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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13화 (13/367)

012-01-누가 내게 돌을 던지는가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정고라는 놈은 언제고 사고를 칠 여지가 넘치도록 많았다. 이철에게 싸가지 없게 말한 것만 봐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 말에 이철의 표정에는 그 나이답지 않은 고뇌가 서렸다.

“내가 나가고 나면 걱정이다, 정말.”

“뭘 그리 걱정해? 지들 인생 알아서 살겠지.”

“··· 넌 생각보다 냉정한 놈이구나.”

경완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아끼지 않는 놈에게까지 오지랖을 부릴 정도로 경완은 선량하지 않았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도 아니고 이철이라는 맏이가 친히 사랑의 맴매까지 해주며 훈계질을 해주지 않는가?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면 본인 잘못이었다.

이철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나가고 나면 정고를 조심해라.”

“그 덜 자란 애새끼를? 농담이겠지?”

“정확히는 정고가 속한 무리들.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야.”

이철의 이야기는 길었다. 솔직히 시설출신의 아이들은 어느 정도 재력이 충분한 후원자나 머리가 좋지 않으면 대학에 가기 힘들다. 비싼 대학 등록금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기능을 익혀 일찍부터 사회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나쁜 길로 빠뜨리려는 유혹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범죄와의 전쟁 이후 폭력 조직이 공공연히 날뛸 수 없다고 하지만 양아치 새끼는 어디나 있는 법이고 위협과 탈법, 불법으로 먹고 사는 이들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도 시간을 피할 수 없고, 나이를 먹는다. 고상한 말로는 세대교체가 필요하고, 대놓고 말하자면 나이 먹어가는 자신들을 밑에서 수발할 따까리가 필요했다.

그런 그들에게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은 젊은 피를 수혈할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이었다. 정고가 바로 그러한 무리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형은?”

경완이 물었다. 오늘 목격한 것을 보아하니 이철이 아이들이 그런 곳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해왔던 모양인데 그런 이철을 회유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좀 더 쉽게 따까리들을 수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짧은 물음에 녹아있는 긴 뉘앙스에 이철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후원자가 있어.”

그렇구나.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자가 있는 고아를 건들면 아무래도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원장은 알아?”

“알아.”

“그런데 가만히 있어?”

“돈 때문에.”

웃긴 건지 슬픈 건지 조폭들의 후원금이 적지 않았다. 그런 양아치들이 후원이라니 고양이가 쥐에게 치즈 주는 꼴이지만 세세히 따져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아무리 조폭이라고 하지만 합법적인 업체 하나 정도는 운영해야 하는데 절세와 탈세, 돈세탁에 기부만큼 좋은 방법이 또 없지 않은가?

경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패거리야?”

원장이 저들과 한 패거리라면 이 시설에서 최대한 오래도록 조용히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있겠다는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이철은 고개를 저었다.

“타협한 거지.”

이놈의 나라는 강바닥이나 토목, 페미니즘 같이 정치적인 이슈를 모을 수 있거나 슈킹할 수 있는 곳엔 예산을 잘 쳐부으면서 복지예산을 늘리려고 하면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요상한 나라였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원장이 예산의 압박에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선 석연치 않은 곳이라도 후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받지 않아서 시설이 망하거나 아이들에게 조금의 지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신 아이들에게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도록 지도의 방침을 바꾸어야했다. 설사 그 길이 탈법과 불법의 길이라도 말이다. 원장은 시설 내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선 아이들이 어떤 장래를 선택하든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비겁함이었지만 특출난 구석이 없는 평범한 개인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이 사회의 기본 스탠스는 '무관심'이니까.

이철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안 해.”

“아직 말 꺼내지도 않았다.”

“나보고 애들 신경 써주라는 말이잖아.”

“.. 그렇지.”

“내가 그걸 할 맘이 있냐는 건 둘째 치고 그게 가능할까?”

“···.”

이철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이 시설에서 맏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여기서 오래 살았고 그 시간동안 아이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완의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굴러들어온 돌의 권위를 아이들이 인정해줄까? 애들도 어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더 예민했다.

“하아..”

이철의 한숨이 깊어졌다. 하지만 경완은 모른척했다.

= = = = =

보호시설의 하루하루는 비슷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경완을 백안시했다. 자신들은 대학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설에서 나갔을 때를 대비해 열심히 기능을 배우고 있는데 혼자서만 딴 세상 사람인 듯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정말이지 꼴불견이었다.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원장이 그러한 분위기를 느껴 경완을 불러내 면담을 할 정도였다.

“요새 공부는 잘 되어 가나?”

“네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경완이 대답했지만 원장은 쉽사리 믿지 않았다.

“점검을 한 번 해봐야겠군.”

경완이 놀고먹고 게으름을 피우며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아이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들은 원장이었다. 경완이 넙죽 대답을 한다고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다.

경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언제 하실 거죠?”

그 말에 원장은 잠시 시계를 보더니 대답했다.

“내일 저녁 먹고 간단히 시험을 보자.”

그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고 원장실을 나온 후에는 곧장 인상을 구겼다. 졸지에 벼락공부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급히 공부방으로 가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펴서는 최대한 머릿속에 내용물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수면 시간만큼은 준수했다. 밤샘 공부? 그런 거 그의 사전엔 없었다.

다음날에도 평상시대로 일어난 경완은 저녁에 있을 원장의 시험까지 교과서를 훑어보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만점을 노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못 쳐서도 안 된다. 성적이 너무 잘 나오면 당장 검정고시를 보고 취업을 위한 기술을 익히라고 할 것이고, 성적이 너무 못 나와도 중졸도 괜찮으니 얼른 기술부터 익히라고 할 테니 말이다.

물론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취득하라는 건 취업 시장에서 최대한 몸값을 높이라는 원장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아무리 개나 소나 대학에 들어가는 시대라지만 사회 새내기들에게 월급 주는 기성세대의 관점에선 고졸은 대졸보다 머리가 나쁘다거나 공부에 게을러 성실한 성품이 아니라는 편견이 있으니 말이다.

조용한 공부방. 물려받은 책이라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환경을 개선해보자는 선배들의 노력이 묻은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마냥 치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고 평범한 구석도 있었다.

“섹스하고 싶다가 뭐야, 섹스하고 싶다가.”

경완은 교과서의 빈 공간에 적힌 낙서를 수정액으로 지웠다. 뜬금없는 낙서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런 돌발적인 문구가 간간이 있는 것 외에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교과서나 참고서는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절약 정신이 투철한 원장으로 인해서 교과서에 직접 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기껏 가능한 짓은 포스트잇으로 정리한 내용을 붙여놓는 거? 최선은 그냥 자신의 노트에 교과서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경완은 깨끗한 참고서가 그대로 폐지로 향하는 이 낭비의 시대에 이 무슨 꼰대같은 비효율인가 싶었지만 나름 이유가 있을 거라 억지로 납득했다. 하긴 새 참고서를 사서 공부한다고 성적이 잘 나오면 개나 소나 서울대에 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로 인해 머리에 떠오른 한 가지 불안감에 학교에서 돌아온 이철에게 작은 부탁을 했다.

“뭐? 필기노트를 빌려달라고?”

혹여나 원장이 여태 공부한 흔적을 확인하려고 할 때 내밀 위장이 필요했던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국어하고 수학 두 개만.”

이철은 어렵지 않게 경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1년 전의 내용이라 잘 보지도 않는 내용이었다.

최소한의 대비를 마친 경완이 마침내 원장과 마주했다.

“검정고시 기출문제다. 풀어 보거라.”

다행히 원장은 필기노트같은 것을 확인하진 않았고 경완은 적당히 시험문제를 풀었다. 기출문제를 전부 푸는 것이 아니고 시간관계상 적당히 20개씩 추려낸 문제라 오래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채점을 해본 원장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검정고시는 힘들까요?”

“이 성적으로는 아슬아슬하다.”

아슬아슬하다? 딱 좋다. 경완이 노린, 바로 그 수준이었다.

하지만 원장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경완에게 제의했다.

“지금부터 기술이라도 배우는 게 어떠니? 제빵이나 요리도 괜찮고, 용접은 어떠냐? 자격증 따놓고 실력만 갖추면 기술이민도 충분히 가능하단다. 그것도 아니면 금형 쪽으로 가는 것도 괜찮고. 요즘엔 죄다 자동화 추세라 사고도 적다.”

원장은 경완의 장래에 대해서 제법 다양한 방향을 제의했다. 보아하니 그냥 앉은 자리에서 정부 지원금이나 기부금을 착복하고 룸살롱이나 다니며 놀고먹는 인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경완은 속으로 질색했다. 자신은 복지도 그럭저럭 잘 되어 있고 밑바닥 인간들에 대한 온정도 살아있는 이 사회에 기생충처럼 빌붙어 세월아 네월아하며 잉여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병행하자는 거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친다고 했습니다. 일단 공부에 집중할게요.”

“··· 알겠다.”

잉여인간이 될지언정 결코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다는 결의의 눈빛을 원장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인지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날부터 경완은 어쩔 수 없이 하루에 꼬박꼬박 공부에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고 수능이 지났다. 이철은 수능을 치고 시설을 나올 준비를 했다.

그는 짐을 챙기고 나오기 전에 경완에게 자신의 장래희망을 이야기했다.

“나.. 경찰이 될 거야.”

“파이팅.”

영혼 없는 격려에 이철은 피식하고 실소를 짓더니 경완에게 작별인사를 남겼다.

“너도 건강해라.”

퍽이나 걱정하는 그의 표정은 경완을 적잖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착한 사람에겐 항상 뭔가를 빚지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었다.

= = = = =

이철이 떠나고 봄이 찾아왔다. 경완은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시설은 정고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철이 나간 이상 경완이 가장 최연장자였으나 그는 굴러들어온 돌이었고, 또한 박힌 돌을 빼고 그 자리에 앉을 성미도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들이 사회의 틀 안에서 안전하게 살길 바랐던 이철과 달리 정고의 책임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성공의 기회를 잡기를 바랬다.

“안 한다고 했지!”

“야. 너 공장가서 그만큼 벌 수 있을 것 같아? 젊었을 때 바짝 벌어서 건물 한 채 사놓으면 연애든 결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네 말을 어떻게 믿어?”

“그렇게 성공한 누나들 많아. 해외에 가서 바짝 벌어 온 누나들도 있고. 애국자가 별거야? 외화 벌어오면 그게 애국자지.”

“···.”

“돈 많은 사람들은 어릴수록 좋아해. 그래서 더 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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