“네. 마경의 끝입니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다.
한 식경 정도 더 걷자 확연하게 영맥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마경은커녕 묵림에 비교해 봐도 영맥의 기운이 미세하다.
천연진도 사라진 지 오래.
다시 한 식경이 지났을 때. 우린 묵림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리도 바라던 묵림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환호를 내지르는 이들은 없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적들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니까.
마지막 관문인 조롱박 협곡을 벗어난 후에야 안심할 수 있다.
“잠깐.”
가운데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골목 앞에서 나는 사활단의 행렬을 잠시 멈추었다.
양자경의 말대로라면. 적이 포위하고 있다면 바로 이 뒤에 있을 것이니까.
나는 눈을 감고 몸 내부를 살폈다.
어찌 된 일인지 걸을수록 회복은 점점 빨라져 신체는 절반 이상 회복이 되었다.
어찌 보면 마경을 가로질러 도망친 것이 좋은 결과를 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마지막까지 좋은 결과로 끝날 수 있느냐는 것.
‘우린 충분히 빨랐어. 마경을 피해 돌아온 놈들은 아무리 서둘러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수는 없을 거야.’
우리가 마경에 들어간 순간부터 놈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쓸데없이 우리를 쫓다가 피해를 증폭시키느니 우릴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저들의 입장에선 흔적을 숨기기 더 좋을 것이다.
‘……존나 긍정적이네. 내가 언제부터 세상을 이리 낙관적으로 봤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애당초 그런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새끼들이었다면 중원 정복 따위의 미친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냉정하게 사실만을 직시한다.
‘우린 최선을 다해 달려왔어.’
그리고 발을 내딛는다.
언제나 그랬듯, 앞을 향해.
뚜벅- 뚜벅- 뚜벅-
단전의 기감을 펼쳐 전방 일대를 쓸어낸다.
누가 있든 묵림을 지나왔을 때처럼 하면 된다.
이미 놈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놈들의 정체는 중원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우뚝.
기감 끝에 불온한 감각이 걸려든다.
작은 언덕을 걸어 올라가자 아래로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씨발…….’
내 예상은 절반 정도만 맞았다.
역시나 놈들은 마경을 돌아오느라 포위망을 구축하지 못했다.
하지만.
터벅.
모두가 우릴 앞지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언덕에 멈춰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제멋대로의 개성을 지닌 삼 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짜 거길 통과해 올 줄이야…….”
나는 세 사람의 면면을 살폈다.
가운데 선 놈은 최근에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무슨 반지를 찾다 북두검수를 죽이려 했던 그 미친놈.’
왼쪽에 선 여자는 모르겠고, 오른쪽에 선 남자는…….
“흉측하기 그지없군. 강시인가?”
찢어진 옷에 맞지 않은 옷감을 덧댄 듯 얼굴과 손발의 피부가 서로 다르다.
더구나 기워진 흔적 때문에 더더욱이 흉측해 보인다.
“키키키, 정말 모르는 건가요? 아님 모른 척하는 건가요?”
여자와 가운데 선 남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고, 강시 같은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다.
‘낯이…… 익다고?’
나에게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감각 중의 하나.
절대적 기억력을 가졌기에, 불확실한 기억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모용상원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런데 ‘낯이 익다’니.
그때.
헝겊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폭사되어 왔다.
이어 그는.
“진- 소운-”
끔찍한 쇳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